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37. 백두산 정계비는 누가 없앴나

Gijuzzang Dream 2008. 8. 1. 20:24

 

 

 

 

[간도오딧세이]백두산정계비는 누가 없앴나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사활동을 하는 일본인들

 

 

백두산 정계비는 1931년 7월 28일 없어졌다.

이 사실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쓴 <백두산 정계비>라는 책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간도는 조선땅이다>(지선당)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정계비가 1931년 7월 28일부터 다음 날인 29일 아침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근년에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전을 위해서

일본 국경수비대의 하기행군 등산에 동행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는데,

이 해에도 역시 혜산진 수비대 약 50명, 무산 및 삼장 수비대 약 50명과 함께

56명의 일반 등산자가 있었다. 

 

일행이 1931년 7월 28일 오전 9시반경 정계비 소재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을 때는

정계비가 엄연히 그곳에 존재해 있었다.

그러나 일반 등산자는 군대와 헤어져서 산정으로 올라가 천지 부근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아침에 귀로에 올라 다시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을 때

정계비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철거되고

그 귀부 옆에 ‘백두산 등산도’라고 새겨진 표목밖에 볼 수 없었다.

이때 백두산을 올라갔던 일반 등산자 중 한 사람이

시노다 지사쿠에게 직접 이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기록됐다.

간도 문제를 연구했던 시노다 지사쿠에게는 백두산 정계비의 멸실은 충격이었다.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아, 어떤 몰지각한 자의 소행인가. 이런 중요한 사적을 인멸시켜 국경을 모호하게 하려고 꾀하다니.

시노다 지사쿠는 일본의 국경수비대를 의심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관동군을 투입했다.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을 세웠다.

이런 일본의 만주 침략이 백두산 정계비의 멸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국을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의 영토 분쟁을 상징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1931년 일본국경수비대 의심


이렇게 백두산 정계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정계비의 내용은 탁본으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정계비에 적혀 있던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동위토문(東爲土門) 문구는

중국에 가장 곤혹스러운 구절이다.

정계비가 있는 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송화강으로 흘러드는 토문강이기 때문이다.

비석이 옮겨졌다거나 토문강이 두만강의 상류라는 중국의 주장은

현대 지리학에서는 잘못된 사실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계비가 한·중 영토 분쟁에서 한국에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정계비가 들어서던 당시의 기록에서 조선 조정은 압록강-두만강 선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백두산 정계비로 인해 한국은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 셈이 됐다.

하지만 두만강 너머 북간도는 청의 모호한 정계로 오히려 조선의 영유권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어느 나라에 유리하든, 유리하지 않든

양국 국경의 역사적 징표를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것은 옳지 않은 행위다.

 

백두산 정계비는 우리의 근대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치욕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강대국의 힘 앞에 약소국이 양보하며 땅을 내놓아야 했던 굴욕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2008 12/16   위클리경향 804호, 윤호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