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전주 승광재(承光齋)의 황손 이석

Gijuzzang Dream 2009. 2. 16. 22:43

 

 

 

 

 

 전주 승광재(承光齋)의 황손 이석


승광재 고종황제의 사진 아래에서.

승광재 앞 경기전 이태조의 초상과 고종의 초상

사이에는 얼마나 지난한 역사가 존재하는지.

 

어찌 숭례문뿐이랴

비바람 눈보라를 온몸에 맞으면서/ 가슴에 꿈을 안고 긴 세월 지켜온 너 허…

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 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

항상 너는 예를 다해 그 자리에서

(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

아…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 아 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리)

오늘도 어제처럼 하루를 맞으면서/ 너와 나 얼이 되어 말없이 지켜온 너 허…

강산이 바뀌어 변해가도 세월이 바뀌어 달라져도/ 항상 너는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 이석 노래 ‘아!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황손 이석(69)은 홍천의 한 콘도에 머물고 있었다.

사흘 전 설날을 맞아 승광재를 찾은 3000여 명의 세배를 받느라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들은 한 후배가 잠시 쉬었다 오라며 콘도를 예약해주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TV를 시청하던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숭례문이 어떤 건물인가.

조선이 개국한 지 5년이 되던 해(1396년) 창건되어 이씨왕조 500년을 지켜온 도성의 정문이 아니던가.

더구나 ‘숭례문(崇禮門)’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 할아버지가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세로로 쓴 글씨였다. 황손은 다섯 시간 동안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그 처절한 통곡에도 아랑곳없이 숭례문은 새카맣게 타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황손보다는 ‘가수 이석’으로 더 알려진 그는 ‘숭례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새 음반 하나를 내놓았다.

‘아! 숭례문’(작곡 심수천, 작사 김동찬)을 타이틀곡으로, 예전에 자신이 불렀던 곡을 함께 담았다.

1967년 두 번째 앨범 <비둘기 집>을 낸 이후 실로 42년 만이다.

첫 번째 앨범은 60년대 초 발매한 <두 마음>이었다.

‘한때’ 가수였던 그가 새삼스레 음반을 내기로 작정한 것은 불타버린 숭례문이

벌써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미 불타버린 숭례문만이 아니라 무릇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도 싶었다.

막상 음반을 취입하기로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칠순을 앞둔 나이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는지 자신이 없었다.

녹음을 하던 날 그는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고서야 어렵게 녹음실에 들어섰다.

어떻게 녹음을 마쳤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40대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는 관계자들의 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불타는 숭례문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서라도 불길을 막았어야’ 했다.


 

황손은 2월 10일 숭례문 복원 현장에서 있을 1주기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거기서 새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황손인 자신이 그런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정 안 되면 녹음이라도 틀어야 하나.

황손은 생각대로 할 수만 있다면 대통령이라도 그 자리에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마음 한구석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숭례문 개방을 결정한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과는 두어 번 인연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연고도 없는 전주로 내려오게 된 것도 그 인연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전주시에서 황손을 모시기로 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가 나온 곳은 서울시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찜질방을 전전하던 그에게 북촌 한옥마을에 생활터전을 마련해주자는

제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서는 내심 크게 기대를 걸었지만

정작 서울시에서 내놓은 방안은 북촌 한옥 민박 방 한 칸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생색내기용’ 대접에 응할 수는 없었다.

전주에 내려온 후에 어쩌다 대구를 방문했다가 당시 역전에서 선거유세 중이던 대통령과

어색하게 마주쳤다. 인사 중에 ‘왕계의 품위 유지…’를 운운해봤지만 그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삼척에서 숭례문 복원 재목으로 쓰일 소나무를 베어내던 날도 그랬다.

고유제 행사에서 ‘야단성’ 치사를 했더니

한 전직 의원이 “마치 증조할아버지인 대원군을 보는 듯했다”는 농 섞인 인사를 건네왔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 이석 노래 ‘비둘기 집’


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지막 황손인 그가 젊은 시절 가수가 된 것은 순전히 생활고 탓이었다.

그는 1941년 종로의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2남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었다.

그때 이미 62세의 연로한 나이였던 아버지 의친왕은 더구나 말이 없는 성품이어서

그와는 자라면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영어로 일기를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다니던 상궁들의 손길로 자라난 그는 경동중·고등학교를 거쳐

외국어대 서반어학과에 입학했다. 어릴 적 영어를 능통하게 하던 아버지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는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전쟁이 터지고 4·19를 거치면서

들어선 군사정권은 그나마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나오던 왕가의 생활보조금마저 끊어버렸다.

그는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마저 없어 곤궁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 때였다.

우연히 종로2가의 한 음악감상실에 들렸다가 마침 열린 노래자랑에서 덜컥 1등을 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전공을 살린답시고 ‘베사메무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방송국 아나운서가

그에게 “목소리가 좋으니 아나운서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싫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그럼, DJ라도 해보라”고 했다.
생활이 어려웠던 때이기도 해서 그마저 사양하지 못하고 그의 소개로 마침내 음악다방 DJ로 나섰다.

