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다호리 유적

Gijuzzang Dream 2008. 12. 21. 21:29

 

 

 

 

 

 

 다호리 유적(茶戶里 遺蹟)

    

 

 

 

경상남도 창원시(舊 地名 : 의창군) 동면 다호리 23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철기시대의 유적이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8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원삼국기(서력기원 직전-기원후 약 300년까지)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 나무 관에 시체를 안치한 뒤 구덩이를 파고 매장한 무덤) 69기와 옹관묘 4기 및

가야시대에 해당하는 대형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 시신을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창이나 입구가

없이 돌로 벽을 세움) 봉토분 1기가 조사되었으며, 1988년 8월 사적 제327호로 지정되었다. 

 

다호리, 수혈식석곽묘

 

 

유적의 북쪽 약 1㎞ 정도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 약 10㎞를 가면 낙동강의 본포(本浦)나루에 이른다. 또한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

김해, 부산까지 갈 수 있어 당시에도 이 강을 따라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논밭 일대는 해발 433m의 구룡산(九龍山) 북서줄기와 이어지는

해발 20m 정도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구릉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감나무 과수원과 계단식 논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유적의 분포범위는 야산에서 구릉의 아래쪽으로 너비 30-40m, 길이 150m에 달한다.

 

 

 

 

 

 

 

 

 다호리 사람들의 음식문화

 

 

 

 

인간과 습지, 그리고 다호리 유적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습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생산적인 생태계이며

기후조절, 오염원의 정화, 아름다운 경관 등 생물학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이유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택지개발과 오염 등으로 습지가 훼손되고 있다.

이와 같은 습지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1971년 람사르(Ramsar)협약이 조인되었다.

이 협약의 목적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습지의 손실을 막는 것이다.

 다호리 습지

 

습지는 물과 흙이 뒤섞여 밀폐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유물이 잘 훼손되지 않는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경남 창원 주남저수지 근처 논바닥에서 발견된 다호리 유적도

습지에 조성된 덕분에 무덤의 구조는 물론 다양한 유기질 유물에 이르기까지

유적 전체가 입체적으로 파악됨으로써

이 시대 문화상의 내용이 처음으로 보다 선명하고 실감 있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특히 다호리 사람들은 습지에 무성한 갈대 등 초본식물류를 이용하여 바구니로 만들어 쓰는 등

습지의 자연환경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또한 습지의 자연이 내준 물길을 통해 풍부한 철을 매개로

왜(倭), 예(濊), 한(漢), 낙랑(樂浪) 등과 교류해 왔다.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이러한 활발한 대외교류 과정에서 다호리 수장층의 권력이 신장되었다.

 

 

문헌으로 본 다호리 사회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漢), 예(濊), 왜(倭)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낙랑과 대방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다호리의 고급문화, 칠기(漆器)

 

 

 

옻칠은 표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과

방부, 방수(防銹 : 녹슬음 방지), 방습, 내열, 방수(防水), 접착성 등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원료인 옻나무 재배지가 한정되고 까다롭고 복잡한 제작과정 때문에 전문 집단만이 칠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칠제품은 일반인보다는 일부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합, 통과 같은 용기류를 중심으로 무기류, 공구류를 비롯해

붓, 부채자루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옻칠이 사용되었다.

 

 

칠기 제작기법

 

칠기란 옻(漆)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침전시켜 얻은 정제된 용액을

나무와 바구니, 토기 등에 바른 기물을 가리킨다.

원하는 광택과 색상을 얻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말리고 바르는 작업이 반복된다.

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건조시킨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칠 작업을 한 목심(木芯)칠기,

모시(紵)로 형태를 만든 후 옻칠을 반복하여 고급 칠기를 만드는 협저(夾紵)칠기,

그리고 대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기물을 짜고 칠을 한 남태(藍胎),

토기 위에 칠을 한 도태(陶胎)칠기 등이 그것이다.

 

 

변진은 토지가 미미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좋으며...

 

다호리 유적에서는 원형두(圓形豆), 방형두(方形豆), 원통형칠기, 뚜껑달린 원통형칠기, 사각합, 컵형칠기

등이 출토되어 칠기가 다시 최고 상층집단의 식기 또는 제기(祭器)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사 지낼 때 상 위에 올리는 삼색과실인 밤과 감도 출토되어

한경 명문에 등장하는 대추와 함께 이때 이미 제사의 기본 상차림이 마련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64호에서 출토된 부엌칼과 63호에서 출토된 칠기국자가 담긴 토기 등도

당시에 다양한 먹거리를 조리하던 다호리의 음식문화를 반증해 준다.   

