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현대사 아리랑] 강달영

Gijuzzang Dream 2008. 12. 20. 05:56

 

 

 

 

 

 

[현대사 아리랑]

 

 

 얼빠져 죽어버린 갓맑은 혁명가 강달영

 

 

해방 3년 앞두고 감옥에서 숨져

순종황제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

<경향신문>

강달영 동지
1887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6세부터 한학 수업. 한일합병 후 비분하야 동지규합에 힘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과 청년의 선두에 서서 지도하다가 피검.

1년 6개월의 일제 철쇄구속을 버서나자(1921) 곳 노동공제회 창립에 힘써 그 간부에 피선되야 활동하고 이어 1923년에 조선노동총동맹을 발기결성하야 그 간부로 피선되며 표면으로는 경제투쟁을 지도하여 이면으로는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1924년에 공산당 내 지부의 당원이 되야 지하운동을 계속하다가 1925년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야 당세 확장에 노력하든 중 조공 제1차 검거가 있자 그후 수습대책에 진력하야 동무는 제2차 책임비서가 되다.

동무는 간악한 일경의 눈을 가리우기 위하야 나제는 가두에서 '아이스크림'과 ‘바나나’ 장사를 하고 밤이면 산중에서 동무들과 연락회의를 거듭하야

당세만회에 초인적 노력을 하다가 드디어 일경의게 피검되야 6년 징역을 받고

기간 옥중에서 난청과 병마로 인하야 정신이상증을 발하였나니 일제의 잔악함이 새삼스러이 회상된다.


1934년에 출옥하였으나 정신회복을 하지 못한 채로 1942년에 도라가시었다. 향년 56.

(홍덕유 동지 자료 제공)
일제 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벌이다 저뉘로 가신 님들을 기리는 글 가운데 하나다.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

 
<조선일보> 진주지국을 꾸려가던 강달영(姜達永)이 ‘지급상경’ 전보를 받은 것은

1925년 12월 10일쯤이었다.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인 홍덕유(洪德裕)가 보낸 것이었는데,

강달영은 손에 땀을 쥐었다. ‘신의주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인 유진희(兪鎭熙)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泳)과 주세죽(朱世竹) 내외가 왜경한테 잡혀간 것이

11월 29일 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달영은 홑된 신문사 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홍덕유는 조선일보사 안에 짜여진 야체이카 목대잡이였고 강달영 또한 당원이었다.

 


김재봉 후임으로 조선공산당 떠맡아


강달영이 경성으로 올라온 것은 12월 12일이었는데

고공청 중집위원인 홍증식(洪增植)을 비롯한 여러 주의자들이 붙잡혀 간 것이 12월 10일이었고,

13일에는 중집위원 서정희(徐廷禧),

14일에는 중집위원 주종건(朱鍾健)과 중집위원이었으나 정권처분을 받은 김약수(金若水)가 붙잡혀 갔다.

죽을 고비를 넘겨 세워진 조선공산당이 허리가 부러지는 판이었다.

홍덕유 안동받아 간 돈의동 명월관 뒤에 있는 명월관(明月館) 기생 김미산(金美山) 집에서

강달영을 맞아준 것은 ‘근전(槿田)동무’였다.

아호인 근전을 따서 ‘근전동무’로 불리는 조공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은

당이 벼랑 끝에 서게 되었음을 말한 다음 강달영에게 책임비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잡히지 않은 중집위원인 김재봉 · 주종건 · 김찬(金燦)이 숨가쁘게 뜻을 맞추어

강달영 · 홍남표(洪南杓) · 김철수(金 洙) · 이준태(李準泰) · 이봉수(李鳳洙)를 중집위원에 보선하였고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뽑았으며, 세 사람은 조선을 벗어나기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주종건은 그러나 이틀 뒤인 12월 14일에 잡혔고 근전동무 또한 12월 17일에 붙잡혔으니,

조선땅을 벗어나 상해로 간 사람은 김찬 하나뿐이었다.

근전동무가 자기 뒤를 받아 조공을 추슬러갈 책임비서로 강달영을 민 데는 세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 앞 중집위원들보다 왜경 눈길을 덜 받고 있다는 것.

