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

Gijuzzang Dream 2008. 12. 25. 02:19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의 복원

 

 

 

    

백제(7세기), 높이 102cm,  너비 38cm, 두께 29cm, 

부여읍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도로변 출토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는 1948년 부여읍의 부소산성 아래인 관북리의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되었을 때 이미 한쪽 부분이 떨어져 나간 잔비(殘碑) 상태였다.

발견 당시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옮겨 온 골재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원래 이 비가 놓여져 있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질이 좋은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하고 그 안에 글자를 한 자씩 새겼는데

글자 크기는 평균 4.5㎝ 정도이다. 1행은 1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비문의 앞 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로서 모두 56자가 남아 있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음양설에 따라 원 안에 봉황문이 새겨져 있으며 붉은 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비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貌含聖明以

. . .

 

- 해석 (1)

(갑)인년 정월구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쉽게 노쇠해지고 달이 갈수록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운다.

웅장하게 홀로 서 있는 자애로운 얼굴은,

신령스러운 빛을 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엄숙히 높이 솟은 슬픈 모습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어

. . .

 

- 해석 (2)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에 사는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달로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속을 다루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빛을 내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럽고 밝은 정기를 지니고 □□하는 듯하다

 

 

명문 내용 가운데 나오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은

<일본서기>에 백제 사신으로 등장하는 대좌평을 지낸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 중에 나오는 당(堂)과 탑(塔)은 불교사원의 당과 탑에 다름 아닐 것이다.

첫 부분에 간지인 '(甲)寅年'이 나오는데 첫 글자 부분은 심하게 파손되어 아래로 내리그은 획이

남아 있어 '갑인년'으로 판독되고 있으며, 이 해는 의자왕 14년(654)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이름 중 앞의 첫 글자인 '砂'는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沙氏와 같은 姓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나, <일본서기>에는 동일인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지적(智積)'이 두 글자로서 姓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는 그 자체가 뒷부분이 잘려나간 잔비(殘碑)이므로

원래 뒷부분에 상당 부분의 명문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문장 자체가 4자, 혹은 6자를 1句로 한 엄정한 대구(對句)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마지막 구의 끝부분 두 글자 정도는 대구(對句)를 이루는 그 앞 구절의 의미와 대구(對句)를 거쳐

복원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러한 대구(對句)의 개념을 통하여

여기에서는 우선 끝 문장의 사라진 두 글자에 대한 추정 복원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마지막에서 뒷 부분이 끊어진 불완전한 문장은 '峩峩悲貌含聖明以□□' 였고,

그 문장과 대구를 이루는 앞 문장은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이었다.

 

 

앞 문장의 '慈容'은 뒷 문장의 '悲貌'와 대응하고 있고,

'吐神光'은 '含聖明'과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앞 문장의 '送雲'과 대응하는 결손 부분의 두 글자는

'迎口'의 구조로 이루어진 표현일 것이다.

'送'이 '迎'과 가장 잘 어울리는 대구 표현임에는 이론이 많지 않을 듯 싶다.

하지만 '雲'과 대구를 이룰 수 있는 글자로는 몇 개의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가능성 있는 글자들을 사전적 용례와 함께 문맥의 흐름에 비교하여 살필 수 있다. 

 

'雲'이 앞에 오면서 대구로서 뒤따를 수 있는 글자를 자전에서 살펴보면

'雨'와 '무(霧)' '연(煙)' '예(霓)' 등이 대입할 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명문 문장 안에서의 의미와 문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미루어본다면

"... 성스러운 빛을 머금어 비를 맞이한다"는 식의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煙'은 '雨'보다도 문장 전체의 분위기와 더욱 거리가 멀다.

따라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운무(雲霧)'와 '운예(雲霓)'의 두 가지 표현이 된다.

  

앞의 문장에서 대구(對句)를 이룬 단어들을 조합해 보면

강개(慷慨), 신체(身體), 일월(日月), 난이(難易), 왕환(往還), 천착(穿鑿), 금옥(金玉), 건립(建立),

진보(珍寶), 당탑(堂塔), 자비(慈悲), 용모(容貌), 토함(吐含), 신성(神聖), 광명(光明)이 되는데,

이 글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평이성이라는 점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하지만 ‘강개(慷慨)’ ‘천착(穿鑿)’ ‘토함(吐含)’처럼 천자문 수준의 평이성을 벗어나는 글자도 있다.

따라서 ‘무(霧)’와 ‘예(霓)’ 두 글자 가운데 어느 글자가 와도 문장의 전체 수준에 비추어 무리가 없다.

다만 의미의 대구(對句) 구조에 있어서 어느 글자가 더욱 적합한가가 문제일 것이다.

 

우선 절(節)의 앞부분이 ‘토신광(吐神光)’과 ‘함성명(含聖明)’으로 되어있는데

문장의 동사가 ‘吐’와 ‘含’으로 의미상 상반구조를 갖고 있음이 주목된다.

따라서 절(節)의 뒷부분 또한 당연히 상반구조의 대구(對句)를 상정해야 한다.

이것은 앞 절(節)에서 사용된 대구(對句)인 ‘身體’라든가 ‘建立’이라든가

‘珍寶’가 이루고 있는 보완구조와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의미상의 상반구조에 주목하여 추정한다면,

보완적 의미를 가진 ‘雲霧’보다는 상반적 의미를 가진 ‘雲霓’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雲(구름)’과 ‘霧(안개)’는 모두 대기(大氣)에서의 습기발생이나 집적에 의해서 나타나는 기상현상이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雲(구름)’과 ‘霓(무지개)’는 상호 순환적인 기상현상이며,

이 두 가지 기상현상은 ‘雨(비)’라고 하는 또 다른 기상현상을 중심으로 하여

앞뒤에서 상호 대응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대기 중의 습기의 증가에 의해 나타난 구름(雲)이 비(雨)를 불러오게 되고

그 비가 그친 다음에는 무지개(霓)가 뜨는 대응구조를 갖는 것이다.

