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득신 - 밀희투전(密戱鬪牋)

Gijuzzang Dream 2009. 1. 24. 06:08

 

 

 

 

 

 

 김득신, '밀희투전(密戱鬪牋)'의 손동작

 

 


사내들은 감정을 숨기려 애쓰지만 무심한 손은 속내를 드러내
패를 내미는 손은 배경속에 감춰
투전판의 상황보다 심리를 그려

 

 

'밀희투전'. 종이에 담채, 22.4×27.0㎝, 조선시대, 간송미술관 소장

 

 

창문이 희붐한 새벽녘.

투전(鬪牋)으로 밤을 지새운 듯 네 명의 사내가 투전에 빠져 있다.

정적인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적지 않은 판돈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어두운 사회상을 그린 긍재 김득신(1754~1822)의 '밀희투전'은

투전 중인 사람들의 심리를 포착한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통하는 긍재는

도화서 화원으로 초도첨사까지 지낸 스타급 화가다.

단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긍재의 풍속화는 단원과 차이가 있다.

주변 경관이나 분위기 설정으로 내용에 활력을 불어넣거나

일상의 단면을 익살스럽게 포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구사했다.

 

18세기 투전판의 주연과 조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옛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을 따라 '밀희투전'을 보면,

먼저 오른쪽 구석에 도박판의 분위기 메이커인 술상이 눈에 띈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는 요강과 가래를 뱉는 타구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바로 옆에는 술기운 탓인지 얼굴이 불콰해진 사내가 있고,

왼쪽에는 안경 쓴 사내가 앉아 있다.

그 앞에 허리춤에 돈주머니를 찬 사내 둘이 투전에 몰입 중이다.

 

이들은 흥미롭게도 주연과 조연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물의 크기와 얼굴의 각도가 배역의 비중을 말한다.

뒤쪽의 두 사내가 주연이고, 앞쪽의 두 사내는 조연이다.

뒤쪽의 안경잡이와 얼굴이 불콰한 사내는

앞의 두 인물에 비해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체구가 크다.

그리고 당시에 흔치 않았던 안경과 살이 두툼한 얼굴은,

이들이 돈푼깨나 가진 인물임을 알려준다.

반면에 앞의 두 사내는 자세도 측면인데다가 덩치도 작고, 외모도 평범하다.

영화로 치면 무명의 '등장인물 1, 2' 정도 되겠다.

이 그림은 뒤쪽의 두 사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쪽지 80장 내지 60장으로 하는 도박이다.

종이쪽지 한 면에 인물, 새, 물고기, 짐승, 벌레 등의 그림이나 글귀를 적어

끗수를 표시한다. 놀이 방식은 여럿이라 전하지만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화투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화투 용어로 알려진 '땡'이나 '족보', '타짜'는 원래 투전 용어였다.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시작된 투전은 나중에는 양반 계층에까지 확산된다.

점차 사기도박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속출하면서 사회문제로 번진다.

이에 따라 투전 금지조치가 내려지고, 사람들은 투전을 몰래 즐겼다.

 

손동작으로 표현된 치열한 심리전

 

'밀희투전'은 투전판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투전꾼들의 심리가 두드러진 부위는 어디일까?

바로 뒤쪽 사내들의 손동작이다.

얼굴이 불콰한 남자는 시선이 왼쪽을 향해 있지만

투전 쪽을 뭉쳐 쥔 두 손은 오른쪽 아래로 가 있다.

자기 쪽을 숨긴 채 상대방에게 신경을 쓰는 중이다.

 

여기서 상대방이란 안경잡이 사내다. 이 사내가 지금 투전 쪽 하나를 내미는 중이다.

왼손에 잡은 투전 쪽은 남이 볼까봐 가슴팍으로 바짝 당겨 잡았다.

조심스러운 폼을 보아하니 우유부단한 '소심남'이다.

얼굴 붉은 사내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안경잡이가 내미는 쪽과 왼손의 쪽들이다.

안경잡이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소심한 안경잡이와 얼굴이 붉은 사내의 눈치 보기가 재미있다.

혹시 이들의 패가 별로 좋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돈을 딴 사내는 두 조연이란 뜻인가?

그래서 주연들이 쫀쫀하게 심리전을 펴는 게 아닐까?

그림에 감정을 이입하고 보면, 상황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투전꾼의 심리를 그린 그림

 

일반적으로 등장 인물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 그림의 중심이 된다.

