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백두산 가는 길, 청나라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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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백두산에 정계를 하기 위해 북경을 떠난 청의 일행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조선의 길 안내자였다. <북정록>에는 북경에 갔던 동지사(冬至使)가 올린 장계를 접반사 박권이 읽은 부분이 소개돼 있다.
동지사가 청의 정계 책임자인 목극등을 만난 부분이다.
<북정록> 국역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인들은 삼을 채취하기 위해 백두산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백두산 너머 북쪽으로 무인지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청이 꺼린다는 이유로 이곳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적발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한 발걸음은 막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청인들은 기껏해야 지금의 심양, 훈춘 정도에 발길이 닿을 뿐이었다. 수백 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청인들이 백두산 지리를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조선인 길 안내자였다. 청에서 ‘그대 나라의 예에 비추어 준행하라’고 조선에 글을 보냈지만, 조선 관리들이 이 뜻을 단순한 문장으로 이해한 것이다. 청의 관리는 이 말이 청의 관리들이 타고 갈 말과 짐꾼임을 뒤늦게 밝혔다.
청의 관리는 화를 내며 말했다. 하나는 하급 통역관 몇 명을 파견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장백산을 조사할 때 길 안내인을 미리 대기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길 안내인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청의 대표인 목극등은 조선 역관을 만나자마자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나무를 베며 길을 만들 인부 10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목극등을 백두산 정상으로 안내했다. 역사적 사실, 주민의 거주, 관청의 관할, 지리적 정보 등이 상대국보다 우월해야 한다. 1712년 조선과 청의 정계 때 조선은 백두산 지역에서 훨씬 더 우월한 상황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계에 필요했던 길 안내자다. 청은 자기들도 잘 모르는 땅을 단지 힘이 세다는 이유로 자기 땅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땅이 하루 아침에 청나라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 2008 12/30 위클리경향 806호 -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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