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건칠불상의 미소
몇 년전 동아대학교 박물관 유물 문화재 지정신청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보조 조사자였지만 좋은 유물을 직접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유물 중에 유난히 관심을 주는 불상 한 구가 있었다.
불상은 세월을 머금은 듯 금빛은 퇴색되었지만
장신구들의 정교함이나 부드러운 조형감이 온 몸으로 배어 나왔다.
박물관 측에서 전하는 구입경위는 이러하였다.
최근 이 불상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불상을 제작하는 재료는 동이나 철과 같은 금속류나 석제 혹은 목제를 사용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물론 건칠을 재료로 불상을 제작한다는 사실은
문헌이나 중국의 사례로 알려져 있었으나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옻칠이나 베 혹은 종이를 여러 겹 둘러 조형된 불상을 건칠상(乾漆像)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건칠’의 용어는 시대별로 그 뜻을 달리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는 약재의 한 이름으로 분류되었고(『고려사』 卷9, 世家 9, 문종 33년 7月),
실제 예술작품의 용어로 등장하는 것은
1936년 동아일보 기사 ‘건칠화병습작(乾漆花甁習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대 이후에 사용된 어휘이다.
건칠의 용어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서도 달리 사용되었는데
고대 일본은 ‘즉(卽)’ 혹은 ‘색(塞)’의 용어로 건칠을 대신하였고, 명치시대 이후 건칠로 사용되었다.
또 칠로써 불상을 제작할 경우 중국과 우리나라는 ‘협저상(夾紵像)’ 혹은 ‘칠상(漆像)’으로 불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원풍연간(元豊年間: 1078-1085)
송으로부터 고려 흥왕사(興王寺)에 협저상(夾紵像)을 내렸음을 기록하고 있고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卷17, 祠宇 王城內外諸寺),
조선시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효종 10년(1659) 청주 안심사 漆像이 땀을 흘렸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는 漆像(漆像)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第155冊, 효종 10年 閏3月 癸亥).
동아대학교 건칠상은 내 힘으로도 옮길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무게였다.
일반적으로 등신대의 목상인 경우 혼자서 움직이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다.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다른 불상과 다른 장신구의 정교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재 조사된 우리나라의 건칠불상은 대부분 탈활건칠(脫活乾漆)기법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 기법은 대략의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포를 두르는 것과 옻칠을 반복한 후 건조시켜
내부의 형상을 깨끗하게 제거하는데 이 때문에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칠 불상은 10-12겹의 베를 돌린 것이 많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건조된 탓인지 두께가 1cm 이하로 나타나고 겹수에 비해 얇다.
보계와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우며, 안면은 호분으로 보안하고,
머리카락과 장신구, 군의의 띠매듭은 호분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다.
이러한 제작 과정이 다른 재료의 불상과 구별되는 섬세함과 부드러운 특징을 드러내게 한다.
건칠상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눈동자를 수정과 같은 다른 재료로 감입한다는 것이다.
눈동자의 감입은 중국 당대 건칠상이나 일본에서는 나라시대부터 출현하는데
특히 일본의 경우는 이를 ‘玉眼’ 이라 하여
불상 안에 사리를 넣으면 영험이 깃든다는 생신사상(生身思想)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옥안 제작과정은 불상내부 눈의 위치에 수정과 같은 다른 재료를 아교와 같은 접착제로 붙인다.
붙인 눈동자의 뒷면에 채색을 하고 그 뒤에 눈동자보다 크고 얇은 목판을 대고
竹釘 등으로 나무를 고정시켜 작업을 완료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해남 강진에서 발견된 머리만 남은 소조 나한상은 눈동자에 홈이 파여 있었는데
여기에 아마도 다른 재료를 감입하고 눈두덩이 부위를 흙으로 발라 눈동자를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건칠상의 눈동자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즉 눈동자 부위를 홈을 파고 다른 수정과 같은 물질을 감입하여
눈두덩이를 호분 등으로 발라 고정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과 같이 눈동자 뒤에 목판을 대고 죽정으로 고정한 사례가 엑스레이 상으로 발견된 것이
없어 이러한 생각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우리나라 건칠상중 눈동자를 감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일본 大倉集古館 건칠보살좌상,
심향사 건칠여래좌상,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죽림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으며,
눈동자의 감입은 건칠상에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안동 봉정사 목조보살좌상, 서산 개심사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목불에서도 확인되어
이 방법이 건칠상과 목조상 그리고 소조불상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실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세지보살상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입상이 남원 실상사에 있다.
동아대학교 건칠상의 자세가 약간 엉거추춤하고 보관의 모양이 다르지만
얼굴이 주는 인상이며, 장식, 착의법 등은 같다.
이런 차이는 구입하고 일년뒤 보수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박물관 측에서는 전한다.
실상사의 짝 잃은 또 하나의 불상, 이 불상이 이렇게라도 존재하고 있음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그리고 이 불상은 이렇게 지난 시간을 우리에게 전한다.
- 이희정,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사진 : 마산 시립박물관 김광희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8년 6월
건칠불(乾漆佛)
건칠불(乾漆佛)은 나무로 간단한 골격(木造原體)을 세운 뒤
천이나 종이와 진흙으로 상의 모습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금물을 입힌 뒤 심목을 빼낸 불상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불상 대부분은 목불(木佛)이며, 건칠불을 모시고 있는 사찰은 소수에 불과하다.
목불이 대중적인 까닭은 만들기 쉽기 때문이고, 건칠불이 드문 이유는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고려후기),
나주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여말선초), 나주 죽림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남원 실상사 건칠관음보살입상, 영덕 장육사 건칠관음보살좌상(조선초기),
경기도 안성 천덕사 대웅전의 본존불, 경주 기림사의 건칠관음보살좌상(1501, 보물 제415호),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상, 안암동 개운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고려후기) 등이 대표적인 건칠불.
