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서화류문화재 복원 -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박지선 교수

Gijuzzang Dream 2009. 2. 5. 03:32

 

 

 

 

 

 

 

 

 

 서화류 문화재 복원 1인자  - 박지선교수

 

 

 

 

 

국보 111호 고려 안향(1243∼1306) 영정, 국보 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96호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보물 133호 화엄사 서5층석탑 출토 다라니경,

보물 1286호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국내 서화류 문화재의 최고 명품들은 모두 그의 손끝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훼손 위기에 처한 서화류 문화재 보존처리 및 복원의 1인자인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장 겸 용인대 교수.

1986년 불모지였던 이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 사람이기도 하다.

 

서화류 문화재 복원은 인내를 요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워낙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보존처리는 대개 ‘기본 조사-해체-소독 및 세척-배접지(그림이나 글씨 뒷면에 덧붙이는 종이) 제거-

종이 천 짜깁기-배접-표구’등의 순서를 거친다. 이 과정은 거의 수작업이다.

 

특히 종이나 천(비단 등)을 짜깁기하는 과정은 고난도의 작업이다.

원재료와 같은 재질의 종이나 천을 제작해야 하는데다, 벌레 먹어 구멍났거나 오래되어 탈락된

크고 작은 부분을 한 올 한 올 일일이 손으로 짜깁기해 넣어야 한다.

그렇다보니 끈기와 정교함이 모두 필요하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6개월, 1년이 잠깐이다.

보물 1286호 수월관음도의 경우 4년이나 걸렸다.

그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5년 이상 고아가 됐다고 생각하고 버텨야 한다.

고독을 무서워하지 말고 즐겁게 도전하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서화류 보존처리는 극도의 긴장을 요한다.

사소한 실수라도 발생하면 국보나 보물 등의 문화재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쁜 생각도 하지 않고 나쁜 것도 보지 않는다.

구도자처럼 마음을 맑게 해야 보존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보존 처리는 단순히 훼손을 방지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과학적 분석을 통해 종이나 비단 등의 재질,

각종 안료, 표구 상태 등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미술사학자들이 놓치는 내용이지만 박 소장에겐 중요한 연구 테마가 된다.

그는 그래서 “서화류 보존처리는 마치 보물찾기 같다.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기쁨이 보통이 아니다”

고 말한다.

 

박 소장은 원래 미술학도였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동양화과 재학시절,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연구실장의 강의를 들으면서 서화류의 보존처리 및 복원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이듬해인 86년 일본으로 건너가 93년까지

교토국립박물관 문화재보존수리소에서 도제식으로 보존과학을 배웠다.

박 소장은 “도제식이다 보니 사실은 혼자서 모든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었고 그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한다.

 

94년 귀국했을 때, 국내 서화류 보존처리 전가는 박 소장 단 한 명뿐이었다.

지금은 전공자들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수준급 전문가는 손꼽을 정도.

힘든데다 크게 돈 버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래도 그는 언제나 즐겁다. 

“문화재 명품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문화재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보존처리의 진정한 매력입니다.”

- 동아,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2002-06-26 [장인정신 獨步 (12)]

 

 

 

 

 

 

 

 

박지선 서화류 보존 전문가전문가

 

 

박지선(46)은 교수(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직함을 갖고 있다. 미대(서울대 회화학과)를 나왔다.

하지만 화가의 길 대신 문화재(서화류) 보존 · 수복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어릴 때 환경이 중요한가 봐요. 할아버지(고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주) 때부터

집이 이른바 표구사가 많은 인사동이었으니까…."


 

서화 보존전문가인 박지선씨가 보존처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표구사에서 본 옛 그림과 옛 서책들. 저렇게 훼손되고 빛바랜 그림 · 책들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1986년부터 8년이나 도제식 수업을 받아가며 일본 교토박물관 문화재 수리소 과정을 거친 이유다.
"그걸 배웠어요. 선배가 왼손으로 하면 나도 왼손으로 배운다.

선배 어깨 너머로 훔쳐 배워라. 뭐 이런 것들."
"왜죠?"
"서화류의 보존·수복기술은 경험이 엄청 중요합니다. 그래 일단 선배를 따라 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가르쳐 주는 것보다는 스스로 배우는 게 오래 남으니까 훔쳐 배우라는 것이죠."

