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경주 남산 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

Gijuzzang Dream 2009. 1. 27. 14:52

 

 

 

 

 

 경주 남산 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

 

 

 

 

 

 

 

남산신성비는 591년(진평왕 13) 남산에 신성(新城)을 쌓고 그에 관여한 지방관 및 지방민들에 관하여 기록한 비이다.

 

제1비가 1934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10개가 발견되었다.

10개 모두 비의 첫머리에 ‘신해년(591) 2월 26일 남산 신성을 쌓을 때, 법에 따라 쌓은 지 3년 만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케 한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신성의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이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약식을 행하였던 관례를 이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제3비와 9비를 제외하고, 그 다음에 도사(道使)와 나두(邏頭)와 같은 왕경 6부 출신의 지방관, 촌주와 장척(匠尺), 문척(文尺)과 같은 지방의 지배자, 그리고 축성에 동원된 기술자집단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할당된 공사구간을 몇 보(步) 몇 촌(村)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제3비는 특별하게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성을 쌓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문의 형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약 문장 다음에 훼부 주도리가 할당받은 공사구간을 기술하고, 부감(部監)과 문척(文尺)과 같은 공사 책임자, 기술자집단을 차례로 기술하였다. 한편 제9비는 서약 문장 다음에 급벌군(伋伐郡)의 이동성(伊同城)이 할당받은 공사구간, 군상인(郡上人)을 비롯한 이동성의 지배자들, 그리고 기술자집단의 순으로 기재하였는데, 다른 것과 달리 왕경 6부 출신의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이 빠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1934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제1비는 본래 경북 경주군 내남면 탑리 식혜골 김헌용의 집 앞 도랑에 놓여있었던 것이었다. 남산 중턱에 있었던 것을 가옥을 신축하면서 옮겨 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 91cm, 최대 폭 44cm, 두께 5~14cm이며, 모양은 기다란 계란형에 가깝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고졸(古拙)한 성격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는 아량촌(阿良村), 영고촌(營沽村)과 노함촌(奴含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인데, 아량촌 등은 현재 경남 함안이나 의령지방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도사(道使), 지방의 지배자로 군상촌주(郡上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이 보인다. 이밖에 축성기술자로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이 보이고 있다.  

 

 

 남산신성비 제1비

 

제2비는 상반부와 하반부가 따로따로 발견되었는데, 하반부는 1956년에 경주 남산 서쪽 능선의 전일성왕릉 부근에서, 상반부는 1960년 12월에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1비와 마찬가지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상하단의 폭이 좁고 중간폭이 넓은 장방형을 이루었다. 전체 길이 121cm, 중간 최대폭 47cm, 두께 7~14cm이다.

비의 내용은 아차혜촌(또는 아단혜촌), 답대지촌(答大支村)과 구리성(仇利城), 사도성(沙刀城)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아차혜촌은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답대지촌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회령, 사도성은 상주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지방관이나 지방의 지배자들은 대략 제1비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지방의 지배자로 군중상인(郡中上人), 작상인(作上人)이 보이고, 기술자 가운데 면석착인, 소석착인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비는 원래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 부근 이판출씨의 집에 있었는데, 진홍섭선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화강암의 재질로 전체 길이는 80.5cm이고, 폭은 상단이 30cm, 하단이 23cm이며, 두께는 10cm이다.

비의 내용은 왕경의 훼부 주도리인이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역부를 동원하고 축성을 감독하는 관리가 부감(部監)인데, 이것은 왕경을 관할하는 6부소감전의 관리인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등과 관련이 깊다. 특히 축성구간이 21보(步)로서 다른 비에 보이는 작업구간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제4비는 1960년 12월에 제2비의 상반부와 함께 발견되었다. 상반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문 전체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비는 고생촌(古生村) 등의 주민들이 신성을 쌓았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지방관으로 나두(邏頭)가 보이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집단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제5비, 제6비, 제7비와 제8비는 비의 조각만이 남아 전하는 것들이다.

제5비는 1972년 8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도로예정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지의 중문지로 추정되는 곳의 민가를 철거하다가 발견하였다.

 

제6비는 1974년 3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습한 것이고,

 

제7비는 1985년 남산신성 남쪽 성벽 내측의 민묘(民墓)에서 수습한 것이다.

 

제8비는 같은 해에 남산신성의 북문지 중간지점 바닥에서 수습하였다.

모두 파손이 심하여 비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제9비는 1994년 1월 남산신성의 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처음 세웠던 상태 그대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남산신성비와 기재 양식이 달라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비의 내용은 급벌군(현재 경북 영풍)의 이동성도(伊同城徒)가 6보를 할당받아 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제9비는 다른 비들과 달리 지방관에 관한 사항이 보이지 않고, 지방의 지배자와 기술자의 명단만을 기재한 사실이 특징적이다. 이것을 통하여 축성을 위하여 역부를 징발할 때, 지방의 지배자들이 거기에 깊게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10비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5월 18일 경주시 배반동 751-3번지 논둑에서 발견하였다. 수습된 비편은 높이 27cm, 폭 16.5cm, 두께 13cm이며, 재질은 붉은 색조의 화강암이다.

현재 비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3행 5줄의 15자만이 남아있다.

