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6·10만세운동 앞장 볼세비키 혁명가 권오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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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휴업 주도 중학교 퇴학 당해
공산당원 150명 피검
권오설씨는 옥사 다수 민중은 학살 드디어 그날은 왔다. 이날 신문사 기빨을 단 자동차 수십 대에 지도부대가 논아 타고 삐라는 청년과 학생들이 난우어 가지고 행열의 양쪽에 대기하였다. 오전 10시 행열이 창덕궁을 떠나자마자 파조교(罷朝橋)에서 삐라는 산포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시위가 벌어졌다. 군중과 경찰 사이에는 각처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학생 수십 명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였다.
제2차 시위는 관수교(觀水橋) 건너서 제3차 시위는 황금정 3정목에서 제4차는 훈련원에서 제5차는 동대문에서 제6차는 안감천(안암동)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시위대의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는 행열과 같이 끝일줄 모르고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든 것이다.
장의 이튿날부터는 검거선풍이 온 장안을 휩쓸어 운동 지도부 이외의 군중 200여 명이 피검되였고 선풍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여 6월 말까지에 수천 명의 근노인민이 투옥당하고 검속된 공산당원만 150명의 다수에 올랐다.
이것이 세칭 제2차 공산당사건이다.
이때에 검거된 공산당원은 악독한 경찰의 손으로 학살을 당하고 권오설씨는 옥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근로인민대중의 혁명적 기세는 점점 더 불타오르고
소작쟁의 노동쟁의 학생맹휴의 투쟁은 계속하여 나타났든 것이다.
<독립신보> 1947년 6월 10일치 기사이다.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 ‘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 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이다.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우려라- 들려오지 않는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의 일제의 항거하든 우렁찬 발자국 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독립만세’의 고함소리-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에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등 모든 조선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독립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 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날 전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열사 22명 중 한명 감방에서 눈을 감은 권오설을 기리는 글이 있다.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는 앞뒷면 모두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만세!’라는 큰 제목 아래
공산주의운동에 몸바치다가 돌아간 혁명열사들 살아온 길을 적고 있는데,
22명 가신 님 가운데 권오설은 김재봉 · 강달영 다음으로 세 번째이다.
손톱만한 사진도 박혀 있는데, 흐리마리한 사진이지만
한일자로 꽉 다문 입에 주욱 찢어진 눈매며 기름한 얼굴이어서 여간 어기차 보이지 않는다.
권오설 동지 1897년 경북 안동군 동학가(東學駕) 밑 일 빈농가에서 탄생하였다. 동무는 생래로 총명 예지 성장하면서 그의 불타는 정열과 의분에 넘치는 기개는
후일의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영웅투쟁에서 십분 발휘되였다.
유소시부터 ‘조선독립’을 위하야 노력과 ‘일본제국주의 박멸’을 위한 투쟁은 비록 34년의 일생이
길지는 안치마는 그의 투쟁이 역사상에서 거대한 자리를 점령하고 있음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중학시대부터 ‘조선역사연구회’란 명칭 하에
조선민족 사상의 고취와 친일선생 배척 급 동화적 노예교육 반대를 조건으로서 동맹휴학을 하였는데
이것을 도화선으로서 학교당국과 투쟁은 치열화되야 결국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당하야 광주에서 민중시위 운동에 참가 지도하다가 피체
이것이 동무의 첫 영어생활이다. 그후 교육문화사업에 열중 풍산소작인 조직지도
1924년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과 동시에 중앙상무위원으로
각 도의 소작쟁의 급 노동쟁의를 지도하였는데 그 중에도 풍산소작쟁의 밑 암태소작쟁의와
대동인쇄공파업 경전승무원파업 등을 동무가 직접 지도하였고
1925년 전조선민중운동자 대회를 소집 준비함에 동무의 노력이 지대하였고
공당 급 공청의 창립을 위하야 김재봉 박헌영 등 동지로 더부러 적극 노력하였고
공청중앙 조직부 책임자로 있다가 12월 박헌영 동지의 피검 후 공청중앙 책임비서로서
또 공당 중앙위원으로서 있으면서 1926년 이척(李 )의 장일을 기하야
전조선 민족을 통일식혀 해방전쟁을 획책하였다. 이것이 곧 6월운동인 것이다.
동무는 피검 후에도 옥중생활을 통하야도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것이 일관적 정신이며
조선을 위하야 살고 조선을 위하야 죽는다는 것이 동무의 일편단심이었다.