 

‘雲霓’의 ‘예(霓)’는 ‘예(蜺)’와 동음동의(同音同意) 관계이고,

‘홍(虹)’과 이음동의(異音同意) 관계에 있다.[諸橋轍次 『大漢和辭典』권12, 21쪽]

 

흥미로운 점은 이 ‘雲霓’라는 표현이

사택지적비 명문 앞 구절의 의태부사(擬態副詞)인 ‘외외(巍巍)’와 함께 쓰이고 있는 대구(對句) 표현의

용례를 고문(古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張衡』南都賦 “鞠巍巍其隱 天俯而觀乎雲霓”]

 

‘雲霓’라는 표현은 또한 간절한 소망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저명한 용례가 있어

후반부 명문에서 기대하는 소망의 내용이 개진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孟子』양혜왕하, “書曰 湯一征自葛始 天下信之 東面而征西夷怨 南面而征北狄怨曰

□爲後我, 民望之. 若大旱之 望雲霓也”]

 

‘송(送)’과 ‘영(迎)’의 대구(對句)를 가정하고 ‘雲’과 ‘霓’의 대구를 가정한다면

결락된 두 글자는 ‘영예(迎霓)’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마지막 문장의 뒷부분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어 무지개를 맞이한다”는 표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상태의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 왼쪽 절단부분을 보면

그 상단부에 두 글자의 잔획이 남아 있다.

첫 번째 결락자의 잔획은 글자의 아래쪽 끝에 가로방향으로 그은 형태인데,

이것이 바로 ‘영(迎)’자의 잔흔일 것이다.

두 번째 결락자의 잔흔 역시 가로방향으로 긋다가 예각(銳角)으로 꺾이면서

안쪽으로 반전해 들어가는 양상이다. 이것은 ‘霓’자 우측 하단부의 파책(波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원을 시도해 본 비문의 문장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甲)寅年正月九日 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貌 含聖明以(迎霓)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금석문실, 박중환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118회, 2008년 12월 10일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는 대좌평을 역임한 사택지적이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하여 불교에 귀의해 금당과 탑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조성 시기는 백제 의자왕 14년(654)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곳이 백제의 고도(古都)란 점, 백제에 사씨(沙氏)란 성이 있었던 점,

백제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란 인물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추정되고 있다.


비문의 전문을 보면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貌含聖明以」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높은[巍巍]한 자비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속은[峩峩]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한 듯하다....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 판독자 : 서영대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이 비문의 문체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인데

문장이 유려하고 자체가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중국 육조시대의 북조풍이 있어

백제 후기에 이르러 중국 남북조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개정되기 이전의 옛 고등학교 교과서(1982년 초판, 89년까지 사용)에서는

사택지적비가 '세련된 문장 속에 노장 사상이 나타나 있는 사택 지적비의 비문'(상권 39쪽)이라고

설명했었으나(현행 교과서에서는 삭제됨), 그 내용을 보면 터무니 없는 설명이었다.

 

 

 

 

 

 

옛 도량형은 유물 연대 푸는 '열쇠'  

글자 그대로 자와 되와 저울을 일컫는 도량형(度量衡)은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뜻한다.

이 도량형이 유물의 연대를 비정하는 새로운 편년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백제 도량형 연구가 진전을 보이면서 이 시기 유물의 편년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김규동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제의 도량형은

한성· 웅진· 사비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성(∼475)기는 서진,

웅진(475∼538)기와 사비(538∼660) 초기에는 남조의 양,

사비기에는 당 및 고구려와의 연관성이 관찰된다고 한다.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벽돌은 한변의 길이가 28.0∼29.8㎝이다.

한 자(尺)가 29.5∼29.7㎝인 당척(唐尺)이다.

이 무늬벽돌은 연꽃의 양식변화에 따라 제작연대를 630∼640년으로 본다.

중국에서 당척제가 시행된 것이 620년인 만큼 거의 시차가 없이 수용됐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최근 부여 쌍북리에서 나온 막대 형태의 자는 한 자가 29㎝로 역시 당척이다.

자의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된다.
그런가하면 당척이 쓰여지기 이전 사비기의 백제고분에는

공통적으로 25㎝ 안팎의 영조척(營造尺)이 적용됐다.

중국의 서진에서 남북조시대에 걸쳐 사용된 척도로

웅진기에 백제와 양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수용됐을 것이라는 기존의 연구 결과가 있다.

이를 적용하면 높이 61.8㎝인 백제금동대향로는 2자 반,

높이 74.0㎝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3자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당척이 쓰여지기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제작 하한이 630∼640년대임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반면 길이 35㎝인 부여 궁남지 출토 목간은 25㎝,

자로는 1자 4치지만, 35.4㎝의 고구려척으로는 1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백제 멸망 직전인 654년 만들어진 사택지적당탑비 역시 고구려척이 적용되고 있다.

목간의 연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2526㎖가 1말인 서진 ‘태강(太康)’명 청동솥과 닮은 토기가 청주 봉명동과

공주 동곡리 · 남산리 등에서 나왔다.

봉명동과 남산리 토기는 용량이 각각 2700㎖와 2800㎖로 중국 것과 비슷하다.

봉명동 유적은 3세기 중엽에서 4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한성백제의 부피 단위가 서진과 많이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김규동 연구사는 “백제는 도량형에서도 중국 선진문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앞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도량형 연구가 이루어지면 이 시기 유물의 편년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서동철기자, 대한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