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낙형(烙刑) - 견디기 힘든 불 고문

Gijuzzang Dream 2009. 1. 21. 21:31

 

 

 

 


 견디기 힘든 불 고문, 낙형(烙刑)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화상의 추억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모여 알코올 램프에서 물을 가열하는 실험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실험 중간에 실수로 가열한 비이커의 물을 내 팔에 쏟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당시 겨울철이라 맨 살이 아닌 입고 있던 옷에 물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부모가 학교 근처 약국을 하는 같은 반 여학생의 발빠른 대처로 화상 부위에 거즈를 바르는

응급조치도 받을 수 있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물집이 생겼던 기억을 떠올릴 때 아마도 2도 화상이 아니었나 싶다.

상처 부위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아무튼 40이 넘은 나이에도 나의 오른쪽 팔뚝에는 그날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화상은 화상이다.

단언컨대 요즘 교과서에는 그같이 위험한 실험이 분명 사라졌으리라...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잠깐의 해프닝이긴 하였지만,

그 당시 어린 나이에도 화상에 대한 두려움을 실감했다는 점이다.

뜨거운 물이 피부에 닿을 때의 전율!

나는 그 느낌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림 1>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서울여대 정연식 교수의 저서.

조선시대 생활 문화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당대의 형벌, 고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초등학생 시절 화상의 추억을 들춰낸 이유는

이 글에서 과거 불을 이용한 형벌이나 고문을 소개하고자 해서이다.

과거 서양에서 불을 이용한 형벌로 화형(火刑)이 있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조선시대에 뜨겁게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인 낙형(烙刑)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이 글에서는 화형, 낙형의 사례를 차례로 설명하기로 한다.

 

 

2. 이단 재판, 그리고 화형

 

잘 알려진 것처럼 화형은 죄인을 산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로서,

중세의 유럽, 인도, 아시아 등 각지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전통시대 형벌 가운데 무시무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만은 생각할수록 끔찍한 것이 화형이다.

 

화형은 일찍이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들을 박해할 때 종종 자행하던 형벌이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방화범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칙에 의거하여 화형으로 처단하곤 했다.

그러다 중세 유럽에 와서는 화형의 적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이단을 심문하거나 마녀재판 시에도 사용하였다.

 

화형 집행 방법이야 대강은 알고 있겠지만 프랑스의 사례를 좀 더 실감나게 소개하면 이렇다.

화형에 처할 죄수가 있을 경우 미리 선정된 장소에다 화형집행대에 해당하는 기둥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키 높이까지 짚과 장작을 몇 겹씩 쌓아올린다.

물론 기둥 주변에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죄인을 묶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었다.

죄수에게는 불에 잘 타게 하기 위해 죄수복 대신 유황이 칠해진 셔츠를 입혔다.

이윽고 죄수를 줄과 쇠사슬로 기둥에 단단히 묶은 후에는 죄수가 들어가던 입구 통로까지도

짚과 장작으로 채워 넣었다.

이렇게 한 후에 불을 붙이면 사방의 장작더미가 일시에 붙이 붙었다고 한다.

 


<그림 2> 프라하의 얀 후스 동상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으며,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광장의 상징물이다.

얀 후스는 카톨릭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다가 화형당한 순교자로서,

체코에서 높이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산 사람을 화마 속에 넣는 행위가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마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과 상식으로는 그렇게라도 해야 할 몹쓸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아무튼 이처럼 잔혹한 화형이 과거 적지 않게 행해졌음은

세계사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몇 몇 인사들을 열거해 보면 알 수 있다.

 

15세기 전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여졌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해 앞장서 싸웠던

그 유명한 잔 다르크가 훗날 이단으로 지목되어 화형에 처해졌으며,

체코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도 교황 등 교회지도자들의 부패를 비난하다

교황에 의해 파문 당해 1415년에 화형으로 생을 마감한 분이다.

 


<그림 3> 화형 집행 장면 ; 서양에는 화형에 관한 그림이 많다.

이 그림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 인디언들에게 화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그린 동판화이다. 1620년. 『도설 중국혹형사』수록.

 

 

이단자에 대한 심문과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도 화형 집행은 종종 있었다.

당시 화형에 처해질 희생자들 중에는 먼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이단자들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하기 일쑤였다.

 

『고문실의 쾌락』(자작출판사, 2001)이라는 책자에 보면

1796년 1월에 있었던 이단자에 대한 화형 집행 장면을 목도한 사람의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는 화형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처형은 정말 잔인했습니다.

여자는 화염에 휩싸여 한시간 반, 남자는 한시간 이상 산 채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습니다...

죄인이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은 단지 몇 더미의 장작을 더 태워달라는 것뿐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화염은 타버린 만큼의 장작만 보충하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탔습니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줄지도 않았고

땔감이 더 많이 허락되어 죽음이 앞당겨지지도 않았습니다.”

 

한편 에도막부 시절의 일본에서도 방화범에게 화형을 집행하였다.

다만 일본에서는 <그림 4>에서 보듯이 기둥에 죄수를 묶기 위해 대나무와 새끼줄을 이용하여

거꾸로 된 U자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 4> 일본에서의 화형

에도시대 화형 집행 장면, 화형 집행대 등을 그린 그림이다.

『사법제도 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3.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 낙형(烙刑)

 

생을 마감하게 하는 형벌인 화형만큼은 아니지만,

이제부터 이야기할 낙형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모진 고문의 하나였다.

 

낙형(烙刑)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뜨겁게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이다.