동무는 죽엇스나 동무에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권오설(權五卨)은 안동권씨 제바닥인 경북 안동(安東)에서 스러져가는 잔반(殘班)댁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당을 열어 떠꺼머리 아이들이 바치는 강미(講米)로 끼니나 잇는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는데,
아우가 언니 못지않게 어기찬 주의자 권오직(權五稷, 1906~?)이다.
아버지가 대가집 사랑채 빌려 세운 남명학교와 물도리동에 있는 동화학교에서 중등과정을 배웠다.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1916년 끝 무렵 벌어진 송년회 자리에서 민족사상을 부추기다가 쫓겨났고,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배움비발을 댈 길 없어 그만두었다.
조선노동총동맹 풍산소작인회 대표 1919년 3·1운동에 들었다가 왜경에게 쫓겨 내려간 옛살라비에서 풍서면 원흥학술강습회와 일직면 일직서숙 선생 노릇을 하였다.
1920년 안동청년회에 들어갔고, 일직면에 금주모임을 얽고 회장이 되었다.
1923년 11월 풍산소작인회를 얽는데 들어가 집행위원이 되었고,
사상모임인 화성회(火星會)를 짜는데 들어갔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세워질 때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들어가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때쯤 ‘꼬르뷰로’ 곧 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에 들어가 노농총 야체이카를 맡았다. 그리고 남녘땅을 돌며 노농총에 들어온 두럭들에 힘을 불어넣으며
여러 노동 · 농민 동아리들을 노농총에 들어오도록 힘썼다.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소작쟁의에 손붙이면서
대동인쇄주식회사 파업과 경성전기회사 전차승무원 파업을 이끌었다.
화요회 상무집행위원, 혁명청년당 당원, 불꽃사(火花社) 동인, 무산자동맹 맹원,
한양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으로 뜨겁게 움직였다.
1925년 2월 화요회가 채잡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니,
김재봉·홍덕유·김단야·김찬·민태흥·박일병·윤덕병·장지필·구연흠·이석·진병기·최원택·임형관·백광흠·강달영·방응모·이준태 같은 72명과 함께였다.
1925년 4월 18일 경성부 훈정동 4번지 박헌영 집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권오설은 박헌영, 김단야, 박철환(朴鐵丸, 조봉암), 홍증식, 신철수, 김찬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모임 대표는 김찬. 12월 책임비서가 되었고,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4월 25일 대한제국 마지막 순종황제가 붕어하자
인산(因山)날인 6월 10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밑그림을 그리고 선전선동문을 만든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에
상해에 있던 김단야가 6·10만세운동을 채잡고자 돌아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갔다.
김단야는 ‘통곡하는 민중에게 격(激)함!’이라는 시위를 부추기는 글을 썼고, 권오설은 그것을 천도교인이며 노농총 맹원이었던 박래원(朴來遠)에게 주어 박아내게 하였다.
그리고 의암(義庵) 종손으로 천도교에서 펴내던 <개벽(開闢)> 책매는 이였던 손재기(孫在基) 집에 감춰두었다.
그때에 일제 입맛에 거슬리는 글이 실린 <개벽> 6월호가 덮잡히게 되었다. 종로서 왜경들이 천도교당 안에 있는 ‘개벽사’를 뒨장질하고 돌아간 다음에도 혼자 숨어 천도교 구린 데를 캐내려던 하늘 밑에 벌레가 있었다. 조선인 왜경 최준호(崔俊鎬)라는 자였는데, 손재기 집 안방에서 주고받는 말을 엿듣게 된다.
“요번 인산날에는 참말로 큰 난리가 날 거라던데 큰일났구먼.” 어떤 아낙 소리였고, 손재기 딸인 14살짜리 손정화(孫貞華)가 말하였다. “난리가 나고 말고지요. 저것 좀 보셔요. 저 벽장 속 버들고리와 궤짝에 무엇인가 잔뜩 들어 있는걸요.” 천도교당에 들어서던 박래원이 잡히면서 경성일보 인쇄공으로 격문을 박아내었던
민창식(閔昌植) 안국동 집에 있던 인쇄기도 덮잡혀 갔고, 권오설이 머무는 곳까지 뽕나버렸다.
겨우 길돈닢이나 마련하여 머물던 곳을 나서는데 형사대를 이끌고 온 미와(三輪) 경부가
삵의 웃음을 보였다. 그때에 두 팔을 척 내밀며 권오설이 하였다는 말이다.
