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효용을 위한 문학’ 임화
시문학계 샛별로 떠오른 ‘네거리의 순이’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같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갓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어리는 바다.
나의 생각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뛰어볼가!
동해바다 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 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카프의 시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임화. 그는 수려한 외모를 가져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
임화(林和)가 <신인문학> 1936년 8월호에 선보인
‘하늘’ 이다.
정지용(鄭芝溶)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기렸다는 작품으로
임화 두 번째 아내인 작가 지하련이 즐겨 읊조렸다고
한다. 일제 억누름에 밀려 카프를 뜯어헤친 다음이었지만
카프시대 품었던 뜨거운 문학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곁말로 깊이 감춰두는 가운데 예술적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카프’를 이끌었던 임화는
깊은 허물어짐과 무릎꿇음에 빠져 이따금 선보이는 작품
또한 까다로운 처음 때 다다풍 추상시 비스무레한 것들이었는데, 이 ‘하늘’만은 깨끗한 서정으로 슬픈 겨레 모습을 노래하고 있어, 정지용과 지하련 손뼉이 올바른 것임을 보여준다.
“어떻게 임화를 떼버려야겠는데, 귀찮아서 죽겠단 말야. 글쎄 밥상에다 담뱃재를 그냥 털어놓지 않나,
밥상 한 번 들고 일어나서 안으로 갖다주는 법이 없단 말야…. 그러니까 어머님도 이맛살을 찌푸리시고,
아버님은 화를 막 내시지 뭐야….
일본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어떻게든지 노자를 만들어줘야겠는데….”
박영희(朴英熙)가 김기진(金基鎭)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때에 임화는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던 다다이즘 냄새 시를 쓰던 젊은이로
카프 이론가 박영희 집에 ‘개기면서’ 문학적 갈팡질팡을 하고 있었다. 1925년 18살 때였다.
박영희가 얻어다 준 노잣돈으로 동경에 간 임화는
카프 동경지부장인 이북만(李北滿)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이북만이 목대잡던 사회주의 잡지 <무산자> 꾸미는 일을 거들며
김남천(金南天) · 안막(安漠) · 한재덕(韓在德) 같은 사회주의 예술이론가들과 어울리며
사회과학 책들을 두루 읽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인 1928년
사회주의사실주의 문예이론에 바탕한 임화 맨 첫 시인 ‘젊은 순라의 편지’를 선보임으로써
다다이즘 때 헤맴에서 벗어난다.
1929년 <조선지광>에 ‘네거리의 순이’와 ‘우리 오빠와 화로’를 선보이면서
조선시문학계에 샛별로 떠오르니, 21살 때였다. 그즈음 임화 문학관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조선지광> 1928년 정월호에 실린 ‘효용을 위한 문학'으로, 전 해인 12월 19일 쓴 것이다.
지금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단지 문학이나 예술뿐이 아니라 모든 문화 그것도 우리의 당면한
이익의 획득을 위한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 있어서의 우리 조선인의 행동의 일체는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즉 그 효용을 위하여 활동하고 활용되는 것이므로 현재 우리의 효용이란 전 우리의 이익이라는 한 표적 하에다 모든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효용의 문제를 전 조선 이익의 획득이란 그 앞으로 몰수하고 그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의 지금 가져야 할 문학이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먼저 말한 문화발전의 그것과 같이 우리 조선인 전체의 이익을 위한 문학이어야 할 것을 정확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학은 XXXX 효용의 가치를 중심으로 제작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운동의 당면의 제문제 즉 조직이라든지 기타의 문제를 위하여 우리의 활동의 일부로 소위 문단이란 외면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효용의 가치를 중심으로 제작되지 않는 작품은 우리 조선에 필요치 않은 것이다. 오직 효용을 위한 문학이어야 조선의 문학이 될 것이다.
이웃 여고생들에게 ‘연예박사’로 불려
본이름이 임인식(林仁植)인 임화는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제 동숭동 동쪽 창신동 산동네인데, 본적은 종로 가회동으로 기소장에 나온다.
<삼천리문학> 1937년 1월호에 그가 쓴 자서전에 보면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행복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임화 시집 <현해탄> 표지. |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은 1922년 15살 때였다.
