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승광재(承光齋)의 황손 이석 | ||||||||||||||||||
어찌 숭례문뿐이랴 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 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 항상 너는 예를 다해 그 자리에서 (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 아…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 아 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리) 오늘도 어제처럼 하루를 맞으면서/ 너와 나 얼이 되어 말없이 지켜온 너 허… 강산이 바뀌어 변해가도 세월이 바뀌어 달라져도/ 항상 너는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 이석 노래 ‘아! 숭례문’ 사흘 전 설날을 맞아 승광재를 찾은 3000여 명의 세배를 받느라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들은 한 후배가 잠시 쉬었다 오라며 콘도를 예약해주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TV를 시청하던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숭례문이 어떤 건물인가. 조선이 개국한 지 5년이 되던 해(1396년) 창건되어 이씨왕조 500년을 지켜온 도성의 정문이 아니던가. 더구나 ‘숭례문(崇禮門)’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 할아버지가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세로로 쓴 글씨였다. 황손은 다섯 시간 동안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그 처절한 통곡에도 아랑곳없이 숭례문은 새카맣게 타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아! 숭례문’(작곡 심수천, 작사 김동찬)을 타이틀곡으로, 예전에 자신이 불렀던 곡을 함께 담았다. 1967년 두 번째 앨범 <비둘기 집>을 낸 이후 실로 42년 만이다. 첫 번째 앨범은 60년대 초 발매한 <두 마음>이었다. ‘한때’ 가수였던 그가 새삼스레 음반을 내기로 작정한 것은 불타버린 숭례문이 벌써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미 불타버린 숭례문만이 아니라 무릇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도 싶었다. 막상 음반을 취입하기로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칠순을 앞둔 나이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는지 자신이 없었다. 녹음을 하던 날 그는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고서야 어렵게 녹음실에 들어섰다. 어떻게 녹음을 마쳤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40대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는 관계자들의 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황손은 2월 10일 숭례문 복원 현장에서 있을 1주기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거기서 새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황손인 자신이 그런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정 안 되면 녹음이라도 틀어야 하나. 황손은 생각대로 할 수만 있다면 대통령이라도 그 자리에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마음 한구석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숭례문 개방을 결정한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과는 두어 번 인연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연고도 없는 전주로 내려오게 된 것도 그 인연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전주시에서 황손을 모시기로 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가 나온 곳은 서울시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찜질방을 전전하던 그에게 북촌 한옥마을에 생활터전을 마련해주자는 제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서는 내심 크게 기대를 걸었지만 정작 서울시에서 내놓은 방안은 북촌 한옥 민박 방 한 칸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전주에 내려온 후에 어쩌다 대구를 방문했다가 당시 역전에서 선거유세 중이던 대통령과 어색하게 마주쳤다. 인사 중에 ‘왕계의 품위 유지…’를 운운해봤지만 그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삼척에서 숭례문 복원 재목으로 쓰일 소나무를 베어내던 날도 그랬다. 고유제 행사에서 ‘야단성’ 치사를 했더니 한 전직 의원이 “마치 증조할아버지인 대원군을 보는 듯했다”는 농 섞인 인사를 건네왔다.
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그는 1941년 종로의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2남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었다. 그때 이미 62세의 연로한 나이였던 아버지 의친왕은 더구나 말이 없는 성품이어서 그와는 자라면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영어로 일기를 쓰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다니던 상궁들의 손길로 자라난 그는 경동중·고등학교를 거쳐 외국어대 서반어학과에 입학했다. 어릴 적 영어를 능통하게 하던 아버지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는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전쟁이 터지고 4·19를 거치면서 들어선 군사정권은 그나마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나오던 왕가의 생활보조금마저 끊어버렸다. 그는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마저 없어 곤궁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우연히 종로2가의 한 음악감상실에 들렸다가 마침 열린 노래자랑에서 덜컥 1등을 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전공을 살린답시고 ‘베사메무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한 방송국 아나운서가 그에게 “목소리가 좋으니 아나운서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싫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그럼, DJ라도 해보라”고 했다. 그때 받은 생애 첫 월급이 4500원. 황손이 처음으로 일을 해서 번 돈이었다. 그러다가 내친 김에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게 미8군 무대. 누군가 미8군에서 신인가수를 뽑는다고 하니 나가보라고 했다. 선발대회장에 가보니 무려 700여 명의 여자와 40여 명의 남자 가수 지망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유방도 히프도 크지 않은(그때만 해도 미8군 무대는 그런 글래머들만 서는 줄 알았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데 며칠 후 턱 합격통지가 날아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의 히트로 한껏 주가가 올라간 가수 최희준이 3만 원이라는 ‘무리한’ 월급을 요구했다 쫓겨난 자리를 채우는 역할이었다.
그 후 워커힐 쇼에서 영어로 사회를 보고 노래도 하던 그는 1966년 군예대였던 비둘기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종군 도중 차량전복사고로 크게 부상하고 귀국했다. 비둘기부대에 근무한 인연을 살려 취입한 곡이 바로 ‘비둘기 집’. 그에게 ‘비둘기 집’을 빼놓고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는 것은 그나마 남은 황손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황손으로서 ‘구질구질하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불건전’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다. 어느 때인가 김민기에게 “네 노래는 불러줄게” 하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으니.
‘비둘기 집’은 결혼식에서만 7000번이 넘게 부르면서 ‘국민가요’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여곡절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였지만 정작 그는 여러 번 이혼을 했다. 10·26사태 후에는 ‘쫓겨나듯’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고, LA 근처에서 작은 식품가게로 겨우 끼니를 때우다 강도를 열세 번이나 당했다. 10년 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홉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생활고도 생활고였지만 마음의 병이 그만큼 깊었다.
머리를 깎고 통도사에 들어가 3년을 지내기도 했고, 서울 수국사에 있을 때는 밤 늦게 술에 취해 돌아갔다가 문이 걸린 절 밖에서 잔 적도 많았다. 거처로 삼던 찜질방에서 유서를 쓰다가 우연히 그를 알아본 한 기자에 의해 신문에 크게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전주의 맑은 공기와 맛있는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 전주시에서는 그를 위해 이태조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 뒤 한옥마을 내에 ‘승광재’란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빛을 계승한다’는 승광재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잇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는 전주대학교 객원교수로 역사를 강의하기도 했고, 2006년부터는 황손후원회의 뒤를 잇는 황실문화재단의 총재도 맡고 있다.
황손의 마지막 소원은 오롯이 황실복원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황실을 권위를 다시 세우자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전통문화를 지키자는 것이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왕가가 있었다. 그것이 빛이든 그늘이든 엄연히 하나의 역사인 것이다. 역사를 바로 알 때 올바른 역사가 시작된다. 비록 상징적이라 하더라도 황실의 복원이 필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황손은 잠을 못 이룰 때가 많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험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불타버린 것이 어찌 숭례문뿐이랴. - 2009 02/17 위클리경향 8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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