단원의 '씨름도'의 경우는 구경꾼의 시선이 집중된 씨름꾼이 그림의 중심이다.

그런데 '밀희투전'은 그렇지 않다.

사내들의 관심은 안경잡이의 오른손에 가 있지만, 정작 오른손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내미는 손이, 배경인 무릎과 함께 그려지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림이 투전판의 상황보다 투전꾼들의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뜻 같다.

관심의 초점인 안경잡이의 오른손이 확실히 부각되지 않음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등장 인물의 손동작과 얼굴 등을 살피며,

그곳에 나타난 투전꾼들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미소 짓게 된다.

사내들은 한사코 마음을 숨기려 하지만 무심한 손은 천상 '청개구리 심보'다.

'수화(手話)'를 하듯이 각자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고 만다.

- 정민영(주)아트북스 대표

- 2008.11.26 ⓒ 국제신문(www.kookje.co.kr)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40]

 

 

 

 

 

투전에 미친 사람들

 

밤샘 놀음에 지쳐 잠든 저 사내 일확천금을 꿈꾸나

국어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지만, ‘돈주정’이란 말이 있다.

19세기의 가사 작품 중 ‘우부가’란 작품이 있는데,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내들에 대한 노래’란 뜻이다.

세 사람의 어리석은 사내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개똥이다.

개똥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주정이다.

돈을 쓸데없는 곳에 마구 써대는 것이 바로 돈주정이다.

돈주정을 하는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것은 도박에 미치는 것이다.

개똥이 역시 ‘주색잡기’로 돈주정을 하다가 패가망신한다.

(잡기는 원래 놀음이란 뜻이다).

 

도박, 곧 놀음은 돈이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산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승부를 겨루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로도 수억 원의 재산을 걸고 도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도박에는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곧 ‘우연’이다.

나에게 좋은 패가 들지, 상대에게 좋은 패가 들지는 완전히 우연에 속한다.

우연이 나에게 워낙 좋은 패를 주면 승부는 거저 난 것이다.

나에게도 결정적인 패가 올 것도 같은 우연에 대한 기대감,

자기의 패를 운용하는 실력을 믿고 도박꾼은 도박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도박계의 으뜸 종목은 투전

 

도박의 방식은 무한하지만, 그래도 가장 스릴 넘치는 종목은 따로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역시 화투로 치는 고스톱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선후기에 가장 유행하던 도박 여섯 가지를 꼽고 있다.

바둑, 장기, 쌍륙, 투전, 골패, 윷놀이가 그것이다.

이 중 골패와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중 더 강력한 것을 가려내라면 역시 투전이다.  

투전은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유행했던 도박계의 으뜸 종목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투전판을 그린 풍속화는 여럿 남아 있다.

여기서는 성협의 ‘투전판’(그림 1)과 김득신의 ‘투전판’(그림 2)을 보겠다.

 

▲ 성협 ‘투전판’(그림 1).

조선후기 크게 유행한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은 투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판이다.

 

등잔불 왼쪽에 앉은 사내는 투전 쪽을 들어 내리치고 있다.

요즘 화투판에서 화투를 세게 내려치는 것과 같은 포즈다.

 

이 사내 아래쪽에 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내는 등만 보이지만, 오른쪽의 사내는 투전을 부챗살처럼 펴서 족보를 따지고 있는 참이다.

 

표범가죽으로 배자를 해 입은 그 오른쪽의 사내는

등이라도 긁는지 오른손을 뒤집고 있고,

그 위의 사내는 패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좋은 패라서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패를 바닥에 엎어 놓고 등잔에 담뱃불을 댕기고 있다.

 

그림 맨 왼쪽에는 밤새도록 한 놀음에 지친 사내가 이불에 기대어

선잠을 자고 있다. 요즘의 놀음판과 다를 게 전혀 없다.

 

▲ 김득신 ‘투전판’(그림 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2)에서도 투전이 한창이다.

망건을 쓴 점잖은 양반들이 돈주머니를 차고 투전 쪽을 부챗살처럼 펼쳐 들고

족보를 맞추는 중이다.

안경을 쓴 사내는 자신이 갖고 있던 투전 쪽 하나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의 바깥의 사내는

패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두 손으로 투전 쪽을 뭉쳐 쥐고 있다.

이 사내의 오른쪽에 놓인 요강과 타구, 그리고 위쪽의 술상은

오로지 투전에 몰입하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18세기의 시인 강이천은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경사(漢京詞)’에서

투전하는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길게 마른 종이에 꽃 모양 흘려 그리고

둘러친 장막 속에서 밤도 낮도 없구나

판맛을 거듭 보자 어느 새 고수되어

한 마디 말도 없이 천금을 던지누나.”