 

 

 

다호리에서 출토된 율무

 

율무는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의이(薏苡), 혹은 의이인(薏苡仁)이라고 하며, 베트남이 원산지이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열전(馬援列傳)’에는 마원이 남쪽지방 교지(交趾 : 베트남)에 있으면서

몸을 가벼이 하고 욕망을 줄임으로써 풍토병을 이겨내려고 율무를 상식(尙食)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율무를 장복하면 비장을 튼튼하게 해 면역체계에 도움을 주고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져 약용식으로 언급되어 왔다.

 

 

다호리 출토 밤

 

통나무 널을 내릴 때 사용되었을 동아줄 주위에 흩뿌려진 채로 28립(粒)이 출토되었다.

밤은 뿌리가 내려가고 줄기가 올라가는 경계부근에 종자 껍질이 달려 있어

자기가 나온 근본을 잊지않는 나무로 여겨져 사당의 위패로 사용되며,

제사 때 밤을 올리는 것도 조상님의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안경숙

- 2008년 12월3일(117회)

 

 

 

 

 

 

 

 다호리 1호 무덤의 주인공

 

   

 

 

고고학 : 다호리 발굴조사와 통나무 관

 

다호리 유적은 1988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98년까지 모두 8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다호리 유적은 특이한 형태의 목관과 장제(葬制)의 확인으로 그동안 막연히 토광묘[土壙墓, 널무덤],

또는 목관묘라고 부른 원삼국 묘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 유적이다.

올해 2008년은 다호리유적을 발굴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1호무덤 출토 통나무 관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관이며, 1988년에 발굴조사된 이래 2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1호 무덤에서 출토된 통나무 관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당시 350년 된 참나무를 쐐기를 박아 반으로 자른 후

내부를 철제 도끼와 자귀 등 도구로 파내고 다듬어 관의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한 것이다.

몸체와 뚜껑의 한쪽 옆면(발쪽 부분)에는 각각 ‘ㄴ’자형 구멍을 파서 굵은 끈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목관의 또 다른 측면(머리쪽 부분)에는 위 아래로 각 2개씩의 홈이 파져 있어

X자형으로 줄을 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무덤 안의 통나무관의 위치와 관련된 다양한 부장유물의 출토위치를 보아 장례절차를 추론해볼 수 있다.

   

 

다호리 1호 무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목관묘군(群) 중 하나로

변한의 등장을 알려주는 표지적인 유적이다. 다호리 목관묘의 가장 큰 특징은

무덤의 바닥 한 가운데에 부장품을 넣기 위한 구덩이(요갱, 腰坑)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다호리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무덤의 형태이다.

그 중 특히 1호 무덤은 여러 목관묘 가운데에서도 가장 탁월한 부장품을 가지고 있어

이 지역 지배자의 무덤임을 짐작케 해준다.

 

1호 목관묘의 조영 방법을 살펴보면 먼저 길이 278㎝, 너비 136㎝, 깊이 약 205㎝의 묘광을 파는데,

장축(長軸) 방향은 대략 남동-북서 방향으로 침향(枕向)은 남동이다.

묘광 바닥 가운데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설치하고 그 안에 각종 유물이 든 대나무바구니를 넣었다.

바구니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칠초동검, 칠초철검, 칠초환두도자, 동과, 철과 등의 무기와 주조철부,

철겸(鐵鎌 - 농기구로 사용된 낫이나 유사시에 긴 자루를 달아 말을 탄 적을 말 아래로 끌어당기는 무기로 사용) 등 공구 그리고 중국거울, 청동띠고리, 삼각거치무늬 청동고리 등 장신구와 중국동전, 말방울,

칠기붓 등이 있다.

    

         철추(鐵椎=철퇴, 鐵槌)  / 철겸(鐵鎌)  실측도 (서산명지리고분군 토광묘 A호분 출토)

충남 서산시 대산면 명지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고분군으로

계곡 능선에 있는 토광묘군이며 두침은 서쪽방향(서침)이다.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후 목관을 안치하였는데 목관은 길이 240㎝의 굵은 참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참나무를 길게 반으로 쪼개고 그 내부를 파낸 뒤 각각 관의 뚜껑과 몸통으로 사용하였는데,

뚜껑인 길이 방향으로 한 번 더 쪼개어 세 개의 부재로 관을 만들었다.

