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매월당 김시습

Gijuzzang Dream 2009. 1. 28. 12:08

 

 

 

 

 

 세종이 칭찬한 수재,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단종이 물러난 뒤 끝없는 방랑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에게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신동’(神童)이란 말이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요약한 내용이 전해진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서,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르니 봄이 저무는구나/ 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

(桃紅柳綠三春暮/ 珠貫靑針松葉露)라는 구절을 지었다.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배웠다.”

 

 

검은 물 들은 옷을 입고 산인이 된다면…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쳤고 다섯살 때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사진/ 권태균)

 

<패관잡기>는 다섯 살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에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고 하기에,

곧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어서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神童)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김시습이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는 ‘국민 신동’이 된 계기는 세종과의 일화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은 세종이 다섯 살 때의 김시습을 부른 이야기를 전한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해 물었다.

박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세종을 대신해,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곧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또 벽에 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박이창이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라는 전교(傳敎)를 내리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며 가지고 가게 했더니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나갔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때부터 그는 ‘김오세’(金五世)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이 유양양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종이 ‘내가 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교양시켜서 자라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라고 했다”면서

‘내려주신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인데,

자호(自號)를 동봉(東峯),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그의 선대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서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 강릉) 군왕(郡王)으로 봉함받았던 김주원(金周元)이다.

그의 부친 김일성(金日省)은 음서(蔭敍)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사대부였으나,

그는 설잠(雪岑)이란 법명을 가진 승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촉망받던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단종 폐위 사건이 그의 운명을 예기치 못한 길로 끌고 간다.

<매월당집> ‘유적수보(遺蹟搜補)’ 는

“나이 21살 때 삼각산 속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단종이 손위(遜位)하였다는 말을 듣자

문을 닫고서 나오지 않은 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미친 듯 더러운 곳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도망하여 행적을 불문(佛門)에 붙이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때부터 세상에 뜻을 잃고 각지를 방황하는데,

<관서를 유람한 기록(遊關西錄)>, <관동을 유람한 기록(遊關東錄)>, <호남을 유람한 기록(遊湖南錄)> 

등의 시문집은 이런 방랑의 자취들이다.

 

이 중 <관서를 유람한 기록> 뒷부분의 ‘방탕하게 관서를 유람한 기록 뒤에 덧붙이는 글(後志)’에서

방랑의 소이를 적고 있다.

 

“내 어려서부터 방탕하여 명리를 좋아하지 않고, 생업도 돌보지 않고,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으로 포부를 삼아, 평소에 산수에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읊고 구경하고자 했었다.

일찍이 거자(擧子 · 과거 준비생)가 되었을 때 친구들이 지나면서 지필을 주면서

다시 과거에 힘쓸 것을 권했으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을 만나 내가 스스로 말했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행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혼자 그 몸을 착하게 하는 것이 옳다.’

사물 밖에 둥둥 떠서 살면서 도남(圖南)과 사막(思邈)의 풍모를 우러르고 사모하려 했으나

우리나라 풍속에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만약 검은 물을 들인 옷을 입고 산인(山人)이 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 집필

 

이 글은 김시습의 변신 이유를 잘 말해준다.

원래 과거에는 뜻이 없던 중 ‘감개한 일’, 즉 세조의 왕위 찬탈을 만나 세상일에 미련을 버렸다.

도남이나 사막 같은 선인(仙人)을 사모했으나 조선에는 그런 사례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닫고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시습은 유자(儒者)였다가 유자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김시습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김시습이 마음속으로는 계속 유자였다고 강조한다.

앞의 ‘유적수보’는 “세상에 전해오기를, 매월당이 태어날 때에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가 반궁리 김일성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꿈꾸고 이튿날 그 집에 가 물어보니

아이(매월당)가 태어났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 역시 김시습이 유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과거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것은 유학 자체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경주에 있는 용장사 터.

김시습은 이곳에 머물며 안정을 되찾았고,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했다.(사진/ 권태균)

 
그는 21살 때부터 29살 때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송도를 거쳐 관서(關西 · 평안도)와 관동(關東 · 강원도), 그리고 호남을 유람했다.

인생의 황금시기를 유람으로 소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려는 뜻이고,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

라고 말한 대로 세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의 기행도 세상을 버리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領相) 정창손(鄭昌孫)을 만나자,

“네놈은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꾸짖었고,

정창손은 못 들은 체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겨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했다고

‘유적수보’는 전한다.

이런 일화들은 역으로 그가 세상사에 가진 관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김시습의 도인(道人)적 일화가 전해진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당대의 명사들이 김시습의 주거지인 용산 수정(水亭)에 찾아와 담소했는데,

내일은 풍악산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담소하던 김시습이 갑자기 창밖으로 떨어져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친구들이 그를 정자 안에 메어다 놓고,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떠나겠는가?”라고 말하자,

“자네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기다리게. 곧 조섭해서 조금이라도 낫게 되면 떠나겠네”라고 답했다.