그때 받은 생애 첫 월급이 4500원. 황손이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번 돈이었다.

그러다가 내친 김에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게 미8군 무대.

누군가 미8군에서 신인가수를 뽑는다고 하니 나가보라고 했다.

선발대회장에 가보니 무려 700여 명의 여자와 40여 명의 남자 가수 지망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유방도 히프도 크지 않은(그때만 해도 미8군 무대는 그런 글래머들만 서는 줄 알았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데 며칠 후 턱 합격통지가 날아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의 히트로 한껏 주가가 올라간 가수 최희준이

3만 원이라는 ‘무리한’ 월급을 요구했다 쫓겨난 자리를 채우는 역할이었다.

승광재의 황손.

옷깃을 매만져주는 손길에

문득 옛 상궁의 기억을 떠올리지나 않을까.

그 후 워커힐 쇼에서 영어로 사회를 보고 노래도 하던 그는 1966년 군예대였던 비둘기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종군 도중 차량전복사고로 크게 부상하고 귀국했다.

비둘기부대에 근무한 인연을 살려 취입한 곡이 바로 ‘비둘기 집’. 그에게 ‘비둘기 집’을 빼놓고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는 것은 그나마 남은 황손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황손으로서 ‘구질구질하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불건전’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다. 어느 때인가 김민기에게 “네 노래는 불러줄게” 하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으니.

 

‘비둘기 집’은 결혼식에서만 7000번이 넘게 부르면서 ‘국민가요’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여곡절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였지만 정작 그는 여러 번 이혼을 했다.

10·26사태 후에는 ‘쫓겨나듯’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고, LA 근처에서 작은 식품가게로 겨우 끼니를 때우다 강도를 열세 번이나 당했다.

10년 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홉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생활고도 생활고였지만 마음의 병이 그만큼 깊었다.

 

머리를 깎고 통도사에 들어가 3년을 지내기도 했고,

서울 수국사에 있을 때는 밤 늦게 술에 취해 돌아갔다가 문이 걸린 절 밖에서 잔 적도 많았다.

거처로 삼던 찜질방에서 유서를 쓰다가 우연히 그를 알아본 한 기자에 의해

신문에 크게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황손은 2004년 전주로 내려온 후 제법 안정을 되찾았다.

무엇보다도 전주의 맑은 공기와 맛있는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

전주시에서는 그를 위해 이태조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 뒤 한옥마을 내에 ‘승광재’란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빛을 계승한다’는 승광재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잇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는 전주대학교 객원교수로 역사를 강의하기도 했고,

2006년부터는 황손후원회의 뒤를 잇는 황실문화재단의 총재도 맡고 있다.

 

황손의 마지막 소원은 오롯이 황실복원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황실을 권위를 다시 세우자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전통문화를 지키자는 것이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왕가가 있었다. 그것이 빛이든 그늘이든 엄연히 하나의 역사인 것이다.

역사를 바로 알 때 올바른 역사가 시작된다.

비록 상징적이라 하더라도 황실의 복원이 필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황손은 잠을 못 이룰 때가 많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험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불타버린 것이 어찌 숭례문뿐이랴.
-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 2009 02/17  위클리경향 812호

 

 

 

 

 

 

 

 

“아! 숭례문”

마지막 황손 이석, 42년만에 새음반

 

<아! 숭례문>을 타이틀곡으로

60년대 히트곡이었던 ‘비둘기집’ ‘두마음’ ‘외로운조약돌’을 함께 담 았다.

(사진은 아! 숭례문 앨범표지)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불에 타 없어진지 1년이 지났다.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어야 할 숭례문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최근 숭례문에 대한 그리움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담은 ‘아! 숭례문’이라는 음반을 내

노래로 역사의식을 심어줘 화제가 되고 있다.

60년대 히트곡이었던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석(68)이

세 번째 음반 ‘아! 숭례문’을 냈다. 60년대초 첫번째 앨범 외국 곡을 번안한 ‘두마음’을 내고

1967년 ‘비둘기 집 ’이 실린 두 번째 앨범을 낸 이후 실로 42년만에 낸 것이다.
세번째 앨범에서 황손 이석은 ‘아! 숭례문’을 타이틀곡으로

지난 해 참화로 불에 탄 숭례문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 있는 역사의식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앨범에는 기존에 애창곡 이었던 ‘비둘기집’ ‘두마음’ ‘외로운 조약돌’도 함께 실었다.
특히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홍보하는 내레이션도 함께 담아 전주를 알리고 있다.

이 곡은 ‘주부가요열창’의 심사위원 심수천이 곡을 만들었다.

가수 태진아 현철의 가사를 많이 썼던 작사가 김동찬이 노랫말을 붙였다.

