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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 -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Gijuzzang Dream 2009. 2. 6. 17:54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

  -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1. 예외의 연속이었던 적장자 상속

 

조선의 왕의 계승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적장자의 왕위 세습을 원칙으로 지키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27명의 왕 중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7명(단종, 문종, 연산군, 현종, 숙종, 고종, 순종)에 불과하였다.

20%가 조금 넘는 수치이다. 왕위 계승에 있어서 여러 변수가 발생했다는 뜻인데

이러한 변수의 배경에는 어떠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태조는 계비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고 이 과정에서 본처 출신 아들들의 저항을 받았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며 둘째인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을 이은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 째 아들이고. 세종은 3번째 아들이었지만

태종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된 후 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종이 적장자로 처음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기간이 짧았고.

역시 작장자였던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왕권 야심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세조의 차남이었으나, 형 의경세자가 죽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성종은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의 차남으로, 예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의 물망에 올랐다.

성종에게는 형인 월산대군이 있어서 서열상 왕위 계승에서는 뒤쳐져 있었으나

장인인 한명회의 후원 등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10번째 왕인 연산군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는 문종과 단종 두 차례에 불과하였다.

문종과 단종은 재위 기간이 짧아 적장자 왕으로서의 프리미엄을 거의 누려보지 못했다.

따라서 성종의 장남인 연산군이야말로 적장자 출신이라는 이점 속에서 왕위에 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최초의 왕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정통성(?)이 그의 독선적인 기질과 더하여 독재적인 군주상을 만들어 나가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왕이라는 정통성에서 취약했던 세종이나 세조가 큰 업적을 남겼던 사실과 대비해 볼 때

연산군의 적장자 프리미엄은 그를 긴장의 끈에서 이탈하게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차기 대권주자 1순위인 왕세자가 왕의 의지 때문에 교체되는 일이 더욱 잦았다.

인조와 이념이 맞지 않았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9세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가 외척 세도정치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장자에 의한 왕위 세습이 원칙이었던 조선시대.

그러나 2인자의 위치에 있던 왕세자가 왕의 자리에 오른 길은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다.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의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 2인자의 비극을 되짚어 본다.

 

 

 

2. 양녕대군의 비극

 

조선왕조의 왕의 계승은 장자 세습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태종 때까지 이 원칙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피를 보는 왕위 계승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태종은

누구보다도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의 기틀을 잡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태종은 첫 번째 아들 양녕대군 제(褆, 1394~1462)를 1404년 8월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18년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된 지 14년만의 일이다.

14년 동안 왕세자의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격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글공부보다는 사냥이나 풍류에 관심이 많았다.

양녕은 공부를 게을리하여 주변의 사람들도 곤란을 겪었다.

1405년 10월 태종은 세자가 학업을 소홀히 한다며 세자를 대신하여 환관들에게 태(笞)를 치기도 했으며,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선생님들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심지어 궁궐에 건달패나 기생들을 들인다는 소문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태종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달밤에 궁궐 담을 넘어 무뢰배들과 비파를 타기도 하고

기생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밤새도록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잡희(雜戱)를 즐겼다.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하기도 하였다.

비행들이 계속되자 마침내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하여

1418년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태종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위를 결정한 것은

양녕의 기행(奇行)이 큰 문제였지만 셋째 아들 충녕에 대한 믿음이 한 몫을 했다.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열중하는 충녕의 됨됨이를 믿었던 태종은

후계자로 충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풍류생활에 빠진 양녕이나 불교에 심취했던 둘째 효령에 비해

셋째 충녕은 태종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왕의 자리는 장자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였고,

왕조가 굳건한 뿌리를 내리려면 충녕과 같은 능력이 있는 왕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태종의 후계자 선택의 희생양이 되었던 양녕대군은

2인자에서 물러나 영원한 야인으로 일생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소현세자, 그 의문의 죽음

   

1645년 소현세자가 9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2인자이자 차기 왕인 그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관료들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 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물러가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테타로 집권한 왕으로서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본 것은 아닐까?

 

귀국 직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실록에도 독살설의 의심을 보이는 내용이 기록될 만큼 의문투성이의 죽음이었다.

특히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셋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효종으로 즉위시켰다.

누가 보아도 효종의 즉위는 인조의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 것이었다.

야사 기록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 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이미 부자의 정을 끊게 했던 시점이었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억울ㄹ한데 자신의 아르이 왕이 되지 못하자 세자빈 강씨는 가만 있지 않았다.

