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지만, ‘돈주정’이란 말이 있다.
19세기의 가사 작품 중 ‘우부가’란 작품이 있는데,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내들에 대한 노래’란 뜻이다.
세 사람의 어리석은 사내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개똥이다.
개똥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주정이다.
돈을 쓸데없는 곳에 마구 써대는 것이 바로 돈주정이다.
돈주정을 하는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것은 도박에 미치는 것이다.
개똥이 역시 ‘주색잡기’로 돈주정을 하다가 패가망신한다.
(잡기는 원래 놀음이란 뜻이다).
도박, 곧 놀음은 돈이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산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승부를 겨루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로도 수억 원의 재산을 걸고 도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도박에는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곧 ‘우연’이다.
나에게 좋은 패가 들지, 상대에게 좋은 패가 들지는 완전히 우연에 속한다.
우연이 나에게 워낙 좋은 패를 주면 승부는 거저 난 것이다.
나에게도 결정적인 패가 올 것도 같은 우연에 대한 기대감,
자기의 패를 운용하는 실력을 믿고 도박꾼은 도박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도박계의 으뜸 종목은 투전
도박의 방식은 무한하지만, 그래도 가장 스릴 넘치는 종목은 따로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역시 화투로 치는 고스톱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후기에 가장 유행하던 도박 여섯 가지를 꼽고 있다.
바둑, 장기, 쌍륙, 투전, 골패, 윷놀이가 그것이다.
이 중 골패와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중 더 강력한 것을 가려내라면 역시 투전이다.
투전은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유행했던 도박계의 으뜸 종목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투전판을 그린 풍속화는 여럿 남아 있다.
여기서는 성협의 ‘투전판’(그림 1)과 김득신의 ‘투전판’(그림 2)을 보겠다.
▲ 성협 ‘투전판’(그림 1). 조선후기 크게 유행한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은 투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등잔불 왼쪽에 앉은 사내는 투전 쪽을 들어 내리치고 있다.
요즘 화투판에서 화투를 세게 내려치는 것과 같은 포즈다.
이 사내 아래쪽에 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내는 등만 보이지만, 오른쪽의 사내는 투전을 부챗살처럼 펴서 족보를 따지고 있는 참이다.
표범가죽으로 배자를 해 입은 그 오른쪽의 사내는
등이라도 긁는지 오른손을 뒤집고 있고,
그 위의 사내는 패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좋은 패라서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패를 바닥에 엎어 놓고 등잔에 담뱃불을 댕기고 있다.
그림 맨 왼쪽에는 밤새도록 한 놀음에 지친 사내가 이불에 기대어
선잠을 자고 있다. 요즘의 놀음판과 다를 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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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을 쓴 점잖은 양반들이 돈주머니를 차고 투전 쪽을 부챗살처럼 펼쳐 들고
족보를 맞추는 중이다.
안경을 쓴 사내는 자신이 갖고 있던 투전 쪽 하나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의 바깥의 사내는
패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두 손으로 투전 쪽을 뭉쳐 쥐고 있다.
이 사내의 오른쪽에 놓인 요강과 타구, 그리고 위쪽의 술상은
오로지 투전에 몰입하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18세기의 시인 강이천은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경사(漢京詞)’에서
투전하는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길게 마른 종이에 꽃 모양 흘려 그리고
둘러친 장막 속에서 밤도 낮도 없구나
판맛을 거듭 보자 어느 새 고수되어
한 마디 말도 없이 천금을 던지누나.”
(板長裁花樣,深圍屛幕沒朝昏,賭來多局成高手,擲盡千金無一言)
어떤가. 위의 그림과 꼭 같지 않은가.
그럼, 이 투전은 언제 생긴 것인가.
투전은 숙종 연간에 역관 장현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왔다고 한다.
원래 120장인데, 이것을 줄여서 80장(혹은 60장)이 된 것이다.
투전을 노는 방식은 현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투전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지금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들은 화투로 하는 ‘짓고땡’이나 ‘섰다’라는 도박을
알 것이다. 화투패 5장을 나누어 주면,10이나 20의 숫자를 먼저 짓고
나머지 두 장을 가지고 족보와 끗수를 겨루는 것이 ‘짓고땡’이고,
짓는 것이 귀찮다 하여 처음부터 두 장을 가지고 족보와 끗수를 겨루는 것이
‘섰다’다. 투전으로 하는 놀음 중에 ‘짓고땡’과 ‘섰다’의 족보가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갑오’니 ‘장땡’이니 하는 족보 역시 모두 투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 간단하고 쉽게 줄이면
80장의 종이쪽으로 ‘짓고땡’과 ‘섰다’를 하는 것이 투전이라고 알면 되겠다.