“욕들 보외다. 나 하나 잡으려고 여러 사람이 애쓰는 모양인데, 잡아가시오.” 6월 10일 인산날이 되자 돈화문 앞에 엎드려 슬피우는 수수천 명 흰옷 입은 조선 백성들 머리 위로
권오설이 징거두었던 격문들이 꽃잎처럼 흩날렸고 사람들은 목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렀다.
긴한목마다 박혀 있는 주의자들이 채잡는 가운데 여러 전문학교와 고보생들 좇아가며
만백성들이 불러대는 만세소리에 경성시내 안이 온통 죽끓듯 하였으니, 3·1운동 때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6월 1일치에 실려 있는 임화(林和) 시이다.
‘청년의 6월 10일로 가자’
손을 잠그면 어른거리는 별 거림자에도 어린 마음은 조리었으나 죽은 王者를 爲해서가 아니라 산 同胞의 自由를 爲하여 싸홈의 뜨거운 씨를 뿌리든 수무해前 六月十日 抗日戰線의 긴 隊列로 默默히 걸어가든 靑年의 가슴속엔 祖國의 첫녀름 하날이 먼 바다처럼 푸르러 아아 죽엄도 오히려 황홀한 榮光이었든 永遠한 六月十日을 爲하여 南朝鮮政府의 龍床을 어르만즈며 外國商館의 늙은 머슴이 꿈꾸는 榮華를 爲해서가 아니라 또 다시 奴隸가 되려는 同胞의 위태로운 自由를 爲하여 젊은 동무여 또 한번 죽어도 오히려 깃거운 靑年의 六月十日로 가자 六月九日 1930년 서대문형무소 독방서 숨져
서울운동장으로 모히자
6월 1일!! 이날은 우리민족이 통일하야 왜적에 육박하든 날이다. 어떤계급 어떤당파를 물론하고 이날을 기념하야 모혀라!! 뭉처라!!
우리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반동분자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 음모를 분쇄하자!!
노동자여!! 농민이여!! 시민이여!! 오라!! 서울운동장으로!! 들으라!! 우리 자주독립의길을!! 6·10투쟁기념시민대회 <해방일보> 1946년 6월 9일치 ‘사고’이다.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내놓은 사탕발림이 ‘문화통치’라는 야바위짓이었다. 조선인민이 바라는 것을 어느만큼 들어주는 듯한 탈박을 썼지만
그 속내는 식민지 꼭뒤누름을 더욱 다지르는 것이었다. 이런 셈평에서 일어난 것이 6·10운동이었다.
긴한목마다 박혀 있는 주의자들이 채잡는 가운데 여러 전문학교와 고보생들 미좇아 가며
노동자 · 농민 · 도시빈민 같은 아랫도리사람들이 외쳐대는 독립만세 소리에
경성시내 안이 온통 물끓듯 하였으니, 3·1운동 때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상해에 있던 김단야와 만나 주의자들은 3·1운동보다 6·10운동에 높은 값을 매긴다. 둘 다 허방친 운동이었으나 그 속내가 팔팔결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선민족 대표라는 33인이 보여준 물렁물렁한 짓거리들에 꿈이 깨져서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끓어오르는 민족해방 마음을 얽이잡아 이끌어나갈 ‘전위당’이 없어
3·1운동이 허방쳤다고 보는 것이다.
광무황제 인산날 일어난 것이 3·1운동인데 이번에는 융희황제가 훙(薨)하였다.
일제의 끔찍한 억누름에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지만
그들에게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헌·당규에 목숨을 맡긴 ‘당원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을 채잡았던 종교두럭과 부르조아 및 소부르조아 인텔리 출신 민족주의자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때에 민족부르조아지들이 목을 매었던 것이
북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쳐든 민족자결론이었는데, 허방 짚은 것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 강도나라들이 세계를 새롭게 찢어발기기 위한 쑹쑹이모임이
‘파리강화회의’이고 제국주의 강도나라들이 그 가진 바 힘에 따라 작고 힘없는 나라들을
식민지로 나눠먹자는 다짐이 ‘민족자결론’이라는 것을 모르는 민족부르조아지였다.
하늘이 주신 이 좋은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부르짖은 사람은 상해로 달아나 있던 김단야와 김찬이었다.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 권오설이 김단야와 만난 것은 1926년 5월 1일,
압록강 건너 안동(安東)이었다.
“계급해방보다는 민족해방을 앞세워야 하오. 조선에 있는 우리 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하니 말이외다.
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 투쟁에서 전위로 나서는 것은 그러므로 현계단에 있어 옳은 노선이 됩니다.
