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는 걸까
근대적 세계관을 반박하는 다양한 방식
근대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는 라플라스의 악마이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고안해낸 이 상상의 존재는
‘만일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모두 설명해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는 19세기 통계 및 열역학의 발전으로 흔들리게 된다.
기체 분자 등의 운동의 경우 원리적으로는 결정론적 기술이 되겠지만,
사실상 통계적으로만 기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은 근대의 세계관이 그 뿌리에서부터 틀린 것임을 보이며, 결정론을 전복시켰다.
▲ 흔히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는 예로 나비의 날갯짓에서 일어나는 태풍이 있다. |
세계가 미시적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양자역학의 주장은 많은 파장을 일으켰고,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거부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출현한 후 수십 년 동안 전개된 실험들은 결정론이 그릇된 관점임을 보였다.
우연에 대한 사고의 전향은 20세기 후반 일리야 프리고진 등이 주창한 카오스 이론에 의해서 더욱 만개한다.
소립자들이 노니는 미시적 세계만이 아니라, 거시 세계에서도 단순한 선형 방정식으론 기술하기 어려운 우연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흔히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는 예로 나비의 날갯짓에서 일어나는 태풍이 있다.
또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는데, 만일 우리가 공룡 시대로 거슬러가 아주 작은 흔적만을 남겼더라도,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불어나 대통령의 이름이 달라지거나, 인류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연 개념은 생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떤 개체가 생존에 유리한 특질을 타고 났다고 해서 곧바로 그 개체가 적자로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다.
단지 그 개체에게 우호적인 생존의 조건이 주어졌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거기에는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우연이 개입한다고 봐야 한다.
우발과 우연은 구분해야
그런데 우발과 우연은 구분을 해야 한다.
우발은 어떤 사건이 근본적으로 이유나 원인이 없이 일어났다는 의미이다.
쿠르노는 우연을 그 자체로는 필연적인 인과적 계열들이 우연히 만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까마귀가 나는 사건과 사과가 떨어지는 사건은 각각을 놓고 보면 필연이지만,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양상은 필연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한편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불확정성은
근원적 우발이나 독립적 계열들의 우연한 만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세계가 우연적 사건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되, 일정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우연은
어떤 사건의 결과가 그 사건의 원인에 영향을 미치면서 복잡하게 뒤얽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확히 말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양자역학의 확률적 우연과 카오스 이론의 복잡계에서 돌발하는 우연과
쿠르노 식의 독립된 계열들의 마주침이라는 우연이 착종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우연을 계기로 삼는 진화론적 세계까지 고려에 둔다면,
우리는 지극히 우연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 오주훈 교수신문기자, aporia@kyosu.net
(2) 미시적 우연과 거시적 결정론의 융합
카오스와 우연, 물리학자의 관점
“카오스는 계가 결정론적 프로그램에 의해 모든 가능한 동역학을 우연의 과정으로
다 탐구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옛날 사람들은 태초에 세상을 완전한 카오스로 보고 그들의 신들 중 하나를 카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복잡한 자연 현상의 원인을 끊임없이 규명하고자 했고,
인과관계의 일정한 패턴을 예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세계관은 뉴턴의 역학 법칙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고,
라플라스에 의해 뒷받침됐습니다. 세상의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운명이 결정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혁명이 밝혀낸 원자의 세계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확률의 세계입니다.
자연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우연을 바탕으로 한 ‘주사위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호모순의 두 세계 - 미시적 우연과 거시적 결정론은 어떻게 융합될 수 있을까요.
▲ 카오스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확률론적 세계관의 중요한 고리를 제공한다. |
기원전 5세기 ‘원자론’을 처음 주장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일이 ‘우연이냐 필연이냐’하는 명제는 철학적, 종교적 차원의 난제로 인류 역사의 끝없는 논쟁의 근원을 제공해왔습니다.