둘째, 경성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여러 갈래 주의자들한테 되받음을 덜 받으므로

여러 갈래로 찢어진 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기가 좋다는 것.

셋째, 무엇보다도 뜻이 굳고 쑹쑹이에 밝으며 셈에 빈틈이 없다는 것.

“민족주의자들은 부패로 망하고 공산주의자들은 파벌로 망한다”는 말이 있을만큼

주의자들은 여러 갈래로 찢겨져 저마다 목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에 무지갯빛 나는 강철 같은 마음으로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은 얼추 주의자들이었는데-

중국에는 상해파 러시아에는 이르쿠츠파라는 두 개 고려공산당이 있었고,

일본에는 일월회파가, 만주에는 만주공산주의청년동맹파가 있고,

조선에는 서울파인 고려공산동맹, 화요파인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북성회파인 카엔당,

노동당파인 스파르타쿠스당이 있었다.

진주땅에서 움직였으므로 왜경 눈초리를 덜 받는 강달영이 빛나는 별들이 우글거리는 경성에서

허리 부러진 조선공산당을 붙잡아 일으키는 일을 맡게 된 까닭이다.

 


진주서 3·1운동으로 3년 징역형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강달영은 6살 적부터 10여년간 진서를 배우다가 진주도립보통학교를 나왔다.

진주와 합천에서 3·1운동을 채잡다가 잡혀 3년 징역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년 6월 만에

대구형무소를 나왔다.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를 세우고 집행위원이 되었고,

진주 얼안 소작인 1000여 명을 모아 소작노동자대회를 열었고,

경성에서 짜여진 조선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진주에서 경남노동운동자간친회를 채잡았고,

조선노동총동맹을 세우는 데 들어 중앙위원이 되었다.

10월 화요회에 들어갔고, 꼬르뷰로 국내부에 들어가 진주야체이카 목대잡이가 되었다.

25년 조선일보 진주지국을 맡았고, 4월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김재봉당’이 무너진 다음 짜여진

후계중앙위원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6년 첫때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얽어내고자 천도교 · 기독교 목대잡이들과 여러 차례 만나

머리를 맞대었다. 순종황제 인산날인 6월 10일에 아주 크게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채비를 하다가

지명수배되었다. 핏발선 왜경들 눈을 속이며 만세운동 채비를 하였다.


일제에 체포당한 후 종로경찰서에 촬영한

강달영의 신원카드. <경향신문>

왜경이 강달영 자취를 찾아낸 것은 26년 7월 첫때였다. 강달영과 함께 6·10만세운동을 채잡았던 권오설(權五卨)을 붙잡아 갖은 족대기질을 다하였으나 1차사건 때 이미 붙잡혀 간 사람들과 해외로 몸을 옮긴 사람들 이름만 대면서 ‘귓등으로 듣고 대답하는’ 등 ‘거물다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권오설이었다.

 

“필설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쉽게 입을 열지 아니하므로 비상한 열과 근기로써 얻어냈다”고 서대문경찰서 경부 요시노가 죽는 소리를 할 만큼 권오설은 어기차게 버텨내었다.

 

요시노가 얻어낸 것은 새로 뽑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강달영이라는 것뿐이었다.

왜경들 족대기질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권오설은 5년 징역을 살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니, 33살 때였다.

강달영이 책임비서를 맡았을 때 조선공산당원 수는 몇 명이었을까?

강달영이 코민테른에 보내려고 만든 ‘조선공산당 현황에 관한 보고’를 보면 265명이다.

146명이 정당원이고 119명은 후보당원이다. 야체이카는 29개.

이것은 공산주의 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목숨을 건 직업혁명가를 가리킨다.

이들은 당이 정한 강령과 규약을 지키고, 야체이카 모임에 빠져서는 안되며,

당중앙이 못박는 대로 싸움에 나가 몸바치겠다고 다짐 둔 사람들이었다.

강령과 규약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적에는 에누리없이 벌을 받았다.