또 관의 고정과 하관을 위해 동아줄로 관을 묶었는데

이를 위해 피장자의 머리 쪽에는 두 개의 홈을 파내고 발쪽에는 두 개의 운반용 고리구멍을 만들었다.

 

하관 전에 무덤 바닥에 목병부 판상철부, 주조철부와 밤, 나뭇잎을 깔았으며

굵은 밧줄을 홈과 운반용 구멍에 묶어 하관한 후 쐐기를 박아 관을 무덤의 바닥에 고정하였다.

목관 내부에는 칠초동검, 목제합, 목걸이, 율무 등을 넣었는데

원래는 훨씬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목관과 무덤벽 사이에도 판상철부, 철제따비, 칠기방형두, 칠기부채 등을 넣은 후

파내었던 흙을 채우고 나무뚜껑을 덮고 봉분을 쌓아 무덤을 완성했다.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기를 비롯한 각종 위신재를 통해 볼 때

당시 변한의 지배세력들은 철의 생산과 통제, 철을 매개로 한 교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지배권력을 유지, 확대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목관묘는 이런 변한사회의 지배계층의 집단묘지로

그 중 1호 목관묘의 피장자는 변한의 지배자로 볼 수 있다.

 

 

1호 목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목관의 제작공정을 살펴보면 참나무를 길이 약 240㎝로 잘라낸 후

밑동과 윗부분을 판상철부를 사용하여 다듬었는데

바깥쪽 면에는 호상의 판상철부 날의 모습이 명확하게 관찰된다.

특히 윗부분은 나무의 겉면과 잘라낸 면을 다듬어 모를 죽였는데

여기에도 역시 판상철부를 사용한 흔적이 관찰된다.

이후 목재를 길이 방향으로 반절한 이후 내부를 파내어 관을 만들었다.

관의 너비는 약 85㎝이고, 발굴당시 관의 높이는 약 65㎝였다.

 

 

 

통나무를 세로로 반절할 때 사용한 도구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무를 켜는 긴 톱이 이 시대에 발견되지 않으므로,

판상철부(板狀鐵斧=철정鐵錠=덩이쇠, 도끼기능과 아울러 철정처럼 철기제작을 위한 중간 가공소재 겸

화폐 구실도 했다)나 철착(鐵鑿), 혹은 철추(鐵椎=철퇴, 鐵槌) 등을 이용하여

나무를 길이방향으로 결에 따라 쪼갠 것으로 추정된다.

쪼개는 과정에서 나무의 겉면에 쪼갠 흔적이 생겼겠지만 철부로 매끈하게 다듬어 지금은 관찰되지 않는다.

 

또 관의 덮개 부분은 세로 방향으로 다시 한번 쪼개어 내어 모두 3개의 조각으로 관을 구성하고 있다.

관의 내부는 판상철부, 단면 사다리꼴의 주조철부와 철착, 철추 등으로 파내었는데

양쪽 단벽에서 판상철부를 사용한 제작흔적이 명확하게 관찰된다.

한편 덮개와 관 모두 양쪽 끝에 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쐐기구멍을 뚫었는데

단면 사다리꼴의 철착과 철추 등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관의 바깥쪽 단면에는 관을 고정하고 하강하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밑동(頭部)에는 윗면과 단측면에 걸쳐있는 홈을,

나무의 위쪽(足部)에는 상면과 단측면을 관통하는 구멍을 뚫었는데,

주조철부와 철착 혹은 철추로 가공한 흔적이 관찰된다.

 

참나무는 목재의 성질이 아주 단단하여 지금도 가공하기 어려운 목재 중 하나이다.

이런 참나무를 쪼개고 파내어 통나무 목관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아

당시 변한사람들이 목재가공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안경숙

- 2008년 12월17일(119회)

 

 

 

 

 

 

 

 다호리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

 

 

 

1. 유적과 조사의 개관

 

다호리 유적은 행정구역상 경남 창원시(舊 의창군) 동읍 다호리 232번지 일대에 해당하며,

다호리마을 뒤쪽에 자리잡은 해발 약 50m 정도의 구릉에서부터

해발 약 10m인 얕은 계단식 논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조영된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동북쪽에는 동판저수지, 북쪽 약 1㎞에 위치한 낙동강에 제방을 쌓아 개간하여

농경지로 만들기 전에는 대부분 갈대 등이 자라는 강변습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수상교통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 무덤군의 분포와 구성을 살펴보면 다호리 마을 뒤쪽 구릉상에는

가야시대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어

순금제 귀걸이를 비롯한 다수의 가야토기류가 압수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경호토기에 남아 있는 도굴의 흔적

