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지리적 진실’은 조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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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간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한 일본은 곧바로 토문강 답사에 들어갔다. 당시 파출소장인 사이토(齊藤季治郞)가 10월 18일 통감공작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토문강 답사보고서가 이 사실을 말해준다.
‘간도영유권 관계 발췌문서’는 이 답사보고서의 번역본이 실려 있다. 이 답사보고서는 일본 외무성 육해군성 문서 중 하나다. . . . 먼저 분계비가 있는 곳에 이르러 비면의 문자를 등사하고 또 비를 촬영한 후 곧 측도(測圖)에 착수하여 토문강을 따라 답사한 결과 다음 사실을 확인하였다.
분계비에서 동북으로 향해 하나의 곡지(谷地)가 있다. 이것이 바로 토문강의 본원이며 그 동측에는 높이 약 3척, 면적 약 1평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2~3m 내지 100m가 떨어지다. 100m의 곳은 비로 인해 갈라져 석퇴(石堆)가 붕괴한 것 같다) 석퇴(둥근 돌을 쌓은 것으로 그 형상은 흙만두와 같았다)가 점점으로 서로 이어졌고 그 연장은 약 7000m에 달하다. 그 종말점에 높이 약 100m의 단애가 있는데 소위 토문이라 칭하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이하 하천의 형상을 따라 울창한 대삼림 속으로 달려 약 4리 가니 방향을 북으로 돌린다. . . .(중략) . . .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나서는 약 18리 지나 곧 낭낭고(일명 연일고) 부근에 이르러 다시 방향을 서(西)로 돌려 소사하를 거쳐 드디어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의 일행은 1907년 백두산 정계비를 직접 답사하고 정계비의 물줄기를 끝까지 추적했다. 만주땅을 차지하려는 일본의 야심이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답사보고서는 현지 답사에서 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당시 석퇴가 존재하고 있었던 점, 석퇴의 끝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단애가 있었던 점, 정계비에서 시작한 토문강 물줄기가 결국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점은 그때 당시 간도 파출소에서 파견된 일행이 확인한 객관적 사실이다. 청나라 측 관리들과 함께 정계비와 토문강 물줄기를 답사했다. 청나라 측 관리들이 이 객관적 사실 앞에 더 이상 말을 잃었음은 보지 않고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청나라 측은 정계비가 옮겨졌느니, 백두산 정계비가 국경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라느니 억지 논리를 내세웠다.
역사적 사실이야 조작할 수 있지만 지리적인 사실은 조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 이후 줄곧 우리에게 무언으로 말하고 있다. - 2009 02/17 위클리경향 8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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