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의 디지털적 계측은 가능한가?
계측하는 시간 대 감각하는 시간
“방금과 지금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 놓인 숱한 사건과 경험이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경험하고, 늙고, 죽어간다. 그런데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매시간 바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인에게 시간은 숫자로 표상된다.
하루는 24시간으로 나뉘고, 한 시간은 분과 초로 다시 나뉜다.
우리는 정확히 계측된 시간으로 일한 대가를 받고, 타자와 약속을 하며, 우리의 미래를 설계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분절하는 시간, 디지털적인 시간을 통해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 달리의 <기억의 영속>, 출처: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사실 이러한 시간관은 근대의 물리학 혁명과 연관이 깊다.
뉴턴, 데카르트 등을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물리 법칙이 있고, 역시 어디에서나 동일하며, 어디에서나 계측 가능한 시간이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보편적이고 분절적인 시간관 덕분에 우리는 뉴욕이든, 부에노스아이레스든, 동경이든, 동일한 시간을 근거로 거래를 하고, 약속을 하며, 소통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근대의 물리적 시간관은 낮이든, 밤이든, 밥을 먹는 시간이든, 일을 하는 시간이든, 집에 있는 시간이든, 버스에서의 시간이든 오직 길이로만 변별이 가능한 동질적 시간들로 바라본다. 그래서 계산가능하고, 측정가능하며,
예측가능한 시간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이 되고, 세계를 담는 그릇이 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연 모든 시간이 동일하고 천편일률적으로 계측가능한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지하철역 앞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5분은
결코 직장에서 서류와 컴퓨터를 오가며 보내는 5분과 동일할 수 없다.
전자의 5분은 온갖 상상과 기대와 떨림으로 충만하지만,
후자의 5분은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무색, 무미의 순간에 불과하다.
객관적 비교가 불가능한 시간들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동료가 적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한 5초간을
천박한 방송프로그램 자막이 나오는 5초와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나와 가까운 타자가 죽어가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은
1+1+1+1+1=5(초)와 같은 식으로 분절할 수도 없다.
분절할 수 없기에 계산이 불가능하고, 계산이 불가능하기에 계측이 불가능하며,
계측이 불가능하기에 시간들 간에 객관적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19세기 심리학의 발전과 프랑스 유심론의 만개로 인해
몇몇 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들을 어떻게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으며,
측량과 분절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또 프리고진 등이 관여한 바 있는 현대의 복잡계 과학은
사적 성격에 대한 강조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근대적 시간관을 넘어서고 있다.
선형적이고 기계론적인 인과론을 따르는 시간, 직선적이고 예측가능한 시간이란
이상적인 상황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서 직접 도출된 결과가 아니고, 현재 역시 미래를 기계론적으로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결코 ‘방금’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요,
‘오늘’은 ‘어제’와 직선주로로 연결된 같은 나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방금과 지금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 놓인 숱한 사건과 경험이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
바로 이 점을 말하면서 현대 과학은 분절 가능하고,
기계론적 인과론으로 연결된 근대 시간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 오주훈 교수신문기자 aporia@kyosu.net
- 2008. 12.08
-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 ⓒ ScienceTimes
(2) "시간은 물리학으로 포착할 수 없다"
불가분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본성
▲ 데카르트는 일반적으로 사적 영역의 발견자라고 알려져 있다. |
“프루스트와 조이스를 보십시오.
그들이 수학공식들로 바싹 말라버린 근대인을 내적 시간의식의 파노라마 속에서 얼마나 풍부하게 살찌웠는지를.”
물리학은 이른바 객관의 세계에 대한 학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물리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와 상상하기 어려운 시공적 차원의 거시적 사태에 접근하기 위해 극히 복잡한 수식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그 정신은 단순명료함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 이외에 어떤 인간적인 의도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4세기 로마로 갑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만일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느낀 이 어려움 앞에서 후대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천이백 년이 지나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턴이 활동하던 서양의 근대로 가 보겠습니다.
이 계몽의 새벽에 인간은 오로지 수학만이 지배하는 객관적 물질계가 확립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미 인간은 거대문명의 발달 이래로 공간을 재단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정수에 있습니다.