93년. 귀국후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정재(靖齋)문화재보존연구소'를 차렸다.

97년엔 대학 재단(용인대)의 고려불화(수월관음도 · 보물 1286호)를 복원처리한 인연으로

문화재 보존학과를 처음으로 만든다. 이력은 화려하다.
그것도 깨알 같은 글씨체로 A4용지 장장 5장이다.

안향(국보 111호) 및 주세붕 영정(보물 717호),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569호), 삼국사기(보물 525호),

개국원종공신녹권(국보 69호) 등.

수백년 세월의 찌꺼기를 말끔히 걷어내고, 옛 사람들의 숨결과 체취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성질 급한 이는 가라."

성질 급한 사람은 속 터져 죽을 거다.

의뢰받은 서화류 문화재가 오면 사전 조사와 회의를 거쳐 세척에 들어간다.

다음, 그림만 남겨두고 배접지(글씨 · 그림 뒷면에 붙이는 종이)를 벗긴다.

그후 훼손된 부분을 새로운 종이와 천으로 짜깁기한 뒤

다시 배접-장황-보고서 작성 등의 순서를 거친다.

"훼손된 부분을 다시 짜깁기하는 작업은 정말 어렵죠.

원재료와 같은 재질과 색깔의 종이와 천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힘들고,

한 올 한 올 때우는 작업은 인내심이 없으면 금방 짜증낼 일이죠. 와중에 많은 장인들의 도움을 받죠.

예컨대 종이는 신현세 선생, 나무는 김문권 선생 같은 분들이 만들어줘요."

풀도 10년씩 삭인다. 해마다 김장하듯 쑤는데, 밀가루 전분만 남겨두고 풀을 쑤어

독에 넣고는 물을 부어 10년을 기다린다.
수복작업은 2년을 훌쩍 넘기는 일도 다반사다.

의뢰품이 들어오면 생각하는 데만 1년이 걸리는 일도 있다.

"유몽인 공신교서가 들어왔는데 형태가 불완전했어요. 어찌하나 하고 깊은 생각에 빠졌는데….

아 글쎄 1년 뒤에 같은 형식의 공신교서(이성윤)가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숙제를 풀었죠."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과거의 미술사는 그림 자체에 대한 연구잖아요.

하지만 전 그 시대의 기법과 흐름까지 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종이 · 비단 재질과 안료, 장황 상태 같은 것을 분석하는 것.

예컨대 겸재는 이런 비단을 즐겨 썼다. 뭐 이런 거. 진위도 쉽게 파악할 수 있죠."
"그럼 우리가 말하는 표구와는 다르네요."
"물론이죠. 특히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 내는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죠."
이 참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표구'라는 말 대신 '장황(裝潢)'이라는 단어를 쓰자.

'표구(表具)'라는 일본 용어를 굳이 쓸 이유가 없으니까.

 

 

"초상화의 양식 다 찾았다."

작업실에는 각 가문과 박물관에서 의뢰한 초상화가 넘쳐난다.

그 덕에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을 모두 찾아낼 수 있었다.
"유물 한점 한점이 저에겐 스승입니다.

특히나 각 가문에서 정성스레 보관해온 초상화들은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요."
옛 초상화는 물감 같은 재료를 제대로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다.

또 하나, 과거에는 화가는 물론 장황한 사람의 기록도 똑같이 남겨 놓았다.


"대원군 초상화가 그래요. 뚜렷한 역할분담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태조 어진의 경우 그림에서 장황까지 한 기간이 20일 남짓 걸렸을 뿐인데,

매우 숙련된 사람들이 공동작업을 한 것입니다. 전문가 집단이 했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여기서 말끝을 흐린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해보면….
교수인 그에게 또 다른 수식어가 있으니 바로 '표구기능공'이다.

업계에서는 전문용어로 한사람의 '기능공'일 뿐이다.

