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47. 국경분쟁 해설서 <감계사등록>

Gijuzzang Dream 2008. 12. 20. 20:43

 

 

 

 

[간도오딧세이] 국경분쟁 해설서 <감계사등록> 

 

 

 

 

 

간도영유권 주장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비해

비교적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것에는

역사적 자료의 우위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에 비해

많은 역사적 자료를 갖고 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에는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외에도

역관 김지남의 <북정록>, 홍세태의 <백두산기>,

접반사 박권의 <북정일기>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1885년과 1887년 을유 · 정해 감계담판(국경회담) 때에는

감계사인 이중하가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에 비해 국경 분쟁에 대한 청의 기록은 거의 없다.

 

특히 이중하의 기록은 조선과 청 사이에 오간 대화까지 기록할 정도로 꼼꼼했다.

다만 이 기록이 한자로 돼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도 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이 기록을 국역했다.

간도영유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기 쉽게 120년 전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감계사등록>은 감계담판에서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와 청국 대표 간에 오고 간 회담과 문서들을 수집한 책이다.

여기에서 등록이란 조선시대 관공서에서

국가의 의례 행사와 관원들의 업무를 해당 부서에서 그때마다 정리한 것이다.

<역주 감계사등록>은 <감계사등록>을 국역한 것이다.

이번에 국역된 것은 1885년 을유감계담판의 기록 부분이다.

역자 중 한 명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이왕무 연구원은

해제에서 <감계사등록>의 중요성을 이렇게 언급했다.

더욱이 19세기 말 조선과 청국 간 외교 분쟁의 중심이었던 간도의 귀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역사적 자료를 정리해놓은 책도 <감계사등록>보다 더 종합적이고 상세한 것은 찾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감계사등록>의 성격이며 자료적 가치라고 본다.

 


120년 전 상황 자세하게 담아


이 책의 해제에서는 <감계사등록>을 작성한 이중하의 생애와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기존의 언론에서 언급한 것에 더해 새로운 사실까지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이 밖에도 간도 국경 분쟁이 발생하게 된 이유, 당시 감계담판 상황 등을 알기 쉽게 서술해,

해제만 읽더라도 간도 영유권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이중하가 어떻게 청의 대표들과 국경회담을 했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청은 국경을 ‘압록강- 백두산-두만강 서두수’로 하려 했으나

이중하는 시종일관 정계비에 나타난 경계를 주장했다.

두만강 서두수는 1909년 간도협약 때 기준으로 한 두만강 석을수보다 남쪽에 위치한 지류다.

 

만약 이중하가 청의 요구대로 국경회담을 마무리했다면 우리는 많은 땅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중하는 청의 대표들을 데리고 백두산 정계비를 찾아갔다.

여기에서 ‘정계비-토퇴·석퇴-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경계선을 청의 대표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왕무 연구원은 해제에서 <감계사등록>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감계사등록>에서는 인간 이중하가 청국과 국경의 강역을 조정하는 조선의 외교 담당자로서

어떻게 처신했으며, 당시 조선 관원들의 국토와 국경, 영토에 대한 의식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감계사등록>의 가치는 당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 부근의 상세한 조사 보고일 것이다.

- 윤호우 기자

- 2009 03/10  위클리경향 815호

 

 

 

 

 <역주 감계사등록>에 본지도 ‘한몫’


Weekly경향 623호에 실린

백두산 정계비 인근의 돌무더기 관련 기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역주 감계사등록>에서는

‘Weekly경향’(구 뉴스메이커) 관련 기록이 눈길을 끈다.

‘Weekly경향’은 2003년 동북공정 논란이 불거진 이후

간도 영유권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사를 발굴해왔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학계에서 밝히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밝혀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85년과 1887년 감계담판(국경회담)에 감계사였던 이중하의 사진 발굴이다.

그동안 후손들이 소장해온 사진 2장을 2004년 ‘Weekly경향’이 발굴했다.

<역주 감계사등록>에서는 <감계사등록>의 저자라고 할 수 있는 이중하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실려 있다. 일대기에 이중하의 모습과 글씨, 묘소 사진이 함께 나타나 있다.

당시 ‘Weekly경향’에 실렸던 사진이다. ‘Weekly경향’은 사진만 발굴한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 잊혀온 이중하의 일생을 기사화해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이중하 후손들이 기록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페이지 걸쳐 각주 설명에 본지 인용

 
<역주 감계사등록>에서 ‘Weekly경향’을 그대로 언급한 것은

백두산 정계비 인근에 있는 돌울타리(石堆) 부분이다.

1885년 9월 30일 청나라 대표와 대화한 기록에서

이중하는 백두산 정계비 인근에 있는 울타리를 언급했다.

차제에 생각컨대 분수령에 있는 한 비석은

우리나라가 받드는 천조의 올바르고 알맞은 법을 위함이어서

일석(一石), 일퇴(一堆)도 감히 혹시라도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성조가 정한 바 관계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중하가 백두산 분수령에 있는 정계비가 옮겨진 일도 없을 뿐더러,

정계비에서 토문강을 연결하는 울타리를 훼손한 일이 없음을 강변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무려 두 쪽에 걸친 ‘일퇴’의 각주 설명에 ‘Weekly경향’과 기사가 소개됐다.

<뉴스메이커> 623호(2005년 5월 10일자)에 소개된 이 사진에는

10여 개의 돌을 모아 만든 돌무더기가 보이고 5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돌무더기가 보인다.

(중략) 한편 북한의 고고학 및 민속학 학술잡지인 <문화유산>(1957)에서

북한의 민속학자인 황철산 교수는

“본고는 1948년 7월에 청진교원대학 백두산탐사대에 참가하여 조사한 자료를 정리했다”라고

하면서 “돌각담의 총수는 106개고 돌각담이 처음 있는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

거리는 5391m에 달한다”고 했다. (중략)

 

<뉴스메이커> 611호(2005년 2월 15일자)에서 1m급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

돌무더기 띠가 백두산 정계비에서 토문강 상류까지 1.5km 연결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3/24   위클리경향 8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