시간이 공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취급되기 시작
그러나 근대과학에 이르러 시간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순간들(단위시간들)에
임의적이고 동등하게 적용되는 독립변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계산의 영역에 들어옴으로써 물질계는 시공적 완결성을 갖게 됩니다.
객관적 물질계를 ‘객관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공의 분할가능성, 계산가능성입니다.
결국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은 어떻게 됐을까요.
물질계를 과학의 관할 아래 둔 데카르트는 정신에 관해서 그 유명한 정식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 확실한 진리가 순간적 진리라는 것이죠.
다음 순간에 나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매순간 나는 사유하는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
신의 재가(즉 자연의 균일성)를 필요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동일성은 순간들의 합이라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확보됩니다.
▲ 최근에 전개되는 복잡계의 과학은 우리에게 끝없는 새로움의 분출과 카오스로서의 우주를 맞아들일 준비를 시키고 있다. |
일반적으로 데카르트가 사적 영역의 발견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시간은 결코 그의 ‘사적 영역’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계산 가능한 순간들로서의 시간이 정신 내부까지 그 명석하고 판명한 ‘빛’을 던진 것입니다.
사실 시간을 사적 영역으로서의 의식 안에서 사유한 최초의 사상가는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이제 시간과 의식이 맺는 동맹의 화려한 개막을 보기 위해서는 19세기 말로 넘어가야 합니다.
서양의 19세기 말은 심리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억과 습관을 비롯한 정신현상 분야의 연구가 봇물을 이루었습니다. 거기에도 역시 자연과학적 방법에 충실한 관념연합론과 윌리엄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이론이라는 두 대립된 입장이 있습니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 내부에서는 전자가 대세일 수밖에 없었으나
문학과 예술, 기타 사회과학에서조차 주관적 의미의 시간관념이 점차 유행처럼 번지게 됩니다.
이것은 가히 ‘사적 시간의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문화적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를 보십시오. 그들이 수학공식들로 바싹 말라버린 근대인을
내적 시간의식의 파노라마 속에서 얼마나 풍부하게 살찌웠는지를.
이들 이전에 철학의 방면에서 시간의식을 주제로 하여 완결된 시간 철학을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입니다.
의식현상은 시간과 동떨어져 생성될 수 없어
그는 “내 영혼의 상태는 시간의 길을 걸으면서 그것이 끌어 모으는 지속으로 계속 불어난다”고 말합니다.
기억과 무의식으로 가득한 인간의 의식현상은 시간과 동떨어져 생성될 수도 사유될 수도 없습니다.
순간들의 합으로서의 의식은 기억 없는 의식이며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불연속적 의식입니다.
관념연합론은 의식을 관념들로 분해하고 그것들을 다시 결합하여
정신 현상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수학적 방식에 입각해 있습니다.
살아 생생하게 활동하는 의식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잘게 쪼개진 의식의 파편들은 임의의 방식으로 조합이 가능합니다.
마치 좌표 위의 수학적 시간이 왼쪽으로 이동하면 과거로도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과거가 잔존하므로 의식에 있어서 같은 상태를 두 번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거의 무게는 시간의 질적 변형을 가져오고
우리의 자아는 매순간 축적된 경험으로 새로워지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흐름이라는 본성, 불가분적 구조 그리고 불가역성은 주관적인 의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이 과연 얼마나 철저하게 데카르트와 뉴턴의 후예들일까요.