새삼 초정 박제가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초정(楚亭)은 전문적인 기예를 익힌 '편벽된 인물'도 높이 사야 하며,

그 뛰어난 기술자를 사(士)로서 예우해야 한다고 했다. 기술자에게는 제값을 치러야 한다면서….
교수라는 직책을 얻은 것은 분명 세상의 눈높이로는 사(士)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의 위치는 이른바 ' 전자입찰'이라는 과정을 넘어야 하는 신분에 불과하다.
"전문가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제대로 일의 질을 평가받고 싶어요."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2007.02.02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新장인열전] 

 

 

 

 

 

 

불화 되살리는 ‘보존 과학의 힘’

 

 

 

수월관음도 2년 수술 ‘6백년전 원형 회복’

해체-건식-짜깁기-표장 거쳐

x레이 · 현미경 · 적외선 촬영 동원

소맥전분 풀 10년 삭였다 사용

 

 

 

◇보존처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죽림사 세존괘불탱(보물 1279호).

 

 

1998년 보물 제1286호로 지정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14세기)는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우선 1991년 미국 소더비경매장에서 고려불화로는 최고가인 14억2천만 원에 경매돼

국내에 들어온 것이 그러하다.

고려불화 자체가 국내에선 희귀해 10여 점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수월관음도는 당시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2점이 유일했다.

6백년이 넘도록 화려한 색채를 자랑했던 수월관음도는 그러나 2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조선시대 때 덧칠을 하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훼손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불화는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본래의 ‘화려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낡고 손상된 불화에 본래의 생명을 불어넣은 ‘과학적 보존처리’덕분이다.

 

사실 불화를 비롯한 서화의 보존처리 역사는 긴 편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그림이 손상된 후에나 비로소 보존처리하게 되는 불가피한 상황도 있지만,

예로부터 선조들은 그 이전에 이미 그림을 어떻게 보관하고 취급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처치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당 나라 때의 장언원이 <역대명화기>에서 표장재료 및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을 정도로,

문인이나 직업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부터 보존을 염두에 두었다. 

이런 전통적인 방법들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보존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되었고,

과학적인 조사방법에 의해 보다 나은 보존처리방법으로 진일보하고 있는 것이다.

 

수월관음도 보존처리를 맡았던 박지선 교수(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장)는

“불화는 재료에 따라 제작기법과 손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보존과학이 기존의 방법과 다른 것은, 보존처리에 앞서 X-ray와 현미경,

적외선 촬영 등 과학적 장비를 동원한 재료 분석을 통해 당시의 제작기법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보존처리를 받으러 오는 불화들 대부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중환자들”이다. 얼마 전 박 교수가 보존처리를 맡았던 죽림사 괘불(보물 제1279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 수리할 때 화면 연결을 정확히 하지 않아 그림이 어긋난 부분도 많았고,

전체적으로 심하게 꺾인 부분과 결실부분이 많았다.

화면 우측 중·하단은 비단과 삼베가 많이 밀려 올라가 화면이 심하게 어긋나 있었다.

현미경 촬영으로 바탕 재질 및 안료상태를 확인한 결과

그림 전체가 6폭의 천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간의 2폭은 비단이고 그 좌 · 우는 각각 삼베를 2폭씩 댔다.

 

불화 보존처리에서는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 못지않게 새로 교체하는 재료와

원 재료의 물리적 힘을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두께, 강도, 수축 · 팽창율의 차이에 따른 힘의 균형이 무너져 오히려 그림에 손상을 입힌다.

안료 역시 열화처리를 통해 약하게 하지 않으면 그 부분만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조사와 기록, 해체, 건식 클리닝, 아교 보강, 배접지 제거, 결실 부분 짜깁기, 배접, 표장 등을 거치는

불화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잘못된 보존처리는 오히려 그림을 훼손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자”는 것이다.

 

예컨대 수월관음도를 보존처리할 당시, 원 작품의 대나무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후대에 누군가가 시커멓게 덧칠한 것을 X선 촬영을 통해 확인했으나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끝내 복원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손상 지도에 표시했다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배접에 사용하는 풀은 보존처리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후대에 보존처리를 할 때 쉽게 분리될 수 있어야 하는 게 기본이다.