파손된 후 남산에서 1Km 떨어진 현재의 출토지까지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10개의 남산신성비는 도사(道使)나 나두(邏頭) 등의 지방관, 다양한 지역, 다양한 명칭의 지방 지배자들을 전하고 있다. 현재 이를 기초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특히 비들이 신성의 축조에 역부를 동원한 사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고기 역역동원체계를 살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주제어

서약식, 도사(道使,) 나두(邏頭), 촌주, 장척(匠尺), 문척(文尺), 왕경, 훼부(喙部)의 주도리 사람들, 부감(部監), 군상인(郡上人), 군상촌주(郡上村主), 성사상(城使上), 면착상(面捉上), 작상인(作上人), 감랑(監郞), 감신(監臣), 감대사(監大舍), 역부, 징발, 중고기 군(郡)과 촌(성)과의 상호 관계, 중고기 역역동원체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으로,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지방 통치체제와 역력(役力) 동원 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 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금석문(金石文)이다.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는 경주 남산의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고 세운 비석이다.

남산신성은 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 바위가 게 눈처럼 튀어나와 붙여진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 3.7km의 돌로 쌓은 성[석성石城]인데, 지금은 쇠락하여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13년(591)에 처음 축성하였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10월 경주 남산 식혜골(食慧谷)에서 발견된 이래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맹세의 글, 축성에 참여한 인물,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쌓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는 물론 국가가 대규모 국책사업에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하였는지,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구분 출토 년 출토 위치 규격(cm) 비고
제1비 1934 경주남산 식혜골 91×44 완형, (辛亥年……)
제2비 1956 경주 배동 121×47 완형, (辛亥年……)
제3비 1960 사천왕사지 부근 80.5×30 완형, (辛亥年……)
제4비 1960 일성왕릉 부근 51×34 부분, 상단부 결실(節如法以…)
제5비 1972 흥륜사지 부근 23×23 부분, 하반부 결실(辛亥,崩破者‥)
제6비 1974 경주 탑동 19.5×8 부분, 4字 확인(尺同, 尺豆)
제7비 1985 경주남산 해목령 25.0×18.5 부분, (辛亥年……)
제8비 1985 남산신성 북문지 22.5×22.2 부분, 2자 확인(奈日)
제9비 1994 창림사지 후방 경주시 배반동 90 완형, (辛亥年……)
제10비 2000 九黃洞 옥다리들 逸名寺址 부근 ×13 作…事爲聞敎令

 

 

1934 1(1) 1956 2(2),

1960 3(3) , 4 · 5 · 6 .

1985 7 · 8 . 1994년에는 9비, 2000년에는 10비가 발견되었다.

7기(1~6비, 10비)는 성 밖에서 발견되었고, 3기(7~9비)는 성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순서에 따라 제 1비에서 제 10비까지의 명칭이 붙여졌다.
비석의 형태와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재료는 자연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으로,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지방 통치체제와 역력(役力) 동원 체제 및

지방민의 신분 구성, 촌락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금석문(金石文)이다.
비석의 형태와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재료는 자연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비문은 고졸한 서체로 음각하였고 행(行)의 수와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

 

 

  경주남산성

 

이 산성은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성을 크게 쌓았는데

지금 성벽이 잘 남아 있는 부분은 이때 쌓은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다.
남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돌로 쌓았고,

성 안에는 3개의 커다란 창고가 있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경주 남산신성비는

첫째, 축조연대 및 규약부(성이 파괴되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서약문),

둘째, 축성에 참여한 촌락, 지방관의 직책 · 출신지 · 촌장의 명단 · 관등명(官等名),

셋째, 축성거리를 명시하고 있다.

 

비문은 고졸한 서체로 음각하였고 행(行)의 수와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
비문(碑文)의 첫머리에는 「신해년(辛亥年)」이라는 같은 연월일의 간지(干支)와,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떤 벌도 달게 받고 다시 와서 쌓겠다는 맹세가 새겨져 있다.

2월26일은 착공일이며 각 축성집단은 공사에 앞서 비를 세움으로써

왕에게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건축실명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각 비에는 지방관과 촌장, 기술관의 이름, 직능, 관등명을 명기함으로써

성벽에 이상이 생길 경우 책임질 사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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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3(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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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4) , 8 13(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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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辛亥年)」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진평왕(眞平王) 13년, 곧 591년이다.

 

공사 담당 거리는 각 비석마다 서로 다르지만 평균 12보(步) 2척(尺) 정도이다.

 

<삼국유사〉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에 남산성을 쌓았다.

 

그 둘레는 2,850보(步)이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성의 전체 규모는 2,854보(步, 1보는 6척, 1척은 약 30㎝).
지금까지 확인된 비의 기록을 종합하면 축성집단별로 6∼21보씩을 맡아

전체적으로는 200여 개 촌락이 참여해 공사가 진행됐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축성거리가 마을마다 달랐던 것은 험한 산악지형이어서

공사의 난이도에 따라 담당지역이 조정된 결과이다.


공사에 참여한 지역적 범위에는

경주, 함안, 의령, 의성, 상주, 옥천, 선산 등 경남북 일대 크고 작은 마을들이 포함돼 있다.

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높이 121㎝, 폭 47㎝의 소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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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지방민의 신분 구성 등을 .


