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新 1000원권과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진위 논란

Gijuzzang Dream 2009. 2. 11. 10:41

 

 

 

 


새 1000원권 퇴계 이황이 두번 등장하는 이유는?

 

 <새천원권도안>

새 1000원권의 뒷면 소재가 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중앙의 두 채 건물은 도산서원으로 확장되기 전 초기의 도산서당.

내년부터 유통되는 새 1000원권의 등장 인물은 기존과 변함없이 퇴계 이황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공개한 도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퇴계와 관련한 몇 가지 변화가 발견된다.

우선, 퇴계를 상징하는 시설이 도산서원에서 성균관 명륜당으로 변경됐다.

퇴계가 은퇴 후 ‘사립학교 이사장’으로 나라에 기여한 것보다

‘국립대학 총장(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했던 점이 중시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뒷면에까지 퇴계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뒷면 문양의 소재가 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가운데 서당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사람 또한 퇴계 이황이다.

 

도산서당 부분을 자세히 살펴 보면 책을 보는 퇴계 이황의 모습이 보인다.

 

한은 관계자는 “여태껏 동일 인물이 화폐 앞 뒷면에 동시 등장한 사례는 없다”고 밝히고 있어 상당히 파격적인 ‘예우’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퇴계가 이렇게 수백년 후 시장경제 국가 중앙은행의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된 실제 원인은 ‘파격적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한국은행 담당자의 ‘까다로운 입맛’ 때문이었다.

 

한은이 모든 화폐의 도안을 변경하되 등장 인물은 바꾸지 않기로 결정을 하자, 담당부서인 발권국의 김두경 국장은 1000원권에 대한 고민을 안게 됐다. 앞면의 퇴계와 관련된 문양이 뒷면을 장식해야 되는데 기존 1000원권의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에 확장된 모습이기 때문에 그다지 당사자와 관련성이 높지 않다고 김 국장은 판단했다.

 

특히 학문적 업적 외에는 유형의 유물을 남긴 게 별로 없어 달리 대안을 찾기도 어려웠다.

이런 저런 고심을 하던 김 국장은 2004년 마침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현장까지 찾아가게 됐다.

서원 뿐만 아니라 일대의 자연 경관도 둘러보고 온 그는 인터넷에서 퇴계 관련 자료를 뒤졌다.

 

이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얼마 전 도산서원 주위와 너무나 흡사하게 현장을 묘사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였다.

이 그림에는 도산서원으로 확장되기 전 도산서당의 모습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겸재가 비록 퇴계와 생존연대는 달랐지만

흠모하는 마음으로 퇴계의 독서하는 모습까지 그림에 담았다.

 

인터뷰를 가진 김두경 국장은 ‘계상정거도’ 그림 하나에 대해서만도 세세한 설명을 쏟아냈다.

새 1000원권 무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두경 한국은행 발권국장.
“이번에 도안을 바꾸는 화폐의 부분부분마다 얘깃거리는 책으로

넘쳐날 만큼 쌓여 있습니다”고 그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했다.

하지만 김 국장이 힘 주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데 있다는 눈치를 그는 끝내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는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002년 부임한 이후 화폐 액면단위 변경에 관련해 특명을 받고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연구 작업을 진행해 놓은 상태다.

 

한은과 재정경제부가 ‘더 이상 국민경제에 혼란을 주지 말자’는 취지로 언급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에 김 국장으로서는 ‘화폐 인물과 그림’에 대한 얘기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김두경 국장은 “정부가 추진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한은으로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며

“하지만 현재 화폐 체계로는 1만원권이 22억장이나 유통이 되는데서 오는 불편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은 고액권 발행과 화폐 단위 변경 문제를 통합해서 검토해 왔다.

현재로선 수년동안 진척해 왔던 검토작업이 말 그대로 ‘검토’사항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도 크다.

당초 이 문제를 제기했던 박승 총재의 임기가 오는 3월 만료되기 때문이다.

화폐액면 단위 변경은 자칫하면 60년대 군사정권의 ‘화폐 개혁’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고액권 발행은 ‘물가 불안’과 불법 정치자금의 확산을 촉진한다는 이유에서

비판 여론에 부딪혀 있는 상태다.

- 2006년 1월 18일 장경순 기자 kschang@akn.co.kr(c)아시아경제(www.akn.co.kr).

 

 


파란색상에 크기도 줄인 새 1000원권

 

… 퇴계 빼고 다 바꿨다


한국은행이 지난 2일 새 5000권을 유통시킨 데 이어 내년 상반기에 유통될 새 1000원권 도안을 17일 공개했다.

한은 김두경 발권국장은 “새 1000원권 시제품이 완성돼
한국조폐공사에서 지난 14일 인쇄에 들어갔다”며 “새 지폐는 충분한 재고물량을 확보한 뒤 내년 상반기 중 적절한 시점에 시중에 유통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1000원권 지폐는 1975년 8월14일 첫 선을 보인 뒤 1983년 6월11일 시각장애인용 점자 추가 등 일부 보완해 지금까지 23년째 사용되고 있다.

◇도안 및 소재

= 앞면 인물초상은 현 1000원권에 쓰이는 퇴계 이 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앞면 보조 소재로는 이 황이 여러 차례 대사성을 역임한 성균관 내 명륜당과 이 황이 평소 아끼던 매화를 사용했다.

바탕 그림으로는 창문이나 방문 등에 사용된 전통무늬인 창호무늬가 채택됐다.

뒷면은 이 황이 손수 지은 도산서당에서 저술하고 있는 모습을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보물 585호)를 사용했고, 바탕 그림으로는 그의 철학이 집약된 천명신도를 도안화해 사용했다.

 

◇크기 및 색상

= 크기는 가로 136㎜,세로 68㎜로 현재의 1000원권보다 가로는 15㎜,세로는 8㎜ 줄었다.

새 5000원권에 비해서는 가로가 6㎜ 짧고 세로는 같다.

미국의 1달러나 일본의 1000엔보다는 약간 작고,

유럽 공통화폐인 5유로 지폐보다는 약간 큰 정도다.

주된 색상은 현 1000원권이 보라색 계열이라

어두운 곳에서는 5000원권과 잘 구분되지 않는 점을 고려해 파란색 계열로 바꿨다.

◇위조방지장치

= 위조방지 장치는 새 5000원권과 거의 비슷하다.

뒷면 오른쪽 밑에 있는 액면숫자(1000)에 색변환 잉크를 써 보는 각도에 따라

색상이 녹색에서 청색으로 연속적으로 바뀐다. 컬러복사하면 광택이 없는 단색으로 나타난다.

앞면 하단의 전통무늬는 볼록 인쇄기법을 활용해 눈 위치에서 비스듬히 보면

감춰진 문자 ‘WON’이 나타난다.

컬러복사할 경우 이 문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육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미세 문자를 지폐 앞뒷면 곳곳에 배치했고,

현 1만원권처럼 앞면 중앙에 홀로그램 처리된 필름 띠를 부분 노출 형태로 삽입했다.

또 빛에 비출 경우 인물초상과 액면숫자 등 숨은 그림이 드러나도록 하는 기능도

추가하거나 보완했다.

 

한은 홈페이지(www.bok.or.kr)에는 “다른 나라 돈은 세련되고 쓰기도 아까울 정도로 멋있다”며

“우리나라 돈의 디자인은

보드게임에 나오는 가상 돈이나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가짜 화폐 같다”고 비난했다.
- 2006년 1월 17일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 ⓒ 국민일보. 

 

 

 

 

 

추사정혼 표지_2.jpg

◇ <추사정혼(秋史精魂)> 이영재 · 이용수 지음/ 선 펴냄/ 2008

 

한국 미술학계에서 고미술 작품의 진위(眞僞) 논쟁이 식을 줄 모른다.

그 중심에 추사 김정희 작품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서화작품의 진위 여부를 가려낸 감평서인

<추사정혼(秋史精魂)>을 이용재, 이용수 씨가 출간했다.

이 작품의 소유자가 이영재씨다.

추사 김정희 연구가이며 개인 컬렉션인 ‘모암문고’를 소장하고 있는 이영재(77)씨는

이 작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이영재씨는 지난 1960년대 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체에 매료돼 약 40여 년간 연구해왔다.

그는 지난 2005년 ‘추사진묵’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학계에 파문을 던졌다.

당시 추사 김정희의 작품 가운데 위작이 상당히 많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의 힘으로 움직이는 고미술계에서 위작문제가 언젠가는 불거질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진행상황을 지켜보면서 소송도 제기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성리학으로서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했던 성리학의 거봉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묵적 「회암서절요 서」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 중 한분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두 번에 걸친 친필 발문,

그리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성 겸재의 네 폭 산수화,

역시 조선시대 시성 중 한 분인 겸재의 지기 사천 이병연의 제시 등이 담겨져 있는

『퇴우이선생진적첩』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서이다.

흠잡을 곳이 보이지 않는 학술논문서로서의 이론적 체계와 정교하고 세심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논증,

그 학문적 깊이 등을 보면 30대 중반이라는 저자의 나이가 놀라울 따름이다.

