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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 -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粧刀匠) 박용기

Gijuzzang Dream 2008. 12. 9. 00:57

 

 

 

 

 

 

 중요무형문화재 제 60호 장도장(粧刀匠) 박용기


 

 

운명의 길


길고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공부엔 재미를 못 붙이고 공작에 소질이 남달랐던 열네 살의 소년,

사촌 누이를 따라 우연히 가본 장도 공방에서 소년의 가슴은

막 알을 깨고 나온 어린 새의 심장처럼 파닥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

부모님은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준비를 하셨지만, 소년은 부모님 몰래 도시락을 싸들고 공방을 드나들었다.

소년의 발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거센 폭풍이 일 듯 시작된 영혼의 깨어남.

공방 가는 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상급학교도, 부잣집 막내아들이라는 신분도 그 행복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스승이 담배 한 대 피우시는 짧은 시간이 유일하게 연장을 만져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장에 손끝이 닿을 때 가슴으로 타고 오르던 떨림을 소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은 장도 앞에서 떨린다.

 

 

장도 이야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칼이 있다.

그 가운데 정절과 의리, 충효의 정신이 담겨있는 칼은 한국의 장도 밖에 없다.

장도는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이다.

나는 장도를 만들며 그 옛날의 정신을 불러 모은다.

그릇된 마음을 도려내고 잘라내 스스로를 다스렸던 선조들의 정신을 새기며 나의 칼은 진정한 칼이 된다.

만드는 동안 조금이라도 혼이 흔들리면, 그 순간을 칼은 안다.

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지니고 다니는 칼이기에 그만큼 예민하다.

 

장도는 너무 강해도 부러지고, 너무 물러도 부러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칼날의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이다.

강하기도 하면서 부드러운 칼날을 위해 달궈진 쇠를 식히고 다시 달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좋은 장도를 만들기 위해선 달궈진 쇠의 온도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온도계는 필요 없다.

붉게 달아오른 쇠의 빛깔이 노을 지는 해질녘 하늘을 닮아있으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드린다.

완벽한 칼을 위하여.

 

 

은장도를 위한 노래

나의 사랑은 님이기도 하고, 부모이기도 하고, 임금이기도 하고, 나라이기도 하지요.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은 큰 소리 나지는 않지만,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처절하게 푸른 날을 세우며 작은 소리로 노래합니다.

얼마나 든든하였는지요.

이 작은 칼이 나를 지켜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온전하게 가꾸어 주니.

삶이란 알 수 없어서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라지요.

이별과 슬픔과 유혹과 시련이 행복과 함께 모여 삶이 된다고 하더군요.

님을 위해, 부모를 위해, 그리고 임금과 나라를 위해,

 세상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찔러야 했던 그들의 서슬 퍼런 정신을

나는 압니다. 꼿꼿한 영혼이었지만 서럽기도 했을 겁니다. 질곡의 삶이 한탄스럽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았을 테지요.

지켜낸 영혼이 자랑스럽고, 잃어버리지 않은 마음이 그들의 삶을 완성시켰을 겁니다.

장도는 단순히 칼이 아닙니다.

서글픈 숙명과 질곡 속에서도 꿋꿋하게 영혼을 지켜준 마음의 칼입니다.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