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천상열차분야지도와 28수

Gijuzzang Dream 2009. 2. 22. 22:14

 

 

 

 

 

 

고구려의 천문도를 복원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당시 하늘의 위엄이 담겨 있다는 이 천문도는 과연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이 천문도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 중에 강물에 빠져 없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탁본(印本)을 지닌 사람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전하(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의) 임금이 된 초기에,

잃어버렸던 천문도를 바친 자가 있어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물처럼 중히 여겼다. 

(右天文圖石本舊在平壤城因兵亂于江而失之歲月旣久其印本之在者亦絶無矣

惟我殿下受命之初有以一本投進者殿下寶重之)

-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천문도시(天文圖詩), [대동야승(大東野乘)]-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도를 누군가 이성계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태조는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문도의 제작을 서둘렀다.

그런데 탁본에 그려진 별자리의 위치가 당시와는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관측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근, 유방택 등 여러 학자들이 수년간 노력한 끝에 드디어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탄생되었다.

이 천문도는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검은 돌판 위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무게만도 1톤이 넘게 나간다.

이 거대한 돌판에 별자리를 새기는 것은 하늘의 체계를 조선왕실에 끌어들이는 작업이며,

그만큼 새기는 손길 하나하나에 세심한 정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총 1467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바깥쪽에 작은 원이 있으며,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에 적도와 황도가 그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천문도에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북반구의 거의 모든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무슨 뜻일까?

천상은 하늘을 말하고, 열차는 하늘을 12차로 나눈 것,

그리고 분야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구역을 28수로 나누고 이를 땅에도 적용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이 모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인 것이다.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천문도에는 없는 별자리 하나가 눈에 띈다.

네 개의 별로 이루어진 ‘종대부(宗大夫)’라는 별자리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17세기 제작된 일본의 천문도에도 ‘종대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之圖, 1670)’와 ‘천상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1677)’가 바로 그 흔적이다.

14세기에 이미 우리 고유의 별자리라고 기록되어진 ‘종대부’ 별자리는

바다를 건너 일본의 천문도에도 자취를 남겼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독창성과 함께

우리의 천문도가 일본의 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된 후로부터 어느덧 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태조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점차 표면이 닳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하늘의 위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우려하였고,

천문도를 다시 새기라고 명을 내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는 하늘을 갖고 싶었고,

하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 또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687년 완성된 숙종 본은 태조 때의 것과 동일한데

단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이름이 위쪽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조선왕조는 태조 본과 숙종 본 천상열차분야지도, 이 천문도들의 보관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관상감 내에 흠경각이라는 건물까지 따로 지어 보관할 정도로 매우 중시 여겼던 것이다.

 

 

천문도는 크게 '구법 천문도'와 '신법 천문도'로 나뉜다.

18세기 이후 들어온 서양식 천문도를 신법 천문도라고 하며

구법 천문도는 동양의 전통사상에 바탕을 둔 천문도를 가리킨다.

두 천문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법은 북반구를 중심으로 원 하나로 그린 반면

신법은 북반구와 남반구 두 개의 원으로 나눠 그린 점이다.

 

구법 천문도의 역사는 고구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옛 서울인 통구(通溝)에 가면

무용총과 각저총 현실(玄室) 천장에 그려져 있는 고대의 천문도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자주색 원으로 그려진 별들이 3개씩 연결돼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

 

고작 해야 20개 남짓한 별이 그려진 원시적인 천문도지만 고구려천문도의 전통은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천문도에 관해서는 전통은 고려사에 오윤부라는 사람이 제작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을 뿐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루퍼스는「한국 천문학」에서 개성박물관에 고려인의 천문관이 담긴 동경(구리거울)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1,000여 개의 별들을 담고 있는 본격적인 천문도로 가장 오래된 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이며

조선시대 이루 민간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천문도가 이를 모델로 그려졌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천문도를 보유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겼으며,

이것이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수많은 모사본과 필사본을 낳게 한 이유가 되었다.

사대부 집안에 전래되는 천문도는 종이에 필사된 후 갖가지 빛깔로 채색이 되었으며

비단에 수놓아 지거나 정자의 천장(亭子)에 그려지기도 했다.

드물게는 구이원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별자리를 표시한 것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생활에까지 이어받으려고 했던 조상들의 마음이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은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일깨워주는 존재인 동시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별들에 인간세상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옛사람들은 천문대를 만들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별들의 지도인 천문도를 그리는 등

별들의 움직임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역대왕조의 임금들은 천상계의 변화가

나라의 안녕과 직결된 것으로 여겨 자기의 통치행위를 반성하는 거울로 삼았다.

