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김구 - 백범일지

Gijuzzang Dream 2008. 12. 9. 18:50

 

 

 

 

 

 

 김구  ‘백범일지’

 

 

타협없는 실천 · 끝없는 성찰로 암흑의 세월 밝힌 민족의 國父

여태 풀지 못한 한이 있었으니, 상놈이라 업신여김을 받아온 것이다.

그래서 글공부를 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졸라 서당에 다녔고 과거준비를 했다.

배우는 것이 즐거워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었다.

이제 한을 풀 수 있을 성싶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목격한 과거장은 비리의 온상이었다. 꿈을 접기로 했다.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해 강가  · 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했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 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 · 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버지 역시 큰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아들이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 같았다 했겠는가.

아들의 결심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관상과 풍수공부를 해보라 권했다.

그게 탈이었다. 공부해보니,

“얼굴과 온몸에 천격(賤格) · 빈격(貧格) · 흉격(凶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망의 늪에 빠졌다.

그러다 ‘상서’에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비로소 빛이 보였다. 마음을 제대로 닦아 사람구실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이야기는 김구가 17세 때 겪은 일이다.

김구의 일생을 정리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이 일화의 얼개를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어찌하지 못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새 길을 개척해나간다. 그렇지만 그 길이 평탄할 리 없다.

고난 속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다시 길을 열어나간다.

김구는 타협 없는 실천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끝없는 공부와 성찰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김구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돌올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 있으렷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는 그 어느 대하소설보다 훨씬 흡인력 강하고 흥미롭다.

구한말 상놈의 신분으로 태어난 이가 민족해방투쟁의 와중에 탄생한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맡았으니,

그 일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했겠는가.

개인을 짓누르는 역사의 압박을 힘겹게 이겨나가는 과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흔들리고 괴로워하나 원칙과 양심을 지켜나갔다.

 

독후감을 서둘러 말하자면 만약 그 엄혹한 시절, 김구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초라했겠는가 싶다.

날씨가 추워져야 소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고, 질풍에 굳센 풀을 볼 수 있으며,

하늘에 검은 장막이 쳐져야 별이 빛나는 법이다. 김구야말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당시 김구의 심리상태는 매우 절박했다.

과거를 포기했고, 관상공부하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동학을 만나니 꿈을 이루려나 했다.

18세에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고,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패전한 장수 신세로 찾은 곳은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이 있는 신천군 청계동.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그때 중암 유중교의 제자이며 의암 유인석의 동문인 후조 고능선이 말했다.

“자네가 매일 안 진사 사랑에 다니며 놀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절실히 유익한 정신수양에는

별 도움이 없을 듯하니, 매일 내 사랑에 와서 나와 같이 세상사도 논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떻겠나”라고.

 

후조가 택한 공부법은 구전심수.

새삼스럽게 책을 펴놓고 일깨우려 하지 않고 김구가 부족한 부분을 말과 마음으로 일깨워주었으니,

고금의 위인들을 비평하거나 ‘화서아언’이나 ‘주자백선’에 나오는 중요 구절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평생 화두로 삼을 구절을 일러주었으니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단성을 재촉한 말씀이렷다. 나라 망신이라 생각했으리라.

 

국모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이해할 만한 진상조사와 처벌이 뒤따르지 않았다.

치하포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일본 사람이건만 조선인처럼 변장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순간, 국모 시해범인 미우라이거나 공범일거라고 생각했다.

기지와 용맹을 뽐내 살해했고, 그 죄로 인천감옥에 투옥되었다.

심문과정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로움을 설파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사형이 확정된 후 감리서 직원들이 신서적을 읽어보라며 권한 일이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탐독해나갔다. 그러면서 눈이 트였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양 오랑캐들이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규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탈옥한 다음, 승려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스승과 일대 논쟁을 벌였다.

서양 것을 무조건 오랑캐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다.

어느 나라든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원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탐관오리들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금수의 행실을 하니

오히려 오랑캐가 아니겠냐고 비판했다.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 ·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추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기염을 토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해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이게 어디 배신이겠는가.

스승의 삶과 사상을 존중하나, 더 나은 세상을 이루려면 홑눈이 아니라 겹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일 뿐. 청출어람이렷다.

이른바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의 일이다. 모진 고문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으니 그 고초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

 

이 시절을 기록한 대목은 ‘백범일지’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정신을 잃도록 가혹하게 고문한 다음 “학생 중에는 누가 너를 가장 사랑하더냐”라고 물었다.