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남산 종합 보존, 정비사업'에 따라

대대적으로 남산 전역에 대한 유적조사를 벌이고 있는 만큼

추가로 신성비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여 기로 추정되는 신성비 중 불과 10여기만 발견됐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 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는 축성과 관련된 이두문과 축성인이 적혀 있다.

이 이두문은 “신해년 2월26일 남산 신성을 지을 때,

법대로 지은 지 3년에 붕파된 것은 죄를 줄 일로 삼아 교지에 따라 맹서하는 일”로 시작된다.

축성 관련자 이름에는 직책과 출신지가 기록된다.

예컨대 ‘아량라두 사훼 음내고 대사(阿良邏頭 沙喙 音內古 大舍)’는

“아량촌 순시관(라두)은 사훼부의 음내고(인명) 대사(직함)”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아량’은〈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오는 ‘아시량’인데, 법흥왕 때 신라에 통합되었다.

‘아시량’은 이두식으로 풀면 ‘아래’가 되며, 우리말을 한자음으로 적은 것으로 보면 ‘아시’가 된다.

‘아시’는 ‘어시’, 곧 ‘어이’나 ‘엇’이 되니 ‘어머니’를 뜻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금석문을 통해 증명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일본 학자가 독도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은 모두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일본 사람은 20%만이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0%의 일본인은 그것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라고 하였다.

역사 기록과 발굴 유적을 두루 살피는 일은,

우리의 말글, 역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 허재영, 건국대 강의교수 · 국어학 / 한겨레 [땅이름]

 

 

 

 

신라문화재 발굴, 보존에 일생 바친 최남주

 

경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평생을 산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가 묻힌 곳은

경주 충효동 김유신 장군묘 서편 선산이다.

 

신라와 경주를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그를 기리는 추송비가 2001년 5월19일 그의 묘소 앞에 서자

언론인 고(故) 이규태 씨는 "무너진 신라의 탑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흙 밑 뒤져 청태 낀 기왓장과

비석 조각을 주워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 배달부"라고 칭송했다.

 

 

그가 배달한 역사의 흔적은 192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모태가 되는 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에

촉탁으로 참여하고, 이듬해 이 단체가 조선총독부경주박물관의 창설과 함께 그에 통합됨에 따라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 박물관 창설에 참여한 주인공이 된다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1926년 경주 서봉총 발굴이라는 역사적 현장에도 참여했으며,

특히 그 해 10월10일 스웨덴 구스타브 황태자가 발굴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훗날 석당은 1962년에는 한국-스웨덴협회를 창설하고,

1971년에는 스웨덴 최고훈장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하는가 하면,

1975년에는 스웨덴 칼 구스타브 6세 국왕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1927년 영친왕 이은 부부와 1929년 덕혜옹주가 각각 경주를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고,

1929년에는 경주 노서리 서봉총 다른 쌍분인 '데이비드 총' 발굴에도 참여했다.

 

1932년에는 경주 원원사 석탑을 복원하고, 1934년에는 경주 남산신성비를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경주박물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외에 지금의 경주와 신라를 이야기할 때도 석당은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른바 '강단사학자'가 아닌 '재야사학자'였지만

경주에 관한 한 그를 뛰어넘을 강단사학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박물관학회(회장 이종선)가 그의 이런 업적들을 기려

그 기관지로 최근 발간된 '박물관학보' 12ㆍ13합집을 '석당 최남주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호'로 꾸몄다.

 

이 특집호는 지난해에 나와야 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다소 시간을 넘겨 이제 나온 것이다.

 

이에 이번 호는 석당의 다양한 활동 면모를 전하는 사진자료와 그의 직접 증언,

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추모나 회상기, 그와 관련한 신문 잡지 등의 보도문 등을 정리해 수록했다.

 

이종선 회장은 "신라문화재의 발굴과 보존에 일생을 바친 석당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한국박물관학회 석당 탄생 102주년 특집호

- 2008-10-20 김태식기자, (c)연합뉴스

 

  

  

 

 

 

 

 

 

경주남산신성비 제1비(慶州南山新城碑 第一碑)

 

591년(진평왕 13)/ 높이 91cm, 최대폭 44cm, 두께 5~14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구 경주군 내남면 탑리) 식혜골[識惠谷] 김헌용(金憲鎔)의 집 앞

                          

                                         

 


 

명문 내용 :

신해년이월입육일남산신성작절여법이작후삼(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後三)

년붕파자죄교사위문교령서사지아양라두사훼(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阿良邏頭沙喙)

음내고대사노함도사사훼합친대사영고도사사(音乃古大舍奴含道使沙喙合親大舍營沽道使沙)

훼(喙)△△△지대사군상촌주아량촌금지찬간칠토(知大舍郡上村主阿良村今知撰干柒吐)

△△지(知)이리상간장척아량촌말정차간노함촌차(利上干匠尺阿良村末丁次干奴含村次)

△△예간문척(禮干文尺)△문지아척성촉상아량몰나생상(文知阿尺城促上阿良沒奈生上)

간공척아(干工尺阿)△정차간문척죽생차일벌면촉상진건(丁次干文尺竹生次一伐面促上珍巾)

△면촉상지예차(面促上知禮次)△촉상수(促上首)이차소석촉상욕(次小石促上辱)

차(次) △△△수십일보삼척팔촌(受十一步三尺八寸)

 

 

남산 신성비 제1비는 남산 신성에서 발견된 10개의 비 가운데 하나로

 

신라 진평왕 13년에 유사시에 신라의 왕성인 월성을 피해 피난하기 위해 만든

신성의 축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비이다.  