(板長裁花樣,深圍屛幕沒朝昏,賭來多局成高手,擲盡千金無一言)

 

어떤가. 위의 그림과 꼭 같지 않은가.

그럼, 이 투전은 언제 생긴 것인가.

투전은 숙종 연간에 역관 장현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왔다고 한다.

원래 120장인데, 이것을 줄여서 80장(혹은 60장)이 된 것이다.

투전을 노는 방식은 현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투전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지금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들은 화투로 하는 ‘짓고땡’이나 ‘섰다’라는 도박을

알 것이다. 화투패 5장을 나누어 주면,10이나 20의 숫자를 먼저 짓고

나머지 두 장을 가지고 족보와 끗수를 겨루는 것이 ‘짓고땡’이고,

짓는 것이 귀찮다 하여 처음부터 두 장을 가지고 족보와 끗수를 겨루는 것이

‘섰다’다. 투전으로 하는 놀음 중에 ‘짓고땡’과 ‘섰다’의 족보가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갑오’니 ‘장땡’이니 하는 족보 역시 모두 투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더 간단하고 쉽게 줄이면

80장의 종이쪽으로 ‘짓고땡’과 ‘섰다’를 하는 것이 투전이라고 알면 되겠다.

 

‘타짜´의 원조는 우의정 지낸 원인손

 

숙종 연간에 수입된 투전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조정의 높은 양반네들부터 시정의 왈자 패거리까지 모두 투전에 골몰하였다.

 

지금 노름판의 고수를 ‘타짜’라고 하는데,

원래 투전판의 고수를 ‘타자’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 타자로서 지금도 이름을 전하고 있는 양반 한 사람이 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 벼슬까지 지낸 원인손이 바로 그 사람이다.

 

원인손은 젊은 날 투전에 빠져 아버지 원경하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다.

출입을 못하게 하자 집으로 친구를 몰래 불러 투전판을 벌일 정도였다.

하루는 원경하가 얼마나 잘 하는가 보려고 투전 쪽 80장을 한 번 보여준 뒤

섞어서 엎어 놓고 맞추어 보라고 하자, 원인손은 하나하나 뒤집으면서

모두 알아맞힌다. 원경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하늘이 낸 재주라면서

아들의 투전질을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타자 원인손은 우의정까지 지냈으니

투전이 사람을 아주 망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점잖은 양반들까지

투전에 미칠 정도였으니, 투전이 어지간히 유행했던 모양이다.

투전 때문에 집안의 재산을 거덜 내는 자가 속출하였고,

투전 빚에 몰려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관청에서 빌린 돈은 떼어먹을 수 있지만 투전 빚은 갚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박장을 열어 판돈을 뜯어 먹고 사는 축도 생겼고,

요즘처럼 사기도박을 벌이는 자들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포교를 풀어 투전판을 덮치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박으로 재산 탕진 · 가정 파탄 속출

 

도박꾼의 공통적 특징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투전에 미친 사람이 어떤 지경이 되는지

18세기 문인 윤기의 ‘투전꾼’이란 한시를 통해서 살펴보자.

이 시의 주인공 투전꾼은 시골 촌사람이다.

 

밤낮 꾼들을 불러 투전에 골몰하다가 재산을 들어먹는다.

집에 있는 물건을 잡혀 먹은 지는 오래고,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며 돈을 꾼다. 노름꾼의 아내는 남편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투전이란 게 웬 놈의 물건이라, 내 속을 이렇게 끓인단 말요.

도둑놈처럼 내 치마를 벗겨가고 솥까지 팔아먹었지.

그때부터 연사흘을 굶었는데, 한 번 가더니 다시는 안돌아왔소.

밤중에 혼자 빈 방에서 한숨만 쉬는데, 어린 것들은 울면서 잠도 못잤더랬소.”

노름에 미친 사내가 아내의 말을 들을 리 없다.

 

방영웅의 ‘분례기’에서 똥례의 남편인 애꾸눈 도박꾼 영철이

어디 마누라 똥례의 말을 귓등으로나 듣던가.

사내는 마누라 말을 듣더니, 도로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만사 내가 좋은 대로 할 뿐이지, 누가 내 예전 허물을 따진단 말이야.

재물이란 건 있다가도 없는 것, 저 밝은 달도 찼다가 이지러졌다 하지 않나!