풀의 접착력이 너무 강하면 그림이 딱딱하게 되어 쉽게 꺾이게 되고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경우 또한 훼손이다. 이때 무리하게 배접지를 떼어내면 그림까지 망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배접에 쓰이는 풀은 밀가루에서 단백질만 제거한 소맥전분풀을

10년 정도 삭였다가 사용한다.

 

불화의 보존처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의 전통적인 표장 형식이 잊혀간다는 점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표장 형식이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 전통의 표장 형식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새로운 비단에 새로운 비례로 일본풍의 한국 표구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불화의 경우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많긴 하지만, 최근 불화 도난 사건이 잦아지면서

소장처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그림의 밑부분을 잘라버린다든지,

테두리가 상했다 하여 그 위에 비단을 덧대어 버리는 경우가 잦다.

 

국내 불화의 과학적 보존처리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과학실이 생긴 것은 1975년이지만, 서화 보존처리실은 1990년대 초에야 생겼다.

그나마 불화의 보존처리를 담당할 수 있는 직원은 없는 실정이다.

때문에 이제는 중앙승가대나 동국대에 문화재보존학과를 신설해

교계 스스로 불화를 비롯한 성보 보존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현대불교 2545년 9월 5일 333호

 

 

 

 

 

 

 

 

보존처리 전문가 박지선씨

 

 

 

정재(靖齋)문화재보존연구소.

보존처리 전문가 박지선씨(용인대 교수)가 이끌고 있는 국내 유일의 수복(修復)전문 민간연구소다.

2층을 오르니 알록달록한 양동이가 즐비하다. 전통 풀을 만드는 곳이다.

밀가루를 물속에 담가두면 단백질은 제거되고 전분만 남는데,

적어도 10년은 삭혀야 고서화에 쓸 수 있는 풀이 만들어진다.

 

3층 작업실은 회화 가운데 가장 큰 괘불의 크기에 맞춰 너비 15,높이 10m의 대형 벽면을 갖췄다.

마루에는 각종 옛 그림과 글씨, 고서가 즐비한 가운데 초상화 1점이 눈에 들어온다.

충남지방유형문화재 85호인 이만유(李萬有) 장군 영정.

원본은 수복을 끝내고 내려 보냈으나 초상화의 작품성이 뛰어나 연구를 위해 다시 그리고 있었다.

수복의 역할이 상한 옛 그림을 고치는데서 나아가 임모(臨摸)를 통해

원본을 보호하는 일까지 맡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다른 곳에는 누룽지처럼 엉겨 붙은 종이뭉치가 있다.

불쏘시개로 쓰면 알맞을 것 같은 책의 겉장을 보니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의뢰한

일제시대의 ‘刑事事件簿’였다.4명의 연구원이 둘러 앉아 얇은 대꼬챙이로 습기에 눌러 붙은 책장을

한 페이지씩 정성스레 펼치며 옛 기록을 되찾고 있었다.

 

“보존과학은 유물과의 대화를 통해 과거와 미래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그래서 유물이 들어오면 가슴이 설레고,

마음 속으로 화가와 교감을 하면서 어떻게 모실까를 생각하지요.

명화를 보면서 느끼는 희열은 따분함에서 오는 작업의 피로를 떨쳐버리게 합니다.”

 

박소장이 옛 그림에서 느끼는 감회는 스스로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기에 더하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 동양화과를 나온 그는 화조화에 재능을 보인 작가였으나

1986년 간송미술관 최완수 학예실장의 권유에 따라 수복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됐다.

그가 유학을 한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의 문화재보존수리소는 정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곳.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에서 의뢰가 밀려든다.

이곳에서 8년간 회화 및 서적류 수복보존에 관한 연수를 한 그는 막바지 2년간은

일본 문화청 주최 문화재수리기술자 연수과정까지 마쳤다.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 국보인 ‘석가금관출현도’와 ‘소상외유도’와

우리나라의 국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을 비롯,

22점의 굵직한 문화재급 작품의 수리작업에 참여하면서 기량을 닦았다.

 

1994년 귀국한 뒤 바로 할아버지(샘표간장 창업자인 고 박규회 선생)의 호를 딴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립중앙박물관 보존실의 지류유물보존처리 담당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일을 하면서

1996년 국보 39호 경주 나원리 석탑내 금동사리함에서 출토된 지류유물과

보물 133호 화엄사 서오층석탑에서 출토된 다라니경, 보물 1279호인 나주 죽림사의 세존괘불탱,

보물652-6호인 제주의 탐라순력도 등 주요 유물을 다뤘다.