비문에는 591년 성의 축조 당시 공사에 참가한 책임자의 관직과 이름, 출신지, 맡구역과 함께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떤 벌도 달게 받고 다시와서 쌓겠다는 맹세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에 적힌 신해년 2월26일의 간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의 축조연대와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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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신성비(제1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 (제1비) 높이 91.0cm 경주 남산 탑동 식혜골 출토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後三」
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阿良邏頭沙喙」
音乃古大舍奴道使沙喙合親大舍營沽道使沙」
喙▨▨知大舍郡上村主阿良村今知撰干柒吐」
▨▨知尒利上干匠尺阿良村末丁次干奴村次」
▨▨干文尺▨文知阿尺城使上阿良沒㚓生上」
▨▨尺阿次干文尺竹生次一伐面捉上珎
▨門捉上知捉上首尒次小石捉上辱次」
 ▨▨受十一步三尺八寸」


1문단: Ⅰ행 제1자(辛)부터 Ⅱ행 제14자(之)까지
2문단: Ⅱ행 제15자(阿)부터 Ⅸ행 제3자(▨)까지
3문단: Ⅸ행 제4자(受)부터 마지막자(寸)까지

<1문단>
신해년1 2월 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2만들 때3,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4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서약(誓約)케 하였다5.


<2문단> 아량나두(阿良邏頭)6인 사훼(부)(沙喙(部))의 음내고(音乃古) 대사(大舍),

노사도사(奴舍道使)7인 사훼(부)(沙喙(部))의 합친(合親) 대사(大舍),

영고도사(營沽道使)인 사훼(부)(沙喙(部))의 요▨▨지(夭▨▨知) 대사(大舍),

군상촌주(郡上村主)8인 아량촌(阿良村)의 금지(今知) 찬간(撰干)9,

칠토▨▨지이리(柒吐▨▨知尒利) 상간(上干)10,

장척(匠尺)11인 아량촌(阿良村)의 말정차(末丁次) 간(干)12,

노사촌(奴舍村)의 차▨▨(次▨▨) 간(干), 문척(文尺)인 ▨문지(▨文知) 아척(阿尺)13,

성사상(城使上)14인 아량(阿良)의 몰내생(沒奈生) 상▨(上▨), ▨척(▨尺)인 아▨▨차(阿▨▨次) 간(干),

문척(文尺)인 죽생차(竹生次) 일벌(一伐)15, 면착상(面捉上)16인 진앙▨(珎卬▨),

문착상(門捉上)인 지례차(知次), 착상(捉上)인 수이차(首尒次),

소석착상(小石捉上)인 욕차▨▨(辱次▨▨)


<3문단> 11보(步) 3척(尺) 8촌(寸)을 받았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2비(慶州南山新城碑 第二碑)

 

전체 길이 121cm, 윗폭 28cm, 아래폭 26cm, 중간 최대폭 47cm, 두께 7~14cm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서쪽 능선의 전(傳) 일성왕릉(逸聖王陵) 부근에서 출토

 

 

가. 비의 현황

() 제2(碑)

1956 6 () () ,

1960 12 관에 .

1 () ,

121cm, 28cm, 26cm, 47cm, 7~14cm .

() 11 183 21 18,

I () , XI .


나. 건립 연대와 성격

1 591( 13) () .

(), (), () 1 ,

(), () (), ()

.

 

 

阿大兮村
年二月廿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三」
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阿且兮村」
道使沙喙勿生次小舍仇利城道使沙喙級知小舍」
大支村道使喙所叱孔知郡中上人沙」
刀城西利之貴干久利城首利之撰干匠」
尺沙戶城可沙里知上干文尺美叱▨之一伐阿大」
兮村作上人所之上干尺可尸▨之一伐文尺」
之一尺面石捉人仁尒之一伐回石捉人」
首叱兮之一尺石捉人乙安尒之彼小石捉人」
丁利之彼受作七步四尺」
 

비문의 전체 내용은 Ⅰ행의 ‘阿大兮村’을 제외하고 세 문단으로 구분된다.

1문단은 Ⅱ행 첫자(辛)부터 Ⅲ행 제14자(之)까지이고,

 2문단은 Ⅲ행 제15자(阿)부터 行 제5자(日)까지,

3문단은 Ⅺ行 제7자(受)부터 마지막자(尺)까지이다.

<1문단>
아대혜촌(阿大兮村)17다음의

‘辛亥年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後三年崩破者罪敎事18 爲聞敎令誓事之19’부분은

「남산신성비」제1비와 동일하다.

‘신해년(辛亥年) 2월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만들 때,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誓約)하게 하였다’로 해석된다.

 

<2문단> 지방행정구역의 장(長)으로 보이는 3인이 먼저 열기되었다.

