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함화4년명불상' 유물로 본 발해사

Gijuzzang Dream 2008. 12. 21. 21:22

 

 

 

 

 

 

 유물로 본 발해사의 쟁점

 

 

발해(698-926)는 전성기에 중국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며

 영토가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러시아 연해주, 서쪽으로는 중국의 요동지방,

북쪽으로는 송화강(松花江)과 아무르(Amur)강 유역까지 미쳤고,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을 그을 정도로 광활하였다.

이에 발해사 연구는 남북한을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발해와 외교관계를 밀접하게 가졌던 일본에서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심을 이루는 연구 주제는 대조영의 출자(出自), 종족 구성, 지리 고증, 대외관계, 문화 성격,

고고조사 및 연구, 유민의 활동, 정치와 사회 등이다.

이 가운데 각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주제는

역시 대조영의 출자와 종족 구성, 문화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발해사의 귀속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발해사의 귀속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발해인 스스로 멸망 직후 유민에 의해 서술된 발해 사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발해의 옛 영토가 오늘날 동아시아 3국에 걸쳐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현 중국 영토 내의 전체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인식하에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국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발해사 연구의 실질적인 출발은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1784)>였다.

이 시기에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한말, 일제하를 거치면서 연구에 커다란 진전은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발해사 연구는 자연스레 남북한에서 별도로 진행되었다.

 

남한의 발해사 연구는 1960년대부터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는 동양사 연구자인 이용범(李龍範)이 일본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 주도해 나갔다.

70년대에 이우성(李佑成)의 남북국시대론을 거쳐

80년대 들어 한규철, 노태돈, 송기호 등에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9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학자가 새로이 참여하면서

연구 분야도 다양해지고 연구 성과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최근의 발해사 연구는 어느 다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각국간에 발해사를 보는 쟁점이 많이 부각되어 있는 것도 현실이다.

현재 발해사의 가장 큰 쟁점은 건국자 대조영의 출자 및 주민구성(사회구성), 문화 성격,

강역과 지리(발해의 영역과 5경의 위치), 발해 인식의 변천, 국가 성격(책봉, 지방정권인가) 등이라

할 수 있다.

 

함화사년명불상(咸和四年銘 佛像)은 양식적으로 당나라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명문이 전해지고 있어 발해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함화 4년(834) 허왕부(許王府)의 조문휴(趙文休) 어머니가 포교를 위해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함화(咸和)란 연호는 중국 동진(東晋) 성제(成帝) 연간(326-334)과

발해 11대왕 대이진(大彛震) 연간(831-857)에 사용되었다.

불상의 형식으로 보아 동진보다는 발해의 연호일 것이다.

함화란 연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복제품으로 전시되고 있는

함화 11년(841)에 발해 중대성이 일본 태정관(太政官)으로 보낸 중대성첩 사본에도 보인다.

  

 

 

 

발해는 15대왕으로 이어지는데 연호가 전해지는 8왕이다.

이를 두고 <신당서> 발해전에서는 “사사로이 연호를 고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연호를 정했다는 것은 발해가 황제국의 나라로서 당당한 독립국가라는 뚜렷한 증거이다.

또한 허왕부(許王府)란 관서명이 있다. 따라서 발해에는 왕부가 설치되었고,

허왕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발해의 군주는 제후 왕을 황제국으로서 다스리는 자인 것이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발해를 속말말갈(粟末靺鞨)을 중심으로 하는 당나라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당서>에서 발해 건국자를 속말말갈 출신으로 여기며,

발해 건국 세력에 말갈이 다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라는 국호를 당으로부터 받았고,

당나라 현종이 발해 고왕 대조영을 홀한주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으며,

당에게 끊임없이 조공하였다는 것이다.

 

발해 국호에 있어서 <신당서>에 ‘말갈’이란 국호를 버리고 “발해”라고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발해는 개국으로부터 ‘진(震), 진국(振國)’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었으며

말갈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왕조의 이민족 수장에 대한 책봉은 발해에만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발해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에 대해서도 그리하였다.

이것이 곧 속국이나 지방정권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식이다.

책봉이란 중국의 대외적 외교 의례에 하나였을 뿐

책봉 상대국의 주권 독립성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화4년명 불비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발해 왕조는 대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왕부가 설치된 황제의 나라였던 것이다.