시인 이상(李箱), 평론가 이헌구(李軒求), 정치인 이강국(李康國)·유진산(柳珍山)이 한반 동무였고, 시인 김기림(金起林), 평론가 김환태(金煥泰)가 한 해 밑이었다.
김남천이 안막한테 들었다는 말인데 “아이 적엔 면도만 반들반들하게 하고 휘파람 불고 다녔다”고 한다.
보성과 이웃한 숙명고녀 여학생들한테 ‘연애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미소년이어서 “아이노꼬 같다”는 말을 들었다. 혼혈아처럼 잘 생겼던 그는 나중 영화배우가 되어 두 편 영화에서 으뜸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문장> 1940년 2월호에 그가 쓴 ‘어떤 청년의 참회’라는 글이 나오는데, 문학청년 임화 고백기로 읽힌다.
보성고보에 들어가면서부터 근현대 세계명작들을 두루 읽었으며 더러는 외울 만큼 ‘빠삭’하였다.
두번째 부인 지하련은 단편 ‘도정’ 남겨
많은 여성들이 임화를 좋아하였고 많은 연애이야기를 뿌렸던 임화였다.
소문의 참과 거짓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임화는 두 번째 부인을 얻게 되니, 이현욱(李現郁)이었다.
임화보다 4살 밑인 이현욱은 경남 마산에서 자라났고
동경에서 고녀를 나와 대학물까지 먹은 아름다운 얼굴의 고학력자였다.
“여자로서 알맞은 키에 예쁜 얼굴이었다”고 작가 최정희(崔貞熙)는 말하였다.
다음은 <몽양 여운형>을 쓴 이기형(李基炯) 증언이다.
“길쭉한 얼굴, 시원한 검은 눈, 콧날은 날카로운 편, 키는 호리호리하였으며,
늘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1935년 8월 가운데 때 묵은병인 결핵을 다스리고자 마산으로 내려갔던 임화가 만난 여성이었다.
1940년 백철(白鐵)이 밀어줘 <문장>지에 단편 ‘몌별’을 선보이며 작가로 올라서는
붓이름 지하련(池河連)으로, 남편 임화를 좇아 월북하였다가
작품 한 편 못 쓰고 제명에 못 죽는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단편소설 상수(上手)였던 이태준(李泰俊)과 어깨를 겨루었던 사람이다.
조선문학가동맹에서 1946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을 만들었을 때 이태준 ‘해방전후’와 함께
지하련 ‘도정’이 마지막 겨루기를 하였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도정’을 높이 기렸다.
“지하련의 ‘도정’은 8·15 직후 국내에서 발흥한 민주주의운동에 있어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새로운 조선문학이 창조하여 나갈 인간형상의 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심리묘사 및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 표시된 작자의 비범한 자질과 더불어
우리들 가운데 있는 소시민의 음영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은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임화 출세작 가운데 하나인 ‘네거리의 순이(順伊)’ 다.
‘단편서사시’로 일컬어지는 ‘이야기시’인데, 잘 짜여진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이들 ‘이야기시’는
임화가 처음 길을 연 것으로, 뒷날 신경림(申庚林)의 뛰어난 노래 <농무>로 그 물줄기가 이어진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順伊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상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핀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아래 줄임)
‘문맹’ 결성 조선문학 헤게모니 잡다
해방을 맞아 거리로 나온 사람들. |
천지를 뒤덮을 듯한 ‘해방조선’의 만세!
지축을 진동할 듯한 ‘일본제국의 타도’의 보무!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만세!’ 함성과 연합군 환영의 흥분!
지난 9월 11일 정오경부터 ‘건준’ 주최로 경성운동장에는 부내와 영등포의 공업지대에서 화학, 금속, 기계, 철도, 체신, 토목, 출판, 섬유 등 각 산업별 남녀 노동조합 회원을 비롯하여 청년, 학도, 시민 등 기외 근로인민대중 1만수천 명이 참집하여 각각 대 기와 ‘스로-간’의 깃발을 때마침 비내리는 하늘 높이 휘날리면서 광화문을 거쳐 총독부를 휘돌아 동 오후 4시경에 해산하였다.