아차혜촌(阿且兮村)20 도사(道使)21인 사훼(부)(沙喙(部))의 물생차(勿生次) 소사(小舍)와

구리성(仇利城) 도사(道使)인 사훼(부)(沙喙(部))의 급지(級知) 소사(小舍)와

 답대지촌(答大支村)22 도사(道使)인 훼(부)(喙(部))의 소질공지(所叱孔知) ▨▨’로 끊어 읽힌다.

 

그 아래에는 ‘군중상인(郡中上人)23사도성(沙刀城)24 출신 평서리지(平西利之) 귀간(貴干)25

구리성(久利城)26 출신 수구리지(首仇利之) 찬간(撰干)’이 적혀 있고,

또 그 아래에는 ‘장척(匠尺)인 사호성(沙戶城)27 출신의 가사리지(可沙里知) 상간(上干)과

문척(文尺)28인 미질▨지(美叱▨之) 일벌(一伐),

그리고 아대혜촌(阿大兮村) 작상인(作上人)29인 소평지(所平之) 상간(上干)과

척(尺)인 가시▨지(可尸▨之) 일벌(一伐), 문척(文尺)인 득모▨지(得毛▨之) 일척(一尺)30

면석착인(面石捉人)31인 인이지(仁尒之) 일벌(一伐),

회(면)석착인(回(面)石捉人)인 수질혜지(首叱兮之) 일척(一尺),

▨석착인(▨石捉人)인 을안이지(乙安尒之) 피(일)(彼(日))32

소석착인(小石捉人)33인 정리지(丁利之) 피일(彼日)’ 등의 인명이 나열되었다.


<3문단> ‘受作七步四尺’은 그들이 담당한 축성거리(築城距離)를 나타낸 것이다.

「남산신성비」제1비가 ‘十一步三尺八寸’인 사실을 감안하면, 비교적 짧은 거리이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3비(慶州南山新城碑 第三碑)

 

 

591년(진평왕 13)/ 전체 길이 80.5cm, 폭 상단 30cm, 하단 23cm, 두께 10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구 排盤里) 사천왕사(四天王寺) 부근 이판출(李板出)의 집

 

 

(: ) () () ,

1960 6 ()

() .

() ().

() () ().

() , ()

1 () .
6 120 , .

,

1 13(591) .

  ,

,

.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
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喙」
部主刀里受作卄一步一寸部監▨▨▨次大舍」
仇生次大舍文尺仇▨▨小舍里作上人只冬大舍▨文知」
小舍文尺久匠面石捉上人▨▨▨▨▨▨▨▨」
大鳥▨石捉人▨下次大鳥小石捉上人▨▨小鳥」

 

전체 비문은 두 문단으로 나뉘어진다.

1문단은 Ⅰ행 첫자(辛)부터 Ⅱ행 제16자(之)까지이고,

2문단은 Ⅱ행 제17자(喙)부터 Ⅵ행 마지막자까지이다.

<1문단> 「남산신성비」제1비와 똑같은 내용이다.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만들 때,

법(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붕파(崩破)하면 죄(罪)로 다스릴 것을 널리 알려

서약(誓約)하게 하였다’로 해석된다.


<2문단>

처음의 ‘喙部主刀里受作卄一步一寸’은 훼부(喙部) 주도리(主刀里)34가 맡은 작업량을 명기한 것이다.

여기서 21보(步)는 1보를 6척(尺)으로 계산하여 126척이 되는데,

여타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작업량과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작업 감독자와 실무 담당자들의 인명을 나열하였다.

부감(部監)35▨ ▨▨차(▨▨次) 대사(大舍)와 구생차(仇生次) 대사(大舍),

문척(文尺) 구▨▨(仇▨▨) 소사(小舍)36,

이작상인(里作上人)37 지동(只冬) 대사(大舍)와 ▨문지(▨文知) 소사(小舍),

문척(文尺) 구장(久匠) 길사(吉士)38, 면석착상인(面石捉上人)39대오(大烏),

▨석착인(▨石捉人) ▨하차(▨下次) 대오(大烏), 소석착상인(小石捉上人) ▨▨ 소오(小烏)’로 끊어 읽힌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4비(慶州南山新城碑 第四碑)

 

높이 (좌측) 51cm, (우측) 39cm, 폭 (상부 절단면) 34cm, (하부) 32cm, 두께 3.5~3.9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서쪽 능선의 전(傳) 일성왕릉(逸聖王陵) 부근

 

 

4 1960 12, 2 ()

 

국립 . () ,

() () .

, () .
10 55 ,

180 190 .

 

 

節如法以」
  聞敎令誓事」
  邏頭沙喙弩」
  貝太舍一善支」
  古生村珎」
  利上干匠尺」
  古一伐古生城上」
  只一尺書尺夫」
 次石捉上人」
▨次小石捉上人」

 

… 때, 법(法)에 따라 (만들어) …
… 알려 서약(誓約)하게 한다. …
나두(邏頭)40인 사훼(부)(沙喙(部)) 출신의 노(弩) …
… ▨ 대사(大舍)와 일선지(一善支) …
… 고생촌(古生村) 출신의 진(珎) …
… 리(利) 상간(上干)과
장척(匠尺)41
… 고(古) 일벌(一伐)과 고생성(古生城) 상(上) …
… 지(只) 일척(一尺)과
서척(書尺)42인 부(夫) …
… 차(次) 소사(小舍)와
▨석착상인(▨石捉上人)43
… 차(次) 피일(彼日)과 소석착상인(小石捉上人)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5비(慶州南山新城碑 第五碑)

 

높이 22cm, 너비 20cm, 두께 9.2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沙正洞) 흥륜사역(興輪寺域) 중문지(中門址)로 추정되는 곳의

            옛 집터 돌무더기 속

 

 

5 1972 8

() () () ()

.