저자의 필력 또한 뛰어나서 이 책이 논문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논문서를 읽으며 이러한 벅찬 감동과 여러 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 경험은 흔치않다.

얼마 전 이 귀중한 우리의 정신적 문화유산을 흠잡은 어떠한 논거와 예술에 관한 기본을 갖추지 못한

한 작자의 저서 『진상-이동천저 동아일보사 』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와부뇌명’, ‘일광견폐형백견폐성’ 두 고사 성어와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작자의 저서를 ‘광견폐서’라 칭한 저자의 가볍지 않은 재치가 돋보인다.”

(도서출판 선 대표 김윤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정종섭) 

지금까지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담겨있는 작품들에 관한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이 진적첩에 담겨있는 작품들에 관한 부분적인 연구들만이 이루어졌을 뿐

첩 전체의 내용과 내력(來歷), 그리고 이 진적첩의 가치 등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학문적 성취를 이룬 저자가 그 철학과 이론을 바탕으로

진적첩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하나하나 꼼꼼히 비평 · 검토하고

진적첩 자체의 연구에 그 중심을 두며 설명을 전개한다.

 

진적첩의 구성과 첩에 담긴 모든 발문들의 내용과 내력을 살펴

이 첩의 연원(淵源)과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역사를 밝히고,

첩에 담긴 퇴계의 친필수고본(親筆手稿本)인「회암서절요 서(晦庵書節要 序)」의 전반적인 내용확인을

통하여 퇴계 사상의 단면을 알아보고,

또한 이 첩에 담긴 겸재의 네 폭 산수화와 발문, 사천 이병연의 제시를 살펴,

각각의 작품에 담겨있는 의미와 퇴계의 수고원고와

겸재의 산수 그리고 겸재의 산수와 여러 발문들과의 관계를 밝히며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증명하여 나간다.

국내 미술학계에서 발표되는 전시나 출간 도서의 상당수가 위작을 무분별하게 포함하고

제2, 제3의 엉터리 비평을 쏟아내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처럼 고질적인 병폐를 앓고 있는 이유는

감식안이 부족한 학자와 자본논리에 얽매인 소장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추사정혼> 부록에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1000원권에 실린 정선의 ‘계상정거도’ 진위논란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

 

퇴우이선생진적_2.jpg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계상정거도’의 근거가 된 도산서원 일대의 실경.

빨간선 안이 서취병. 오른쪽 파란선 안이 도산(연합뉴스)

 

 

 이동천 박사의 위작논란에 휩싸인 보물 585호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쪽 빨간 선 안은 서취병, 우측 파란선 안은 도산, 아래 노란선 안은 천연대,

낙관 옆 왼쪽 표구부분에까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연합뉴스)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계상정거도'의 필획은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강약, 고저, 완급이 느슨하고 약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연결성도 서툴렀다.

무의미한 필획인 패필(敗筆) 또한 곳곳에서 지적됐다.

그리고 겸재 특유의 '삐침'이 별로 눈에 띄지 않은 가운데 농담의 조절과 두께의 일관성,

앞뒤 논리의 일관성이 결여된 듯했다. 특히 표구 부분까지 어색하게 그려나간 건 이해하기 힘들다.

천하의 겸재가 저렇게 허술했을까 싶어서다.

 

천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보물 제585호)가 가짜라고 저서를 통해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던 서화감정 전문학자 이동천 박사가 이 작품이 명백한 위작이라며 거듭 역설했다.
이 박사는 5일 오후 서울대 멀티미디어동에서 열린 '1천원권 뒷면의 정선 그림- 계상정거도 왜 가짜인가'

주제의 공개 강연회에서 '계상정거도'가 위작임을 구체적 증거 제시와 함께 또다시 주장했다.

이 박사는 강연회 개최 배경에 대해 "단순히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뚜렷한 근거도 없이 나의 주장을 폄훼함은 물론 현실을 조작한 엉뚱한 사진을 갖다 붙여

마치 작품이 진작인 양 호도하는 미술사가마저 있어 공개 강연회를 통해 검증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위작을 제작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위작을 진작으로 둔갑시키려는 행위 또한

예술혼을 더럽히는 죄악"이라고 규정한 뒤

"터무니없는 위작이 진작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재 정선이 안다면 통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이날 강연회에서 '계상정거도'가 위작임을 필획, 묘사, 표구 분야로 나눠

하나하나 적시하는 한편, 작품과 실경의 차이 등을 비교해 설명했다.

다음은 강연회 내용 요약 -.

◆ "가짜 '계상정거도'는 필획이 느리고 무기력하다"

= 작가의 붓놀림은 한 시기의 작품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노년의 완숙한 경지에서 그렇다.

가짜 '계상정거도'는 겸재가 71세 때에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70세 전후의 겸재 작품과 비교하면 가짜 '계상정거도'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겸재가 67세 때 그린 '우화등선' '웅연계람'과

72세 때 그린 '불정대' '총석정' '문암' '삼부연' '화적연' '만폭동'을 비교 작품으로 해보자.

이 시기에 겸재의 붓놀림은 매우 굳세고 빨랐다.

필획을 아래로 긋든, 옆으로 긋든, 그 길이가 짧든 길든

필선의 삐침과 필선 간의 연결이 굳세고 빠르게 표출됐다.

그가 붓글씨를 쓰듯이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다.

가짜 '계상정거도'는 '천연대' 부분에서 보듯이 묘사가 느리고 무기력하고 난잡하다.

위조자가 필획을 흉내내는 데 급급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는 듯하다.

나무줄기 묘사에 쓰인 필묵도 담묵으로 그린 위에 다시 농묵으로 그리거나 대충 그려

그 졸렬함과 조작함이 금방 표시난다. 진작의 경우는 먹의 농담을 정교하게 조절했다.

특히 농묵으로 한 번에 자신있고 분명하게 묘사했다.

기와지붕 묘사를 봐도 그렇다. 겸재는 '총석정' '해산정' '장안사' 등에서처럼 굳센 필력을 이용해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기와집을 그렸다.

반면, 가짜는 겸재의 특징과 필획의 두께마저 조절하지 못한 채 겉모습 흉내에 급급했다.

물결 묘사를 비교해보자.

진작 '화적연' '삼부연' '만폭동' 등은 물결이 중봉으로 거침없이 경쾌하게 이어져 그려진 데 반해,

가짜는 물결이 측봉으로 느리고 끊어지게 그렸다.

 

'계상정거도' 의 물결이 가로획의 흐릿한 모양으로 묘사돼 있다.

 

겸재 정선의 진작‘삼부연’ (왼쪽)과 ‘화적연’ (오른쪽)의 물결 묘사가

강한 필획의 원형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전체적으로 봐서, 겸재가 아주 적절하게 농묵과 담묵을 구사한 데 비해

위조자는 농묵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 "사물 묘사가 어설프고 유기적이지 못하다"

= 겸재 작품의 붓놀림은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유기적이다.

그래서 사물 묘사가 작품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고 있다.

'우화등선' '웅연계람'의 경우 강바람의 방향을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두툼하고 힘 있는 소나무 잎을 독특하게 유기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가짜 '계상정거도'의 나뭇가지에서는 작가가 뭘 의도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필획의 두께마저 균일하게 조절하지 못한 채 엉성하게 묘사됐고, 소나무의 잎 또한 얇고 가볍게 그려졌다.
물가의 묘사에서도 겸재는 강한 필획의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표현했으나

가짜 '계상정거도'는 얇고 가벼운 필치로 흉내냈고, 패필(敗筆) 또한 많다.

요컨대, 가짜 '계상정거도'는 수준 낮은 위조자가 겸재의 창작 의도와 화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원작을 옆에 놓고 베끼는 데 급급한 임본 위작이다.

터무니없는 위작이 진작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재 정선이 안다면 통탄할 것이다.

◆ "장표 부분까지 그림을 그린 건 위조자 수준이 얼마나 졸렬한지 보여준다"

= 가짜 '계상정거도'는 장표(표구) 부분까지도 그림이 그려졌다.

화가가 화폭 밖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식에 위배된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위조자가 원작을 보면서 베끼는 과정에서

먼저 그린 부분들이 원작보다 크게 묘사되면서

나중에 그린 부분들을 제대로 원작의 위치나 크기에 맞게 그리지 못해서다.
위조자가 자신이 잘못 그린 부분들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장표 부분까지 그린 것은
명백한 사족이며

위조자가 위조자로서의 전문성조차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임을 단번에 확인시켜준다.

수준이 그만큼 졸렬한 것이다.

그림 속의 도산과 서취병은 가까운 산이기에 전통화법으로 그린다면,

먼저 산의 능선과 봉우리의 윤곽을 그린 뒤에 산의 질감을 필선 등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가짜 '계상정거도'는 원작의 우측과 하단 부분부터 베끼기 시작해

좌측을 그린 다음 상단 부분을 가장 늦게 그렸다.
위조 과정에서 예상보다 사물들이 커져 화폭 윗부분에 산을 그릴 만한 공간이 나오자 않자

위조자는 당황한 나머지 담묵을 사용해 장표 부분에 서취병 산봉우리와 능선을 그려넣은 것이다.