다음날 아침 누원에서 김시습이 전혀 다친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이야기했고,

남효온이 “자네는 어찌하여 환술을 써서 우리를 속이는가?”라고 말했다는 일화이다.

 

김시습은 서른한 살 때 경주 남산 금오산(金鰲山) 남쪽 동구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금오산실이며 당호가 매월당이었다.

 

그는 “금오산에 살게 된 이후 멀리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쓴 대로 안정을 되찾았고,

서른일곱 살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해

여러 시문집을 지었다.

이 시절 김시습은 생장지인 서울을 객관(客官), 서울에서 꾸는 꿈을 객몽(客夢)이라고 할 정도로

금오산을 마음에 들어했으나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물질을 중시하는 기 철학 주장

 

율곡 이이(李珥)가 선조의 명으로 지은 <김시습 전기>는

47살이 되던 성종 12년(1481)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지냈다”며

제문까지 실었는데, 이는 한때 입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비에 휘말렸던 이이가

김시습을 유자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 주석했다가

이곳에서 쉰아홉인 성종 24년(1493) 2월 병사했다.

현재도 무량사에는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시습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서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는 서로 달랐다.

이황은 “매월당은 한갓 괴이한 사람으로 궁벽스러운 일을 캐고 괴상스러운 일을 행하는 무리에 가깝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라면서 낮게 평가했다.

 

반면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 전기>를 쓴 율곡 이이는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라고 극찬했다.

두 대유(大儒)의 서로 다른 평가는 실상 김시습의 사상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시습은 불교에 입도해 선도에 심취했지만 정작 그 철학적 기초는 물질을 중시하는 기(氣) 철학이었다.

 

“천지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가 운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면 굽혔다 피기도 하고, 차기도(盈) 하고 비기도(虛) 한다.

…펴면 가득 차고, 구부리면 텅 비지만, 가득 차면 도로 나오고 텅 비면 도로 돌아간다.

나오면 ‘신’(神)이라 하고 돌아가면 ‘귀’(鬼)라 하지만 그 실리(實理)는 하나요, 그 나눔이 다를 뿐이다.”

<‘귀신설(鬼神說) ’>

 

이는 만물의 본질이 기, 즉 물질이라는 주기론(主氣論)으로서

그 시대 사대부의 상식인 주리론(主理論)을 정면에서 거부한 것이다.

그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이

사대부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념임을 간파하고 주기론을 주창한 것이다.

 

“천지 사이에 나고 또 나서 다함이 없는 것은 도(道)요,

모였다 흩어졌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理)의 기(氣)다.

모이는 것이 있으므로 흩어진다는 이름이 있게 되고, 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간다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며,

생(生)이 있기 때문에 사(死)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니, 이름이란 기의 실사(實事)다.

기가 모인 것이 태어나서 사람이 되고… 기가 흩어진 것은 죽어서 귀(鬼)가 된다.” <‘생사설(生死說)’>

 

 

“군주와 필부는 머리카락 차이”

 

김시습보다 66살 뒷사람인 퇴계 이황(1501~1570)까지도

주리론에 따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던 판국에

그의 주기론은 사상계의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론은 율곡 이이(1536~8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선 성리학의 정통 이론의 하나가 된다.

 

그는 비록 세상을 버린 것 같았지만 “의(義) 아닌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는 변(辨)”을 쓴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의에 주리고 백성들의 고통에 슬퍼했다.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민서(民庶)뿐이다.

민심이 돌아와 붙좇으면 만세토록 군주가 될 수 있으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 저녁도 기다리지 못해서 필부(匹夫)가 되는 것이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머리카락(毫釐)의 차이로 서로 격해 있을 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름(倉廩 · 곡식 창고)과 부고(府庫 · 재물 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관(冠 · 모자)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주식(酒食)과 음선(飮膳)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실(宮室)과 거마(車馬)는 백성의 힘이요,

공부(貢賦 · 세금)와 기용(器用 · 물건)은 백성들의 피다.

백성이 10분의 1을 내서 위에다 바치는 것은 원후(元后 · 군주)로 하여금 그 총명을 써서

나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음식을 받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음식을 먹는가를 생각하고,

옷을 입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옷을 입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애민의(愛民義)’>

 

왕조 시절에 가슴 서늘한 논설이 아닐 수 없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신동’(神童)조에서

“어려서 총명하고 영리했던 수재가 차츰 장성해서는 도로 그 빛나던 재질이 줄어든 것을 보았으니…

공명과 사업이 반드시 이런 사람들(신동)에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뛰어난 머리로 세상을 속이고 백성들을 등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역사에서

끝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버렸던 김시습이 진정한 천재가 아니겠는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 한겨레 21 제654호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세계

경주 남산 용장사지를 가다

경주 남산 <용장사 석탑>

매월은 김시습의 호이자 남산의 옛이름.