1970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생물학자인 자크 모노가 저술한 ‘우연과 필연’은 새로운 과학적 접근으로 출간 후 전 세계의 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폴 데이비스에 의하면 이 시기에 시작된
또 하나의 현대과학의 혁명은 ‘복잡성의 과학’입니다.
복잡성의 과학은 우연을 가장한 자연의 복잡성 속에 숨어 있는 질서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우리 주위의 자연과 사회를 더 주의 깊게 관찰하면,
많은 현상이 교과서의 예제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며 역동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변화무쌍한 구름, 계곡의 급류 흐름, 흔들리는 불꽃, 역동적인 생명현상, 주식의 급격한 등락,
인터넷과 사회의 거미줄 망 등은 매우 불규칙하고, 비예측적이며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거시적 세계에서의 비예측성은 주위에서 흔히 관찰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예외적, 비정상적 대상 또는 고전적 방법론의 물리학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예측성은 ‘나비효과’에 의해 결정계에서도 생겨날 수 있으며 이를 카오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카오스는 완전한 우연이 아니며,
그 불규칙성의 이면에는 새로운 형태의 수학적 질서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뇌도 카오스 상태
저명한 과학자 더글라스 호프스타더에 의하면
“질서와 카오스는 거울 양쪽의 실상과 허상처럼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카오스의 미스터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카오스는 전혀 달라 보이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확률론적 세계관을 연결시켜주고
상호 양립이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고리를 제공합니다.
카오스 계들은 비선형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선형계의 경우 출력이 입력에 비례해 결과의 정확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비선형계의 경우 출력과 입력의 상관관계가 비례하지 않고 ‘나비효과’에 의해 비예측성을 낳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뇌도 수많은 비선형 신경세포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복잡계로서
그 활동이 카오스 상태를 보인다는 것이 생리 실험과 뇌파 측정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자연은 카오스의 우연성을 오랫동안 이용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가능성들을 시험해봄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환경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통제된 형태의 우연한 돌연변이를 통해
자연도태를 이겨낼 수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만들어 진화해온 것입니다.
카오스는 우연을 통한 다양성과 함께 제어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게 해주는
바람직한 자연의 알고리즘인 것 같습니다.
또한 카오스의 원리로 우리 창의성의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고,
결정론적 세계관과 자유의지의 융합이 가능하도록 해줄지도 모릅니다.
이제 카오스가 질서와 예측성의 족쇄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복잡계는 많은 작은 부분들로 엮어져 있어 카오스를 축으로 한 복잡계 과학은
다양한 단계가 엮어진 패턴을 이해, 제어하려는 노력을 시도합니다.
최근 복잡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원리를 공학, 생명현상, 생태계, 경제 및 사회현상에 응용하려는
학문간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조세프 포드에 의하면
“복잡성의 과학은 거시의 세계, 미시의 세계에 이어 복잡성의 세계를 다루는 21세기 현대과학의
새로운 흐름” 이라고 합니다.
또한 과학평론가인 하인스 페이겔스는 “무한한 응용가능성을 가진 복잡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21세기의 세계의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연과 필연, 카오스와 복잡성의 상관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면
기상예측 등 현대사회의 주요 과제에 새로운 접근이 가능합니다.
카오스는 미시적 세계의 우연과 거시적 세계의 필연을 엮는 유기적 전체의 원리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 김승환 교수/ 포스텍, 물리학
(3)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우연히 남는 현상"
진화론과 우연, 생물학자의 관점
“자연은 의도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우연히 하나가 남을 뿐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루키포스(Leucippus)는
“아무것도 우연히(random)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은 이유와 필요가 있어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도 행운이나 우연이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연의 사건들은 인과로 이어진 필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목적론은 완전성을 전제하는 본질주의로
중세 유럽의 신학과 결합해 신의 의도적인 창조만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17-18세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영향을 받은 기계적 세계관과 이슬람 문화의 유입으로
종의 변화를 인식하지만 신학은 여전히 종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종의 변화를 인정하는 경우도 지적 설계론처럼 신이 계획하고 안내하는 변화를 주장합니다.