한편 종이로 만든 건칠불은 지불(紙佛)이라고도 한다.
건칠불(乾漆佛)을 제작하는 손희정씨가 말하는 지불 제작방법이다.
“한지(요즘은 신문지 등)를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푹 곱니다. 그런 뒤 탈수기에 넣어 수분을 짜냅니다.
다시 채로 받쳐서 종이가루를 냅니다. 이 종이가루에 풀을 섞어서 종이떡을 만듭니다.
종이떡을 골조 위에 한 겹 바르고 그늘에 말립니다. 다시 한 겹 바르고 말리고.
이런 식으로 수십 겹을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하면 할수록 확실히 결과가 좋습니다.
그런 뒤에 염료 채색에 들어갑니다. 연하게 바른 뒤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합니다.”
[역사]
건칠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협저(夾紵)라 하였다. 건칠은 주로 근대에 쓰이는 용어로,
초기에는 건칠(乾漆)조각상에 이용되었고 현재는 공예 · 고고학분야에서도 사용된다.
건칠기법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미 한대(漢代)에는 산시성(山西省) 양가오현(陽高縣)에서 출토된 전한의 협저관(夾紵棺),
낙랑(樂浪)에서 출토된 후한 건무(建武) 21년(45)의 협저이배(夾紵耳杯) 등
다양한 용기와 식기 등의 유물이 있다.
《법원주림(法苑珠林)》등의 여러 문헌들에 의하면
협저상이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동진(東晉) 395년 이전으로
초은사(招隱寺)에 협저행상(夾紵行像) 5구(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조상(造像)을 전하는 문헌은 많으나 중국의 불상유품은 많지 않고
9세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워싱턴 프리어미술관의 상(像) 등이 있는 정도이다.
협저상은 돌 · 소(塑) · 금속상과 비교해서 가벼운 반면 내구성이 크다.
한대 이후의 전통적인 협저기법이 불상을 받들고 행렬하는 행도상(行道像)이나
황제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한 등신상(等身像)의 제작에 사용된 것은 목적에 맞는 기술의 채용이며,
여기서 협저상 발생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문헌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건칠상이 있었다고 하며
유품으로는 고려말로 추정되는 보살형좌상(菩薩形坐像;일본 大倉集古館)이 알려져 있다.
[제작법]
건칠기법은 탈건칠과 목심건칠 두 가지로 나뉜다.
이 두 방법은 목시칠(木屎漆)에 의한 소형이 공통되므로 합쳐서 <건칠상>이라고도 한다.
(1) 탈건칠(脫乾漆)
건칠불상에서 탈건칠, 즉 탈공건칠 기법에 의한 제작법으로 탈활건칠(脫活乾漆)이라고도 한다.
우선 나무심(木製心木)을 짜고, 소토(塑土)를 붙여 상의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다.
굳어지기를 기다려 이 소상(塑像) 위에 삼베(麻布)를 접착력이 강한 밀가루를 섞은 생칠(生漆)로
5∼10층 정도 겹쳐 바른다. 두께는 0.7∼1.5㎝ 정도가 된다.
마포는 부분에 따라 크기를 적당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이것을 여남은 겹칠로 덧붙여
말라서 굳은 뒤에는 머리 뒷부분과 등 부분 등을 갈라서 원형인 소토를 긁어내고
형태의 본이 된 소토의 형(型)을 내부에서 떼내어 속이 비게 한다.
이것을 탈공협저(脫空夾紵) · 탈활협저(脫活夾紵)라고 부른다.
상(像)을 보존하기 위해 내부에 3단의 선반과 같은 구조의 심목을 새로 짜 넣어 고정시킨다.
이 방법은 8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2) 목조건칠(木心乾漆)
불상을 나무로 조각하고 여기에 옻칠한 마포를 1겹 씌운다. 그 외에는 탈건칠과 같은 방법으로 한다.
또는 중요한 부분만을 건칠기법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대체적인 선들은 나무를 조각해서 충분히 나타낼 수 있으나,
섬세하고 정밀한 표현은 협저를 이용한 칠의 조작으로 더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목조건칠의 경우에는 나무가 원형이 되므로 제거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8세기 후반부터 성행하여 9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3) 현재의 건칠
현재는 점토로 만들고자 하는 기형(器形)을 조소(彫塑)해서, 석고로 외형을 뜨고
그 안 에 칠을 하고 삼베를 발라서 말린 뒤, 외형에서 분리시키는 방법을 쓴다.
이 외형은 두 조각 또는 더 많은 조각으로 만들어서 맞추면 안의 모양은 원형과 같아진다.
여기에 풀을 물에 풀어서 벵갈라(bengala)를 섞고, 외형 속에 솔로 칠을 해서 말린다.
그 다음 숫돌가루를 물에 풀고, 거기에 칠을 3대 1 또는 5대 1의 비율로 잘 섞어 다진 다음,
석고형의 내면에 칠하고 건조시킨다.
이 과정을 2∼3번 되풀이해서 칠의 두께가 약 2mm 정도가 되게 한다.
그 위에 옻칠을 다시 하고 삼베를 잘 발라 밀착시킨다.
원하는 두께가 될 때까지 되풀이하면 그릇의 두께는 적당하게 두꺼워지고 견고성도 더해진다.
이런 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석고 외형을 벗겨내면 그릇은 원형과 같은 모양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낸 건칠기류에 다시 표면에 고운 칠로 마무리 작업을 한다.
조소원형이 완전하고 세밀하지 못할 때에는
협저상(夾紵像) 손질처럼 옻칠로 그 디테일을 살려가면 된다. 또 거기에 무늬를 넣고 장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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