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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김재봉 -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56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민중의 혁명적 교양사업 힘쓰다

1890년 유생 김문섭(金文燮)씨의 장남으로 경북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에서 출생하였다.

7세시 재종조인 운재공(雲齋公) 문하에서 한자를 배우고 19세에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공업강습소를 졸업한 후 귀성하야 농업에 종사하는 일방 신구 학술을 연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농민을 지도하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악독한 일경의 추구를 피하야 경향 각처로 망명생활을 하여가면서 꾸준히 반제운동을 계속하다가 검거를 당하고 6개월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출옥한 후 1922년 상해 만주를 거쳐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였든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다음 노령 ‘일크쓰크’에서 개최된 혁명대회에 참석한 후 그곳 공산당에 입당하야 활동하였다.

이것이 김재봉 동지가 민족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 전환한 것이니 실로 조선인으로서 공산주의자가 된 최초의 일인이었다.

니시파(尼市派)와 상해파(上海派) 합동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니시파의 중앙 간부로 선임되여 이면으로는 신사상연구회 화요회에서 활동하면서 이면에서는 니시파의 당무로써 분투하였다.

1922년 4월 17일 아서원에서 우리 당이 조직되자 책임비서로 피선되어 1925년 11월 피검될 때까지 우리 당 발전을 위하야 활동을 전개하였다.

6년간의 투옥생활을 마치고 왜적의 감시하에 일반 민중의 혁명적 교양사업에 노력하다가 1944년 3월 3일 향년 54세를 일기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에 실려 있는 머릿기사이다.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만세!’라는 제목 밑에

‘민족해방운동의 영웅이오 조선공산당의 초석인 전사한 동지를 추억하자!’는 버금제목과 함께

김재봉 · 강달영 · 권오설 · 차금봉 · 김세연 · 김강 · 고광수 · 이인수 · 한해 · 이동휘 · 주현갑 · 이동선 · 이재유 · 한위건 · 정운해 · 김철산 · 이낙영 · 김철 · 진병기 · 정태옥 · 도정호 · 오성세 동지가

살아온 길이 간추려 적혀 있다. 가신님들을 기리는 머릿글이다.



양반집 도령이었으나 상투 잘라

 
일본제국주의의 백천의 탄압과, 수없는 학살에도

조선공산당은 불사의 정신으로 파괴되면 재건되었고 학살되면 후속되었다.

적은 최소한의 행동에도 최악의 법률과 야만적 고문을 적용하고.

이리하야 조선의 해방운동은 유혈사투의 연속이였든 것이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어듸서 유래한 것이든가?

그것은 조선공산당이란 것은 타협을 모르는 타협하여 얻을 것이 없는 무산계급의 선두대인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 최근사상 조선공산당의 투쟁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적 정신은 사멸하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로 하야금 일일의 영일이 없이 하야ㅆ고 민족의 독립적 정신을 살게 하얐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야는

참담한 전야에 무수한 민족해방의 영웅이 차제로 너머졌는 것이다.
3천만 민중아! 우리의 영웅을 추억하자! 우리는 우리 영웅의 시체를 밟아

너머너머 우리 민족의 완전해방의 피안으로 돌진하자!

그것만이 우리 민족의 영웅에 대한 최대의 기념이고 보답일 것이다.

 

김재봉(金在鳳)은 비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진서를 익혔고, 아호는 근전(槿田)이다.

잡도리 호된 양반집안이었으나 냅뛸성 높은 도령이었던 김재봉은 상투를 자른 다음 대처로 나갔다.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를 마친 것이 1908년이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를 나온 것이 1914년이었다.

3·1운동에 들었고,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가 되었는데, 신문사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1921년 1월 조선독립단 문서를 건네주다가 왜경에게 잡혀 ‘제령위반’으로 징역 여섯 달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오자 러시아로 갔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감목으로 한몫 들어갔다.