이날 근로대중들의 불타는 듯한 투혼과 강철 같은 단결의 힘은 여실히 발휘되어 일찍이 볼 수 없던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일반 시민과 연합군에게도 우리들의 위력이 깊이 인식되었다.
또 이날 야수와 같은 일본제국주의 경관의 흉탄에 맞아 건국의 초석으로 사라진 연전 학도 두 동지의 유해를 모신 학도대의 엄숙한 장렬도 합류하여 더욱 이날의 시위행렬을 뜻깊게 하였다.
<해방일보> 1945년 9월 19일 창간호 기사이다.
‘조선공산당 통일재건 만세!’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하자!’는 커다란 활자가 박힌
2면 1쪽짜리 타블로이드판 일간지이다. 이날의 가슴벅참을 읊은 임화 시가 있다.
‘9월 11일’이라는 제목이고 부제가 ‘1945년, 또 다시 네거리에서’ 이다.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窓도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여드는
千 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골
찬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든 旗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사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가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카프’가 없어지면서 임화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되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일제 윽박지름이 아무리 모지락스럽다지만 민족의 원수요 계급의 원수며 문학예술의 원수인
일본제국주의에 무릎꿇었다는 데서 오는 비꾸진 마음으로
시 또한 처음 때 추상적 다다풍으로 뒷걸음질하던 임화였다.
그러던 임화가 8·15를 맞으면서 한창 때 서슬과 스스로 믿는 마음을 되찾게 되니,
이 시가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닥쳐올 제 한살매를 지레짐작하는 듯한 슬픈 가락이 눈에 밟히지만,
문득 한물 때 ‘단편서사시’ 가락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기뻐하는 민중들. |
8·15를 맞아서 가장 힘차게 움직였던 것이 임화였다.
김남천(金南天) · 이원조(李源朝) 같은 이들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얽은 것이 8월 16일이었으니, ‘준비된 문건’이었다.
8월 18일 ‘문건’ 위 모임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얽고 이들 모임을 채잡는 문학론으로 내놓은 것이 ‘인민적 기초 위에서의 민족문학’이었다.
12월 ‘문건’과 ‘예맹’을 뭉뚱그려 ‘조선문학가동맹’을 얽는 데 앞장서 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니, 조선문학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이었다.
‘문맹’에서 차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라는
밑가락 연설을 하였고, 문화부문 통일전선체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얽어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항쟁’시만을 모은 제2시집 <찬가>를 펴내고
1938년 펴내었던 처녀시집 <현해탄>을 <회상시집>이라는 이름으로,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조카 조벽암(趙碧巖)이 세운 건설출판사에서 박아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깊어지게 한 ‘문학에 있어 봉건적 잔재와의 투쟁임무’ ‘문학의 인민적 기초’
같은 문학을 이끄는 길을 내보였다.
1947년 미군정 뒷받침을 받는 극우테러단의 좌익신문사 습격과 시인 유진오(兪鎭五) 구속,
시낭송 원고 검열, <찬가> 판매금지, ‘문화공작대’ 피습, 좌익인사 검거선풍이 도를 더해 간다.
더 이만 서울에 있을 수 없는 셈평이 된 것이었다.
1947년 월북, 황해도 해주에 머물러
1945년 11월 이기영과 한설야가 올라갔고,
1946년 3월 박세영(朴世永)이 올라갔으며, 6월에는 이태준이 올라갔다.
임화가 월북한 것은 1947년 10월쯤이었다.
비슷한 때에 오장환(吳章煥) 또한 월북하였는데 같이 갔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임화가 간 곳은 평양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였다.
남로당 윗선 목대잡이가 있는 그곳에서 제1인쇄소를 책임맡아
<민족조선> <인민조선> 같은 여러 간행물과 팸플릿을 찍어 남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장사꾼들이 오갔고 길잡이만 붙이면 38선을 넘나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46년 3월 15일 비롯된 남북 우편물 교환은 6·25 사흘 전까지 개성 · 여현역을 거쳐 주 1회쯤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북조선에 보낼 편지는 ‘38우편물’이라고 불렀다.