지금도 국보 111호 안향 영정과 보물 717호인 주세붕 영정 등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전까지는 주로 표구업을 하는 분들이 수복을 맡았습니다.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다보니 기술은 수준급이었지만 과학적인 토대를 갖추지 못한 것이 흠이었지요.

수복(修復)은 외과의사와 같아 ‘환자’에 대한 여러 자료를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종이로 만들어진 유물이 들어오면 먼저 좀이 먹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조사해 손상지도를 만든다.

이후 X선, 적외선 사진으로 섬유질의 특징과 본래의 모습을 찾아낸다.

다시 잿물에 삶는 등의 방법으로 같은 종류의 종이를 만들어 짜깁기를 하듯

손상부분을 메우는 공정을 거친다.

시료 채취를 위해 유물의 일부를 떼어내는 방식이 아닌 ‘비파괴 분석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서울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다 1997년부터 용인대 예술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로 있는 그는

현재 연구생을 받아들여 보존과학의 체계적인 기술을 전하고 있다.

연구의 가치가 있는 작품은 재료비도 안되는 돈으로 작업을 맡아 교육의 자료로 삼는다.

가짜 작품도 그의 안목 앞에서는 꼼짝없이 정체를 드러내는데

최근 중국에서 고려불화 위작을 들여와 “우리가 거두지 않으면 일본으로 넘어간다.”는 식으로

애국심을 자극해 거래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림은 바탕과 접착제, 물감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구조체입니다.

요즘 화가들은 대상은 모르고 표현만 하려드는 것이 약점이지요.

작품은 자기의 창작이지만 일단 팔리고 나면 남의 재산인 만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가령 한지에 아크릴을 쓰는 것까지는 좋으나 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고

종이는 숨을 쉬는 재료이니 유리 액자를 할 것인지도 환경에 맞춰 고려해야할 사항이지요.”

 

그의 작업실 한켠에는 재료 창고가 있다. 한지와 일본 종이, 중국 종이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비단은 일본에서 수공으로 만든 것을 문양별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우리 작품을 일본 재료로 수복(修復)하는 것이 아쉽지만 표구용 비단이 국내에서는 대가 끊긴 반면

일본에서는 고미술품에서 쓰던 것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현실이다.

 

“수복(修復)은 죽은 예술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입니다.

소문이 나서 그런지 금속이나 도자기까지 들고 오지만 저희는 오직 지류로 만든 것만 다룹니다.

한 분야를 전문화시켜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2001-01-04 국민일보, 손수호기자 shshon@kmib.co.kr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박지선교수

 

 

 

 

“보호 최우선…모사품 전시해야”

 

 

국내 몇 안 되는 불화 보존처리 전문가인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박지선 교수는 불화 보존을 위해서는

“문화재급 불화들은 박물관 또는 수장고에 보관하고 대신 모사품을 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예불의 대상이기도 한 불화 대신 모사품을 건다는 데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일본 등에서는 불화 보존을 위해 널리 쓰이고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현재 있는 얼룩 하나, 결손 부분 하나까지도 그대로 옮겨 그리는 방식을 현상 모사라고 하는데,

현상 모사한 작품은 원래 불화를 대신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괘불의 경우 실제로는 문화재급을 소장하고 있으나 너무 낡아

야외법회에서는 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이 경우 모사는 단순히 ‘베낀다’는 차원이 아니라

“불화 보존 차원과 기법의 전승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서울대 회화과 미술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한 박 교수는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 교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회화와 서적류 문화재 보존처리를 배웠고,

1994년부터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다.

보물 1286호인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고려불화 지장시왕도(보물 1048호),

죽림사 세존괘불탱(보물 1279호),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화엄사 5층 석탑 출토 다라니경(보물 133호), 경주 나원리석탑 내 금동사리함에서 출토된 종이류 유물 등

국보급 문화재들이 그의 손을 거쳐 원형을 되찾았다.

