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 속에 살았던 임금과 치욕을 극복한 세자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밤,
서인세력들과 손잡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궁에 난입합니다.
궁을 지키던 군대의 수장들 대부분을 포섭한 상태라 어렵지 않게 궁을 점령합니다.
궁을 점령한 반란군은 곧바로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알현(謁見)하여
반정이 성공했음을 고합니다.
인목대비는 크게 기뻐하며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립니다.
한편, 궁을 빠져나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어있던 광해군은 이틀 뒤 체포되어
반정은 성공하게 됩니다. 조선 조(朝)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입니다.
당시 광해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반정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사실 반정 거사일은 12일이 아니고 하루 뒤인 13일이었습니다.
12일 밤 계획이 누설되어 주모자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졌고
급박해진 반정세력들이 계획을 앞당겨 거사한 것입니다.
인조반정의 1등공신으로 책봉된 김류는 거사 계획이 탄로 났다는 소리를 듣고 주저하고 있다가
뒤늦게 합류할 정도로 반정세력은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반정이 성공한 것은 광해군이 신임하는 장수들이 모두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후금의 공격에 대비해 북쪽 변방으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괄, 국경을 비우고 권력을 탐하다
인조반정이 성공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조 정권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괄(李适)의 난’입니다. 이괄은 반정당시 부사령관을 맡아 군대를 지휘한 사람입니다.
인조는 이괄의 뛰어난 전투력을 믿고 후금과의 일전을 대비해 평안병사를 제수하여
국경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정에 지대한 공을 했음에도 반정 2등공신에 책봉되어
불만이 있던 이괄은 아들 이전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자 국경수비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을 갑니다.
이괄은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한양으로 입성합니다.
조선 조에서 내부 반란으로 수도가 점령되는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한양을 접수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전력을 가다듬은 진압군에게 패합니다. 이괄도 부하의 손에 살해당해 난은 끝납니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인조 정권은 두 가지 큰 타격을 받습니다.
첫 번째는 반정 세력간에 벌어진 권력다툼이라는 정치적 오명입니다.
반정에 성공한 서인은 원당, 산당 등으로 분파되어 권력다툼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벌어진 거짓 역모사건에 이괄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그리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인사들까지 연루된 것입니다.
가뜩이나 2등공신으로 책봉되어 불만이었던 이괄이 역모로 몰리자 참지 못하고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두 번째 타격은 국경수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괄이 국경수비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후금과의 국경수비에 공백이 생긴 것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 외교를 천명한 인조 정권에게
무엇보다 후금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면서도 오히려 반정으로 인해 국경수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1979년 12․12 사태 당시 9사단장 노태우는 휴전선을 지키던 군대를 빼돌려 쿠데타에 가담했습니다.
입만 열면 안보가 어쩌니, 나라가 어쩌니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던 자가 말입니다.
지배계급의 어이없는 행태는 어찌나 닮았는지 세월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바뀌질 않습니다.
결국 이괄의 난으로 무너진 국경수비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치욕의 전조(前兆)
앞서 말한대로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서북 국경 수비가 허술해졌습니다.
때를 노려 1627년(인조 5) 1월, 후금의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넙니다.
정묘호란입니다. 국경을 넘은 후금 군대는 의주를 정령하고 주변성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남하합니다.
위기를 느낀 인조 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합니다.
후금은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라 기병전술에는 뛰어났지만 해전에 약하다는 것을 의식한 조치입니다.
이 조치가 먹혀들었는지 후금은 평양을 점거하고 이어 황주까지 진출했다가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고 화친의 뜻을 전합니다.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인지라 조선과의 전면전이 무리라고 판단한 후금이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한 것입니다.
이후 ‘양국은 형제로 칭한다.’,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다소 애매한 조약을 맺고 끝이 납니다.
후금에게 전쟁물품을 조달하되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조선과 후금이 타협한 셈입니다.
이를 ‘정묘약조’라 부릅니다.
그러나 정묘약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틈만 나면 병선 및 군사적 지원을 요구합니다.
국경을 넘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합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 초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 정병 3만, 말 3천필 등의 군수물자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인조 정권은 이 요구를 거부합니다.