.

. 7, 41 .

 

 

 辛亥
崩破者罪敎事爲聞▨
道使▨▨啄部▨文▨
問村▨▨上干同▨
▨城作上人▨
▨▨一利▨
另囗


… 신해년(辛亥年)에 …
… 붕파(崩破)하면 죄(罪)로 다스릴 것을 알려 …
… 도사(道使) ▨▨훼부(▨▨喙部) 출신의 ▨문▨(▨文▨) …
… 문촌(問村) 출신의 ▨▨ 상간(上干)과 동▨(同▨) …
… ▨성작상인(▨城作上人)인 ▨ …
… ▨▨일리▨(▨▨一利▨) …
… 령▨(另▨)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6비(慶州南山新城碑 第六碑)

 

전체 길이 18cm, 폭 8cm

 

 

6 1974 3 ,

1975 1 23 () .

18cm, 8cm, 2cm , 2 4 .

 

 

▨尺同▨▨
尺豆▨


▨척동▨▨(▨尺同▨▨)
척두▨(尺豆▨)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7비(慶州南山新城碑 第七碑)

 

높이 25.0cm, 폭 18.5cm, 두께 4.3~5.5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신성 남쪽성벽

 

제7비(종래의 8비)는 1985년 남산신성 남쪽성벽 내측의 민묘(民墓) 앞에서 수습되었다.

앞서 발견된 남산신성비 들이 성에서 멀리 떨어진 민가 부근에서 수습되었던 것에 

7 8 () .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
節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
事爲▨▨▨誓事之▨▨▨▨▨」
▨▨▨▨▨▨舍▨▨▨▨▨▨」


신해년44 2월 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 만들 때,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45이라는 사실을 … 서약(誓約)케 하였다46.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판독자 : 이명식 

 

 

 

경주남산신성비 제8비(慶州南山新城碑 第八碑)

 

높이 22.5cm, 폭 22.2cm, 두께 4.3cm~5.2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신성 북문지

 

8( 9) .

 

,

7 8 () .

 

 

奈日」
나일(奈日)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1992)]

 

 

 

 

경주남산신성비 제9비(慶州南山新城碑 第九碑)

 

높이 90cm, 폭 39cm, 두께 18.5~23.5cm

출토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신성 서쪽 성벽

 남산신성비(제9비)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 (제9비) 높이 90.0cm 경주 배동 남산신성 내 출토

 

9 10 9 .

 

7 .


1994 150m

 

.

() ,

.
, (),

679( 19) .()

9  10 155 () .

.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
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
令誓事之伋伐郡中伊同城徒受六步」
郡上人曳安知撰干生伐城文上干匠」
尺同村內丁上干斤谷村另利支文尺」
生伐只次丈城促上人伊同村▨尸丁」
上干工尺指大么村入夫▨文尺伊同」
村▨次兮阿尺面促伯干支村支刀面」
捉同村西西阿尺捉人伊同村▨
伯干支村戊七」

[출전 : 「南山新城碑 第9碑에 대한 檢討」『美術資料』53(1994)] 판독자 : 박방룡

  

 

 

 

경주남산신성비 제10비(慶州南山新城碑 第十碑)

높이 27㎝ 폭 16.5㎝ 두께 13cm

출토지 : 경주시 배반동 751-3, 논둑(九黃洞 옥다리들 逸名寺址 부근)

 

 

지난 1994년 경주 창림사지 부근에서 9번째비가 발견된 이후 6년여만에 10번째비가 발견된 것이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남산 주변에서만 10개가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99년부터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마련한

'경주 남산 종합 보존 · 정비사업' 계획에 따라 남산 전역(史蹟 제311호)에 대한

보존 · 정비 세부추진계획서와 종합도록 발간 및 복원 · 정비를 위한 발굴과

불상 정밀실측 및 정밀지표조사 등의 사업을 추진중에 있어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중

지난 2000년 5월 18일 경주시 배반동 751-3번지 논둑(九黃洞 옥다리들 逸名寺址 부근, 지도 참조)에서

글자가 새겨진 비석편을 발견 · 수습하여 조사한 결과 남산신성비임을 확인하였다.

 

 

 

수습된 碑片은 높이 27×폭 16.5×두께 13(cm) 크기로,

碑文의 모두(冒頭)부분에 해당하는 3행 5줄의 銘文(15字)이 확인된다.  

한 글자의 크기는 2.5×2.5(cm)로 지금까지 발견된 9기의 남산 신성비중 완형인 제 1, 2, 3, 9비 등의

예로 보아 비문의 전체적인 크기는 65×59(cm)로 추정할 수 있다.