 

다호리에서 출토된 가야(고령계) 토기 

 

발굴조사된 무덤들은 원삼국기(서력기원 직전-기원후 약 300년까지)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 나무 관에 시체를 안치한 뒤 구덩이를 파고 매장한 무덤) 69기와

옹관묘 4기이며, 전체 유적 중에서도 특히 해발 10-20m 사이의 낮은 지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토기류 46점, 구슬류 2련, 순금제이식 1쌍 등이 박물관에 수장된 이후

이 유적의 존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단지 1970년 문화재관리국이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는 관리번호 1015-39-011로 등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릉상(丘稜上)의 가야고분들은 경작으로 인해 거의 봉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삭평(削平)되었고 유적의 존재와 전체적인 규모조차 정확히 인식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또한 1980년대에 들어 주변지역에서 도굴이 심하게 자행되어 이 일대의 구릉지대 뿐만 아니라

주변 평지의 논밭에 이르기까지 도굴의 피해를 극심하게 입어 유적의 존재가 재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유적의 보호와 고고학적 성격 규명을 위해

연차적인 발굴과 함께 이 일대 약 30,795평을 사적(史蹟)으로 지정 요청하였다(사적 제327호).

 

1988년 초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1988년도에는 제1-3차 조사,

이후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의 조사가 이루어져 모두 7차례의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97년에는 이 유적을 관통하는 도로의 확장공사 때문에

기존도로의 하부와 다호리의 동쪽에 인접한 해발 약 20m의 구릉지를 구제(救濟)발굴하였다.

이 구제발굴에서는 다호리 1호분에 인접한 도로변에서 1기의 원삼국기 토광목관묘가 조사되었으며,

구릉지에서는 가야시대의 무덤이 다수 발굴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 다호리 유적 발굴조사 내역 -

 

기간

발굴구역

담당자

1차 발굴

(1호 목관)

1988년 1월 21일

         ~ 2월 1일

231번지지 일대

232번 밭(田)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故한영희

故이상수, 이영훈, 윤광진, 김정석

2차 발굴

(2호-14호)

1988년 3월 14일

       ~ 4월 27일

231(전), 232-2(구)

232-3(답), 233-3(답)

234-3(답), 237-7(구)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안승모,

故한영희, 故이상수, 이영훈, 윤광진, 조현종, 안병찬, 김정완, 손명조,

김정석, 신대곤

3차 발굴

(15호-22호)

1988년 11월 1일

      ~ 12월 10일

56(답), 58(답), 59(답)

59(답유), 60-2(유)

233-3(답), 234-1(답)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이영훈,

서오선, 故이상수, 윤광진, 조현종,

신대곤, 김두철, 권오영, 안병찬

4차 발굴

(23호-29호)

1989년 3월 30일

         ~ 5월 8일

56(답), 60-2(유)

233-1(답), 234-1(답)

정양모, 지건길, 이건무, 이영훈,

故이상수, 윤광진, 신대곤, 김두철,

김용민

5차 발굴

(30호-37호)

1990년 3월 28일

         ~ 5월 7일

51-2(답)

55-1(답)

이건무, 안승모, 서오선, 윤광진,

신대곤, 정성희, 김두철

6차 발굴

(38호-46호)

1992년 4월 15일

       ~ 5월 15일

55-1(답)

237-1(답)

이건무, 안승모, 서오선, 윤광진,

신대곤, 정성희, 김두철

7차 발굴

(47호-75호)

1992년 10월 28일

       ~ 12월 31일

43(유), 45(전), 46-1(묘), 47(답), 52(답),

232-1(답), 232-2(구),

232-3(답)

이건무, 안승모, 송의정, 정성희,

한봉규

8차 발굴

1997년 7월 1일

~1998년 2월16일

231번지 외 19필지,

신방리 355-6번지 외

                   16필지

정양모, 故한영희, 송의정, 임학종,

정성희, 김재홍, 은화수, 장상훈,

홍진근, 오세연, 홍정희, 김성주,

안경숙

 

 

 

2. 유적 및 유구와 관련된 성과

 

조사 결과 원삼국시(변한 또는 가야 초기)에 해당하는 토광목관묘 69기와 옹관묘 4기 및

가야시대에 해당하는 대형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 시신을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창이나 입구가 없이 돌로 벽을 세움) 봉토분 1기가 조사되었으며, 토광묘가 분포하는 구릉의 정상부 주변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이미 가야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신고된 바 있고,

구릉의 중복에서는 지표채집된 표기편 등으로 보아 토광목곽묘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유구들에서 드러난 성과는 대략 다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시기에 따른 분묘 조성의 방향성 인식이다.