이때 이미 후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수도 북경 코앞까지 진격한 상태였는데 말입니다.
인조 정권은 여전히 군사력 증강이나 민심안정보다는 헛된 명분에 사로잡혀
오로지 ‘향명배금(向明排金)’만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청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쓰기 시작합니다.
청 태종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전에 요구한 사항을 이행할 것과
왕자를 볼모로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인조 정권을 이 요구를 묵살합니다.
그해 11월 왕자와 척화를 주장하는 대신을 심양(청의 수도)으로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인조 정권은 이 요구마저 무시합니다. 조선과 청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볼모가 된 세자
1636년(인조 14년) 12월 1일, 청 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합니다. 병자호란입니다.
정묘호란 당시 주변성을 점령하며 천천히 남하하던 전술을 버리고 속전속결로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급박해진 조선 조정이 우왕좌왕하고 있던 사이 청 군대는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합니다.
인조와 세자, 조정 대신들은 어쩔 수 없이 강화도 피난계획을 접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관리들은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총 병력은 1만 3천이었습니다. 성안에는 근근이 연명해야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식량만이 있었습니다.
국경을 넘은지 보름만에 한양에 도착한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임금을 구하고자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주하였고
원군을 요청한 명나라는 감감무소식입니다.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조정은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조선은 항복의사를 밝힙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의 임금이 직접 항복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결국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신하를 뜻하는 푸른 의복에 의장도 없이 말을 탄 채
세자와 몇 명의 신하들만 이끌고 청 태종이 주둔하고 있던 삼전도(현재 송파구 삼전동)로 향합니다.
청 태종 앞에서 ‘대죄를 용서 하소서’라고 말하며
한번 절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히기를 세 번 반복합니다.
이른바 ‘삼괘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입니다.
큰 소리 쳤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굴욕적인 항복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자 부부를 비롯하여 둘째왕자 봉림대군, 셋째왕자 인평대군, 척화를 주장했던 대신 등
많은 인사들이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또한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간의 예’를 맺어야 했으며
이후 청나라가 요구하면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야 했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철군하면서
주변 고을을 약탈하고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인들이 끌려가는 피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외교관이 된 볼모
삼전도의 굴욕이 있은 9일 뒤 1637년(인조 15) 2월 8일,
세자를 비롯한 왕자 일행과 척화론을 주장한 대신 일부가 청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는 세자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먼 곳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이 배웅이 부자지간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볼모로 잡혀간 세자 일행은 심양의 모처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곳을 ‘심양관’이라 하며 본격적인 볼모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자는 볼모로 잡혀갔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위해 청과의 외교적 중재 역할을 수행합니다.
세자는 우선 청 황실과 친분을 쌓습니다.
특히 후금을 세우고 청 태조의 시효를 받는 누루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청 태종의 동생인
‘구왕(九王) 다이곤(만주어로 ‘곰’이라는 뜻)’과 각별한 친분을 쌓습니다.
구왕 다이곤은 후금 태조는 물론 청 태종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후 청 태종의 아들 청 세조가 어린 나이에 등극한 뒤 실권을 장악한 청나라의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소현세자와 구왕 다이곤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나중에 소현세자가 죽자 다이곤은 사신을 보내
세자의 아들 중 장자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중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청 황실과의 친분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의 껄끄러운 외교문제를
세자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청나라 또한 조선 문제를 심양에 와 있는 세자와 논의하려고 했습니다.
세자는 조선의 ‘향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망해가고 있는 명나라를 지원하다 발생한 조선의 외교문제를 구왕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구왕 다이곤도 외교 감각이 뛰어난 세자를 높이 평가하며 조선 문제를 세자와 논의했습니다.
부자지간을 갈라놓은 의심
그러나 세자의 이러한 움직임이 고국에 있는 부왕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인조는 외교문제에서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소외되자,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후궁인 소용 조씨는 이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며 부자지간을 이간질하기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 작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볼모로 끌려 온지 3년이 지난 1640년(인조 18), 세자는 부왕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세자부부는 청 조정의 허락을 얻어 일시 귀국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합니다.
문제는 세자가 조선으로 가기 전날 발생합니다.