11월 베르흐네후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들었다가

치따에서 불러모은 이르쿠츠파와 고려공산당대회에 들어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1923년 1월 꼬르뷰로 파견원으로 뽑혀 조선으로 돌아왔다.

주의자 서클인 ‘신사상연구회’에 손붙여 8월 경성에 꼬르뷰로 국내부를 세우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24년 남모르게 조선공산당을 세우는 일을 채잡으며

여러 공산주의자 동아리 대표자 모임인 ‘13인회’에 들어갔다.

10월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얽혀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 무렵 ‘화요회’에 들어갔는데, 러시아혁명 아버지인 레닌이 태어난 날을 기려 붙인 ‘화요회’는

홍명희(洪命熹) · 김찬(金燦) · 홍증식(洪增植) 같은 이들이 꾸려가던 ‘신사상연구회’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회 선언

 
1925년 4월 17일. 이제 을지로1가에 있는 청요릿집 아서원(雅?園) 2층 모꼬지방에는
19명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하오 1시쯤이었으니 점심을 곁들인 무슨 모꼬지를 하려는 것으로 보였는데,

참으로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경성에 있는 6개 합법단체 야체이카 대표 8명과 여러 바닥에서 올라온 야체이카 대표 11명이었으니,

김재봉·김찬·김약수(金若水)·주종건(朱鐘建)·윤덕병(尹德炳)·진병기(陳秉基)·조동호(趙東祜)·조봉암(曹奉岩)·송봉우(宋奉瑀)·김상주(金尙珠)·유진희(兪鎭熙)·독고전(獨孤佺)·정운해(鄭雲海)·최원택(崔元澤)·이봉수(李鳳洙)·김기수(金基洙)·신동호(申東浩)·홍덕유(洪德裕)였다.

조선공산당을 세우기 위하여 피끓는 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꾀를 내었는데,

온나라 신문·잡지 기자대표 639명(여기자 5명)이 모인 조선기자대회가 15일부터 사흘째 열리고 있었고,

20일 상오 10시부터는 이제 소공동에 있던 곡천정공회당(谷川町公會堂)에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여러 고장에서 올라온 425개 모임 대의원만 508명이어서 경성시내 여관들은

방이 동날 판이었다. 기자대회와 민중대회를 채잡는 것은 화요회였다.

종로 기독교회관에 내걸린 기자대회 ‘캐치프레이즈’는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였다.

19명 주의자들이 아서원에 모였을 때 흥인지문 밖 손병희(孫秉熙) 별장 상춘원(賞春園)에서는

기자대회 마지막날이 열리고 있었다. 경성시내 왜경들 눈과 귀가 모두 기자대회와 민중대회에 쏠려 있는

틈을 타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였으니, 화요회 사람들이 오랫동안 얽이잡아 짜낸 전략·전술이었다.

“조선에 있어서 사상단체 운동은 그 역사로 볼 때는 몇 년 안되지만

그 양에 있어서는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여태도 확고부동하게 조직되고 질서잡힌 운동방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중앙당이 없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여기에 대한 대응책을 의논하고자 함에서올시다.”

김재봉이 개회선언을 한 다음 사회를 맡은 김약수가 말하였고, 김재봉이 다시 일어섰다.
“우리 조선 안에는 사상운동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표하는 바는 모두 똑같으나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한 방책에 있어서는 저마다 다르니,

각자위대장(各者爲大將)인 것입니다. 뿐인가, 해마다 그 복잡다단함이 더해가는 실정이올시다.

연인즉 이런 여러 단체들을 하나로 모아 정로(正路)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중심구조를 짜지 않으면

안될 줄 압니다.”

김찬이 일어나 문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촉급하외다. 결사 명칭은 조선공산당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두루마기 차림인 누군가 일어났다.
“조선이란 말을 붙이면 대외적으로 문제가 있소이다.

노서아 · 영국 · 독일은 차치하고 중국인들까지도 코리아 즉 고려라고 하면 다 알지만,

조선이라면 잘 모르는 실정이외다.”