▲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우연의 현상으로 종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한편 19세기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와 다윈(Charles Darwin)은
종의 변화를 인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라마르크는 단순한 종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형태가 더 복잡하게
선형적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필연의 목적론의 주장입니다.
반면 다윈은 다양한 새끼들 중 일부가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하면서
한 종이 다양한 종으로 분기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여전히 필연의 결과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연의 현상으로 종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선택설의 기본적인 요건은 무엇일까요.
첫째, 한 종의 개체들이 서로 달라 변이가 있습니다.
이 변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유전되는 변이입니다.
둘째, 한 지역에서 살 수 있는 개체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새끼들이 태어납니다.
따라서 새끼들 사이에 생존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새끼들 사이의 경쟁에서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개체가 살아남아
새끼를 낳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대는 생존한 개체를 더 닮게 돼 종이 환경에 더 잘 적응하게 변합니다.
이런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합니다.
자연은 의도적인 선택하지 않아
이런 자연선택의 설명은 종의 변화를 필연적인 변화로 오해하기 쉽게 만듭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적응 과정으로 정의된 자연선택은
분명 목적하는 결과를 낳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연선택에 의해 최적자가 생존한다는 극단적인 설명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생명의 역사를 획일적인 필연으로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순환논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특정한 종에서 관찰된 현상을 자연선택에 의한 유일한 적응 방식인 것처럼
사람 사회에 직접 적용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해 재미있는 우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종들이 처한 상황, 즉 환경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령 같은 상황이라도 현상은 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우연히 남는 것이지
필연의 유일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오해가 발생할까요.
자연선택은 관찰된 현상을 생존 목적을 달성한 결과라고 인과론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의도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우연히 하나가 남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벼락이 칠 때 용감하고 활발한 원숭이는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포효하며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이 더 큽니다.
하지만 소심한 원숭이는 숨었기 때문에 살아남아 우두머리가 될 확률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이 자연에서 관찰된 현상을 유일한 필연의 결과로 단정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다윈이 자연선택설을 발표한 19세기에 널리 인정된 혼합 유전 방식에 반해
신이 창조한 대로 유지되는 유전 입자를 입증한 멘델(Gregor Mendel)의 유전 원리가 발전하면서
종의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자연선택설을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 것은 역설적입니다.
즉, 20세기 들어 집단유전학과 분자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 빈도를 직접 측정하고 유전자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면서 자연선택설은 더욱 널리 인정됐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자연선택설은
크로우(James F. Crow)와 기무라(Motoo Kimura)에 의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자연에 돌연변이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기무라는 돌연변이의 대부분이 자연선택에 대해 중립이라는,
즉 적응면에서 중립적이라는 중립설을 주장하면서
종의 역사가 한 조의 돌연변이군에서 다른 돌연변이군으로 전이해 가는 확률적인 과정,
즉 우연의 현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전히 자연선택과 중립설의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연선택설이 생명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된 이론으로 인정되면서 중립설이 부분적으로 인정되는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생물이 단순히 유일한 인과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 중 우연히 실현된 하나라는 점은 명확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조건이 같더라도 현재와 동일한 생명의 역사는 재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 정민걸 공주대 생태유전
- 2008. 12.15
- 학술 전문 주간지 <교수신문>(www.kyosu.net)과의 공동기획, ⓒ ScienceTimes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공지능의 구현을 둘러싼 철학자와 로봇 공학자 간의 쟁점 (0) | 2009.01.08 |
---|---|
시간의 계측에 대한 철학과 물리학의 쟁점 (0) | 2009.01.08 |
청백리(淸白吏) (0) | 2009.01.08 |
어느 건칠불상의 미소 (0) | 2009.01.07 |
팔공산 파계사 건칠보살좌상 (0) | 2009.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