계급해방보다는 민족해방이 더 인민들한테 환대받는다 이런 말씀이지요.
전술적인 과정에서도 우리 당은 민족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당에서 이번 인민봉기를 조직해서 그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이른바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호기가 될 것이오.”
김단야가 하는 말이었으니, 인산행렬이 지나가는 경성 울안과 온 조선 골골샅샅마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건네주는 것이 북경에서 박아왔다는 독립선언문과 다섯 가지 격문이었다.
김단야한테 글찍은 종이와 함께 운동밑천 1000엔을 받아 경성으로 돌아온 권오설은
고공청 맹원인 박래원(朴來遠)에게 인쇄를 맡겼다.
천도교 신파 목대잡이였던 춘암(春庵) 박인호(朴寅浩, 1855~1940) 조카였던 박래원이 한 말이다.
“삐라 인쇄 관계로 특별히 권동지와 밀접하였든 만큼 감회가 깊읍니다. 그때 인쇄방법은 내가 책임을 지고 양재식 민창식 등 출판노조 동지들과 같이 의논해서 일을 했는데
경계가 심해서 인쇄소에 마낄 수 없고 해서
본정(本町)에 있는 앵정(櫻町)출판기계상회에서 손기계 대소형 두 대를 사고
활자는 신문사 같은 각 출판관계 동지들한테 부탁해서 수집해 갖이고 했읍니다.”
박래원 동지와 연락 삐라 인쇄
<조선인민보> 1946년 6월 9~10일치에 실린 좌담회에 나온다. ‘찬란한 6·10만세 당시의 투쟁보’ ‘기억도 새로운 투사면면’ 좌담에 나온 사람은
홍덕유, 박래원, 양재식(楊在植), 이천진(李天眞), 조두원(趙斗元).
신문사에서는 편집주간 고재두(高在斗), 주필 임화(林和)와 기자 4명이 나왔다. 양재식이 말한다.
“그때 권오설 동지는 공청 책임자로 신의주사건에 관련이 있어서 해외로 망명하였다고 하고 숨어 있었는데 1926년 4월 5일 이왕(李王)의 서거를 계기로 여기 앉은 박래원 동지 외 몇 분과 연락하야 ‘이 시기에 절대로 이러서야 되것다.
일반민중에 반제혁명 의식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이니 이때 궐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하며 권동지가 주장하야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든 것입니다.
저는 그때 공청에 있었는데 민창식 동지 외 3인이 권과 연락하야 결의하고 비밀리에 격문 삐라 같은 것을 인쇄하기로 되었었읍니다.
실제 일을 한 것은 박래원 동지와 나와 민창식 기타 6,7인이 되였으며
얼른 안국정(安國町) 35번지에 옮겨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주야로 박어야 약 2000매밖에 박지 못하는 손틀로 30만 장을 박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7만 매를 박는 과정에 소리가 나서 우리들은 광목을 사다 다다미질을 하기도 하고
고담(古談)을 소리 높이 읽기도 하며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느라고 애를 썼지만
급기야 그 안집에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박는 것이라고 말하고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쇄물 운반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때 마침 송호(宋虎)의 재등(齋藤)총독 암살미수사건이 있어서 경찰의 신경이 날카로운 때라
갖다 둘 데가 마땅치 않었습니다. 생각다 못해서 차라리 그놈들이 제일 주목하는 천도교 지하실이
등하불명(燈下不明) 격으로 안전하다고 공론이 되어서 그곳으로 갔다 두기로 하고
사과궤짝에 넣고 못질을 해서 단단히 싸가지고 거리에 나가서 지게꾼을 한사람씩 사서
7만 매를 다 운반하여 손재기(孫在基)씨의 조력을 얻어
아까 말한 상해에서 온 삐라와 함께 10여만 장을 지하실에 넣어 두었든 것입니다.
그후에 또다시 민창식씨의 사랑방에서 수만 매를 더 박었는데
한 달 이상을 불면불휴(不眠不休)하였기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일단 중지하였읍니다.
다음에는 증거물을 없새는 방법이였는데
인쇄기 두 대는 그 마루 밑을 파고 뭏어놓고 활자는 녹여서 없새버렸는데
손씨 집에서 잘못하여 그만 그 삐라가 발각이 나서
먼저 박래원씨가 피검되고 나도 6월 5일 11시에 역시 잡혔든 것입니다.”
본사 “그때 그 삐라 내용은 어떠했든가요?”