- 고고관 발해실, 김동우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115회

 

 

 

 

 

 

 

 

 

[국립고궁박물관]  「아무르 · 연해주의 신비」특별전

(The treasures of Primorie and Priamurie:

New results of Korea-Russia joint excavation)

   

 

 

한, 러 공동발굴 특별전

[아무르, 연해주의 신비]

 

 

전시기간 : 2006년 11월01일-12월3일

전시장소 :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주      최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6년간(2000-2006)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소장: A.P. 데레비얀꼬)와 공동으로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조사한 유물들을 국내로 들여와

한 · 러 공동발굴특별전 「아무르 · 연해주의 신비」를

(The treasures of Primorie and Priamurie: New results of Korea-Russia joint excavation)

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06년 11월 1일부터 12월 3일까지 개최한다.

 

한 · 러 공동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해주 등

러시아 극동지역의 유적을 우리 손으로 직접 발굴조사하여 우리 민족의 원류를 밝히고,

나아가 선사시대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양 지역 상호 문화교류 양상을 이해하고자

기획 · 추진하는 사업이다.

 

1차 3개년 조사(2000~2002년)는 아무르강 하류 '수추섬(Suchu)’ 신석기시대 유적을,

2차 3개년 조사(2003~2005)는 연해주 ‘불로치까(Bulochka)’ 초기철기시대 유적을 발굴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 아무르유역과 서포항 등 한반도 동해안일대와의 관계,

초기철기시대 옥저 등 고대국가의 문제,

특히 한민족 고유문화인 ‘온돌’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확보하여 국내학계에 소개하였다.

 

 

 

이번 특별전에는 아무르강 하류 수추섬유적과 연해주 불로치까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을 포함하여,

러시아 극동지역의 신석기시대에서 발해 · 여진까지의 고고유물과

현지 원주민의 민속유물 등 총 393점이 전시된다.

 

 

 

일명 ‘아무르의 미케네’로 불리는 아무르강(黑龍江) 하류에 위치한 수추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주거지 5기 등의 유구에서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토기,

간결하고 세련되게 표현된 다양한 인물상, 동물상을 비롯한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번에 전시된 세계 최고(最古)의 토기편과 강렬한 인상의 인물 문양 토기 및 편두(偏頭) 여인상,

곰, 물범, 물고기, 새 등의 다양한 조각품들은 이 지역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풍부한 예술성을 보여준다.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연해주의 동해안에 위치한 불로치까유적에서는

총 23기의 주거지에서 신석기시대에서 발해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중 옥저(沃沮)의 ‘돌상자형’ 온돌의 발굴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인 온돌의 기원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밖에 각종 철기시대 유물들은 발해 형성 이전의 문화상을 잘 보여주며,

아무르 지역의 말갈 · 여진문화는 특히 연해주의 발해문화와 비교된다.

 

이번 한 · 러 공동발굴특별전은 이러한 한 · 러 양국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러시아 연구소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러시아 극동연구소와 공동으로

3차 3개년 계획(2006-2008)으로 실시 중인 ‘연해주 문화유적 학술조사’는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두만강 이북 하싼과 나제즈다지구에 소재한 발해유적을 중심으로 한다.

 

하싼지구는 발해시대 염주성(鹽州城)으로 알려져 있는 끄라스끼노 발해평지성이 존재하는 곳으로

일본과 신라를 왕래하는 주요한 교역로로 이용된 지역이다.

또한 북옥저 등 고대국가 형성시기는 물론 보이스만문화의 평저토기,

자이싸노프까문화의 빗살무늬토기 등 선사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이번 조사를 통해,

한반도와의 역사·문화적 관계를 밝혀줄 실증적인 자료를 다수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발해시대의 유적으로는 끄라스끼노城과 절터 이외에도 뽀시옛 동굴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담당자 : 유적조사연구실 홍형우
연락처 : 042-860-9171 

- 문화재청

 

 

 

 

 중국동북공정과 한 · 러 공동발굴조사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의 역사무대였던 만주지역과

심지어는 북한지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왜곡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책이다.