◆ "실경 서취병과 그림 속 서취병의 형태가 다르다"

=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주변의 유적지를 보면

가짜 '계상정거도'와 다른 풍경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실경의 서취병과 가짜 '계상정거도'의 서취병, 지폐 그림의 '서취병'의 형태가 모두 다른 것이다.

언뜻 보기에 실경에서 도산과 그 옆 서취병 부분의 산 높이가 비슷해

가짜 '계상정거도'가 맞게 그려진 것 같지만

서취병에서 우뚝우뚝 솟은 부분과 그 옆 낮은 서취병 부분을 비교하면

가짜 '계상정거도'의 도산 옆 서취병 부분이 낮게 그려졌다.

미숙한 위조자가 임의 방식으로 위조하면서 미처 비슷하게 그려넣지 못한 것이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5월 26일 MBC TV의 '화제집중'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산 옆 서취병이 실경에 의해 그려졌다는 걸 증명하면서

실제 도산 옆 우뚝우뚝 높이 솟은 서취병 부분이 아닌 도산서원 대각선 맞은 편,

그리고 실제 서남쪽에 위치한 낮은 서취병 끝부분의 실경을 '도산 옆 서취병'이라고 슬쩍 갖다 붙였는데,

이는 교묘하고 터무니없는 조작이다.

가짜 '계상정거도'에 그려진 서취병 부분과 실제 서취병 부분이 달라서

그림 속의 서취병 부분과 비슷한 낮은 서취병 끝자락 부분을

도산 옆에 높이 솟은 서취병 부분으로 둔갑시켜 속이려든 것이다.

미술사가가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진실을 감추는 데 앞장선 듯해 한심하다.

이 박사는 강연 후 원작 검증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개인 소장품인 '계상정거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돼 있는 걸로 안다.

국가 문화재인 만큼 의혹이 제기된 이 작품을 일반에 공개하고 진위 재검증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은행 등 유관기관이

진위 논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한 뒤

"진작이면 왜 진작인지를 설득력있는 근거로 밝혀야 하며

내 주장이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반박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위대한 화가였던 겸재가 위작 때문에 예술성이 폄하돼서는 안된다"면서

"미술품 감정은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호하는 데 있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위작 제작은 물론 두둔 또는 은폐도 예술혼을 더럽히는 죄악"이라고 전제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거나 '연구중'이라며 진실 규명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 예술발전에 도움이 안된다"며

작품성과 사실관계에 입각한 토론을 다시한번 촉구했다.

- 연합뉴스, 2008.07.06 임형두 편집위원  ido@yna.co.kr

 


 

 

 "계상정거도는 위작… 공개감정을"


이동천박사, 필획 · 묘사 · 표구 등 논거 들며 거듭 주장

 

서화감정학자 이동천(43) 박사가 1,000원권 화폐 뒷면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ㆍ보물 제585호)는 위작이라고 거듭 주장하며

유관기관의 공개감정을 촉구했다.

 

이 박사는 5일 오후 서울대 멀티미디어동에서 열린

‘1,000원권 뒷면의 정선 그림-계상정거도 왜 가짜인가’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회에서

‘계상정거도’가 위작인 이유를 필획, 묘사, 표구 분야로 나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강연회는 이 박사의 위작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 없다’고 논평한 고미술계에

공개적 작품 검증을 촉구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박사는 일단 ‘계상정거도’의 필획에 주목했다.

작가의 붓놀림은 한 시기의 작품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데,

겸재가 67세 때 그린 ‘우화등선’ ‘웅연계람’과

72세 때 그린 ‘불정대’ ‘총석정’ ‘문암’ ‘삼부연’ ‘화적연’ ‘만폭동’ 등이

매우 굳세고 빠른 붓놀림을 보이는 것과 달리,

71세에 그린 ‘계상정거도’는 붓놀림이 느리고 무기력하고 난잡하다는 것.

나무줄기의 묘사에 쓰인 필묵도 진작(眞作)은 먹의 농담을 정교하게 조절,

농묵으로 한번에 자신 있고 분명하게 묘사했으나,

‘계상정거도’는 담묵으로 그린 위에 다시 농묵으로 그려 졸렬함과 조작함이 금방 표시난다고 설명했다.

 

물결 묘사도 진작 ‘화적연’ ‘삼부연’ ‘만폭동’ 등이 중봉으로 거침없이 경쾌하게 이어져 그려진 데 반해,

 ‘계상정거도’는 측봉으로 느리고 끊어지게 그렸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겸재가 아주 적절하게 농묵과 담묵을 구사한 데 비해

위조자는 농묵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상정거도’의 사물묘사에 관해서는 어설프고 유기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우화등선’ ‘웅연계람’은 강바람의 방향을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힘 있는 소나무 잎을 독특하게 유기적으로 표현했으나,

‘계상정거도’의 나뭇가지는 필획의 두께가 균일하게 조절되지 못한 채 엉성하게 묘사됐고,

소나무의 잎 또한 얇고 가볍게 그려졌다는 것.

 

물가의 묘사에서도 겸재는 강한 필획으로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으나

‘계상정거도’는 얇고 가벼운 필치로 흉내낸 데다 패필(敗筆) 또한 많다고 설명했다.

 

특히 위조자의 낮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표장(표구) 부분.

‘계상정거도’는 화폭 바깥 부분인 장표 부분까지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위조자가 원작을 베끼는 과정에서 먼저 그린 부분들을 원작보다 크게 묘사해 공간이 부족,

나중에 그린 부분들을 장표 부분에까지 그렸다는 해석이다.

이 박사는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은행 등 유관기관이

진위 논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며 “진작이면 왜 진작인지를 설득력 있는 근거로 밝히고,

내 주장이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반박해달라”고 요구했다.

- 2008/07/07 박선영기자 ⓒ 인터넷한국일보

 

 

 


 

<진상(眞相)> … 겸재-단원-추사 작품 어떻게 진위 판별했나

 

◇ 眞相(진상)/ 이동천 지음/ 544쪽 · 동아일보사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고서화 감정법을 소개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의 작품 상당수가 위작이라는 주장을 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보물 527호 '단원 풍속화첩' 스물다섯 작품 가운데

'서당' '춤추는 아이' 등 여섯 작품만 진본이고 '기와 이기'  '우물가'  '편자 박기'  '장터길'  '주막' 등

나머지는 위작"이라며 "화첩의 필치가 달라 두 명 이상의 위조자가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실려 있기도 한 "보물 585호 겸재의 '계상정거도'도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겸재의 진본인 '신묘년풍악도첩' '금강전도' 등과 비교해 볼 때

겸재의 예술 세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보물 547호 추사의 칠언시 '시골집 벽에 쓰다', 
신사임당의 '초충도8곡병' 등도 위작이라고 했다.

 

서화감정 전문가인 이동천 박사는 19일 펴낸 <진상-미술품 진위감정의 비밀>(동아일보사)에서

지난 3년 동안 서화 540여 점을 감정해 찾아낸 위작 실태와 근거를 공개했다.

그는 위작으로 꼽은 <계상정거도>(개인 소장)에 대해

“겸재의 그림은 나무나 바위의 획을 내려 그을 경우 탄력적으로 붓을 운용해

아랫부분에서 삐쳐 올라가는 게 두드러진다”며

“겸재가 1746년에 그렸다는 <계상정거도>는 그의 다른 진짜 작품과 달리 그러한 특징이 없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또 교과서에 나오는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보물 527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모두 25점 중 6점을 뺀 19점이 위작이며,

김홍도의 <단원절세보첩>(보물 782호 · 리움 소장) 역시 가짜라고 주장했다.

단원은 대상을 묘사할 때 붓을 빠르게 운용하면서

먹의 농담과 비백(飛白, 끝이 잘게 갈라지는 나는 듯한 붓질)이 뚜렷한데,

위작들은 모양을 베끼기에 급급해 그런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아울러 추사 김정희의 칠언시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547호 · 김정희 종가 소장)와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547-2호 · 제주도 소장),

정선의 <금강내산>(고려대박물관 소장)과 <만폭동>(서울대박물관 소장) 등도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가운데 제호 역시 안평대군의 글씨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중국의 대표적 서화 감정가였던 양런카이 전 랴오닝성 박물관장의 제자로,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전 교수의 주장에 대해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분위기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계상정거도>는 수많은 고증을 거쳐 보물로 인정된 것인 만큼

위작이라는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단원풍속화첩>을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실 관계자는 “가짜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안휘준 문화재청장은 “<몽유도원도>의 그림 제목은 안평대군의 글씨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단원풍속화첩>의 상당수가 단원풍의 모작이라는 얘기는

고미술계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며 “위작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저자는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중국 랴오닝(遼寧)성박물관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서울대 동양화과 박사과정에서 작품감정론을 강의하고 있다.

