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41. 길 안내인 한치익, 국경 물줄기 의문 제기

Gijuzzang Dream 2008. 12. 20. 20:39

 

 

 

 [간도오딧세이] 길 안내인 한치익, 국경 물줄기 의문 제기

 

 

 

 

 

 


백두산 지역의 지도에 나타난 압록강과 토문강.

토문강은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에 이른다. 오른쪽 파란 선이

두만강 물줄기로 백두산 천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1712년 5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8월,

백두산 인근의 관리들이 백성을 데리고 정계비 지역으로 올랐다.

정계로 인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에 백두산의 지리에 밝은 백성이 동원됐다.

한치익이 대표적이다.

 

한치익의 이름은 <숙종실록>에서도 나타난다.

숙종 38년(1712) 12월 7일 기사에서다.

8월 초순에 순찰사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 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물줄기는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


정계비를 세운 곳에 두만강 물줄기는 없었다.

무산 사람인 한치익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관리인 차원 허량은 한치익의 입을 빌려 정계비대로라면

조선과 청의 경계를 이루는 물줄기는 두만강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토문강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했다.

허량의 설명에 따르면 푯말을 세우는 곳에서 두만강 본줄기인 대홍단수까지 2일 반의 길이었다고 한다.

이 설명에서 한치익이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라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치익이 백두산 지리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치익의 이름은 박종의 <백두산 유록>에서도

“한치익은 나무 울타리를 설치할 때 길을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한치익은 5월 백두산 정계 때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8월에는 울타리 설치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가 백두산 지역의 지리에 밝다는 사실은 정계 당시 기록에 나타난다.

정계 당시 청의 목극등과 협상하는 대표였던 박권의 <북정일기>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5월 13일자 기록을 보면,

박권은 어윤강 근처에 원익성이라는 주인의 집에 머물렀다.

주인은 대홍단수가 두만강이 아니며 진짜 두만강이 따로 있다면서

이 강을 자세히 아는 지역민이 채진귀와 한치익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은 김지남의 <북정록>에 5월 16일자 기록으로 적혀 있다.

마찬가지로 원익성이라는 주인의 말로 대홍단수는 진짜 두만강이 아니며

이런 상황은 무산의 절충장군인 채진귀와 한량 한치익이 상세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박권이 채진귀와 한치익을 불러 물어보고 양식을 주면서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 상황까지 설명돼 있다.

박권은 정계를 마치고 돌아온 목극등에게 한치익이 제기한 의문을 그대로 제기한다.

하지만 목극등이 자신이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면서 한치익의 의문 제기는 무산되고 만다.

나중에 한치익이 울타리를 쌓으러 올라가면서

정계비 인근의 물줄기가 두만강이 아닌 토문강으로 흘러들어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한치익의 경우를 보면 조선인 중 백두산 지리에 밝은 인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백두산 지리에 어두워 엉뚱한 물줄기를 찾은 청이 당시 백두산의 주인인지,

아니면 백두산 지역을 환하게 알 수 있었던 조선이 당시 주인인지 금방 알게 된다.
- 윤호우 기자

- 2009 01/20   위클리경향 8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