이와 같이 낮은 평지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점차 높은 곳으로 이어지면서 고분군이 조성되는 경향이 밝혀짐으로써 인해

이후 김해 양동리, 부산 복천동 등지에서도 이러한 분포양상에 주목하여

유적 조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고 있다.

또한 비교적 지하 수위가 높아 저습지에 가까운 지대에 무덤이 조영됨으로써

당시에 부장되었던 각종 목기가 대부분 잔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변한지역 수장묘의 실상을 파악함과

동시에 저습지 고고학의 단초를 제공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둘째, 이른바 요갱(腰坑 : 묘광 바닥 가운데에 중요한 부장품을 매장하는 시설로 시신을 안치한 목관

허리 부근에서 땅밑으로 파내려간 둥근 구덩이)의 확인이다.

토광목관묘는 무덤의 방향이 대체로 등고선과 나란한 방향을 이루고 있으며,

토광폭과 유물의 출토 위치 등으로 보아 침향(枕向)은 대체로 동침(東枕)으로 간주된다.

토광이 규모는 길이 2-3m, 폭 0.5-1.5m 정도이고 개답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원 지형을 고려할 때

깊이는 1m 내외로 판단된다. 또한 1호를 비롯한 일부 무덤은 토광을 팔 때,

토광 중앙에 부장품을 넣은 바구니를 안치하기 위한 지름 60㎝ 정도의 얕은 구덩이를 마련한 것도 있다.

이와 같이 목관 하부에 부장용 구덩이를 마련한 예는 기존의 경주 조양동 38호가 대표적인 예였지만

당시에는 명확히 인식되지 못하였다. 이는 다호리 유적의 조사결과에 의해 재조명되었으며,

최근에 조사된 성주 백산, 예전리와 경주 덕천리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확인되었다.

 

 

셋째, 봉토의 존재를 확인한 점이다.

발굴조사 결과에 봉토(封土)의 존재가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토광목관묘 중 비교적 원 지형이 남아 있었다고 보이는 제70호 무덤의 경우

토광 중앙부의 어깨선 높이에서 기형의 2/3 정도가 복원되는 타날문 단경호가 출토되었는데,

토광내부 목관의 부식에 의한 토양 함몰과 토기의 출토위치로 미루어 볼 때,

이 토기는 봉토 내에 매납된 것으로 간주되므로 일정한 규모의 봉토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선사 및 고대 초기 묘제에 있어서 봉토의 존재는

북한의 강서 태성리 토광묘 발굴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며,

남한에서는 부여 송국리 석관묘 주변의 목개(木蓋)토광묘 보고에서 토층으로 그 존재를 추론한 바 있었다.

또한 창원 덕천리 1호 고인돌의 경우 상석이 주변보다 높은 성토지형에 위치하여

분명한 의도로 시설된 봉토로 간주된다. 이외에도 최근 각지의 지석묘 발굴조사에서

봉토의 존재 가능성이 종종 제기되고 있으며, 춘천 천전리와 홍천 철정리 등지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주구석관묘나 마한 지역의 주구묘(周溝墓 : 주구 곧, 도랑처럼 땅을 파 사방으로 두른 무덤)에서도 주구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봉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다호리에서는 70호 한 예에 불과하지만,

바로 인접한 시기에 해당하는 경주 조양동 5호묘의 토기 부장양상과 관련해보면,

봉토와 관련해서 결코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다호리의 석실묘 및 주구 

 

넷째, 통나무 목관의 실체를 확인한 점이다.

1호분에서 출토된 목관은 지름 80㎝ 정도의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안쪽을 구유모양으로 파내

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아래위를 고정시키기 위해 관의 양 끝에 구멍을 뚫어 굵은 나무못으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일부 목관은 외부 충전토(充塡土)의 특징으로 보아 판재를 이용한 것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목관의 규모는 흔적으로 보아 길이 1.5-2.5m, 폭 60-80㎝ 정도에 이른다.