- 동아일보 | 2008.05.24

 

 

 

 

 

 

“고미술계에 엉터리 감정인 판친다”

이동천 교수 첫 저서 <진상> 통해 “국내 만연한 위작 실태와 낙후된 감정수준” 고발

 

 

 

이동천교수는 “2007년 발행된 한국은행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실린 겸재 정선의 1746년작 ‘계상정거도’는 진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한권의 책이 한국 고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800장의 희귀도판이 수록된 <진상(眞相)>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진상>은 ‘사물의 참된 모습’이라는 뜻.

책 분량만 해도 무려 541쪽에 달한다.

 

‘미술품 진위감정의 비밀’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그동안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비기(秘技)로 알려졌던 ‘고미술 감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감정전문서다.

 

우리나라 고미술 시장은 깊고도 넓다.

반만년 역사에 걸맞게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단원 김홍도, 흥선대원군 같은 불세출의 예술혼들을 탄생시킨 미술의 나라였다.

어디 그뿐인가?

급속한 경제성장과 재벌가문들의 수집욕에 발맞춰 연간 수천억원대의 미술품이 거래될 뿐 아니라, 매주 공영방송에서는 ‘진품 명품’이라는 미명 아래 수십억원짜리 진품감정서가 전 국민에게 공개되는 나라다.

 

“1000원 지폐 속 ‘계상정거도’ 등 보물급 작품도 위작 수두룩”

 

그런데 끊임없이 진품이 탄생하는 세태를 한 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작품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판가름 나는 것일까?

작가는 이미 사라진 뒤고 이를 모방한 위작들이 끊임없이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상황. 그런데 만일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시킨다면,

아니 고의가 아니라 부족한 식견으로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어떨까?

 

30년 넘게 한학과 고미술 감정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이동천(44) 교수는

바로 이 ‘진상’이라는 첫 저작을 통해 대중에게

“진본이라 알려진 모든 작품을 의심하라”며 충격적인 위작 실태를 공개했다.

그는 지난 3년간 540여 점의 국내 대표작을 감정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인들의 대표작 상당수(약 200점)가 ‘위작’ 또는

그에 상응하는 가짜라고 했다.

나아가 우리 미술계의 고질적 병폐인 ‘기록 없는 다수결 투표에 의한 감정’ 현실까지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미술품 위작을 폭로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품 전문가 양성을 위한 ‘감정학습서’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책의 중심 내용은 ‘위조된 작품’을 감식하는 방법론이다.

몇몇 전문가가 “이 책을 위조전문가가 보면 큰일”이라고 할 정도로

진품과 모조품의 차이를 치밀하게 분석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저작이 한국 고미술계의 나태함과

이른바 전문가로 불리는 몇몇 허명(虛名)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인사동 학고재 패밀리로 알려진 유홍준(명지대 교수) 전 문화재청장과

이태호(명지대 박물관장) 교수가 대표적인 타깃이다.

이들이 지난 십수 년간 국내 최고의 고미술 전문가로 군림하며

각종 저서와 전시회를 통해 여러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시킨 장본인들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진상>이란 책이 시중에 깔리기도 전에 이 책을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대한민국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인쇄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작론’이다.

71세의 겸재가 퇴계의 계상서원을 보고 그렸다는 이 작품은 그동안 전문가들에게서

“노년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붓질이 힘차고 거침없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미 1971년 문화재청으로 진품 판정을 받았고,

문화재청은 이 작품이 삽입된 화첩 ‘퇴우이선생진적’을 보물 제585호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를 임본위작(臨本僞作 · 원본을 보면서 베낀 작품)이라고

단호하게 평가했다.

“원숙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느린 붓놀림에 졸렬한 화풍과 어색한 구도까지,

계상정거도는 정선 화풍과 어떤 일치점도 없는 심각한 상태의 위작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존 전문가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출처의 정확성(정선의 아들 정만수의 기록)을 들어 진본임을 주장하는데,

특히 이태호 교수는 “진품을 보지도 않고 위작이라 주장하는 것은

감정의 기본이 돼 있지 않은 행태”라고 반박한다.

“실물을 보지 않고도 필선의 차이와 물감의 변한 정도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동천 교수와 기존 미술계의 논쟁은 앞으로도 치열하게 전개될 예정이다.

 

이동천 교수가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는

정선의 1746년작 ‘계상정거도’.

  

감정위원 전문성 떨어지고 과학적 근거도 부족

 

사진이나 영인본(影印本), 목판수인본(木版水印本) 등 정교한 복제본이

원작으로 오인되는 일은 미술품 유통시장에서 흔하다.

2007년 국내 모 경매에서 추정가 8000만~9000만원에 출품된

‘북산 김수철, 우봉 조희룡, 대산 강진의 ‘산수도’는 원작이 아니라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다.

2005년 추정가 3000만~4000만원에 출품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역시 마찬가지.

 

문제는 이 같은 초보적인 오류가 권위 있는 미술품 경매장에서까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는 점. 감정위원들의 전문성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다른 나라의 위작이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돌변(중위작)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2003년 미술품 경매에서 이상적의 ‘시고대련’이란 작품에는

어이없게도 청나라 강희 황제의 낙관이 찍혀 있었다.

그럼에도 감정인들과 경매 참가자들은 최초 낙찰가의 3.5배까지 뻥튀기시켰다.

 

이 교수의 책 <진상>에 따르면 더 큰 문제는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과 대학박물관 등에

소장된 위작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고미술 시장의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위조는

명성만큼이나 심각해 보인다.

예산의 김정희 종가에서 가지고 있는

‘김정희의 칠언시-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호)를 비롯해

제주특별자치도가 소장하고 있는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2호),

유홍준 전 청장이 제주시에 기증한 ‘김정희 편지 모음집’,  ‘시의정’,  ‘자화상’(선문대 박물관), ‘예서’(간송미술관) 등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

 

수준 이하의 작품을 칭송하는 고고미술학자들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인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고려대 박물관),

‘독서여가’(간송미술관), ‘설평기려’(간송미술관), ‘산수도’(서울대 박물관) 등도

가짜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풍속화의 최고 경지인 단원의 ‘단원풍속화첩’(보물 527호)도

전체 25점 중 6점을 뺀 19점이 위작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동천 교수가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한 신윤복의 ‘아기 업은 여인’

 

이동천 교수가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한 정선의 ‘금강내산’.

 

이동천교수가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한 김홍도 ‘주막’(단원풍속화첩) 

 

작품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은 감정의 절대 목표다.

문제는 그동안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위원들과 민간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익명 뒤에 숨어 인상비평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교수는 재료의 성질 분석을 통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료의 특징만으로도 위작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림에 하얀색 색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연분(鉛粉) 안료’를 보자.

조선시대 작품을 보면 19세기 중기까지는

주로 조개껍데기로 제작한 합분(蛤粉)을 백색 안료로 사용했고,

19세기 후기 장승업을 전후해서는 납 성분이 들어간 연분이 사용됐다.

이 납 성분은 시간이 지나면 짙은 갈색(반연현상)으로 변한다.

 

이 같은 현상을 통해 확인 가능한 대표적인 위작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는

김홍도의 ‘단원절세보첩’(보물 제782호)이다.

이 그림의 꽃과 새를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다.

결국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것.

이와 함께 김홍도의 ‘섭쉬쌍부도’, 김정희의 ‘팔곡병’,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병’ 중 ‘맨드라미와 쇠똥벌레’(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의 ‘설제화정’(雪霽和制 · 간송미술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랑이 무늬라 해서 ‘호피선지(虎皮宣紙)’로 알려진 종이를 통해

작품의 진위를 확인할 수도 있다.

호피선지는 국내에 그 연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교수는 “20세기 초 중국에서 수입됐으므로 1856년 사망한 김정희의 호피선지 서첩인 ‘연식첩(淵植帖)’은 위작”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동안 우리 문화재 감정이 비과학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이 교수는 여기서 유 전 청장이 그의 저서에서

‘완당의 종이 사랑’이라고 칭송한 부분을 거론한다.

“완당은 종이의 선택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썼다.

자신의 작품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이를 고르기도 했고 (…)

완당이 중국제 화전지를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그의 ‘연식첩’이라는 작품만 봐도

알 수 있다.”

유 전 청장의 말대로라면 김정희가 생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이를 사랑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그간 비전문가들이 고미술 감정을 해왔다는 비판이다.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국내 전문가들의 작품 감정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조자가 작품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이 위조하고,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되레 칭찬하는 감정전문가들의 사례를 접할 때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의 ‘묘길상’은

서화 창작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위조자가 당시 수요에 맞게 제작한 것이다.

작품에 작가 명관(名款)도 없고, 인장은 붓으로 무슨 글자인지 모르게 그려진 것.

그럼에도 국내 한 고고미술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린 듯한 불상의 선묘와 공양 드리는 두 선승 표현,

선묘를 쌓은 암준법과 특징적인 수묘법 등

역시 김홍도의 능숙한 수묵담채의 구사와 필치다.”