- 현대불교미디어센터 ⓒ2005

 

 

 

 

 

 

<탐라순력도> 보수 과정에서

임란 직후 제주 속오군 기록 첫 발견 

 

 

 

지금의 향토예비군 편제와 비슷한 제주지역 속오군의 임진왜란 직후 군적부가 처음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제주시는 10일 화첩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를 보수하기 위해

서울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에 의뢰, 그림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배접용 속지로 사용된 군적 기록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26쪽으로 이뤄진 화첩(표지 포함)의 절반 가량을 해체한 결과

각 장마다 5-6쪽꼴로 군인의 이름, 나이, 부친 이름, 출신지, 수염, 흉터, 사마귀, 주특기 등이 기록된

군적기록이 나와 전체 분량은 1백60여 쪽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탐라순력도>가 이형상이 목사로 있던 1702년부터 1703년까지 그려졌다는 점으로 미뤄

이 군적 기록은 임진왜란(1592-1598년) 직후인 1600년대 속오군의 군적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이 '탐라지'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19세기 당시 제주 지방의 속오군은 15세 이상 양반과 상민 남자 3천930명으로 조직돼

평시에는 군포를 납부하고 훈련 기간과 유사시에만 군역에 종사했다.  

제주시 관계자는 "새로 발견된 속오군 군적부를 <탐라순력도>와 별책으로 엮은 뒤

학술적 가치를 면밀히 분석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2000.07.10

 

 

 

 

 


 

1868년 신정왕후 회갑기념 병풍 ‘무진진찬도병’ 실물 발견

 

화려한 궁중공연 장면 생생히 묘사

 

 

고종을 임금 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힘을 보탰던

‘막후 실력자’ 신정왕후 익종비 조씨(1808 ~1890)의 회갑 잔치 장면이 처음 확인됐다

대원군이 이끈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 고종은 1868년(무진년) 12월,

자신의 정치적 대모인 양모(養母) 조 대비의 회갑과 혼인 5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궁중 잔치(진찬 · 進饌)를 벌였다.

이를 8폭 병풍에 그림으로 담은 것이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이다.

 

이 잔치 과정을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 · 서울대 규장각 소장)는 당시 잔치 풍경을

병풍 7점으로 제작해 고종과 흥선대원군 등에게 바쳤다고 기록했으나,

정작 병풍의 실물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소장은 “미국 LA카운티박물관에서 ‘무진진찬도병’의 보존처리를 의뢰해 와 최근 처리를 마쳤다”며 그림을 공개했다.

병풍은 모두 여덟 폭(한 폭 가로 46.7㎝, 세로 136.3㎝)으로,

유숙 이한철 등 당대의 쟁쟁한 궁중 화원 10명이 비단에 채색으로 그렸다.

그림은 몇가지 의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세를 과시하는 경복궁 중건을 마친 직후의 화려하고 당당한 왕실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근정전, 근정문 등 건물 이름이 또렷하게 표시돼있고,

22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대형 춤 ‘선유락’(船遊樂),

모란꽃가지를 꺾어들고 춤추는 ‘가인전목단’ 등 화려한 궁중 공연(정재 · 呈才) 장면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근정전의 기와나 계단, 지붕 장식인 잡상(雜像)까지 정확하게 나타내

마치 사진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회갑 축하를 받는 신정왕후나 고종, 대원군의 자리는 빈 의자로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다.

왕실을 소재로 한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왕권의 존엄함 때문에

임금과 직계친족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병풍 마지막 장면으로 12월 11일.

고종은 왕실 종친과 진찬에 수고한 이들을 경복궁 강녕전에 불러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다.

차일 아래 유리등(네모)과 양각등(월)이 불을 밝히고 있다.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는 잔치 준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적었다.
예를 들어 선유락(사진 가운데 큰 원을 그리며 공연하는 모습)에서
노잡이 역을 국희와 옥엽이 했다고 기록하였다.

 

 

▲ 12월 6일 오후 임금 침소인 강녕전에서 신정왕후와 왕실 친척들만 참여한 '내진찬' .

신정왕후가 주인공이므로, 사진 가장 위쪽 붉은 천을 두른 공간은 여성만 출입 가능했다.