이러한 목관의 존재는 이후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부여 송국리, 공주 남산리 및 창원 덕천리의 석개(石蓋)

또는 목개(木蓋) 토광묘에서 목관의 존재를 유추하는데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통나무형 목관의 분포는 중국 남서부를 넘어

현재의 베트남 북부의 청동기문화인 동손문화(Dongson Culture, Văn hóa Đông Sơn)에서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연구의 지평을 보다 넓게 가질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3. 유물과 관련된 성과

 

<청동기>

먼저 가장 큰 성과는 한국식동검의 전체적인 조립구조에 대한 명확한 표지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동검(銅劍)은 옻칠을 한 목제 칼집과 손잡이, 반부(盤部), 청동검파두식(靑銅劍把頭飾)을 갖추고 있어,

한국식 동검이 원래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검파두식은 대부분 땅콩껍질을 반으로 나눈 형태이고, 표면에 좁쌀모양의 돌기가 많이 붙어 있으며,

철검에 부착되기도 한다.

69호분에서는 복숭아씨 모양의 특이한 형태도 있으며 유사한 유물이 일본 대마도에서 출토된 바 있다.    

동모(銅矛)는 날이 길고 넓은 중광형(中廣形)과 아주 짧지만 이환(耳環)이 붙은 형태로

모두 후기 형식에 해당한다.

 

또한 중국제 청동기로 성운문경(星雲紋鏡)과 오수전(五銖錢), 금형대구(琴形帶鉤)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성운문경을 통해 유적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으며, 토기의 편년에도 큰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칠목기(漆木器), 칠초철검(漆鐵劍), 고리자루칼(環頭刀) 등은

중국적 요소인 한식유물(漢式遺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경주 조양동에서도 일부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철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지방과 한(漢), 낙랑(樂浪)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한국의 청동문화를 모두 10기로 나누어 특히 다호리 유적의 연대와 가까운 7기 이후에 대해서는

유물의 조합상 중 전한경(前漢鏡)의 존재가 편년이 기준이 되는 세분화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철기>

철검의 한국식동검과 비슷한 크기로 날의 단면은 마름모꼴이며,

슴베부분에는 자루에 끼울 때 잘 빠지지 않도록 실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철모는 대부분 날의 단면이 마름모꼴이고 길이가 30㎝ 전후이지만,

1호분에서는 길이 40㎝가 넘고 단면이 편육각형이며, 표면에 옻칠을 한 예가 있다.

 

철제도끼(철부, 鐵斧)는 형태로 보아 판상(板狀) 철부, 방주상(方柱狀) 철부,

유공식 단조(有銎式 鍛造) 철부, 유공식 주조(有銎式 鑄造) 철부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특히 주조철부는 두 개씩 끈으로 묶은 예가 있고, 내부에 주물사(鑄物沙)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보다는 교역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간주되며,

이는 삼국지 변한, 진한조의 기록에 대한 방증자료로 삼을 수 있다. 

 

철제 낚싯바늘의 부장은 다호리 주민이 낚시어업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쇠망치가 출토된 제17호분의 피장자가 대장장이와 같은 철기제작에 종사하였던 인물이라고 할 때,

낚싯바늘이 출토된 분묘의 피장자는 어업에 관계된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농공구로는 조각칼의 역할을 하는 철사(鐵鉈 : 짧은 쇠창), 끌 낫, 따비, 환두도자(換頭刀子) 등이 있으며,

환두도자 중 칠기칼집에 들어있는 것은 중국의 예에 비추어 목간 등에 쓴 글을 깎아내 지우는

서도(書刀)로 추정된다. 특히 1호무덤 부장품 중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에서의 고대문자 사용에 대한 고고학적 물증이 될 수 있으며,

원삼국 초기 대외교역의 서사용구(書寫用具)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말을 제어하기 위한 ‘S'자형 또는 고사리모양 경판부비(鏡板附轡 : 멈추개), 말띠를 연결하던 철환(轍環)

등을 통해 말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동안 철제 고사리형장식이 있는 철기로는 경주 조양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S’자형 말재갈멈추개와

경주 구정동 목곽묘출토의 철모, 가야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미늘쇠(有刺利器)와 판갑(板甲) 등이 있는데

모두 철기시대 후기 이래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런 철기의 전통을 다호리에서 출토된 철제 고사리형장식 철기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판을 두드려 길게 늘인 뒤 둥글게 말아 붙인 제작방법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철촉(鐵鏃 : 화살촉)은 역자식(逆刺式)으로 살대에 부착시 감았던 나무껍질이 남아있던 경우도 있으며,

이와 함께 목제품에는 최초 보고에서 길이 170㎝ 정도의 장궁의 예만 보고되었으나

80㎝ 전후의 단궁도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64호 출토 철광석의 분석결과는 이미 보고된 바 있으나,

그 의미에 대해 언급되거나 후속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철광석의 미량 원소 중 구리의 양이 많은 편인데,