구왕 다이곤은 세자가 차기 왕위를 이을 것이라 생각하고 ‘언제 다시 보겠는가’라며 송별회를 준비합니다. 이 송별회에서 구왕은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를 준비하여 세자에게 입으라고 권유합니다.
대홍망룡의는 임금이 입는 옷입니다. 붉은색 바탕에 임금을 뜻하는 용이 수 놓여 있습니다.
사극에서 많이 보셨을 겁니다. 세자는 대홍망룡의를 보고 깜짝 놀라
‘이는 국왕이 입는 장복(章服, 황제 · 왕 · 관리의 관복(冠服))입니다’라며 사양합니다.
구왕은 더 이상 권유하지 않고 송별회를 진행합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조선에는 ‘세자가 청 황실이 주는 ‘대홍망룡의’를 입고 잔치에 참석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세자가 조선에 당도했을 때 이 소문은 크게 번졌고
인조도 이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인조는 세자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선조를 대신하여
광해군을 차기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습니다.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차기 임금으로 세우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인조의 의심은
무리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세자를 불러들인 것은 인조의 병세를 핑계로 입국시킨 후 다시 보내지 않고
조선에 머물게 하려는 조선 조정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략은 부왕인 인조에 의해 무산됩니다.
인조는 청나라 실세 구왕 다이곤이 세자와 결탁하여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차기 임금으로 책봉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서둘러 세자를 심양으로 보내버립니다.
대소신료들은 최초 계획이 어긋난 것을 의아해 하며 세자 부부를 좀 더 머물 것을 요청하였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세자 부부는 할 수 없이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볼모생활을 지속하게 됩니다.
실리를 배운 세자
한편, 다시 청나라로 돌아간 세자는 청나라에 의해 망하는 명나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됩니다.
명나라는 일찍이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과 ‘고증학’을 발전시켜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유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이념적 사상을 버리지 않고 철저히 흡수하여
명나라 백성들을 규합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됩니다.
세자는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당시 중국에 입국해 있던 프랑스 신부 ‘아담 샬’과 돈독한 친분을 쌓습니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볼모로 잡혀있는 불행한 세자의 처지가 통했는지
세자는 아담 샬과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었으며 서로의 거처를 오가며 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서양의 뛰어난 문물을 소개받고 감탄하며
조선에 이 문물을 전하고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아담 샬은 천주교의 불모지인 조선에 교리를 전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세자는 조선이 명분을 중시하는 ‘주자학(성리학)’이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고증학’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청나라보다 뛰어난 국가로 성장해야 한다는 꿈을 꾼 것이지요.
그러나 세자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인조의 아들 세자는 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를 칭합니다.
소현세자는 비록 무력 때문에 굴욕적인 항복했으나,
내부를 깊숙이 이해하여 청나라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고민합니다.
세자는 청나라보다 뛰어난 문물을 발전시켜 조선을 일신하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청나라를 인정하고 교류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자의 이러한 원대한 꿈은 ‘향명배금’이라는 정치적 명분에 사로잡힌 인조와 서인 정권에 의해
철저히 무시됩니다. 거기다 ‘왕위를 넘본다’는 의심 때문에 속절없이 꺾이고 맙니다.
중원의 주인이 바뀌다
1644년(인조 22)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는 그해 11월 북경에서 세조(世祖)의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세조는 이미 심양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바 있었는데 다시 대관식을 치른 것입니다.
이는 천하가 청나라의 손에 들어왔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종의 정치 행사였습니다.
행사에는 당연히 세자도 참여하였습니다.
조선이 ‘어버이의 나라’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명나라가 ‘오랑캐’ 청나라에 의해 망하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세자는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대관식이 끝난 후 구왕은 세자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말을 전합니다.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10년 가까운 볼모 신분을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왕 다이곤의 말대로 명나라 황제는 살해되었고
(명 황제는 청나라 군대가 아니라 농민 출신 반란군 이자성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수도인 북경도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제 몇몇 지방 명나라 잔당세력만 제거하면 중원이 통일되는 시점이어서
더 이상 후방의 조선이 명나라와 손잡고 뒤를 칠 염려가 없어진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귀국
볼모 시절 세자 부부는 1640년(인조 18) 인조의 병세를 핑계로 일시 귀국한 이후
한 번 더 귀국한 적이 있습니다. 1643년(인조 21) 세자빈 강씨의 부친이 사망했을 때입니다.