 

 

“매화(梅)에 달빛(月) 가득하니 속세 떠난 선사따라 노닌다”

고위봉과 금오봉 사이로 흐르는 용장골은 경주 남산의 많은 계곡 중 가장 깊고 크다.

금오산 정상 아래 도로에서 1㎞ 가량 통일전 방향으로 걸어가면 용장사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온다.

언양행 국도변의 용장리 마을에서 계곡으로 더듬어 오르다 땀이 홍건할 즈음

멀리 산꼭대기 용장사터 삼층석탑이 마치 부처님의 나라로 맞이하는 듯 세상을 내려보며 서있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꿈과 현실에 울분을 되새기면서 10년여 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편력하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29세 되던 해 찾은 용장석탑도 지금처럼 반갑게 맞이하며 기다렸으리라 .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낳은 곳 금오봉 용장사지에 올랐다.

5세 때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했던 매월당은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던 중 세조의 단종 폐위 사건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통곡한 뒤

읽고 있던 책을 모두 내어 불태운 다음 스스로 머리를 깎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설잠(雪岑). 높고 아른한 눈 덮힌 산이라는 법명의 수행자가 된 것이다.

단종 폐위 접한 후 출가

아마 단종 폐위 사건이 없었다면 설잠은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율곡이 평한대로 “성질이 굳세고 곧아 세속을 분개”하였던 그는

충(忠)을 거슬린 수양대군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기개있고 제대로 된 선비라면 죽음을 택하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두가지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이 비록 척불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이미 천년을 내려온 불교를 신생왕조가 완력으로 금지한다 해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 법. 불교는 유학에 염증을 느낀 선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10여 년의 만행을 통해 그는 불교를 익히고 세속의 속내를 샅샅이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착한 곳이 금오산. 지금의 경주 남산인 금오산은 절터가 100여 곳,

석탑과 불상이 150여 개가 남아있는 신라 불교 유적의 보고다.

지상 극락정토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서린 곳.

김시습도 이 곳에서 정토의 이상세계를 꿈꾸었을지 모른다.

7년간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창작한 용장사는 이제 터만 남았지만

남산 전체를 내려다 보며 서있는 탑 한기만으로도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마을 뒷산을 거닐 듯 평안한 길은 속으로 들어갈수록 캄캄해지고 사위를 분간키 힘들어진다.

귀신, 염라왕, 용궁,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금오신화’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금오신화속 다섯편의 소설은 귀신과의 사랑, 용궁에서의 생활등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속엔 기존질서에 대한 부정과 어릴적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란 김시습 자신의 처지가

담겨있으며, 유교와 불교가 화합하고 부정한 권력을 통렬히 비판하는,

철저히 현실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은 생사를 초월한다는 애정지상과 자유연애관은, 작가의 현실적 욕구를 보여주며,

고독하고 한 많은 그리고 허무적이고 절의적인 남자 주인공을 통해 김시습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용장사서 7년간 ‘금오신화’집필

문의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선(禪)의 이치를 아는 매월당은

초현실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명나라 ‘전등신화’의 모방작이라고 했던 금오신화는

이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기소설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작자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고 무대가 우리 국토라는 점에서도

‘금오신화’의 의의는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보현사에 오고서부터/ 마음 한가하고 형평도 편안해

돌솥에 새 차 끓이고/ 쇠향로에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나 같은 국외인으로서/ 속세 떠난 선사 따라 놀면서…’ (보현사 중)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50대에 접어들자,

자연에 의탁하여 유유히 자적한 방랑인으로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문다.

이곳에서 친구와 시화답을 하고 후학을 지도하다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김시습의 시 '유객'>

‘싯귀는 매양 한가로움 속에서 얻고

선심은 모두 고요함 가운데 끌리네’라며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를 보였던 그는

세인의 평가야 어떻든 자성을 깨친 선승의 반열에 둘 수있을 것이다.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

애초의 지조와 달리 세조를 찬양하는 가하면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고

때로는 똥통에 빠져 미친척하거나, 나무에 시를 쓰다가 곡을 하는 등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하는 모습 역시

눈에 보이는 형상만 집착하는 범부의 경지를 넘어선

도인의 풍모가 아니었을까.

목탁소리 염불소리 끊일 날없는 불국토 경주 남산.

설잠 스님의 꿈이 서렸던 용장사.

귀신세계를 빠져 나오는 뒷덜미를 낚아채듯

초가을 스산한 바람이 목등을 스치고,

놀라 뒤돌아본 남산은 하늘과 절 탑과 하나가 되었다.
- 불교신문, 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