 

이 같은 방식으로 비전문가에 의한 진품 둔갑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져왔지만

아직도 우리 미술계는 선대가 진품으로 평가한 작품을 재평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엇보다 감정에 참여한 모든 전문위원들의 진위 판단에 대한 구체적 근거와

진위감정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것을 출판물로 공시해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

이를 공개하면, 언제든지 잘못한 곳을 찾아 올바르게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작 논쟁 제기한 이동천 교수는 누구?
중국 최고의 고미술 전문감정가 양런카이 선생에게서 사사한 숨은 고수


생전의 양런카이 선생(오른쪽)에게 사사(師事)중인 이동천 박사.

“지난 세월 마치 의용군처럼 공부하며 단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정진해왔다. 지금의 나를 변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됐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고미술 감정가’가 국내에 흔치 않은 이유는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동양의 고전에 정통해야 하고,

스스로 서화(書畵)는 물론 전각(篆刻)에도 능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작품을 다루는 일이어서 물감과 종이 재질의 화학적 특성은

물론 표구방법의 이론과 현장까지 장악해야만 정확한 감정이 가능하다.
때문에 제대로 된 고미술 감정가 한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년 적공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1964년 전북 전주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현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이런 까닭에 고미술계에서는 젊은 고수 이동천 교수의 등장을 우리 미술계의 일대 사건으로 평가한다.

그의 역저인 <진상>으로 미술계가 언젠가는 겪어야 할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도 좋다.


5월21일 만난 이 교수는 ‘계상정거도 파문’ 이후

쏟아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는 논리적으로 우리 고미술 학계의 ‘침묵의 카르텔’과 ‘나태함’에 대해 폭로하고 분노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싸우는 상대가

다른 이들도 아닌 같은 대학(명지대) 동료이자 선배격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이태호 교수라는 점.


“자신을 변호해줄 사람이 없다”는 표현처럼

그는 현재 골리앗(미술계 전체)에 대항해 싸우는 다윗의 처지다.

하지만 그는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고미술 감정에 관한 한 나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고미술 감정계의 혁명가인 ‘이동천’은 과연 누구일까?
비교적 젊은 그의 이력을 보완해주는 이는

그의 스승인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양런카이(楊仁愷 · 1월31일 작고) 관장이다.

1915년생인 양 관장은 55년간을 랴오닝성박물관에서 감정에 매진해온

중국 최고의 고미술 전문감정가라고 평할 수 있다.
그가 집필한 ‘중국서화’ ‘중국서화감정학고’라는 책은 동양미술 감정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며, 평생을 인민감상가(人民鑑賞家)로 살아온 그는 죽으면서

‘국안’(國眼 · 국가의 감식안)이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부여받았다.


젊은 시절 이 책을 접한 이동천은 1993년 배를 타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제자 되기를 간청한 이국땅 젊은이의 편지를 읽고 감동한 양 관장은

이후 7년간 그와 숙식을 함께 하며 자신의 수제자로 길러내기에 이른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양 관장의 세대적 특징이다.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은

전통문화가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 양 관장 역시 한쪽 눈을 문화대혁명 당시 잃을 만큼 모진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제자 하나 길러내지 못했는데 말년에 한국에서 건너온

학생을 만나게 된 것. 중간 세대가 텅 빈 중국 문화계의 현실에 대해

이 교수는 스스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또 양 관장의 소개로 중국 런민대학 국학원 원장인

펑치용(馮其庸) 원장에게서 고증학을 사사하고

수복(修復) 표구와 공필화(工筆畵), 전각에도 정통하게 된다.
이 교수는 이후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랴오닝성박물관 특빙연구원으로 일하며 양 관장의 수제자로 통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교수급에 해당하는 중국박물관의 연구원으로 일한 것은

이 교수가 최초다.

이 교수의 부친은 전라북도 향교재단 이사장과 전라북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한

만초 이태연 선생이다. 기호학파의 거성인 간재(艮齋) 전우 선생에게서 사사한

집안 출신답게 그는 어릴 때부터 서예와 한학을 공부했고

전주의 ‘소년 명필’로 불렸다.


2000년 귀국한 그는 명지대 이사장의 배려로 국내 최초의 ‘예술품감정학과’를

개설했다. 이후 명청왕조 유물전, 진작과 위작을 대비한 ‘명작과 가짜명작’전을

기획하고 전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한 번도 국내 고미술품의 진위와 관련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진상>의 완성에 매달려왔다.

 

“책으로 말하려는 이유는 ‘말’은 쉽사리 잊히고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한국미술이 한 단계 높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의 내용이 건전하게 토론되고 검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데뷔는 스승의 타계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다만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만 다를 뿐이다.

그의 등장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답은 이제 우리 고미술계가 찾아야 할 듯하다.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2008.06.03 638호(p18~22) 주간동아

 

 

 

 

 

 

화제의 책 <진상(眞相)> 펴낸 고미술 감정가 이동천

 
“위작(僞作)은 예술혼 더럽히는 죄악… 환영 못 받는 감정(鑑定)은 나의 업(業)”


1000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는 가짜다.

경매회사에서 추정가 8000만원에 출품된 ‘산수도’는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는 영인본이었다. 국립박물관에도 가짜 고서화가 차고 넘친다.

고이고이 모시던 보물급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위작이라니 폭탄선언이었다.

허탈하고 분노할 일이었다. 주장을 제기한 이동천 교수에게는 힐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말한다. 알면서 잘못된 걸 그냥 내버려둘 순 없지 않으냐고.

우선 아프더라도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면 뒷면에 그림이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 보물 585호, 개인 소장)’.

그런데 이게 정선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린 임모위작(臨模僞作)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 나라의 화폐에 사용된 그림이 위작이라니 미술품에 대한 심각한 불감증이다.

어째서 제대로 된 감정을 거치지도 않은 작품을 화폐 도안에 사용하는 일이 생길 수가 있나.

 

'계상정거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동천(李東泉·43) 교수를 만났다.

 

그는 머리를 승려처럼 바싹 깎았다. 고등학생처럼 해맑은 얼굴이다.

고미술품 진위논란이란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선,

치열한 싸움판에 뛰어든 주인공이라기엔 너무 젊다.

표정과 태도가 섬약해 보일 정도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의 내용은 결코 여리지 않다.

“두려워요. 겁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오랫동안 진품인 줄 알던 작품을 가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폭탄을 던지는 것과

같아요. 그런 일을 했으니 당연히 떨리죠.

그러나 살찐 것하고 부은 것은 다른 거잖아요.

고름이 찼으면 짜내고 수술을 해야지요.

그래야 남아 있는 팔다리를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불안하세요?”

“예, 언제 칼 맞을지 몰라요, 하하. 그래서 사람 많은 데는 안 나가려고 해요.

두렵긴 하지만 내게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충분히 가난해요.

돈이나 직위가 탐나지 않아요. 가난하게 공부하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겁날 게 뭐가 있겠어요?”

머리를 바싹 깎은 이유는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라 한다.

1주일에 한 번씩 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밀면서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 허물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단다.

하루 두 끼, 깍두기나 김을 반찬으로 소박하게 먹고 외출도 거의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연봉 400만원 정도로 버텼다. 그러면서 책을 준비했다.

고서화 감정에 대한 사회적 발언의 방법으로는 책이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상(眞相)-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이란 책이 그 결실이다.

 

지폐 속 가짜 그림

 

'계상정거도'는 퇴계 생존시 도산서당의 주변 산수를 담은 작품이다.

정선이 1746년에 그렸다고 알려져 있고 겸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던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가짜란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가짜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뭐가 진짜이고 뭐가 가짜인지를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

비단 서화만 그런 게 아니다. 감정법을 전문으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섣불리 진위를 논할 수가 없다. 아니, 소문난 미술사학자들도 진위를 헷갈릴 만큼

가짜를 만드는 이들의 수법이 지능화하고 있다.

 

1000원짜리 지폐 속 겸재 그림을 암만 들여다봐도 나는 그게 진품인지 가품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매사가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품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그는 어떤 근거로 위작이라 판단했을까.

 

“이건 정교한 위작도 아니에요.

정선 그림에 이런 식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림은 없어요.

따라 그리다 보니 산이 커져버려 하늘 둘 자리가 없어진 거예요.

이 그림은 임모위작이에요. 진작(眞作)을 옆에 놓고 따라 그린 거죠.

따라 그리다 보면 긴장이 풀려서 원래보다 커지게 마련입니다.

아니, 무슨 산이 이렇습니까. 겸재는 작품 수준이 대체로 균질해요. 정교하죠.

산을 굴곡 있게 그리지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구릉처럼 그릴 리가 없다고요.

정선은 획을 삐쳐서 그려요. 빠르고 힘차죠.

이 그림은 70대의 겸재가 그렸다기엔 필체가 너무 느리고 필획의 격이 떨어져요.

겸재 그림에선 폐필(쓸데없는 붓질)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이건 폐필투성이잖아요.

이 나무 방향을 보세요. 방향이 다 달라요. 대체 바람이 어디서 분다는 겁니까.

겸재라면 이런 그림 안 그립니다.