내 나이 이미 어른이니, 어찌 여편네 말을 듣고 뉘우칠 리가 있나.

내 부모도 말리지 못했고, 관청도 어쩌지 못했거늘.

여편네란 잔소리를 좋아하는 법, 내 주먹맛을 어디 한 번 볼 테냐.

살고 죽는 건 네 하기에 달렸다. 나는 놀면서 내 평생을 마칠 테야.”

 

아아, 노름꾼의 이 도저한 깨달음, 그래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

하지만 이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니, 문제가 아닌가.

이 말을 마치고 노름꾼은 항아리를 걷어차고 의기양양 튀어나갔다.

 

투전은 조선후기 사회의 어두운 풍경이었다. 지금이라 해서 노름이 없을 것인가.

가끔 신문에 보도되는 사기도박이야 아예 괘념할 것도 못된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줄을 이어도

크게 걱정할 바 아니다. 그보다 더 거대한 도박판이 있지 않은가.

부동산이며 증권이며 펀드라 하는,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자,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투기야말로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거대한 도박판이 아니겠는가?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008-10-13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0]

 

    

 

 

 

 

  밀희투전(密戱鬪牋) 

 

입체파 화가 김득신,

밤새는 것도 모른 채 투전에 빠져 있는 네 남자를 그려내다.

 

영조 30년-순조 22년까지 살다간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1822)은

도화서의 화원(畵員)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낼 정도로

그림 솜씨를 인정받은 사람이다.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겸재 정선(謙齋 鄭敾)과 더불어

영조 때 3재(三齋)라 불릴 정도로 인물화로도 유명한 화가로,

그가 그린 풍속화는 당대를 풍미하던 천재화가 김홍도의 그림과 매우 유사한

화풍을 보이긴 하지만 김홍도의 그림에 비해 인물 중심에서

주변 배경을 더 그려 넣어 또 다른 흥을 만들어 내는 점이 특징이다.

   

김득신의 그림은 다른 이들에 비해 참으로 익살스럽다.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그려낸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이

그 일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 흥취 등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면

김득신의 그림은 거기에다 주변배경과 익살이 더해져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그림마다 우와 감탄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김득신의 그림에서는 먼저 웃음이 나오고 그 뒤에 감탄이 나온다. 그 점이 다르다.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아! 이 시절,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구나!’내지는

‘이 시절 사람들도 사용하는 도구나 의복만 달랐을 뿐이지 우리들이 현대를 사는

것처럼 똑같았구나!’하는 감동과 흥취를 같이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김득신의 그림에서는 거기에다 캐리커처를 보는 듯한 날카로운 느낌과

만화를 보는 듯한 익살스러움에 웃음이 먼저 나오게 만든다.

익살스러운 면에서 보면 언뜻 윤두서의 그림에서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윤두서 보다는 훨씬 더 소박하고 털털하다.

   

<야묘도추> 만큼이나 <밀희투전>도 볼 때마다 먼저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 유명하다는 이들이 그린 그림들 못지않을 정도로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먼저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네 명의 남자가 말없이 패를 들고 앉아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투전판에서 자신의 처한 입장이 온 몸에서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이유는

인물들의 배치와 그 주위를 둘러싼 배경에서 그 상황의 미묘한 심리가

더 세밀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우리 옛 그림은

눈길을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순으로 감상해야 한다.

현재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눈길로는

우리 옛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조상들의 글 쓰는 방법이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 순으로 썼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불과 10여전까지만 해도 이 방법을 고수한 신문과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 참고로 그 방법을 그 때까지 고수했다는 것이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니 제발 별다른 오해 마시길-).  

 

이 순서를 지켜 그림을 읽어 보면 오른쪽에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술상이다.

그 바로 앞에 술에 얼큰히 취해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가 있다.

구레나룻까지 털북숭이인 이 남자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아마도 돈을 잃은 듯하다. 그것도 애써 태연한척 감추려 하고 있다.

손을 왼쪽으로 모아 패를 감추고 몸을 오른쪽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이번에 자신이 가진 패가 그리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그의 왼쪽에 앉아 있는 안경을 쓴 남자는 왼손으로 패를 움켜쥐고

가슴 앞으로 가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패를 숨기려고 하고 있다.

오른손으로 패를 바닥에 내려놓는데도 뭔가 조심스러운 걸 보면

그의 패가 제법 좋은 듯하다.