낙형처럼 불을 이용한 고문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겨드랑이 아래에 삶은 계란을 끼워 놓는 고문,

용의자의 손가락에 양초를 매달아 태워서 양초와 피부가 동시에 타들어가도록 하는 고문 등이

있었다.

 

흔히 낙형을 단근질이라고 하는데,

본래 단근(斷筋)은 도둑의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서 다시는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앉은뱅이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이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 단근질과 유사하기 때문에

낙형을 단근질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와전된 말이다.

 


<그림 5> 남원시 춘향테마파크의 감옥 모습

남원시의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부의 감옥을 재현한 세트장이다.

2008년 여름 휴가 때 찍은 사진으로 죄수들을 매질하던 형틀도 보인다.

요즘 사극에서 죄인을 고문, 형벌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고문할 때 대개 신장(訊杖)이라는 매를 이용하였고,

매질 횟수 등에 있어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자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고문들이 관습적으로 행해졌으니,

그 중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낙형이었다.

사극 등에 보면 숯불에 달군 쇠로 죄수의 온몸을 지지는 고문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원칙적으로 낙형은 발바닥만을 지질 수 있었다. 이를 『숙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고,

인현왕후를 폐하는 대신 장희빈을 중전으로 정하였다.

이 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 86인이 상소문을 올리고 극력 반대하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숙종은 이 해 4월 25일 한밤중에 상소문 주동자들을

인정문 앞으로 붙잡아 오게 하여 친히 국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으로 지목된 박태보가 신장, 압슬에도 굴하지 않자

숙종은 박태보의 옷을 벗기고 낙형 도구를 가져와 온몸을 두루 지지도록 지시하였다.

이 때 옆에서 지켜보던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은 규정상 낙형은 발바닥을 지질 뿐이라고 만류하여

겨우 진정되긴 했지만, 이미 박태보의 양 다리를 비롯해 여러 곳이 타들어 간 뒤였다.

결국 박태보는 이 날의 모진 고문으로 진도에 유배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발바닥을 지지는 고문인 낙형은 조선 조정에서 이른 시기부터 등장한다.

『성종실록』에 난신적자(亂臣賊子)와 같은 대역 죄인을 심문할 때 썼던 관례가 있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이미 15세기에 취조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후에도 자복을 하지 않는 질긴 죄수들에게 낙형으로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연산군과 광해군 때에 낙형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끔찍한 고문 방식의 하나인 낙형을 가하는 장면은

각종 악형(惡刑)을 상당수 금지시킨 영조 때 조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영조가 낙형을 금지시킨 직접적인 이유가 재미있다.

1733년(영조 9) 8월에 영조는 종기 때문에 여러 번 뜸을 떴는데 뜸을 뜰 때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 뜸뜰 때의 괴로움을 낙형의 고통과 클로즈 업 시키면서

마침내 앞으로 죄수를 국문할 때 낙형을 쓰지 말 것을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6> 청나라 말기 『점석재화보』에 실린 절에서의 화형 장면

주지 스님의 방사(房事)를 목격한 소승의 입을 막기 위해

이들 두 명을 장작더미에 올려 화형시키려 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횃불을 든 자가 주지이다. 『도설 중국혹형사』 수록.

 

그럼 이웃 나라 중국은 어땠을까?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포락(炮烙)이라 하여 불을 이용한 고문을 썼다.

이미 은나라 때 주왕이 동으로 된 기둥을 숯으로 달구고 맨발의 죄수를 그 위에 걷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후에도 관리들이 죄수를 심문할 때 인두나 달군 가위 등을 사용하곤 했다 한다.

 

특히 17세기 명나라 때에는 ‘홍수혜(紅繡鞋)’라는 신발이 등장했다.

홍수혜를 풀이하면 예쁜 붉은 자수 신발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사실은 숯불 속에서 새빨갛게 달둔 쇠신발을 지칭하였다.

이처럼 당시 달궈진 쇠신발을 피의자에게 신겨 발 가죽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줌으로써

자백을 강요하는 일도 있었다.

 

 

4.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전통시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두뇌가 고안할 수 있는 잔혹한 고문이나 형벌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앞서 화형, 낙형 등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불을 이용한 형벌이나 고문도 그 가운데 하나리라.

지금은 그같은 잔혹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화상의 공포를 이야기했지만,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흘러 나의 불에 대한 공포와 충격은 대학 1학년 때 다시 찾아왔다.

화상처럼 나 자신의 피부를 덮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강도는 초등학교 시절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것이었다.

바로 이 무렵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그것이었다.

1970,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야 다 경험한 이야기겠지만

80년대 후반 학생들이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적지 않게 분신(焚身)을 감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경우 대학에 입학한 지 한 학기도 되지 않는 사이에

세 명의 분신자살을 소식으로, 눈으로 접했다.

 


<그림 7> 이동수의 분신 ;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경

이동수가 서울대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하여 투신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국일보 권주훈 기자가 찍었고, 제18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사진이다.

 

1986년 4월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등 반미 시위를 주도하던 김세진, 이재호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 중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도 잠깐,

5월 20일에는 서울대 오월제 기간 중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의 문익환 목사 연설 도중

원예학과 이동수가 온 몸에 불을 붙이고 학생회관 4층에서 분신 투신하는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 때 그것은 화상의 공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참혹, 분노, 좌절, 절규...

 

이로부터 5년 후인 1991년 5월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분신자살을 생명을 담보로 하는 민주화 투쟁이라 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지하의 지적처럼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던져 스스로를 산화하면서 외쳤던 그들의 절규가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나는 늦었지만 다시 되돌아 보고 싶다.

화형과 낙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분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필진 : 심재우 / 등록일 : 200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