양 “‘조선독립만세’ ‘조선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토지는 농민에게’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혁명가를 석방하라’ 등등이였지요.”
격문에는 공산주의사상이 없었고 조선공산당이라는 말도 없었다.
김단야가 준 것에만 이데올로기적인 냄새를 조금 풍길 뿐이었다.
조선에서 박아낸 격문에는 다만 조선독립과 반일구호로만 채워져 있었다.
“식민지 민족은 누구나 무산자다.”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요, 정치해방이 곧 경제해방이다.” “우리 인민의 통곡과 복상(服喪)은 이척(李?)의 죽음이 아니고 경술년 이래 사무친 그 슬픔이다.” ‘불꽃사’ ‘대한독립당’ 따위 꾸며낸 두럭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리방으로 긁은’ 어느 격문에는 최린(崔麟) · 최남선(崔南善) · 김성수(金性洙) 같은 친일파들 이름이
박혀 있었다. 친일파들을 억판(곤궁)에 빠뜨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상복 입고 피신하려는 찰라 붙잡혀
친일파들 이름으로 된 격문이다.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여! 죽음을 걸고 싸우자.”
경성 서대문경찰서 경부 길야등장(吉野藤藏) 수기이다.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의 검거와 전모’.
5. 거두(巨頭) 권오설의 체포 박래원을 체포하는 동시에 나는 6일 저물녘으로부터 박의 신문을 시작했다. 손재기 등의 공술로서 인쇄한 것을 부인하고 굳은 약속한 민창식의 이름을 내어 걸고,
“두 사람이 인쇄한 것이지 다른 놈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원고는?”
“그것은 상해의 김찬이 집필한 것이다. 김모(평북 출신)가 비용 백원과 같이 가지고 온 때문에
하룻밤 자고, 이미 퇴선(退鮮)하였다”고 하였다.
“이놈, 거짓말 마라. 민창식은 인쇄는 3,4인이 하였고, 비용은 6백원 정도라고 한다. 제1 김찬의 문장이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또 김모가 왔다는 것은 민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김모라는 자는 아무데도 숙박한 행적이 없지 않은가?”
이때 박래원은 머리를 수그리고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나는 철야하면서 추구한즉 박의 번민은 점점 심하여지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7일 오전 10시에 겨우 입을 열었다.
“동지와 굳은 약속을 깨뜨리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 아니다. 죽기를 결심하였다. 실은 원고의 집필자는 권오설이요, 6백원도 권에게서 받았다.”
“무엇! 권오설! 그러면 권은 어디 있는가?” “장사정(長沙町: 목욕탕) 곁의 잡화상 집에 있다.” 이때 미소하였다. 오늘까지 이와 같은 낯을 보인 적이 없었다.
즉시 유(劉) 형사부장을 자동차로 보내었다.
그 중도 국장취체의 예행연습으로 통행금지를 겨우 허(許)하여 가지고 간일발(間一髮)의 곳에서,
만일에 일초라도 지체되었더라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잡화점 앞에 내리는 형사 일대,
바로 이때 잡화점으로 상복(喪服)에 백립(白笠)으로 낯을 가리고 나오는 것이다.
유형사부장은 소리쳤다. 돌아서는 남자.
“여, 유상, 오래간만이요, 어디로…” 어디까지나 태연한 태도를 취하는 권은 손을 내밀어 유부장에게 악수하였다. 입장이 딱한 유형사부장은 할 수 없이, “사실은 권상에게 일이 있어서.”
이 말에 대해여 추호도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에서 방안을 살펴본즉 고려공산당 간부 박민영(朴珉英)도 있었으므로 함께 동행하였다.
증거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권오설 손에 쥐고 있는 책보자기를 헤쳐본즉 안동현 영운송점(安東縣 永運送店)의 발송의 하물인환증이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이요?” “가재도구요.” 권오설은 신변이 위험함을 느끼고 상복을 하고 피신하려고 떠나는 길이었다. 개가를 부르는 형사의 일대는 권, 박을 데리고 귀서(歸署)하였다.
권오설이 징역 5년을 받은 것은 1928년 2월이었다. 왜경들 마음에 찰 때까지 빨래처럼 꼭꼭 비틀어 쥐어짜는 이른바 ‘예심’ 2년 동안
끔찍한 밥받이와 족대기질을 겪은 권오설이 숨진 것은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였다.
족대기질 뒷덧으로 얻은 폐렴 탓이었으니, 1930년 4월 17일이었다. 향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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