뜻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 밖 혁명동아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했고, 3개월에서 1년까지 후보 기간을 거쳐야 하였다.

강달영이 머문다는 집을 들이쳤으나 없었고,

명치정(明治町)에 있는 주식거래소에 270원 돈을 맡겨놓은 것을 알게 된 왜경은

형사대를 풀어놓고 밤낮없이 지켰다. 강달영은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고, 왜경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요시노가 쓴 수기 어섯이다.

“망보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지?” 또한 불안과 초조로 지냈다.

그런데 그 이튿날 17일의 저물녘에 40세가량 되는 바나나장수가 동점(同店)으로 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마하고 대수롭게 생각지 아니하였으나

상점에서 부르지도 아니한데 조심없이 들어가는 것을 본 형사들은 긴장하였다.
바나나장수와 주식의 중매점. 너무도 기묘한 일이 아닌가.

먼 곳에서 점내(店內)에서 하는 행동을 본즉 돈을 수취하여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본즉 강이다.
“어쨌든 그럴 듯한 변장이다.”
뒤를 따르는 형사의 눈지시에 상하좌우로 포위하여 30간쯤 나아가서,
“여보, 강달영이.”
뒤로 돌아다보는 것을 뒤로부터 들이 덤비었다. 동시에 상하좌우로 포위하고 체포하였다.

강달영은 죽어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잡기도 어려웠지만 입을 열게 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강달영 오르그인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집을 덮쳐 찾아낸 수십 권 공책을 펼쳐보니

모두 암호로 적혀 있었다. 아무리 족대기질을 해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은 틈을 얻어서 빠른 손으로 공책을 조각조각 찢어서 입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가.

겁이 나서 이것을 빼앗아 치웠다.

그러면 이번에는 자기의 골을 책상에 부딪쳐서 자살하려고 하지 않는가?”

‘뼈가 모래가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었다고 요시노는 머리를 흔든다.

죽기로 작정하고 버티는 데는 어떻게 하여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왜경 스스로 암호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날 밤을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그 공책만 들여다보고 있었을 뿐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한다는 것은 이러한 때에 쓴 것’이라고 생각하며 끙끙대기 30여 시간 만에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3자씩 씌어 있는 것이 몇 개소 있다. 마치 조선인 성명을 쓴 것과 같이…

이것은 성명이다…’

 
“난해한 수학을 해득한 이 기분. 이에서 더한층 마력(馬力)을 가하여 연구한 즉

한자를 분해하여 그 변(邊)을 만들고 또 관(冠)과 그 하(下)를 언문과 영자 즉 영문식으로 조합하여

혹 언문의 모자음이 변전되어 있는 것을 고래의 문법관례 등으로 연역하여 판독하게 되었다.

천행으로 내가 조선문에 통한 까닭에 해득하였다.

이에서 전정관(全政琯)의 성명도 나타나고 계속하여 세 사람의 야체-카의 성명도 읽게 되었다.

이때의 기쁨이라는 것은 참말로 귀신의 목이나 베어온 것 같았다.

즉시 고등계 주임, 서장에게 보고하고, 다음은 다만 시간과 근기(根氣)의 문제이다.”

 


바나나장수로 변장했으나 붙잡혀

 

강달영은 모든 생각을 끊고 문서에 적힌 글발들을 왜말로 옮겨 주었다.

그러면서도 본딧글자를 조금씩 다르게 옮겨적음으로써

실오라기 하나라도 건져내려는 눈물겨운 애를 쓰는 것이었다.


6년 징역을 받았는데, 사자 어금니 같은 동지들 탈막이를 못하였다는 뉘우침에서 온 것일까.

강달영은 미쳐버린다. 왜경들이 하는 짐승보다 못한 족대기질에 무너져버린 제몸을 매질하던 끝에

넋을 잃어버린 흰눈처럼 갓맑은 혁명가가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것은 1932년 겨울이었다.

10년을 더 살았으나 한번 떠나버린 넋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강달영이 저뉘로 간 것은 해방되기 3년 앞인 1942년. 향수 56이었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 2009 06/09   위클리경향 8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