산을 장표(표구) 부분까지 튀어나오게 그릴 리 없죠.

위조품은 화가의 작품세계를 손상하고 왜곡합니다.

가짜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것도 죄악이지만 예술품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게

더 큰 재앙이죠. 계상정거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작품을 공개해야 합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해놨다지요.

문화재니까 그걸 꺼내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이동천 교수는 위작의 근거로 ‘호피선지’  ‘연분’  ‘소릉’ 3가지를 제시한다.

그는 <진상>이란 책에서 놀랄 만한 얘기들을 산더미로 쏟아놓는다.

 

고미술 유통시장에서 사진이나 영인본, 목판수인본 등 정교한 복제본이

원작으로 오인되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한다.

지난해 어느 경매회사에서 추정가 8000만~9000만원에 출품된

북산 김수철, 우봉 조희룡, 대산 강진의 ‘산수도’는 원작이 아니라

사진을 확대한 인쇄물이었고,

2005년에 추정가 3000만~4000만원에 출품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春秋筆法’ 휘호

역시 인쇄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점들까지 훤히 보이는 영인본이었다는 거다.

심지어 세 사람의 산수도는 설명에 ‘삼베에 수묵담채’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원래 그린 비단 바탕이 확대되어 삼베로 오인된 경우라니 기가 막힐 지경이다.

 

20세기 종이에 쓴 19세기 글씨

 

문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초보적인 오류가

권위 있는 미술품 경매장에서도 드물지 않다는 점이다.

감정위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다른 나라의 위작을 국내 작가의 진작으로 감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단다.

<진상>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한 패닉 현상까지 경험했다.

그동안 그토록 아취 있다고 탄복했던 추사의 글씨와 단원의 그림이

모조리 위작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별 친절한 설명도 없다.

아니, 왜, 이게 위작인가. 이게 위작이라면 진품은 어디 있다는 것인가.

분노에 가까운 배신감이 치밀었다.

차라리 입 다물고 말지, 이렇게 위작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이동천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안 그래도 현대미술 쪽에 고객을 다 뺏겨 찬바람 쌩쌩 도는 고미술시장에

이렇게 대량의 위작 타령을 한다는 건 배고픈데 전쟁까지 일으키는 격 아닌가.

우리 예술품을 두 번 죽이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이 사람 제정신이야?

그러나 정말 위작이라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간 더 큰일 날 일임이 확실하다.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건 작품의 가치 문제만이 아니다.

거짓이 용인되고 통용되는 사회는 거짓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아프더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게 백번 옳다는 걸 인정한다.

 

그가 <진상>에서 위작임을 선명하게 밝힐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은 세 가지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것들이다.

고미술시장이 형성된 게 언젠데 아직까지 이런 초보적인 내용마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먼저 호피선지. 호피선지를 말하기 위해 그는 미술사학자 유홍준에게 칼을 겨눈다.

다른 이야기에선 안휘준, 이태호에게도 칼날을 들이댄다.

여간 맹랑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 공격적인 글을 쓰는데 거북하지 않으냐, 망설임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유홍준 선생이 ‘완당평전’을 쓴 게 2002년이에요.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 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아 누군가 호피선지 얘기도 하겠지 싶어 기다렸어요.

그런데 암만 지켜봐도 아무도 말하지 않데요.

2006년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개정판이 나올 때도 똑같은 얘기가 실립니다.

돌팔이가 사람을 죽이면 죽였다고 떠들지만

명의가 죽이면 죽을 만하니까 죽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명성이란 그만큼 무서운 거죠. 그러니 권력을 가진 사람은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호피선지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위조자는 때로 시대별 창작재료에 관한 지식이 없는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위조하기도 한다. 즉 앞 시대 작품에서 쓰인 종이, 비단, 안료 등을 쓰지 않고

위조자 자신이 활동할 당시의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다.

더 큰 문제는 연구자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는 현실이다.

유홍준은 ‘완당평전 2’와 ‘김정희 :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에서

완당의 유별난 종이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완당은 종이의 선택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썼다.

자신의 작품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이를 고르기도 했고

붓에 잘 맞는 종이 먹을 잘 먹는 종이를 그때그때 면밀히 검토해보곤 했다.

완당이 좋은 종이를 얼마나 좋아했고 중국제 화선지를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그의 연식첩이라는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식첩에 사용한 종이는 중국에서 20세기 초에 제작한 호피선지로

당연히 김정희가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쓰지도 못한 종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다.”

 

호피선지와 연분

 

폭탄선언이다. 그렇다면 호피선지라는 호랑이 무늬 종이가

19세기 말에는 정말 없었다는 근거라도 있나.

그걸 더욱 명확히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자꾸만 이 젊은 학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호피선지가 20세기 종이란 건 중국 감정계에선 공공연한 이야기예요.

종이감정 전문가가 쓴 글도 있고요.

종이도 종이지만 연식첩의 글씨는 원작과 비슷하게 한 개칠이 많아요.

먹의 농담도 좋지 않고요.

필세를 봐도 추사의 진필일 리가 없는 명백한 위작입니다.”

 

호피선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20세기 이전 인물이 호피선지에 글씨 쓴 작품들은

모조리 가짜라고 보면 틀림없다는 거다.

위작에 대한 확실한 기준 하나가 생긴 셈이다.

 

다음이 연분. 안료는 작품을 제작한 시대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에서 백색안료인 연분은 작품의 창작 시기를 밝히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그 이유는 연분이 지닌 결점에 있다.

백색 연분은 오랜 시간 빛과 습기의 영향을 받으면 짙은 갈색 또는 흑색으로

변하는 반연현상이 나타난다.

반연현상이 일어난 부분은 과산화수소로 씻으면 다시 백색으로 환원된다.

19세기 중기까지 조선 화가들은 조개껍데기로 제작한 백색안료인 합분을 주로 썼다.

합분을 사용한 진작은 안견의 ‘몽도원도’, 윤도서의 ‘유하백마도’,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심사정의 ‘화조도’,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다. 거기 시대를 초월해 하얗게 빛나는 안료가 바로 합분이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이러한, 반연 현상이 나타난 연분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기 장승업때라고 한다.

백색 안료로 기존에 사용하던 합분에 이러한 연분이 새롭게 더해졌고,

연분 사용은 20세기 초 크게 유행했다. 대개 1940년 무렵까지 널리 쓰이다 사라졌다.

지금 전하는 그림에 나타난 반연현상이 그걸 증명한다.

물론 반연현상이 있는 그림이라고 다 진작은 아니다.

반연현상을 위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연분을 놓고서는 두 가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적어도 안견부터 신윤복까지는 그림에 연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따라서 안견부터 신윤복까지의 그림 중 이러한 연분을 사용한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1940년 사이에 위조된 작품이 확실하다.

이쯤 되면 정말 확실한 기준이다. 이런 간단한 원칙을 몰라 시장에서도 감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오류가 빚어졌는지 모른다.

반연현상 위조는 그 특징이 명확해 판별하기가 매우 쉽다고 한다.

문제는 반연현상만으로도 간단하게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이런 위작들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 서울대나 고려대 미술관에 진품으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확인 가능한 대표적인 위작이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김홍도의 ‘단원절세보첩’이다.

이 그림의 꽃과 새를 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했고

그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작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곡병’ 중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심사정의 ‘설제화정’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단다. 사실이라면 정말 통탄할 일이다.

 

흥선대원군이 사랑한 ‘소릉’

 

세 번째는 소릉이다. 소릉은 중국제 서화창작용 비단의 일종이다.

소릉은 본래 명대 홍치부터 서화창작에 쓰인 재료지만 당시는 시작단계에 불과했고 천계, 숭정 연간에 이르러 널리 유행해 청초까지 이어지다 자취를 감춘 그림재료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소릉을 19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반세기 동안

서화창작 재료로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기생의 속치마에 난을 그렸다는 얘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중국제 소릉이 명주처럼 보였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걸 기생의 명주단속곳이라고 소문내고 다녔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지금 전하는 조선시대 서화작품을 보면 진품으로

흥선대원군 이전에 소릉을 사용한 예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소릉에 처음 작품을 그린 사람은 흥선대원군이라고 봐도 된다.

그가 어전에서 소릉 작품 총란도를 그렸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청국에서 3년의 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소릉에 서화작품을 그렸고,

그 비단이 마음에 들어 이후 쭉 사용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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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권 지폐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흥선대원군 이후 지금까지 많은 서화가가 중국제 소릉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제 서화용 소릉에 제작한 1880년대 이전 서화는 모두 위조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소릉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므로

대원군 이후 소릉이라고 무조건 진작일 리도 없다.

호피선지, 연분, 소릉. 자, 이동천 이후 고미술계는 위작을 감별할 수 있는

명백한 세 가지 기준은 가진 셈이다.

 

그는 위험하게도 미술사가 이태호가 자신의 책에서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린 듯한 불상의 선묘와 공양드리는 두 선승 표현,

선묘를 쌓은 암준법과 특징적인 수묘법 등 역시

김홍도의 능숙한 수묵담채의 구사와 필치이다”라고 극찬한

김홍도의 ‘묘길상’을 위조라고 못 박는다.