“하지만 고려라는 것을 당명 머리에 붙이고 보면 왕년 고려공산당 전철이 떠올라 불길하고

또 파벌싸움만 일삼는 해외 고려공산당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소이다.”

이런 다툼을 거쳐 정해진 이름이 ‘조선공산당’이었다.

신의주에서 온 독고전이 “국경지대 사상동향이 공산주의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고,

마산에서 온 김상주와 광주에서 온 신동호는

“기본계급 농군들에게 경자유기전 법칙 따라 밭 가는 사람에게 땅이 돌아가야 한다는

공산주의 평등사상이 환영받고 있으므로 공산주의운동 장래가 밝아진다”는 사룀이 있고 나서,

여러 부서 목대잡이 뽑는 일로 들어갔다.

당 강령과 규약을 정해서 통과시켜야 했지만 그러면 본메본짱을 남길 수 있고

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므로 다음 모임으로 미루고 여러 부서 목대잡이를 뽑았다.

김재봉이 비서부까지 아우르는 책임비서였고,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노동부 정운해, 겅경부 유진희, 조사부 목대잡이는 주종건으로 이들 7명은 중앙집행위원을 아울렀다.

이때부터 조선공산당은 ‘김재봉당’이라는 딴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모스크바로 간 조동호가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1926년 3월 31일이었다.

이때부터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과 오직 하나뿐인 교섭 상대자가 됨으로써

조선에서 여러 공산주의 동아리들을 소매 안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신의주사건’으로 6년 징역 살아

 
옴치고 뛸 수 없는 처지가 된 김재봉이었다. ‘신의주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김재봉이 목대잡는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이 목대잡는 고려공산청년동맹이 짜여진 지 일곱 달 만인

1925년 11월 22일이었다. 돈의동 명월관 뒤란에 있는 김미산(金美山)이라는 명월관 기생집이었다.

신의주 청년모임 사람들이 요릿집 2층에서 혼인 뒤풀이를 하다가

아래층에서 술을 마시던 왜경과 조선인 순사보조원 그리고 친일변호사와 의사하고 시비를 벌여

밖으로 도망치는 왜순사를 쫓아가 두들겨 팼는데, 왜경을 팬 젊은이 집 옷장 속에서

고공청 중집위 회원자격 심사표와 통신문 3통이 나왔던 것이다.

박헌영·주세죽·임원근·유진희·박길양·김상주·권오설·홍증식과 독고전 등 4명,

시대일보 기자 조이환(曹利煥) 등이 잡혀갔다. 가까스로 세운 조선공산당 허리가 부러지는 판이었다.

낙원동 어느 여인숙에 숨어 있던 김찬이 김미산에게 선을 대왔고, 김재봉은 김찬과 무릎을 맞대었다.

조선일보 지방부장인 홍덕유한테 조선일보 지주지국장인 강달영(姜達永)을 불러올리게 하여

“조공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낙원동주재소에 있던 왜순사가 담배가게에서 고급담배가 여러 갑씩 팔려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매음하는 곳이 있다고 보고 거미줄을 드리웠는데,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붙잡아 왔는데, 경성시내 왜경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김재봉이었다.

“거물을 잡았다”고 종로서 미와(三輪) 경부에게 알렸는데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미와는 뜻밖에도

“아니야. 풀어줘.”하고 말하는 것이었으니, 조선공산당원들을 한 그물로 떠내기 위한 능구렁이짓이었다.

김재봉이 붙잡힌 것은 1925년 12월 19일이었다.

6년 징역을 선고받은 것이 28년 2월이었으니, 옹근 2년 7개월 동안 ‘예심’이라는 이름 아래

징역으로 쳐주지도 않는 헛징역을 살며 온갖 끔찍한 밥받이와 족대기질을 겪은 것이었다.

감옥을 나온 것은 34년이었는데, 눈을 감은 44년 3월 3일까지 어디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자취가 없다.

아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반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 가신 님들이 한둘이 아니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2009 06/02   위클리경향 8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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