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정조(正祖)와 정순왕후(貞純王后)

Gijuzzang Dream 2009. 2. 16. 22:03

 

 

 

 

 

 

 정조(正祖)와 정순왕후(貞純王后)

 

 

최근에 끝난 MBC 사극 ‘이산’을 비롯하여 ‘한성별곡’,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등

정조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사극은 때로는 사실과 달리, 때로는 기존의 관점과 다르게 전개합니다.

시청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극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극이 방영될 대마다 ‘역사고증’이라는 문제가 따라 다닙니다.

사실, 정조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군주도 드뭅니다.

또한 죽음을 둘러 싼 각종 의혹과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는 군주도 드뭅니다.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성시대

 

학교에서 ‘국사’를 배우면, 특히 조선사를 배우면 수많은 파벌 때문에 괴롭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참 많기도 합니다. 자세히 나누면 더 많습니다.

어쨌든 조선시대 왕위계승과 당파, 또는 붕당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정조의 조부이자 선왕인 영조(英祖)는 19대 숙종의 2남이고 20대 경종(景宗)의 이복동생입니다.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는 무수리(각 처소에서 궁녀들이 부리던 여자노비)였다가

숙종의 후궁이 됩니다. ‘천민 출신’ 모친의 이력이 영조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한편, 숙종 말 소론은 장자인 경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노론은 영조(연잉군)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종이 폐출된 희빈 장씨(장희빈)의 소생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결국 경종이 왕이 됩니다만 4년 만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습니다.

영조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왕위에 오릅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노론의 도움으로 등극했기 때문에 왕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희대의 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즈음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누어집니다.

사도세자를 옹호하고 죽음을 애통해하는 세력이 시파이고

영조를 부추겨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세력이 벽파입니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소수의 남인과 시파의 일부가 남아있었습니다.

 

 

죄인의 아들, 임금이 되다

 

정조는 영조의 2남 사도세자의 장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가 역모죄로 세자에서 폐위되고 억울함을 호소하다 뒤주 안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죄인이 되어 죽은 임금은 몇 명 있었으나,

아버지가 죄인이 되어 죽은 경우는 전무후무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 ‘산’을 일찍 죽은 자신의 장자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고

세손(世孫)에 봉합니다. 비록 죄인의 아들이지만 형식상으로는 그 굴레를 벗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벽파가 이를 두고 볼 수는 없었겠지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방해했습니다.

 

한편, 정조는 여느 무신에 뒤지지 않는 무예실력을 갖추었다고 전합니다.

세손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암살 위기를 넘겨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드라마처럼 암살기도의 배후가 벽파인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조가 죽으면 가장 이득 볼 사람들이 벽파니까 ‘역사적 의심’을 받는 것입니다.

 

정조는 알려진 바와 같이 민심을 수습하고 수많은 개혁정책으로

경제안정과 민심안정에 평생을 진력(盡力)하였습니다.

그러나 집권 초기에는 벽파와의 권력투쟁이 치열했습니다.

정조의 개혁정책은 벽파의 기득권을 제한하기 위한 의도도 숨어있었습니다.

정조 집권 후반기나 되어야 조정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게 됩니다.

탕평책이 효과를 거두어 남인, 시파 등이 대거 등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탕평책이라는 것도 왕권 강화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왕권을 확립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여 수원성을 축조합니다.

아울러 대규모 능행(陵幸, 임금이 부모 등 선조들의 능에 거동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수행합니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정면돌파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래,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하면 정확 할까요?

 

 

왕의 남자, 홍국영과 정약용

 

집권 초기 벽파와의 투쟁에서 빠지지 않은 사람이 ‘홍국영’입니다.

홍국영은 세손시절부터 벽파의 파상공격에서 정조를 방어해낸 핵심인물입니다.

홍국영이 없었다면 정조가 등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은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쥐게 됩니다.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고 자신은 도승지와 숙위소(정조 호위부대)대장을 겸합니다.

이후 누이(원빈 홍씨)가 후사 없이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들여 결국 세자로 책봉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世道政治)’라는 말이 있는데

세도정치라는 말은 홍국영을 두고 만들어진 말입니다.

 

이러한 홍국영도 정조 4년 누이인 원빈 홍씨가 중전인 효의왕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고 믿고

중전을 핍박하면서 결국은 가산이 몰수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일각에서는 정조가 집권초기 자신의 세력을 모을 시간을 벌기위해 벽파세력의 눈을 다른 곳에

돌리고자 홍국영을 전면에 내세워 세도정치를 묵인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정조 5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정조 초기 왕의 남자가 홍국영이라면 후기 왕의 남자는 단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정조 13년 성균관 유생 중 뛰어난 사람을 등용하는 ‘식년문과’라는 특별과거에 합격하여

발탁됩니다.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받아들인 남인세력의 중심인물입니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몇 번 귀향을 가고 요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매번 정조의 배려로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합니다.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수원성 축조 때 거중기를 발명하여 사용했고

정조 후기 개혁정책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실각한 후 평생을 집필작업에 몰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귀향지가 다산(茶山)이기에 붙여진 것입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수많은 저서도 대부분 귀양지에서 집필했습니다.

 

 

최후의 승자 정순왕후(貞純王后)

 

최근 정조와 함께 부각되는 인물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입니다.

영조 35년, 중전 정성왕후(貞盛王后)가 죽자

당시 15세의 나이로 무려 51살이나 차이 나는 영조의 계비가 됩니다.

보통 중전이 일찍 죽으면 새로 중전을 들이거나 후궁 중에 중전을 뽑는 2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숙종 때 희빈 장씨의 사태를 겪으면서

후궁 중에 중전을 세우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리하여 66세의 남편과 15세의 아내가 부부가 된 것입니다.

 

“정순왕후가 드라마에서처럼 실제로 노론 벽파의 수장이었는가?”라는 물음에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른다.”입니다.

예전에 정조를 묘사할 때 최대 정적은

화완옹주(和緩翁主, 사도세자의 여동생)와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이었습니다.

화완옹주와 정후겸의 행동과 몰락과정은 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핵심적인 부분은 정조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 정순왕후 단 한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 때문에 정순왕후가 정조의 알 수 없는 죽음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드라마에서처럼 벽파 대신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당당히 상석에 앉아 지휘하는

모습은 왠지 낯섭니다. 당시 왕실의 여자들은 임금과 직계가족 외에는 아무리 대신이라고 해도

마주 앉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벽파의 수장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런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폐위되고 남는 일입니다.

드라마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새로운 갈등구도를 만들기 위해 도입된 장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순왕후 친정 인물들이 벽파의 핵심인물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조 사후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할 때 정조가 이루었던 개혁정책을 모두 파기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교를 뿌리 뽑는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박해하고

이를 통해 벽파의 정적인 남인들을 모두 숙청한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정순왕후가 드라마에서처럼 벽파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면

한마디로 정순왕후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숨기면서 이루고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 최후의 승자도 정순왕후가 아닐지 모릅니다.

정순왕후 사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순왕후의 일가가 아닌 김조순 일가가 이후 60여 년 동안 조선을 좌지우지합니다.

이것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입니다.

 

일각에서는 조선의 몰락이 뿌리 깊은 당파싸움으로 인해서 자멸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평가 뒤에 따라오는 것이 ‘그래서 일본이 조선을 병탄(倂呑)한 것이 당연하다.’라는 논리입니다.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붕당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평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선말기의 혼란은 붕당정치가 아니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 엄균용 / 울산 다울(다함께 사는 우리)성인장애인학교 개교준비단 대표

-  2008.06.20ⓒ prometheus All right reserved 엄균용의 부록 조선시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