우리는 지난 세기들에 발생한 목적론이나 종교적 사유에서 자유로운 만큼
기계론적 인과론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전개되는 복잡계의 과학은
우리에게 끝없는 새로움의 분출과 카오스로서의 우주를 맞아들일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일단 정해진 태풍의 방향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은 물질에서도 그 족적을 남깁니다.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요동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는 프리고진의 물리학적 혁명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관념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황수영 한림대연구교수, 철학
- 2008. 12. 08
-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 ⓒ ScienceTimes
(3) "시간은 객관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의미
다 같은 ‘시간’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내면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언어로 대화하고, 언어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먼 옛날에는 나무의 그림자, 때로는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시간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지상 어디에서나 보이는 태양은 인간 내면과 무관하게 초월적인 존재를 뽐내며 꾸준히 움직였습니다. 시베리아의 저녁 태양과 대서양의 아침 태양이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 확립됐고, 이는 한 지역의 밤낮과 구별되는 우주 전체에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관념을 뚜렷하게 했을 것입니다. 푸코는 『전날의 섬』에서 이런 상상력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행히 지금은 국제전화가 간접적으로 그런 구별을 경험하게 합니다. 시간 측정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만,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서 측정한 시각을 직접 비교할 때는 여전히 천문현상을 ‘동시에’ 관측한다고 간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고안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두 지점에서 측정한 천문현상 발생시각을 직접 비교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19세기 말 장거리 전신망 덕분에 직접 비교가 가능해졌는데, 이번에는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신호가 오가는 시간 간격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달리는 열차의 시계와 철도역의 시계를 동기화하는 문제로 환원해 해결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시간관념은 일상경험과 잘 들어맞지도 않고, 개념적으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로지 정밀한 측정기계를 통해 추상화된 시각들만을 전달 받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20세기 전반 보어는 입자나 파동 같은 우리의 언어와 개념이 일상세계에 추상화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양자역학적 세계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일상에서 추상화된 것이라면, 우리 몸이 경험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우리 감각에 잘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방법마다 특성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이컬슨-몰리 간섭계를 이용하면 빛이 두 경로를 각각 이동하는 시간의 차이를 학부생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경로를 따라 빛이 이동하는 전체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장비를 이용해서 ‘현재’가 그리니치 시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를 판별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경험과 기술은 다양하게 분기돼 있습니다. 계측방식마다 측정영역이 다른 방식의 측정영역과 일부 겹치고, 공통영역에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덕분입니다. 마치 누벼 만든 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장의 커다란 천으로 기워내었지만, 한 천조각과 다른 조각이 같지는 않습니다. 즉 경험세계마다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푸앵카레는 인간이 물리법칙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방식과 내용이 인간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시간’ 이라는 누비이불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 이관수, 동국대 교양교육원 조교수, 물리학史 - 2008. 12. 08 -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 ⓒ ScienceTimes
“물리학 이론은 원리가 다른 장치로 계측한 시간들도
▲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은 시간들의 관계를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저는 옛 물리학자들의 행적을 살펴볼 따름입니다만, 물리학을 높이 평가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 또한 공연히 덩달아 으쓱하곤 합니다.
우리가 물리법칙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지식과 개념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지 저 사물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지난 수백 년간 많은 노력 끝에 물리학적 지식을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와 비교적 잘 대응하도록 다듬어 내었고, 이제는 우리 몸으로는 도저히 감각할 수 없는 영역까지 진출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평소에 세계에 대한 고전 물리학적 개념과 몸과 간단한 도구들을 통해 감각하는 세계 사이의 구별을 잊을 정도입니다. 아마 다른 어떤 분야에 견주어도 대단한 위업이 아닐까 합니다.
뉴턴이 말한 절대시간도 그런 개념이었습니다.
두 지점의 천문현상 발생시각 직접 비교
천문학 지식이 축적되면서
사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상상해내어야 합니다.
갈릴레이가 진자의 원리를 발견하고, 호이겐스가 진자시계를 처음 제작한 이래
▲ 물리학 이론은 원리가 다른 장치로 계측한 시간들도 다 같은 ‘시간’으로 여긴다.
그렇게 탄생한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는 물리량이며 두 시계가 상대방에 대해 등속직선운동을 할 때 한 시계의 측정치는 언제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다른 시계의 측정치로 변환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 시계는 이상화된 시계입니다.
양자역학이 기계적 인과를 느슨하지만 더 질긴 확률적 인과로 대체했듯이 특수상대성은 시간들의 관계를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게 고정시켰습니다.
양자역학적 세계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하는 까닭
우리의 몸은 두 장소에서 측정한 시각을 한 번에 직접 경험하지 못합니다.
제가 ‘시간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또 세포 내에서 생화학반응이 일어나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정밀하게 측정할 수도 있지만,
물론 물리학 이론은 원리가 다른 장치로 계측한 시간들도 다 같은 ‘시간’으로 여깁니다.
측정현장에서는 문제영역마다 적합한 측정방법을 선별해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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