 

세계 두 번째 오래 된 '천상열차분야지도'

 

조선 태조(1395)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남아있는 천문도 이후

우리 천문학의 역량과 성과를 결집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문도다.

이 천문도는 가로 122, 세로 221cm의 검은 대리석에 1.467개의 별들을 새겨 놓은 것으로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石刻) 천문도다.

600년간 비바람에 시달린 탓에 돌의 표면은 반들반들하게 닳았지만

흐릿하게 남아있는 미세한 점과 선들은 당시 천문학 수준이 세계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천문도만의 독특한 양식을 가리킨다.

천상을 커다란 원으로 표현해 이를 12개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列次)마다 그에 대응하는 지상의 12개 지역(分野) 명칭을 기록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76cm나 되는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원 둘레에는 옛사람들이 하늘을 나누는 기본 틀로 설정했던 28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조선 태조는 자신이 하늘이 세운 나라의 임금임을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이 각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태조는 대동강에 수장된 것으로 전해지던 고구려의 석각천문도의 탁본을 우연히 입수한 뒤

권근(1352-1409) 등에게 이를 토대로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천문 관측기관이었던 서운관의 학자들은

700년이라는 시차에서 생길 수 있는 오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 천문도를 기준삼아 별을 새로 관측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나 중국 것과는 다른 매우 정확한 천문도가 탄생했다.

 

‘천상 열차분야지도’ 각석의 가장 큰 의문점은

앞뒤 양면에 왜 똑같은 내용의 천문도가 새겨져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 면은 반대 면과 비교할 때 아래 위 방향이 거꾸로 새겨져 있지만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전상운, 박성래 외국어대 교수 등은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에서 "세종 15년에 제작됐다고

기록된 그 천문도일 것, 태조 때 각석은 만든 뒤 세종 때 다시 뒷면에 천문도를 새긴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하고 있다.

 

조선 초 권근(1352~1409)은 <양촌집(陽村集)>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경위를

'옛날 평양성에 있던 석각 천문도의 인본(印本ㆍ종이에 찍은 것)을 바탕으로 했으나,

원래 천문도가 너무 오래돼 별의 위치가 차이가 나므로 이를 바로잡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양면 석각에 대한 기록이나, 수정한 별자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사료로 남아 있지 않다.

 

또 다른 특징은 별의 밝기를 별의 크기로 표시했다는 점이다.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그렸다.

중국 천문도에서 볼 수 없는 별자리를 새로 추가한 점도 독자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2,900여 한자의 글자체도 매우 정교해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된 각석은

숙종 때 또 다른 대리석에 복각 돼 관상감(서운관의 추신)에 보관됐다.

영조 때는 관상감 내에 흠경각을 지어 두 각석은 함께 보관했다.

 

1960년 창경궁 풀밭서 발견

 

그러나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아무도 각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각석이 다시 발견된 곳은 흠경각이 아니라 창경궁의 명정전 추녀 밑이었다.

평범한 돌덩어리가 돼버린 각석은 풀밭에 내 팽개쳐진 채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었다.  

창경궁 안에 방치돼 있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발견해 서1983년 국보 제228호 국보로 지정케 한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은 "(당시)창경원에서 이 천문도를 발견했을 때

고궁에 소풍을 나온 어린이들이 깔고 앉아 각석 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진가를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1910-1930년대 평양숭실학교에서 근무했던

미국인학자 WC 루퍼스였는데 1936년 출간한「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고 격찬했다.

 

한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천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한국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이 일본 정향력(貞享曆)의 모태가 됐다는 기록을

남겼던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 시부카와 하루미(1639-1715)는 그의 문집에서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일본의 천문도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을 처음 제기한 박성래 교수는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천문도 2개의 이름이 각각「천상열차지도」와「천상분야지도」인 것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1997년 4월26일 경향/ 2009년 02월17일 한국일보 발췌-

 

 

 

 

 

 

 

 

 

 

 

 

 

 

 

 

 

 

 

 

 

- 더보기 -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구성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293

●천상열차분야지도(한글번역본)와 별자리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295 

●천상열차분야지도와 1만원권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296

●천상열차분야지도 - 조선 건국을 담다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030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국보 제228호) : http://blog.daum.net/gijuzzang/3908370

●천상열차분야지도 음악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7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