“서화창작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위조자가 당시 특정 수요에 맞게

졸렬하게 제작한 것일 뿐”이라고 뾰족각을 세운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까.

아니, 이태호 선생의 눈은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숙하단 말입니까.”

 

“묘길의 길자를 보세요. 그게 글자입니까.

그리고 인장이 없으면 안 찍으면 되는거지, 인장을 붓으로 그리는 게 말이 되냐고요.

축구선수가 공 차는 걸 보면 연습을 얼마나 한 선수인지 알지 않습니까.

필선도 똑같아요. 획을 보면 어느 수준에 올랐는지 금방 안다고요.

이름난 미술사가들이 착각하는 건 아마도 선입관 때문일 겁니다.

처음부터 진품이라고 보니까, 의심하지 않으니까 다 좋게 보이는 거죠.

우리는 달라요. 감정은 경찰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일단 다 범인이라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거죠.

관찰해서 단서가 잡히면 과학적 검증에 들어가는 겁니다.”

 

중국 서화감정 대가의 제자

 

지금까지 안평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몽유도원도 제첨이

안평대군의 글씨가 아니라는 주장도 편다.

“안휘준 선생은 왕희지의 행서체를 연상시키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그건 당송의 금초서를 배운 글씨예요.

안평대군은 1447년 음력 4월20일에 꿈을 꿨고 사흘 뒤인 23일에 몸소 제기를 짓고

썼어요.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몽도원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꿈속에 동행한 박팽년에게는 그림의 발문 ‘몽도원기’를 쓰게 했어요.

본래 이 그림은 두루마리가 아니라 벽에 붙여놓고 감상할 용도로 그렸어요.

수권 형식은 관찰자의 시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지만

벽에 붙여놓을 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도 가거든요.

몽유도원도 제첨은 후대 소장가가 두루마리로 장표형식을 바꾸면서 첨가한 거예요.

그림 이름도 본래의 ‘몽도원도’라고 불러야지,

‘몽유도원도’는 나중에 붙인 틀린 이름이에요.

사람들은 늘 처음 알았던 것을 고집하죠.

틀렸다고 해도 좀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뒤늦게 왜 귀찮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응한단 말이에요.

나는 감정가이기도 하지만 감정학자고 교육자예요.

학자와 교육자로서 의무가 있어요. 혼자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외롭기로야 한량없죠.

갈 길이 험하기 짝이 없죠.

그러나 내가 오를 산이 자그만 앞동산이라면 길이 편하겠지만

히말라야라면 갈 길이 험한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난데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 자신의 등정길이 히말라야라고 말하는,

이 겁 없고 강단 있는 청년은 누구인가.

이동천, 아호인 것 같은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는 이, 태자, 연자이신 어른으로

문화재위원과 전라북도향교재단 이사장을 지낸,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선비다.

연묵회를 운영해 집 안에 늘 묵향이 그득했다.

강암, 토림, 도산 선생같은 전주지방 서화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제가 막내예요. 아버지가 절 유난히 귀애하셨고

어려서부터 서화하시는 분들 곁에서 자랐어요.

붓글씨는 5세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한문은 김형관 선생에게서 배웠어요.

그림, 전각도 조금씩은 해봤죠.”

전주고교 다닐 땐 전국 서예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기차 타고 서울까지 글씨를 배우러 올라오곤 했다.

“아버지가 전주서 글씨를 배워서는 지방선비밖에 못 된다고 하시면서

일중 김충현 선생께 보내셨어요.

고1 때 쓴 글씨는 지금도 전북 예총사무실에 걸려 있어요.

고등학생 때 장성 묘장서원의 묘정비문을 제가 썼어요.”

미대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비가 되려면 문사철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고 부친이 말렸다.

명지대 국문과에 진학한다. 글씨는 꾸준히 썼다. 그림도 그렸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양런카이가 쓴 ‘중국서화’였다. 박물관 교재로 쓰이는, 미술품 감정에 관한 책이다.

“제자가 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당시 써놓은 글씨도 같이 넣었죠.”

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1993년 중국으로 간다.

처음엔 베이징으로, 다음엔 스승이 계시는 선양으로.

“특별히 운이 좋았어요. 스승이 감정가라 1994년 이후부터 스승과 함께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경매장을 숱하게 찾아다녔어요.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었죠.”

당시 베이징만 해도 경매하는 곳이 33군데였다.

한해, 가덕경매만 해도 1년에 적어도 2번 이상 열리는데

그때마다 서화가 1000점씩 쏟아져 나왔다. 그 그림들을 탐욕스럽게 다 들여다봤다.

재미있고 흥분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스승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되면 날아갈 듯 기뻤다.

 

‘곤이지지’

 

중국은 최고의 감정가에게 ‘인민감상가’란 칭호를 붙이는데,

현재까지 이 칭호를 얻은 사람은 양런카이 선생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동천은 양 선생의 수제자가 됐다. 제대로,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스승은 ‘생이지지’보다 ‘곤이지지’가 낫다고 가르쳤다.

괴로움을 겪어가며 배우는 것을 말한다.

 

1995년 봄 가덕경매에 함께 갔을 때였다.

평소처럼 스승은 몰려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저쪽으로 가고 혼자 종일 그림을 봤다.

저녁에 숙소에서 만났을 때 “동천아, 너는 오늘 나온 것 중 어느 그림이 제일 좋더냐”

물었다. 명말 충신이자 서화가로 예원로란 학자가 있다.

그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 답했다. 스승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테스트를 수시로 받았다.

“그래, 예원로가 좋거든 박사논문은 예원로로 쓰도록 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스승의 가르치는 방법은 철저했다.

“한 학기에 한 달 정도는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순회하게 해요.

‘이 사람은 내 제자니 찾아가거든 물건을 보여주라’는 편지 한 통을 써주시죠.

그걸 들고 중국 전역의 박물관을 다 찾아다녔어요.

항저우, 쑤저우, 상하이, 저장성, 후베이성, 둥베이, 선양, 사오싱, 베이징!

베이징에선 역사박물관 고궁박물관 수도박물관 자료실에 틀어박혀 거기 있는

서화와 문헌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거예요.

7원짜리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온종일 꼼짝도 않는 거죠.

모기에 물리고 추위, 더위 말도 못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틈도 없었죠.”

박물관, 도서관, 유물 관리실 직원들과 나눈 이야기도 큰 도움이 됐다.

“후베이성 박물관 유물관리실장은 지금 부관장이 됐어요.

그 사람과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했죠.”

 

그렇게 원작들을 보고 난 후 도판을 구해 공부한다.

글씨라면 임서하고 그림도 따라 그려본다. 따라 쓰고 그려봐야 필세나 획의 두께,

농담이나 삐침의 각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시대별 특징을 공부하고 인장이나 종이에 관한 지식도 연마한다.

스승 양런카이는 제자에게 감정의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각 방면의 최고전문가를 소개해줬다.

“위서체는 스승님이 직접, 공필화는 선양루쉰미술학원 교수인 옌샤오샹,

수복표구는 수복표구의 아버지 펑펑성,

고증학은 인민대학 국학원 원장인 펑치용, 전각은 슝보치 선생에게 배웠어요. ”

 

박물관과 경매장과 여러 스승을 오가면서 7년을 보냈다.

3년 공부 후엔 선양의 스승을 떠나 베이징에서 공부했다.

베이징에 머물 때도 1년에 서너 달 방학 때는 반드시 선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시키는 양 선생에게 이동천말고도 다른 제자가 있었을까.

“저말고 둘이 더 있었어요. 그런데 한 명은 감정이 아니라 미술평론 쪽으로 가버렸고

다른 하나는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죠.

선생님의 외손녀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상하이 박물관에 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손녀에게 ‘감정은 이동천에게 배워라’고 말씀하셨대요. 영광이죠.

내가 좀 안정되면 그 손녀를 불러 꼭 미술품 감정을 가르칠 겁니다.”

 

“감정학엔 결백이 필수”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감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외국인 최초로 랴오닝성 박물관 연구원으로 근무한다.

선양리공대학에서 감정학 강의도 한다.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 명청황조 미술대전을 추진했고

2001년 봄엔 ‘명작과 가짜명작’이란 흥미진진한 전시를 기획했다.

귀국은 2001년에 했다.

 

명지대 대학원에 국내 처음으로 예술품감정학과를 개설하면서 주임교수가 되고

3년 정도 거기서 학생을 가르쳤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직한다.

지금은 서울대에서 작품감정론과 서예를 가르친다.

강사라 박봉이지만 시간을 많이 뺏기지는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여전히 공부다. 암만 해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공부도 업이에요. 적을 만들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감정을 공부하는 것은 제 업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중국에 있을 때 아름다운 위서체 천자문을 써서 전시했다.

거기 양 선생이 쓴 발문엔 ‘탐미색은’에 능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탐미색은! 작은 것을 발견하고 숨은 것을 찾아낸다는 뜻이다.

그것이야말로 감정가의 일이다.