비의 재질은 붉은 색조의 화강암으로,

파손된 후 남산신성에서 약 1.1km 떨어진 현재의 출토지까지 이동된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 발견된 남산신성 제10비에는(序頭部는 기 발견 碑와 내용 동일)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

'신해년이월(辛亥年二月)…절여법이작(節如法以作)…사위문교령(事爲聞敎令)'이 확인되는데,

이를 풀면 '신해년(591) 2월26일에 남산신성을 만듦에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안에 무너져 파괴되면

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誓約케 하노라'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신성비와 같은 내용이다.

 

※ 남산 신성비는 眞平王 13년(591) 남산신성을 축성한 후 세운 碑로서,

축조연대를 시작으로 規約部(성이 파괴되면 죄로 다스린다는 내용) · 축성관련자 집단 · 관직(道使 등) ·

人名 · 축성거리 등을 기재하였다.

『三國史記』기록에는 남산신성의 전체적인 규모가 2,854보(步)로 기록되어 있고,

기 발견된 비의 전체내용으로 보아 일개 축성집단의 담당거리가 대략 6∼21보인 점을 감안할 때

향후 남산 문화유적 복원 · 정비를 위한 발굴 등이 실시되면

새로운 남산신성비가 계속 출토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2000년 5월18일 경주시 배반동 일명사지 부근 논둑에서 남산 전역(史蹟 제311호)에 대한

보존 · 정비 계획의 하나로 정밀 지표조사를 벌이던 중 비석편을 발견해 분석한 결과

10번째 남산신성비로 확인됐다”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밝혔다.

연구소에 따르면 비석은 붉은 색을 띤 화강암에 높이 27㎝, 폭16.5㎝의 파편 형태이며

한자명문 15자가 확인됐다.

명문 내용은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안에 무너지면 그 죄를 다스리겠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으로

다른 신성비와 같다.

연구소쪽은 “신라시대 통치사와 고대 금석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남산신성비는 진평왕 13년(591) 남산신성이라는 성을 축성한 후 세운 碑로,

여기에는 축조연대를 시작으로 성이 파괴되면 죄로 다스린다는 내용과

축성관련자 집단과 여기에 관여한 관직, 사람이름, 구간별 축조를 맡은 거리 등을 담고 있다.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똑같이 남아있어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전체적인 규모가 2천854보(步)로 기록되어 있고

이미 발견된 비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1개 축성집단의 담당거리가 대략 6∼21보인 점을 감안할 때

향후 새로운 남산신성비가 계속 출토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관련, 진홍섭 박사는 남산신성비 숫자가 대략 200개쯤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비만으로도 신라가 각 지방을 어떻게 통치했으며

얼마나 중앙집권적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산신성의 축성과 관련한 기록을 담은 이 비석들에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축성기록이 담겨있다.

완형으로 발견된 제1비의 내용을 참조하면 이번에 새로 발견된 비문의 내용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 한겨레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 연합뉴스 외 2000년 5월25일자 일간신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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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1 5
() , 1984, ,