우리나라의 철광은 부산에서 내륙방향으로 대체로 동심 대상으로

 Fe-Cu대, Cu-Pb-Zn대, W-Mo대가 차례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존의 사용 철광석의 경우에도 양양, 연천, 예미광은 구리가 0.001-0.003이하인 반면

울산광의 경우 0.01이하로 약 10배로 나타나 경남지역의 광산에서 채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토기>

토기는 타날문단경호(打捺文 短頸壺), 우각형파수부장경호(牛角形 把手附 長頸壺, 쇠뿔손잡이항아리),

주머니호 등이 대표적이며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고배(高杯), 장경호(長頸壺),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소형 완(碗), 소형 직구호(直口壺), 원통형토기

등도 보고되었다.

이러한 토기들은 대부분 영남지방의 기존 연구에 의하면 모두 고식 와질토기에 해당하며,

신식 와질토기인 노형토기(爐形土器)나 대부단경호(臺附短頸壺)의 예가 없는 점이 특징이다.

 

 

 

 

이 토기들은 형식분류를 통해 상대편년 작업이 심화되고 있으며,

여러 단계의 구분에 의해 획기가 설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조양동 38호묘와 다호리 1호묘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후반에 비정됨에 따라

고식(古式) 와질토기의 출발점이 상당히 분명해졌다.

한편 토기 중 타날문이 가해진 단지들과 구연부의 형태가 정연하고 비교적 단단하며,

회색을 띤 소형완이나 원통형토기 등은 확실히 이 시기에 들어 새로운 제작기술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검은색을 띤 일부 토기들은

보존과학적 검증을 통해 방수를 위한 옻칠이 전면에 베풀어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칠기>

다호리 유적 출토 칠기의 분석 결과는 이후 상세히 보고되겠지만

국내의 광주 신창동, 경주 사라리 등지의 사료와 비교할 때

대부분 바탕칠 없이 목기 표면에 바로 옻칠을 한 것으로 동일한 기술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연대가 비슷한 낙랑의 칠기가 골분, 토분 등을 이용한 바탕칠이 있는 점과 구별되므로

한대(漢代)의 칠 기술과는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일본의 야요이 유적 출토 칠기의 분석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의 칠기에는 바탕칠이 분명한 경우가 많으므로 낙랑의 영향을 상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보존 처리 과정에서 기존의 죽태칠기(죽기竹器 혹은 대 껍질을 엮은 기물에 옻칠을 한 제품)

바구니로 보고된 것이 초본류를 바탕으로 한 칠바구니로 밝혀졌으며,

예보 단계이지만 가죽제품에 칠해진 예도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추후 분석 및 연구의 진행에 따라 보다 다양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이외에도 자연유물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당시 목관 위에 뿌려진 밤의 존재로 인하여

두형(豆形)칠기 위에 눌러 붙은 식물 유체도 밤일 것으로 잠정 추정되었으나,

동정 결과 감으로 판정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감의 원산지가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반도 남부가

중심지임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학제간 공동연구가 미흡함이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다호리 출토 감               /                    율무                    

   

한편 1차보고시 씨앗으로 보고된 것은 율무로 확인되었다.

율무는 원산지가 동남아로 기록에는 지금의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이후 한반도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중국의 기록보다 전래시기가 상회하므로

당시 문화교류의 역동성이 현대인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 연구의 방향성 확대가 필요하다.

 

 

4. 문헌사와 관련된 성과

 

최근까지 초기철기문화와 관련하여 삼한의 성립시기를 둘러싼 다양한 주장이 문헌사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인 입장에서도 초기철기시대와 삼한을 관련짓는 견해들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입장에서도 초기철기시대의 문화복합체(Assemblage)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통일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우며, 그 시기에 대한 주장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다호리 유적 발굴의 결과로 인한 성과는

최소 기원전 1세기경 문화적 실체를 가진 변한, 진한의 성립은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문헌사에서는 거론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문화적 실체로 설명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식 동검의 전통은 유지되지만,

청동제 의기와 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 : 굵고 다소 거친 무늬의 거울) 및 점토대토기로 대표되는

재지적(在地) 전통사회가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을 흡수하고,

다량의 철기와 중국제 동경 및 교역과 관련된 외래적 성격의 유입된 다호리형 유물 복합체를 가진

정치 문화 집단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타당한 해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 나머지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중남부에서 소량의 철제품과