표정이 무덤덤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패가 좋은데 애써 그것을 감추려하는 느낌이 역력하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불콰해진 구레나룻의 남자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몸과 눈길이 은근히 오른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리라.

그림 앞에 있는 두 남자는 영 패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수염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패를 쥐고 들여다보고 있는 태도도 그렇다.

그 중 안경 쓴 남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오른손에 패를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왼손잡이이다.

   

<야묘도추>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참으로 절묘한 구성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먼저 웃고 그 다음에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그림 안에서 살아 움직이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그림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먼저 그림 속의 인물들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주인공과 그 상대자와 엑스트라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왼쪽에 있는 창호 문의 왼쪽은 약간 거무스레한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 색이 점점 옅어져

이것으로 새벽이 희뿌옇게 다가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을 세 개로 그어 이 투전판이 벌어진 곳이 방 안이라는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점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술병 또한 붉은 색으로 처리해

술이 몇 병이 오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부제를 ‘입체파 화가 김득신,

밤새는 것도 모른 채 투전에 빠져 있는 네 남자를 그려내다.’로 한 것이다.  

- 한젬마의 '그림 읽어주는 여자'

 

 

 

 

 김득신의 ‘밀희투전’

 

조선 후기의 3대 풍속화가라면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을 꼽습니다.

모두 국가기관인 도화서(圖畵署) 출신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요.

도화서 화원들은 국가에서 녹봉을 받았지만,

민간에 유통시킨 풍속화로 더욱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을 것입니다.

조선이 시장 경제의 초기 단계에 접어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풍속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풍속화에 나타난 정도의 성문화와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는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만큼 사회 분위기도 전 시대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남녀의 은밀한 만남을 열심히 추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노골적인 춘화(春畵)도 마다하지 않았던 혜원처럼 도화서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려진 사례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혜원이 이 때문에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문 앞에 줄을 설 정도의 그림 수요로 경제적인 여유를 찾으면서

더욱 자유분방하게 화업(畵業)을 이어갔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김득신(1754∼1822)은 단원이나 혜원이 워낙 뚜렷한 개성을 발휘한 탓에

상대적으로 후대의 평가가 후하지만은 않습니다.

긍재의 시대에 풍속화가 최고조에 이르렀다지만,

한편으로는 풍속화 쇠퇴의 출발점으로 그를 지목하기도 하지요.

긍재(兢齋)라는 호는

전전긍긍(戰戰兢兢)이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고 하지요.

몸을 움츠리고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그의 인생관을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4대에 걸쳐 20명의 도화서 화원을 배출했을 만큼

걸출한 그의 집안 내력도 개성있는 자신만의 화풍을 드러내는 데는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밀희투전(密戱鬪)'은

그의 작품으로는 소재부터가 파격적입니다.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에 인물 · 새 · 짐승 · 곤충 · 물고기 등으로

끗수를 나타내어 겨루는 놀이라고 하지요.

몰래 즐긴다(密戱)고 한 것은 당시에 투전 도박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주연과 조연이 명확합니다.

뒤에 앉은 두 사람은 얼굴 윤곽이 분명한 반면

앞의 두 사람은 마치 의궤에 그려진 인물처럼 흔해빠진 표정이지요.

게다가 뒤에 있는 인물들을 앞에 앉은 인물들보다 훨씬 크게 그려놓았습니다.

특정인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안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적지 않은 판돈이 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경은 당시에 여간한 사람이 아니면 쓰지 못할 만큼 비쌌습니다.

오른쪽의 혈색좋아보이는 사내도 돈푼깨나 있어보이지요.

왼쪽의 사내는 작은 체구지만 돈주머니는 두둑합니다.

오른쪽의 개다리소반에는 술병이 놓여있는데,

잔이 하나뿐인 것을 보면 술보다는 물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술이라고 하더라도 투전꾼들은 관심이 없다는듯 상을 멀찌감치 밀어놓았지요.

'출연자'들은 큰 돈이 걸렸는데 술이 웬말이냐고 이구동성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요강과 가래를 뱉는 타구(唾具)를 곁에 놓아둔 것을 보면

밤을 새울 요량인 듯합니다. 친구들 사이의 친선게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밀희투전'은 돈이 본격적으로 인격을 좌우해가기 시작하는 시대의 사회상을

어떤 풍속화보다도 리얼하게 그려냈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이 작품이 없었다면

조선 후기 풍속화첩이 조금은 심심한 그림책이 되었겠지요.

긍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2007.12.06 Copyrights ⓒ서울신문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