‘타짜´의 원조는 우의정 지낸 원인손
숙종 연간에 수입된 투전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조정의 높은 양반네들부터 시정의 왈자 패거리까지 모두 투전에 골몰하였다.
지금 노름판의 고수를 ‘타짜’라고 하는데,
원래 투전판의 고수를 ‘타자’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 타자로서 지금도 이름을 전하고 있는 양반 한 사람이 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 벼슬까지 지낸 원인손이 바로 그 사람이다.
원인손은 젊은 날 투전에 빠져 아버지 원경하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다.
출입을 못하게 하자 집으로 친구를 몰래 불러 투전판을 벌일 정도였다.
하루는 원경하가 얼마나 잘 하는가 보려고 투전 쪽 80장을 한 번 보여준 뒤
섞어서 엎어 놓고 맞추어 보라고 하자, 원인손은 하나하나 뒤집으면서
모두 알아맞힌다. 원경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하늘이 낸 재주라면서
아들의 투전질을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타자 원인손은 우의정까지 지냈으니
투전이 사람을 아주 망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점잖은 양반들까지
투전에 미칠 정도였으니, 투전이 어지간히 유행했던 모양이다.
투전 때문에 집안의 재산을 거덜 내는 자가 속출하였고,
투전 빚에 몰려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관청에서 빌린 돈은 떼어먹을 수 있지만 투전 빚은 갚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박장을 열어 판돈을 뜯어 먹고 사는 축도 생겼고,
요즘처럼 사기도박을 벌이는 자들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포교를 풀어 투전판을 덮치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박으로 재산 탕진 · 가정 파탄 속출
도박꾼의 공통적 특징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투전에 미친 사람이 어떤 지경이 되는지
18세기 문인 윤기의 ‘투전꾼’이란 한시를 통해서 살펴보자.
이 시의 주인공 투전꾼은 시골 촌사람이다.
밤낮 꾼들을 불러 투전에 골몰하다가 재산을 들어먹는다.
집에 있는 물건을 잡혀 먹은 지는 오래고,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며 돈을 꾼다. 노름꾼의 아내는 남편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투전이란 게 웬 놈의 물건이라, 내 속을 이렇게 끓인단 말요.
도둑놈처럼 내 치마를 벗겨가고 솥까지 팔아먹었지.
그때부터 연사흘을 굶었는데, 한 번 가더니 다시는 안돌아왔소.
밤중에 혼자 빈 방에서 한숨만 쉬는데, 어린 것들은 울면서 잠도 못잤더랬소.”
노름에 미친 사내가 아내의 말을 들을 리 없다.
방영웅의 ‘분례기’에서 똥례의 남편인 애꾸눈 도박꾼 영철이
어디 마누라 똥례의 말을 귓등으로나 듣던가.
사내는 마누라 말을 듣더니, 도로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만사 내가 좋은 대로 할 뿐이지, 누가 내 예전 허물을 따진단 말이야.
재물이란 건 있다가도 없는 것, 저 밝은 달도 찼다가 이지러졌다 하지 않나!
내 나이 이미 어른이니, 어찌 여편네 말을 듣고 뉘우칠 리가 있나.
내 부모도 말리지 못했고, 관청도 어쩌지 못했거늘.
여편네란 잔소리를 좋아하는 법, 내 주먹맛을 어디 한 번 볼 테냐.
살고 죽는 건 네 하기에 달렸다. 나는 놀면서 내 평생을 마칠 테야.”
아아, 노름꾼의 이 도저한 깨달음, 그래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
하지만 이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니, 문제가 아닌가.
이 말을 마치고 노름꾼은 항아리를 걷어차고 의기양양 튀어나갔다.
투전은 조선후기 사회의 어두운 풍경이었다. 지금이라 해서 노름이 없을 것인가.
가끔 신문에 보도되는 사기도박이야 아예 괘념할 것도 못된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줄을 이어도
크게 걱정할 바 아니다. 그보다 더 거대한 도박판이 있지 않은가.
부동산이며 증권이며 펀드라 하는,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자,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투기야말로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거대한 도박판이 아니겠는가?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008-10-13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