조선 조정은 부친상을 당한 세자빈이 위패 앞에 곡을 해야 한다며 귀국을 요청하였고
청 조정도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세자의 아들들과 세자 부부를 맞바꾸자는 조건이 따랐습니다.
자식들과 자신들이 맞바꿔지는 상황에서도 세자 부부는 세자빈 부친상을 위해 귀국하였으나
인조는 끝내 세자빈의 빈소행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자빈 강씨는 부친 빈소에서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도 만나지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임금의 행동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1644년(인조 22) 반정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이 들어옵니다.
고변의 내용은 인조가 명나라의 멸망을 좌시하고 있으니, 인조를 상왕으로 앉히고
왕자 중에 차기임금을 세운 후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의 배후를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모사건으로 인조정권은 반정세력 간에 또다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는 치명적인 오점을 안게 됩니다.
또한 인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자에 대해 의심의 단계를 넘어 자신의 왕위를 넘보는 ‘역적의 무리’로 바라보게 된 듯 합니다.
1645년(인조 23) 2월, 세자 일행이 그렇게도 바라던 영구 귀국길에 오릅니다.
귀국 전 세자는 아담 샬의 도움을 받아 ‘지구의’, ‘망원경’ 등 다량의 서양 물품을 확보합니다.
9년의 볼모 생활은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세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서양의 발명품들과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아마도 세자는 조선이 청나라를 뛰어넘어 강국으로 가는 미래를 상상하며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의 희망은 부왕을 만나고 나서 산산이 부서집니다.
세자는 인조를 만나 청나라의 상황과 서양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세자의 이야기를 듣고 인조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서양의 책과 발명품들을 보여주자 심하게 분개하며 벼루를 들어 세자의 얼굴을 내리칩니다.
긴 세월 동안 오직 조선의 안위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노력과
조선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의문의 죽음
세자는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진 탓에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눕게 됩니다.
울화병인지, 단순한 열병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3일 만에 어이없이 생을 다합니다.
세자의 갑작스러운 병과 죽음에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끊임없는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최근에는 인조가 세자를 독살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인조의 세자 독살설은 여러 가지 정황이 있습니다. 먼저 세자의 병명입니다.
귀국 2달 만에 앓아누운 세자의 병명은 ‘학질’이었습니다.
사실 9년 동안 이국땅에서 지낸 세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학질에 걸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세자의 주치의도 문제였습니다. 세자를 진료하고 치료한 것은 의관(醫官) 이형익입니다.
이형익은 세자와 인조 사이를 이간질했던 소용 조씨의 사가에 드나들던 의원입니다.
이형익이 내의원 의관으로 특채 된 것도 세자가 귀국하기 3개월 전이었습니다.
세자의 귀국소식이 조선으로 날아든 바로 그 시점입니다.
세자가 병석에 누운 후 이형익이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합니다. 치료 3일째 돌연 사망하고 맙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정황은 세자 시신을 염습(殮襲)하는 과정에서 밝혀집니다.
세자의 친모인 인렬왕후의 동생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종친 자격으로 세자 염습에 참여합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을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천의 빛과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인조실록)
세자 사후 처리과정에서 인조의 행동도 석연치 않습니다.
통상 왕족이 치료 중에 사망하거나 병세가 더 악화되면 담당 의관이 처벌을 받습니다.
그냥 왕족도 아니고 세자가 치료 중에 사망했습니다.
당연히 담당 의관인 이형익이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인조는 아무 죄도 묻지 않습니다.
삼사(三司)에서 이형익을 처벌하라고 상소가 빗발칩니다. 대신도 들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조는 꿈쩍 않습니다. 모든 요구를 묵살합니다.
또한 무덤의 이름도 세자의 무덤인 ‘원(園)’자 대신 한 단계 아래인 ‘묘(墓)’자를 쓰도록 합니다.
상복을 입는 기간도 장자가 죽으면 부모가 3년복을 입어야 함에도 1년복으로 결정합니다.
거기다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易月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 하고,
결국 7일 만에 상복을 벗어버립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인조의 행동에 후대 역사는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 평가합니다.