반주는 죽향 이생강선생이 연주를 맡아 노래 전체에 웅장함이 배어 있다.

“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 / 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 /

항상 너는 예를 다해 / 그 자리에서 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 /

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 / 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라”

황손 이석은 불에 탄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이 노래를 부를 때 간혹 눈물을 흘리곤 한다.

“음반을 판매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음반을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잊혀져 가는 역사의식을 노래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TV를 통해 숭례문이 불에 타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만 보아야 했던 그는

5시간 내내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야 했다.

일개 방화범의 손에 의해 6백여 년간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던 숭례문이 맥없이 무너지는 참화를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역사의식이 담긴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황손 이석은 지난해 때마침 작곡가 심수천으로부터

“왕손이 직접 노래를 부르면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

평소 생각과 맞물려 음반작업 수개월만에 아! 숭례문이 탄생된 것이다.

“평소에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앨범이 나오기 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마침 전주시에서 지원을 해주어

숭례문에 대한 문화재의 소중함을 노래로 불러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모 레코드사에서는 제작비 전액을 지원해 줄 테니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 왔습니다만

제가 거절 했습니다. 괜히 계약서 쓰고 얽매이고 상업성을 띠기 싫었기 때문이죠.” 

42년 만에 음반을 내는 그는 녹음실에 들어가기 전에 매우 흥분되고 떨렸다고 한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까하는 염려스러움 때문이었다.
“실로 42년 만에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흥분되고 가슴이 두근거려 녹음을 하기 전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녹음을 했어요.

다행히 녹음기사가 아직도 40대 목소리가 나온다고 해 무사히 녹음을 마쳤어요.” 

 

전국순회공연계획을 갖고 있는 황손 이석은

“노래를 통해 문화재의 소중함과 나라의 정체성을 알리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1941년생인 그는 가수, 미국이민, 사찰생활, 자살시도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소년기를 엄격한 궁궐에서 생활을 하며 자랐다.
“운동회날 달리기를 하려면 상궁들이 ‘아니 되옵니다. 뛰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는 거예요.

교장선생이 저를 대신해서 뛰어 주었어요. 왕실법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자치기도 못하고 숟가락 젓가락소리도 내면 안되었죠.”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음악을 시작한 그는

중고등학교 때 내내 고독하고 슬픔이 밀려와

자유당시절 비원에서 가슴이 답답할 때 소리를 지르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이때 목이 터져 가수가 되고 지금의 굵직한 바리톤 목소리를 간직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가수 조영남이가 그래요 ‘형님! 발성 연습도 안했는데 목소리가 왜 이리 좋습니까?’라고 묻기도 했어요”

미8군 무대에서 주로 팝송을 불렀던 그의 음악적 재능은 미군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인정되었다. 그러나 윤대비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왕손이 광대노릇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완강히 반대를 했던 것이다.

황손 이석은 먹고 살기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니 용서해달라는 석고대죄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그는 군대에서 부상을 입는 순탄하지 못한 군생활로 이어졌다.

“제가 월남 상이군인 7급 이예요.

월남에서 교통사고로 오른쪽 어깨를 다쳐 지금도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동궁에서 태어나 1979년까지 40여 년을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던 그는

전두환 정권 때 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LA근처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며 생활고를 해결 했지만,

그나마 10여 년의 미국 생활도 청산하고 귀국을 해야만 했다.
“저희 가게에 강도가 13번이나 침입을 했어요.

하도 강도들이 들끓어서 가게에서 일 할 때는 권총을 차고 일을 했었죠.

어느 날 강도가 장총을 들고 침입했어요. 지갑을 달라고 하기에 지갑을 건내려고 하니까

‘야! 새끼야 빨리’하며 한국말을 쓰는데 한국교포였어요. 그때 많은 자괴감을 느꼈죠”

미국에서 돌아와 마땅히 안착할 수 있는 곳을 못찾던 그는

양산 통도사 김해 육지사, 서울 수국사 등 절을 전전하며 살아 왔으나

전주시의 도움으로 지난 2004년  10월 전주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전주시 풍남동 한옥마을 승광재에서 거주하며

문화유산해설, 전국강연, 전주대교양국사 객원교수(2006~2008), 조선왕조 발상지 유적기행,

(사)황실문화재단 총재를 맡아 황실복원운동 등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집도 없이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상징적인 황실이  없는 나라에서 황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담했습니다. 아홉 번이나 자살도 시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바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나라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되살리는데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숭례문’곡으로 전국순회공연도 갖고 있는 그는
상징적인 황실문화를 살려 달라고 건의하기 위해

뱀띠 동갑내기인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신청을 해 놓은 상태이다.

숭례문이 불에 탄지 1년이 되었다.

황손 이석은 “조급성에 밀려 빨리 복원하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묻어나는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복원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 고봉석기자

- 2009/02/25 ⓒ 뉴스웨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