그 겉봉에 ‘38 이북’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도록 했는데
이 ‘38우편물’도 여느 우편물과 같이 전국 우체국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이 이름만일망정 합법정당이었던 것은 1949년 끝무렵까지였다.
청년시절 임화. |
목대잡이들이 모두 월북한 ‘문맹’에는 소설가 박찬모(朴贊謨)가 위원장 몸받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해주에서 내려보내는 임화 분부에 따라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었다.
해주에 있으면서 임화는 ‘인민항쟁가’ 같은 노랫말들을 지어 내려보냈고, 남조선음악동맹 위원장이었던 작곡가 김순남(金順男)이 곡을 붙인 이 노래들은 입산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산인민유격대를 비롯한 남로당 사람들 신바람을 북돋아주는 북소리 같은 것이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온 임화는 ‘조선문화총동맹’을 얽고 그 부위원장 자리를 맡는다. 그때 8닢 시를 묶은 전선문고 <너 어느 곳에 있느냐>라는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백철(白鐵)이 임화를 보았던 느낌이다.
“…불과 2~3년간에 임화의 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가 반백에 가깝게 흰머리가 많이 생겨난 일이다.
임화와 나는 나이가 동갑이니까 그때 아마 마흔다섯 정도였을 터인데 얼른 보면 50이 넘은
노신사의 풍모였으니 거기 가서 그렇게 팔자가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림화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회 전 부원장’.
“그는 1935년 일제경찰과 야합하여 혁명적 문화단체인 카프를 해산시키도록 책동하였으며
친일 ‘문인보국회’ 리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위 내선일체의 사상을 주창하는 등 민족반역 행위를 감행하여 왔으며
8·15해방 후는 미국 정탐기관의 밀정으로 가담하여 리승엽 등과 련계 밑에 간첩행위를 감행한 자로
(…) 1951년 8월에는 무장폭동음모 활동에 참가하여 폭동음모 본부를 조직하고
폭동시 조일맹과 같이 정치 및 선전선동조직 책임을 담당하고
그의 역량 집결을 위하여 문화예술 단체를 자기들의 수중에 장악하려고 활동하였다.”
리승엽이 짠 박헌영정권에서 문화교육상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는 임화가 처형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사형판결을 받은 1953년이라는 설도 있고
그 2년 뒤에 있은 박헌영재판에 증인을 선 다음이었다는 설도 있다.
1920년대 뒤판부터 1940년대에 걸쳐 우리 민족문학운동의 사북에 서 있던 임화는
두 권 시집 말고도 우리 근대문학사를 나름의 과학적 방법론 자리에 서서 간추린 <조선문학사>가 있다.
북한서 간첩혐의 받아 ‘형장의 이슬’로
임화가 엮은 <조선민요선>. |
지하련은 1948년 끝 무렵 처녀창작집 <도정(道程)>이 나오는 것을 본 다음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6·25때 만주로 피난해 있다가 뒤늦게 임화가 잡혀갔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으로 달려왔을 때, 임화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거의 실성상태가 된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매지 못한 반미치광이 모습으로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기관이나 단체를 수소문하여 돌아다니다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평북 희천 근처 산 속에 있는 교화소로 끌려갔는데, 1960년 첫 무렵 앓다죽었다고 한다.
임화와 지하련 사이에 태어난 남매 살매는 알 길이 없다.
임화가 노랫말을 쓴 ‘해방조선의 노래’ 이다.
1. 전사들아 일어나거라
영웅들아 일어나거라
압박의 사슬은 끊어지고
자유와 희망의 새날이 왔다
일어나거라 전사들아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2. 서백리아 바람 찬 벌판
현해탄의 거친 파도에
한 많이 쓰러진 수없는 생명
旗ㅅ발은 벌거니 피에 젖었다.
잊지 말아라 혁명 동지를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3. 등불도 없이 걸어오던
눈물도 없이 울어오던
어둔 밤 우리의 머리 위 높이
호올로 빛나는 그대들 이름
높이 들어라 전사의 旗ㅅ발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 2009 05/05 위클리경향 823호
- 2009 05/12 위클리경향 824호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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