세자 가족의 비참한 최후
세자가 죽은 후, 3개월 뒤에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세자책봉 문제를 꺼냅니다.
대신들은 세자책봉은 국왕의 권한이라며 말을 아낍니다.
인조는 한사코 대신들이 주청(奏請)하라고 보챕니다.
대신들은 결국 ‘세자가 비록 죽었으나 원손이 있으니 크게 상심하지 말라’며
법도에 따라 세자의 장자 석철을 세손에 봉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대로하며 ‘어리고 아둔한 원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며 대신들을 질책합니다.
몇 번의 설전 끝에 결국 대신들은 마지못해 둘째왕자 봉림대군을 차기 세자로 주청합니다.
이 자리에서 인조는 몇 번이나 ‘이는 신들이 주청한 것이오!’라며
봉림대군의 차기 세자 책봉은 신하들의 주장이라고 떠넘깁니다.
신하들을 방패삼아 왕위계승 순위를 무시했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행위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었나 봅니다.
이 결정 때문에 조선 땅 전체를 시끄럽게 만든 ‘예송(禮訟)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자의 아들 원손을 세손자리에서 밀어내자 인조는 세자 가족들에게 눈을 돌립니다.
얼마 후 궁궐에서 저주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조는 이 저주사건이 세자빈 강씨가 한 행위로 단정하고
강씨 처소 궁녀 2명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자행합니다.
궁녀들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강씨를 보호합니다.
이 사건이 묻힐 즈음 또 다시 저주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도 강씨 처소 궁녀 2명이 연루되었으나 이들 역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죽어갔습니다.
결국 강씨는 처소에 감금되는 처분을 받습니다. 그러나 강씨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올라옵니다.
역시 강씨 처소 궁녀들이 하옥되어 고문을 당하지만 이들 또한 죽음으로 그 답을 대신합니다.
이쯤 되면 세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조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병적(病的)으로 세자 일가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연일 강씨 처소 궁녀들이 죽어나감에도 끝내 죽일 혐의를 찾지 못하자
결국 인조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강씨의 죄를 물으라고 고합니다.
비망기의 내용이 어이없습니다. 강씨는 볼모 생활할 때부터 역심을 품었으므로
저주사건 등은 분명히 강씨의 소행이며 따라서 이를 단죄(斷罪)할 처벌을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강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세자의 아들 3명은 제주도에 유배됩니다.
장자 석철은 유배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습니다.
사인은 풍토병이었으나 세간에는 인조가 죽인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이즈음 구왕 다이곤이 사신을 보내 석철을 양자로 삼고 싶다고 알려왔고
사신이 돌아가면서 세자의 묘에 들러 참배하며 세자의 죽음을 슬퍼했기에 이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둘째아들 석린도 형이 죽은 뒤 석 달 후 풍토병으로 생을 다합니다.
멀어지는 부국강병
소현세자가 당시 인조의 의심대로 역심을 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한 시기에 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국내 정세나 정치에는 무지했습니다.
설령 청나라에서 역심을 품었다면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구왕 다이곤이나
청나라 1급 무장 용골대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있어야 하나
청나라 역사서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결론은 소현세자 일가족의 죽음은
인조의 권력을 향한 병적인 집착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결여되었고
이괄의 난 등 반정세력 내부에서 빈번히 반역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조는 왕위에 대한 집착이 다른 임금에 비해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오랑캐라 깔보던 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내부에서는 오랑캐에게 항복한 무능한 임금이라는 공격이 있었습니다.
거기다 청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임금 자리도 보전키 어려운 형국이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굴레에 갇혀버린 불쌍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아비라는 역사적 비난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헛된 명분만을 중시하는 학문을 버리고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욕과 의심의 굴레에 갇힌 아버지 때문에 그 꿈을 피워보기도 전에 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소현세자가 인조 다음 왕위에 앉았다면 조선은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요?
- 엄균용 / 울산 다울(다함께 사는 우리)성인장애인학교 개교준비단 대표/ 사회당 중앙위원회 의장
- 2009.01.29 / 02.05/ 02.12 ⓒ prometheus All right reserved. [엄균용의 부록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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