창졸지간에 그만 최중호라 말하고서는 혀를 끊고 싶었다고 기록해놓았다.

고문 가운데는 굶기기도 있었다. 신문할 때는 밥을 보통의 반만 주고, 사식은 넣지 못하도록 했다.

매를 맞고 나올 때, 사식 먹는 장면을 보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 때문에 미칠 듯했다고 회상한다.

얼마나 절실했던지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해다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다 났단다. 비겁함과 흠을 다 털어놓을 적에 빼어난 자서전이 되는 법이다.

 김구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김구는 변화한다. 자신을 왜놈들이 뭉우리돌이라 한 것을 영광이라 여긴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뭉우리돌 가운데 세상에 나가 왜놈에게 순종하며 연명하는 무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뭉우리돌을 일러 김구는, 석회질이 들어 있는 돌이라 말했다.

석회가 물에 들어가면 풀리듯, 세상이라는 바다에 들어가면 굳은 의자가 석회처럼 녹아내린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도 석회질 있는 뭉우리돌이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 (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순간을 목격한다.
개인적인 신분 상승을 열망했던 김창수가,

반일적 유생들과 교유하며 김구(金龜)가 되고,

이제 나라 잃은 민족의 영원한 스승인 백범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his story’가 ‘HISTORY’가 되는, 실로 놀랍고 경이로운 존재의 변화렷다.

백범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는 당당해질 수 있었다.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했던 사건이나, 윤봉길의 홍구공원 거사 뒤에는 백범이 있었다.

비록 피신과 유랑의 나날을 보냈으나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이도 백범이었다.

개인적 희생도 잇따랐다. 독립운동의 대가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큰 아들을 중국땅에 묻어야 했다.

그런데도 막상 일본이 항복하자 기뻐하기보다는 분통해 했다.

한반도로 침투해 일본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고, 이를 위해 정예부대의 훈련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백범의 계획대로 광복군이 참전을 해 국권을 회복했다면

남북분단은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백범이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것일까. ‘나의 소원’에서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구한말 상놈으로 태어난 이가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기까지,

그것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좌절과 실패를 예비한 길이었다.

신분의 질곡, 가난, 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일본의 압제.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켰고,

마침내 근현대사를 비추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평생 꿈꾼 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김구의 소원.

아름다운 나라.

문화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남에게 행복을 주는 나라.

해방 60년을 맞는 지금 김구가 사랑한 이 나라는 과연 그런 나라인가.

- 경향, 2008년 08월 08일 [자서전 읽기]
-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봉창의사 사진을 조작?…“수류탄 든 손과 태극기 그린 것”  

 

 

 

1932년 1월8일 일본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1900~1932)가

의거 직전 찍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문제의 사진(왼쪽)은 1931년 12월31일 밤 중국 상하이에서 이 의사가

일왕을 폭살할 결심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찍은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와 백과사전 등에 실려 있을 정도로

이 의사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에서 이 의사는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최근 출간된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너머북스)에서

이 사진이 "한인애국단 선서식 때 찍은 사진도 아니고 수류탄을 든 두 손과 배경의 태극기는 그린 것"

이라고 밝혔다.

그는 "목에 건 선서문도 이봉창의 선서문으로 알려진 것의 필체와 다른, 누군가가 새로 쓴 것"이라면서

"얼굴의 목선도 없어 얼굴을 다른 사진에서 오려붙인 합성사진"이라고 말했다.

이 사진은 일제시대에 발간된 어떤 책자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며

1946년 3월 출간된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기 <도왜실기>의 한글판에 처음 등장한다고 밝혔다.

배 연구원은 이와 함께 한인애국단 입단식 때 찍은 것으로 알려진 또 다른 사진(오른쪽)을 제시했다.

앞의 사진과 배경과 구도가 같지만 이 의사의 표정은 어둡다.

이 의사가 거사 동기를 밝히기 위해 체포 당시 지니고 있었던 이 사진은

1932년 상하이에서 출간된 중국어판 <도왜실기> 에는 실렸지만 한글판에서는 빠졌다.

편집 과정에서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배 연구원은

"수류탄을 두 손에 들고 삶을 초월한 듯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봉창의 사진이 '창안'된 이미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봉창의 삶도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신화화된 '인간 이봉창'이 "황국신민을 꿈꾼 식민지 청년이었고

식민지 근대의 향락문화를 소비한 '모던 보이'였지만

김구를 만나 일왕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되면서 평범한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 경향, 200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