(), 1983, ()22,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1. ‘辛亥’는 원비문에 ‘’라는 이체자(異體字)로 쓰여 있다. 본절의 개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연대는 진평왕 13년(591)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2. 이 성(城)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권4 진평왕 13년(591년)조와 같은 책 권6 문무왕 3년(663년)조 및 권7 문무왕 19년(679년)조, 권34 지리(地理)1 신라조(新羅條) 등에 축성과 증축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에서도 권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관련 기록이 있다. 성(城)의 총 길이는 2,854보(步)라고 한다. [본문으로]
  3. ‘節’에는 ‘時’의 뜻이 있으므로, ‘만들 때’ 혹은 ‘만듦에 있어’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4. ‘罪敎’는 ‘令罪’, ‘使罪’의 뜻이고, ‘事’는 ‘일’을 나타내므로, ‘죄줄 것’ 혹은 ‘죄로 다스릴 것’으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5. ‘令誓’는 ‘使誓’의 뜻이 되므로, ‘誓約하게 한 일이다’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6. 아량(阿良)지역의 나두(邏頭). 아량(阿良)과 본 비문의 아래에 나오는 노함(奴含), 영고(營沽), 칠토(柒吐) 등은 오늘날 慶南의 咸安, 宜寧地方에 비정된다. 邏頭는 아래에 보이는 道使와 함께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다. 한편 아량나두(阿良邏頭)를 ‘阿良邏郡의 頭’ 즉 ‘阿良邏郡 太守’로 본 견해도 있다(末松保和). [본문으로]
  7. 노함(奴含)지역에 파견된 도사(道使). [본문으로]
  8. 아량촌(阿良村)을 관할하던 군(郡)의 상촌주(上村主)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신라 하대(下代)의 금석문인 「규흥사종명(竅興寺鐘銘)」에도 ‘上村主’가 보이는데, 거기에는 ‘第二村主’, ‘第三村主’ 등도 나오고 있다. [본문으로]
  9. 신라 외위(外位) 5등급. 문헌상에는 선간(選干)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경위(京位) 11등급인 내마(奈麻)와 동격이다. [본문으로]
  10. 신라 외위 6등급. 경위 12등급인 대사(大舍)와 동격이다. [본문으로]
  11. 뒤에 보이는 ‘文尺’과 함께 일종의 기술직(技術職)으로 파악된다. [본문으로]
  12. 신라 외위 7등급. 경위 13등급인 사지(舍知)와 동격이다. [본문으로]
  13. 신라 외위 11등급. 경위 17등급인 조위(造位)와 동격이다. [본문으로]
  14. 다른 금석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使’를 ‘作’으로 보고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제2비와 제3비, 제5비 등에 나오는 ‘(村·城·里)作上人’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본문으로]
  15. 신라 외위 8등급. 경위 14등급인 길사(吉士)와 동격이다. [본문으로]
  16. 「남산신성비」 제2비와 제3비 등에 보이는 ‘面石捉人’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비문의 아래에 보이는 ‘門捉上’, ‘小石捉上’ 등과 함께 기술상의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본문으로]
  17. 지금의 충북 옥천군 안내면 일대로 비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4 지리(地理)1 상주조(尙州條) 참조. [본문으로]
  18. ‘罪敎’는 ‘令罪’, ‘使罪’의 뜻이고, ‘事’는 ‘일’의 의미이므로, 죄교사(罪敎事)는 ‘죄를 내린다 혹은 죄로 다스린다’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19. ‘敎令’은 ‘ … 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誓約하게 한다‘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20. 지금의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에 비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4 지리(地理)1 상주조(尙州條) 참조. [본문으로]
  21. 지방행정구역의 ‘長’을 이르는 말이다. 「남산신성비」제1비에는 도사(道使)가 촌(村)에만 파견된 것으로 나왔는데, 여기서는 성(城)에도 파견된 것이 확인된다. [본문으로]
  22. 지금의 경북 상주군 화서면 회령에 비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4 지리(地理)1 상주조(尙州條) 참조. [본문으로]
  23. 지방의 유력자인 것은 확실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직책이었는지 잘 알 수 없다. 축성에 작업인원을 동원한 촌주(村主)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24. 오늘날 상주지방에 위치하였던 성(城)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2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 3년조, 유례니사금(儒禮尼師今) 9년조, 10년조 등에 보이는 ‘沙道城’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으로]
  25. 외위 제4등급으로서, 경위 제10위 대나마(大奈麻)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26. 앞의 구리성(仇利城)과 동일한 성(城)으로 보이나, 미상이다. [본문으로]
  27. 사도성(沙刀城)과 동일한 성(城)으로 보이나, 미상이다. [본문으로]
  28. 일종의 기술직인데, 기록의 업무를 가진 직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29. 실제 작업을 책임진 자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30. 외위 제9등급으로서, 경위 제15위 대오(大烏)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31. 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기술자로 보인다. [본문으로]
  32. 비문에는 ‘日’이 잘 확인되지 않으나 ‘彼日’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일(彼日)은 외위 제10등급으로서 경위 제16위인 소오(小烏)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33. 돌을 다루는 기술자로 보인다. 추측컨대 ‘石捉人’은 여러 명이 있어 그 지위의 고하(高下)에 따라 명칭이 구별되었던 것 같다. [본문으로]
  34. 훼부(喙部) 소속의 방리명(方里名)으로 보는 견해와 축성(築城) 책임자의 인명(人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35. 바로 뒤의 미상자(未詳字)를 ‘等’으로 보면, ‘部監等’이 하나의 직명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작업 감독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36. 경위 17관등 중에서 제13위. 사지(舍知)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7. ‘作上人’은 「남산신성비」제2비에 ‘阿大兮村作上人所平之上干’의 예가 있고, 제5비에도 ‘城作上人’의 예가 있다. 실제 작업을 책임진 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으로]
  38. ‘韋’, ‘堂’ 등으로 판독하기도 하나, 이 비문에 ‘大舍’나 ‘小舍’, ‘大烏’, ‘小烏’ 등의 관등명이 한 글자 공간에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역시 ‘吉士’가 위아래로 붙어 한 글자처럼 보이는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길사(吉士)는 경위 17관등 중 제14위. [본문으로]
  39. 이 비에는 면석착상인(面石捉上人), □석착인(□石捉人), 소석착상인(小石捉上人) 등의 직명이 나오는데, 지위의 고하에 따른 구분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술직으로 보고 있다. [본문으로]
  40. 「남산신성비」제1비에도 ‘阿良邏頭’의 예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 부분의 바로 앞에는 나두(邏頭)가 파견된 지역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명활산성비(明活山城碑)」에는 ‘上人邏頭’의 예도 있다. [본문으로]
  41. 「남산신성비」제1비와 제2비에도 보이는데, 기술직으로 추정된다. [본문으로]
  42. 다른 비에서는 볼 수 없는 직명이다. 「창녕비(昌寧碑)」에는 ‘書人’의 예도 있는데, 서자(書者)의 뜻으로 보아 비문을 쓴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43. 석공(石工)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타 「남산신성비」에는 비슷한 용례로써 ‘面石捉上人’, ‘面石捉人’, ‘面捉上’, ‘石捉上人’, ‘石捉人’, ‘小石捉上人’, ‘小石捉人’ 등이 있다. [본문으로]
  44. 이 연대는 진평왕 13년(591)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45. ‘罪敎’는 ‘令罪’, ‘使罪’의 뜻이고, ‘事’는 ‘일’을 나타내므로, ‘죄줄 것’ 혹은 ‘죄로 다스릴 것’으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46. ‘誓約하게 한 일이다’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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