고종은 그 아래 푸른 막을 친 곳에 자리했다.

건고와 삭고 등 전통 악기도 손에 잡힐 듯 그렸다.

 

▲ 1868년 12월 6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신하들이 참여해 열린 '진하례' 
세 장면으로 나누어 8폭 병풍에 담게했는데 그중 첫번째 장면이다.
고종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신정왕후 조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을 마련하였다.

 

 

 

이번에 병풍 그림을 조사한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미술사)는

“배채법(背彩法 · 은은한 색조 효과 등을 위해 그림 뒷면에서 칠하는 것) 등을 이용해 그린

조선 말기의 수작”이라며

경복궁 중건에 맞춰 진찬을 치른 점 등 왕권과 왕실 권위를 높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평했다.

박 교수와 이태진 서울대 교수(근대사) 등은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조의 며느리로

당시 궁궐의 실력자였던 신정왕후는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는데,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의 밀착된 관계 등이 성대한 진찬의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2005-03-14

 

 

 

 

 

 

조선 태조 어진, 8년만에 보수 마무리

  

 

지난 2000년 3월 경기전에서 전주이씨 종친들의 분향례를 올리던 과정에서 한 종친의 실수로 훼손된

보물 제931호 조선 태조 어진이 8년 만에 보수작업을 마치고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전주시에 따르면 지난 28일 서울시 상도동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태조 어진 관련 자문회의에서  

보수가 잘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진의 보수는 용인대 산학협력단이 지난 2006년 11월부터 시작해 최근 완료했다.  

문화재청은 광복 60주년 기념 서울 국립 고궁박물관 전시를 위해 어진을 2005년 8월 서울로 가져간 후  

'태조 어진의 전주 보관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되돌려 주지 않고 서울서 보수를 해왔다. 

- 2008-05-30

 

 

 

 

 

 

 

 

 

용인대박물관 개교 50주년 "복제와 모사"展

   

1.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보물 제 1286 호)

-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는 35점이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2점 외 

 처음 공개되는 14세기 고려시대 불화이다.

-  크기 : 표장전체 - 세로 198.3cm 가로 68.85cm (그림 - 세로 100.3cm 가로 52.45cm)
-

 서화유물 보존처리분야의 박지선교수(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소장)가

수월관음도를 보존처리하였으며, 수월관음도의 수리전의 상태와 복원수리과정,

수리후의 상태를 비교전시하여 문화재 보존처리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표장 전체 사진(수리전)

  수리후 족자 전체 사진

 

 

 

  X-ray 사진

  적외선 사진

  보건 후 상태

 

 

 

  보채 전 상태

  보채 중

  보채 후

 

이번 전시회는 (용인대박물관 개교 50주년 '복제와 모사'展 / 2003년 6월)

수월관음도, 감로탱화 등 보물 2점을 포함한 총 14점의 원 유물이 전시된다.

특히 전시유물 가운데 14세기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보물 제1286호, 세로 100.3cm, 가로 42.45cm)는

서화유물 보존처리분야의 박지선 교수(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소장)가

보존 처리하였으며, 수월관음도의 수리전의 상태와 복원수리과정, 수리후의 상태가 비교 전시되어

문화재 보존처리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2.  감로탱화(甘露幀畵 보물 제 1239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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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탱화는 불교의 우주관을 三界로 집약해 놓은 上 · 中 · 下 삼단의 공간성을 확보하면서,

前世 · 現世 · 來世 라는 三世의 시간이동을 수직적인 상승구조를 한 화폭 속에 담아 놓은

도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생들의 영혼이 정화되어 극락으로 인도되게 하는 과정이

그려진 조선시대 대표적인 불화이다.

-  제작 시기 : 1681년, 작품 하단에 발원자와 제작연대를 기록한 명문이 남아 있다.
-  크 기 : 세로 220cm 가로 197.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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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佛畵 화가로 활동하는 이태승교수(용인대 회화학과, 간송미술관 연구원)가

감로탱화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모사하는 현상모사를 시도하여,

모사과정과 원 유물과 모사 유물을 비교 전시한다.

 

이승태 교수가 감로탱화를 모사하는 모습


감로탱화(1681년)를 놓고 색표를 만드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