탐미색은하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이 감정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이 분야가 왕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술품의 양이나 시장규모나 애호가 수에 비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구가 미미하다.

 

스승 양런카이 선생을 말할 때 이동천은 운다.

스승이 없는 세상의 적막이 그를 눈물 흘리게 한다는 거다.

감정은 철저한 도제식 교육이다.

현대식 학교교육을 받은 오늘 우리들이 짐작할 수 없는 사제관계다.

“학문이란 배움을 묻는 거잖아요. 이제 나는 물을 사람이 없어져버렸어요.”

스승은 늘 “작은 은혜도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한다.

공부는 오랜 세월 고생스럽게 해야 하고 글은 결코 한마디도 빈말로 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늘 “퉁취안 니 짜이날?”이라고 했다.

 

양 선생은 지난 1월 타계했다.

<진상>의 앞머리에 그는 “이 책을 스승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미술품 감정학은 민감한 학문이다.

미술품이 돈으로 거래되는 상품인 까닭에 자칫 돈의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일단 돈과 결탁하면 학문을 계속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감정은 특별히 학문 본연의 결백을 유지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

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깨끗한 사람이 많아져야 감정학의 터가 잡힌다.

양 선생이 먼저 인간 되기를 가르치고 서예를 가르친 것도

세속에 오염되기 쉬운 감정학의 위험을 경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화혁명 때 고문을 당해 실명해서 오른쪽 눈을 잃으셨어요.

늘 왼쪽 눈으로 서화를 바싹 당겨서 보셨죠.

60세가 되기까지 단칸방에 사신 분이세요.

그런 분이 늘 제게 ‘學問之道, 如逆水行舟, 不進則退.’라고 말씀하셨어요.

과연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등골에 땀이 좍 흘러요.”

 

‘마음의 장애’ 극복해야

 

미술품 감정은 결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결과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일정한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필연적 산물이다.

작품 감정학습의 첫걸음은 검증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감정이란 모든 사람을 범인으로 의심해보는 경찰과 같아요.

시대를 막론하고 위조와 사기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에게 무조건 믿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죠.

모든 위조나 사기는 자기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아요.

그러니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죠.

기존의 권위를 무조건 믿어버리는 ‘마음의 장애’를 극복한 후라야

작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작품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작품에 감춰진 위조자의 제작수준과

의식적, 무의식적 실수까지 알아낼 수 있죠.”

 

작품 감정방법에는 목감과 고증이 있다.

목감은 오래 교육받고 훈련을 거친 눈으로 작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방법이고,

고증은 작품에 대한 사실 검증을 통해 과학적으로 감정하는 방법이다.

목감은 수많은 고증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고증은 목감을 기초로 깊이 있는 검증을 하는 것이니

둘은 분리되지 않는 상호작용이다.

 

작품은 작가가 활용한 지식의 결정체다.

그러니 목감에서 인문적 지식은 필수다.

감정에서 과학기기의 사용은 고증의 한 방법이긴 하지만 예외 없이 목감이 먼저다.

합리적 목감 자세는 작품 진위 판별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이야기다.

그 목감의 단계에서 이동천이 저만치 올연하게 도드라진 인물이 된 것은

당연히 오랜 궁구의 힘에서 나온 고증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지금까지 감정학습은 주로 특정 작가나 특정 시대의 진작과 위작 특징만 학습하거나

진작과 위작의 비교를 통해 위조작의 유형분류에만 머물렀다.

전자는 언제든지 위조자가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 극히 위험하고,

후자는 전체를 볼 수는 있겠지만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동천은 <진상>에 위의 몇 가지 팁 외엔 위조품 감정방법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 비법들은 스스로 수년 동안 ‘곤이지지’ 해서 깨친 뒤

스승과 토론하면서 얻어낸 것들이다.

 

“감정의 포인트는 대개 한두 문장으로 끝나요.

그렇게 힘들게 얻은 내용들을 책 속에 다 넣어 알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연구자나 애호가에게 감추려는 것은 아니지만

위조자들이 알게 되면 그걸 역이용할 수 있죠.

그래서 많은 부분을 책갈피 안에 숨겨뒀어요. 곧 다른 책을 쓸 겁니다.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을 각기 한 권의 책으로 낼 거예요.

그땐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김홍도 그림이 왜 가짜인지를 나는 구분할 수 없다.

혼자서는 운필의 정도나 농담의 강약을 가려낼 눈이 없다. 추사 글씨도 마찬가지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호고유시’나 간송미술관이 가지고 있다는

‘화법유장강만리’ 같은 대련(對聯)을 위작이라고 판독하는 것에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호피선지도 아니고 소릉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연분이 칠해진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가짜라고 하는가.

 

유홍준의 “완당의 글씨 중 글자 구성에 멋이 한껏 들어간 명품”이란 해설을

먼저 본 선입관 때문이라고?

이동천이 쓴 책에 나오는 “김정희의 필력, 필묵 성격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위조자의 무기력한 필치가 위작 곳곳에서 발견된다”라는 말을

석연하게 인정할 수 없다.

그걸 이동천 또한 콕 집어 설명하기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것이다.

구선수가 공차는 것을 보면 그 선수의 실력을 한눈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놈이 그놈같아 보이는 사람도 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니까.

 

아는 만큼 사랑한다

 

감정학습엔 자수성가가 없다고 한다. 즉 자의적 독학은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다.

독학에 의해 한번 각인된 의식은 남이 바로잡아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잘못 각인된 인식을 평생을 가지고 가기 일쑤다.

인간 두뇌는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거다.

“독학은 혼자만 알고 깨우쳤다고 착각하게 되니 큰 깨우침의 세상을 보지 못해요.

깨우침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죠.

그래서 감정은 큰 스승 아래서 배워야 합니다.”

 

위조작품의 제작과 유통은 철저하게 프로의 세계다.

미술품 유통의 큰 축인 위조작품의 유통은 위조와 사기라,

예술품을 수장할 때 순수한 열정과 재력만으로는 안 되고

이 세계를 공부하고 알아야만 더 사랑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여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예술과 인간 세상 전반에 통용되는 정석이다.

 

전통적 감정학습은 마음으로만 깨달을 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은밀히 전수되는 도제식 교육의 장점은 스승이 학습의 방향을 정하고 제자의

학습단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제자에게 적당한 학습내용을 수행시키는 데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양 선생에게 왜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교육시키느냐고 힐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알아듣고 날 따라오는 놈을 가르치는 거야.”

그렇지만 스승은 이동천이 중국 서화 감정에 평생을 보낼 것으로 기대했을 거란다.

그러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네가 공부한 건 중국 서화이니 한국엔 돌아오지 말라’고 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 머문다. 환영받지도 못하는 이곳에 왜 머물까.

 

“1991년에 ‘미인도’ 진위논란이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딱 부러지게 규정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진위논란을 벌이지만 결론은 늘 오리무중이에요.

내가 했던 공부로 그걸 밝히고 싶었어요. 뻔히 보이니까.

한 10년 한국미술사에 매달려 정리가 되면 다시 중국으로 갈 겁니다.”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 작품의 위조는

명성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예산의 김정희 종가가 지닌 ‘김정희의 칠언시-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호)를

비롯해 제주특별자치도가 소장한 ‘시골집 벽에 쓰다’(보물 제547-2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제주시에 기증한 ‘김정희 편지 모음집’ ‘시의정’

‘자화상’(선문대 박물관), ‘예서’(간송미술관) 등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추사의 위작들이 나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겸재의 ‘금강내산’(고려대박물관), ‘독서여가’(간송미술관), ‘설평기려’(간송미술관), ‘산수도’(서울대 박물관)도 가짜고,

심지어 풍속화의 최고 경지인 단원의 ‘단원풍속화첩’(보물 527호)이 전체 25점 중

19점이 위작이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동천은 또랑또랑하게 묻는다.

 

“부은 것을 살쪘다고 인정할 순 없지 않습니까.

가짜 작품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건 경제적 손실을 보는 소장가라기보다

그림이나 글씨의 원작자죠.

자기 작품세계가 왜곡되고 훼손당하는 걸 지하의 그분들이 얼마나 통탄하겠습니까.

그걸 밝힐 때 고미술시장이 더 건강해져요.”

그림 뒤에 감정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감정가실명제를 실시하자는 것도

그의 주장이다. 그래야 책임소재가 명확해져 신뢰할 수 있다는 거다.

 

명지대를 물러날 때 전주의 부친은 말씀하셨다.

“얘야, 사람이 굶어죽는 법은 없느니라.”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아마 <진상> 때문에 다음 학기 서울대에서 잘릴지도 모르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수만 있으면 만족해요.

쥐가 소금 먹듯 조금씩 먹어가며 살 거예요.”

이동천에 의해 어느 날 한국미술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날이 올 것 같다.

우리 미술계는 지금 문제적 인물 하나를 맞이했다.

그 도전과 응전을 기꺼이 지켜보겠다.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김서령이 쓰는 이사람의 삶]

 - 2008.07.01 통권 586호(p420~433)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