그러한 역사왜곡은 신석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황화문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석기시대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발상지로

지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역사인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는 논리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유사 이래 극히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북방민족들의 역사도 모조리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중국은 한국과의 역사전쟁을 야기한 다음 한국 학자들의 중국 내 관련유적과 유물에 대한 접근을

차단 혹은 제한함으로써 자료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에서 출간되는 유적조사 소개 논문은 내용이 매우 소략하고 도면과 사진이 부족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극히 어렵다.

중국은 고고학 자료를 통제함으로써 역사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는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자료는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가 있다.

사실 문헌자료는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주변의 모든 나라 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헌자료를 통한 역사전쟁은 이미 확보되어 있는 자료를 어떻게 취사선택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는 그렇지가 않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는 만주지역과 북한지역에 걸쳐 위치하였고,

발해는 여기에 더하여 대부분의 연해주 지역과 아무르 강 유역까지도 포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의 많은 유적이 중국에 위치하며,

유적 조사의 내용을 중국학자들만이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적은 자료, 그것도 완전하지 못한 자료로 많은 자료를 확보 및 통제하는 중국과

싸워 이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역사가 우리의 역사임이 명백함에도 말이다.

따라서 고고학에서 역사전쟁은 아직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자료 확보의 문제가 우선적 과제라고 하겠다.
만주지역은 중국의 통제로 인해 우리 역사 유적을 직접 발굴 조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적과 유물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 지역은 이유는 다르지만 중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발해와 옥저 유적은 지금으로서는 러시아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만 우리의 직접적인 조사가 가능하며,

연해주에서는 고구려의 유적도 조사될 가능이 있다.


1990년 9월에 한국과 러시아(구소련)가 수교를 한 이후, 17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 동안 고려학술문화재단과 대륙연구소가 연해주 지역의 발해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신석기시대, 초기철기시대, 말갈, 발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유적이

우리 학자들의 손에 의해 직접 조사되어 국내에 곧바로 소개되었다.

 

특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아무르 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수추 섬 유적과 연해주의 초기철기시대 불로치까 유적,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조사한 연해주 체르냐찌노 5 발해고분군,

고구려연구회와 고구려연구재단이 조사한 연해주 끄라스끼노 발해성터는

국내는 물론이고, 러시아 학계에서 조차도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고 있다.

체르냐찌노 5 고분군 출토 발해 청동기마인물상



발해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체르냐찌노 5 발해 고분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발해의 장법과 묘제에 대해,

발해의 공격용 및 방어용 무기에 대해, 발해의 장신구에 대해, 발해의 토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출토유물 간의 비교 및 다른 유적 출토 유물 간의 비교를 통해

발해의 강역을 고고학적으로 새로이 연구할 수 있게 하였고,

나아가 발해와 고구려, 발해와 말갈, 발해와 여진의 상호관계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하였다.

제한된 중국의 자료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수많은 학문적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체르냐찌노 5 발해고분군 발굴조사 모습



한때 중국은 연해주 지역의 발해유적도 조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행히 한국의 팀들이 중요 유적을 선점하여 그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중국의 팀들이 연해주 지역의 발해유적을 조사하고, 그 자료까지 통제한다면,

우리에게는 북방 역사의 모든 고고학 자료가 중국에 넘어가는, 실로 생각만하여도 끔찍한 일이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지금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러시아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있으며, 최근 2~3년 사이에 일반인들에 대한 급료가 3배 이상 올랐다.

러시아의 경제성장은 공동 발굴조사 현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발굴현장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2005년도에 조금 보이기 시작하더니 2006년에는 모든 학생들이 핸드폰과 MP3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적 격차가 매우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러시아가 그동안 한국과의 공동 발굴조사에 응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바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할수록 공동발굴조사의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한·러 공동발굴조사는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우리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복구할 수 있는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고고학 자료 확보라는 지극히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공동조사는 미래의 북방고고학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능을 하고 있고,

한국과 러시아의 팀원들에게는 상대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넓힐 수 있게 하며,

관련 러시아 학자들로 하여금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지원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한·러 공동발굴조사는 발굴조사를 통한 1차 자료 수집을 통해

중국과의 역사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학문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미래의 북방고고학 전문가 양성과 국제적 우군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공동조사를 위한 대외적 여건은 점차 나빠지고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보다 많은 팀이 투입되어 보다 많은 유적을 발굴하여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역사전쟁에 필요한 학문적 토대를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 2007-06-22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