그 상대가 시아버지인 인조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빈은 강하게 저항했다.

러나 그녀에게 찾아온 것 역시 죽음이었다. 세자빈 강씨는 인조 독살 혐의로 사약을 받았고,

세자의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풍토병으로 죽었다.

2인자 소현세자, 그리고 그 가족은 처참하게 몰락하였다.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

즉 북학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던 2인자에게 다가왔던 불운이었다.

 

 

 

4.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

 

조선왕실에서 최고의 비극 장면으로 기억되는 1762년의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첫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잃고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더 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불행히도 세자는 성격부터 영조의 마음에 차지 못하였다.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여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했던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또 세자는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타기와 같은 놀이에만 열중하여

학문에 정진해 주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부자의 사이는 세자가 15세이던 1749년(영조 25) 대리청정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졌다.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았던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찍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거나

정사를 대신 돌보게 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쳐를 취하였으며 결국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 운영에 미숙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데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꾸중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1752년에는 세자가 멋대로 일을 처리하였다고 진노하자

홍역에 걸린 몸으로 3일 동안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죄를 빌어야 했고,

영조가 왕위를 넘기겠다며 창의궁(彰義宮: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거처를 옮기자

또 이마에 피가 나도록 엎드려 사죄해야 했다.

 

영조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는 부왕에 대해 큰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주색에 탐닉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발을 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국가에 내린 금주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술을 마셨으며 여자를 데려다 살림을 차린 일도 있었다.

세자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영조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즈음

나경언의 고변 사건이 터졌다.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투서하면서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에 걸쳐 나열하였다. 세자가 자기 대신 내관을 방에 앉혀 놓고 20여 일 동안

평양을 몰래 다녀온 것이 발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세자는 나경언의 고변이 무함이라며 맞섰고, 나경언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지만

이 사건은 영조와 세자를 영원히 갈라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윤5월 12일 오후 세자를 창경궁 휘령전(현재의 문정전)으로 나오도록 하라는

영조의 명이 떨어졌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세자시강원의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저지하였다.

사도세자는 결국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영조는 조선시대 최장수 왕이자(83세) 최장기 집권(52년)을 한 왕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도 영조는 14년을 더 살았다.

세습으로 왕이 이어지던 시절 왕의 장수는 장기집권의 최고 비결이었다. 영조의 이례적인 장수가

결국은 사도세자가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비극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까?

영조의 후계자가 소현세자의 경우와는 달리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 점도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5. 잊혀진 왕세자, 효명세자

 

19세기 정치사는 흔히 외척들이 권력을 차지한 세도정치기로 정리되고 있다.

19세기의 시작과 함께 어린 왕이 연이어 즉위한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12세에 즉위한 순조 역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 가문의 협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부족을 느낀 순조는 마침내 자신의 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 : 후에 익종으로 추존됨)로 하여금

정치의 실무를 맡게 했다. 이른바 대리청정을 통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서

풍양 조씨 가문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기도 했다.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4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가문 견제, 왕실권위 회복에 힘을 쏟았다.

순조가 즉위한 후 30주년을 맞아 숙종대와 영조대의 전례를 논하면서

순조의 진찬(進饌)을 주관하면서 국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궁중 무용의 창사(唱詞)를 직접 지을 정도로 문화면에도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세도정치의 그늘을 뚫고 정치와 문화면에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효명세자는

건강 문제로 22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효명세자 요절 후 순조의 뒤를 이은 아들 헌종(1827~1849)은 1834년 불과 8세에 즉위하였다.

이제 왕실의 권위는 더 없이 추락하였다. 19세기 전반 조선왕조의 불운이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효명세자는 그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는 의식을 그림으로 정리한 「왕세자입학도」에

잠시 그의 모습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8세에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서는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6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풍양 조씨)가 있었지만,

헌종의 비 효현왕후를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로 맞이하는 등 안동 김씨 세도의 위세는 보다 강력해졌다.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철종의 비 역시 김문근의 딸로서 안동 김씨 출신이었다.

우리가 흔히 19세기 세도정치를 떠올릴 때 안동 김씨를 빠뜨리지 않는 것은

19세기 60여 년 간 그만큼 안동 김씨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고, 조선 왕실을 튼튼히 했더라면

세도정치의 모순이 상당히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인천시립박물관, 2008 시민강좌 자료 중 발췌

- 세계일보, 2008-03-26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⑨조선왕조 사리진 2인자들 '적장자'

-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신병주, 노대환 지음, 돌베개,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