한국식 청동기 및 점토대 토기를 공통적 표지로 하는 문화상을 가진 사회를

문헌사적 연구 결과와 연계시키는 작업은 보다 심도있는 연구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삼국지의 한 관련기사에서 한과 삼한의 구분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5. 맺음말

   

다호리 유적은 한반도 남부의 진국 또는 한(漢) 사회와 현재까지 공백기로 남아있는

삼한(三韓) 즉 원삼국기 초기의 전이 과정과 주요한 묘제(墓制)가 목관묘였음을 밝혀내는 한편

거의 원형을 잃지 않은 구유형 목관과 함께 당시까지 거의 출토된 바가 없던 각종 칠기류 및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식동검의 옻칠된 손잡이와 칼집 등의 각종 부속구가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어

실로 우리 학계에서 고대하고 있던 물질적 자료들이 확인됨으로써

당시의 문화상을 밝히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80년대의 고고학적 발굴 중 가장 큰 성과를 얻은 유적의 하나이며,

문헌사적으로도 불분명하였던 기원전후의 역사에 서광을 비쳐줄 것으로 기대된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송의정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2008년 12월10일(118회)

 

 

 

 

 

 

 

 다호리 유적의 제철기술 - 첨단기술, 철(鐵)

 

 

 

철, 흔히 '쇠'라고 불리는 금속은 오늘날 요리할 때 사용하는 식칼, 연필을 깎는 칼, 톱이나 드라이버 등

여러 가지 공구, 자동차, 배, 비행기, 다리, 집을 지을 때 세우는 철근 등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300만 년 전부터 금속기를 사용하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인류는 주변에서 쉽게 채집할 수 있는 돌을 소재로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었다.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불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토기와 같은 가공물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광석을 녹여 금속물질을 뽑아내는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청동기 사용의 시작이다.

 

청동기는 자체만으로는 무른 성질이 있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제약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주석(朱錫)이나 아연이라는 첨가물을 섞어 제작하였다.

청동기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동(銅) 즉 구리성분을 가지는 광석을 채취한 다음

순수한 구리를 얻기 위해 가마에 넣어 광석을 녹인다.

여기서 얻은 구리는 다시 가열하여 액체 상태로 만든 다음

필요한 용도의 형태로 만들어진 틀(용범)에 부어 형태를 갖추게 된다.

틀에서 떼어낸 다음 숫돌에 갈아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고 날을 세워 사용하게 된다.

즉 청동기는 주조기법으로 제작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쪽지역에서는 청동기제작에 필요한 주석이 많이 분포하지만

남부지역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주석이 거의 없어 당시에 수입에 의존하여야 했다.

때문에 영남지역에서는 청동기가 그다지 많이 출토되지 않았다.

 

제작 기술상으로 보면 청동기 제작기술이나 철기 제작기술이나 큰 차이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철제작이 늦은 이유로는 아마도 철이 지각을 구성하는 주요한 성분의 하나이며,

널리 분포하지만 바로 철기로 제작할 수 있는 천연의 철은 매우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녹슬지 않도록 하는 니켈성분이 함유된 철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한편 지구상에 떨어진 운석 가운데

철 성분을 함유한 운철(隕鐵)을 가지고 도구를 만든 예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재료는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고, 철을 사용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말기에 철 제작기술이 개발되었다.

전국시대와 서한시기를 거치면서 철기사용이 성행하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철기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국가에서 철기 제작기술을 감독하였으며, 여기서 생산된 철기도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웃지역으로 철 제작기술이 전파되지 못하다가 중국 삼국시대이 혼란기를 틈 타

철 제작기술이 중국 북동지역으로부터 우리나라로 유입되게 된다.

 

이런 현상이 처음으로 확인된 유적이 평북 위연 용연리유적이다. 이 유적은 분묘유적이지만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소재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낫, 괭이, 창, 화살촉 등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주조기법 이외에 단조기법이 새로이 등장한다.

이 유적 출토품이 여기서 제작되어 부장된 것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철기들인 점은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면 철기와 청동기가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중국에서는 국가가 직접 제작에서 공급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리하였을까?

이유는 첫째, 청동보다 철의 원료량이 많다는 점이다.

둘째, 철이 청동보다 더 예리하고 단단한 점이다. 즉 내구성과 파괴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셋째, 주조기술뿐만 아니라 단조기술도 개발되어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이점으로 철기는 등장과 동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첨단기술이었다.

 

우리나라도 철을 사용하면서 국가의 모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삼국시대로 향할 수 있게 하였던 원동력이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윤태영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2008년 12월 24일(12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