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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온실보다 170년이나 앞선 조선초기 온실

Gijuzzang Dream 2008. 12. 9. 03:12

 

 

 

 

 

 유럽 온실보다 170년이나 앞선 조선초기 온실  

 

 

 

 

 

 

 

세계 최초의 난방 온실이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조선 땅에 있었다.

이는 유럽 최초의 난방온실인 독일 하이델베르크보다 무려 170년이나 앞선다.

황토 흙벽과 온돌을 이용한 단열 지중 난방과 실내 온습도 조절,

창호지에 유지를 발라 자연 채광 및 보온, 통풍 효과를 높인 것은 실로 과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실린 온실에 관한 기록

 

1450년에 편찬한산가요록 』은 2001년 발견되었다.

이 책은 15세기 중반 의관(醫官)으로 봉직한 전순의(全循義)가 쓴 종합농서로서

당시의 농업기술과 함께 술 빚는 법, 음식 조리법, 식품 저장법 등 생활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동절양채(冬節養菜)」편, 즉 ‘겨울에 채소 키우기’ 항목에

당시 온실 건축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진흙과 볏짚으로 쌓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고 그 위에 30㎝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로 경사진 남쪽 면은 창살에 기름먹인 한지(韓紙)를 붙여 막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한지온실의 성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산가요록(山家要錄)』의 온실에 관한 기록「동절양채(冬節養菜)」의 내용을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실(室)을 짓되 그 크고 작기는 임의대로 할 것이며

삼면은 토담으로 막고 온실 내의 벽은 종이(한지)를 발라 들기름칠을 한다.

남쪽면은 살창(箭窓)을 달아 역시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온

실바닥은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그 구들 위에 한자반 높이로 상토(床土)를 쌓고 봄채소를 심어 가꿀 수 있도록 한다.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며

날씨가 매우 추울 때는 반드시 날개(飛介, 거적)를 두껍게 창에 덮어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온실 내에는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온화한 기운이 감돌게 하여야 흙이 희게 마르지 않는다.

또 굴뚝을 밖으로 내고 솥을 외벽 안에 걸어서

건조한 저녁에는 불을 때어 솥의 수증기가 온실 안을 훈훈하게 해야 한다.


비록 문장은 짧지만 온실 설계나 그 이용에 대해 눈에 보이듯이 요긴하게 망라하여 풀이하고 있다.

 


온실은 전순의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의 세종 20년(1428) 5월 27일조를 보면

세종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귤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가를 시험할 때

“수령이 가을에 집(온실)을 짓고 담을 쌓아 온돌을 만들어 보호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무렵인 15세기 중기에 강희안의 저술인『양화소록(養花小錄)』에도

토우(土宇, 움집)라 하여 온실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다만 전순의는 당시의 온실을 구체적으로 설치, 운용하는 내용을 최초로 밝힌 데 공이 크다.


15세기 조선시대의 온실을 복원한 모습

온실 내에서 발아된 무와 상추 /    온실 내에서 개화된 철쭉꽃   /   복원 온실의 내부               

 

 

조선초기 온실의 우수성


그럼, 이제 이 조선초기 온실이 어째서 우수한가를 밝혀보자.


첫째로 온실바닥에 구들을 놓고 1.5척(45㎝) 높이의 거름진 상토(床土)를 덮은 후

구들에 불을 지핌으로서 작물(채소, 화훼)의 발아와 뿌리의 생장을 도울 수 있도록

지온을 높였다는 점이다. 흔히 작물의 발아와 생장은 눈에 보이는 지상부만 생각하기 쉬우나

뿌리의 발육이 없는 작물의 생장은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보다 약 170년 늦게 1619년 유럽에서 최초로 설치한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온실은

난로로 지상부만 가온하기 때문에 작물을 재배할 경우

필연적으로 지상에 화분을 이용하거나 지상부에 또 다른 재배시설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온실 내의 보온과 보습 효과를 들 수 있다.

삼면을 흙담으로 에워싸고 흙담벽의 온실 내부는 기름종이를 발랐을 뿐 아니라

햇빛을 받는 살창에도 기름종이를 발라 서양의 유리 온실보다 보온성이 우수하다.

유리온실보다는 흙담온실이 열의 손실을 막는데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온실은 주방격인 부엌 아궁이에 솥을 걸어 불을 지펴

온실을 덮힐 때 솥안의 끓는 물에서 발생하는 수증기를

나무로 된 홈통을 통해 흙담으로 관통시켜 온실 내에 주입시킴으로써

온실 내의 지상온도를 높일 뿐 아니라 수증기의 수분으로 온실공기에 보습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서양의 온실은 공중 습기의 보전을 위해 지상에 자주 물을 뿌려 보전하는데

조선초기의 온실은 보온을 겸한 보습으로 수증기를 이용함으로써

온실 운영의 성력화(省力化)에 보다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채광이다. 식물이 발육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흡수하는 양분뿐 아니라

태양에서 오는 광선이 있어야 탄소동화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태양에너지가 모두 동화작용에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광선의 극히 적은 일부만이 동화작용에 이용될 뿐 대부분 지온이나 기온을 높이는 데 이용되고 있다.
조선초기의 온실은 남쪽으로 향한 살창을 통해 필요한 최소한의 광선을 이용할 뿐 아니라

온상에서 재배되는 월동작물은 대부분 장일성(長日性)작물로 자라면서

점점 햇빛쪼임이 길어지는 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채광 문제가 조선초기 온실의 작물재배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수한 조선초기의 온실이

어째서 16세기 이후 수많은 우리 농서에 전혀 기록돼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해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주민생활에 온돌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연료 확보가 어려워졌다는 점,

또 하나는 식품저장기술이 발전하면서

굳이 온실에서 기른 신선한 채소가 아니라도 월동 중의 채소 조달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김영진, 한국농업사학회 명예회장, 농학박사

- 2008-12-05,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태양창의 구실을 하는 기름종이 한지는 요즘 유리와 비닐에 해당하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날이 추울 때에는 솥을 건 아궁이에 불을 때서 수증기를 안으로 보내 습도와 온도 조절

 

‘세계최초 과학영농 온실 복원사업 위원회’(공동대표 서영훈)에서는

1450년대에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의 '동절양채(冬節養菜)' 부분을 근거로

한달간 공사를 벌여 조선초기 온실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서울종합촬영소 JSA 세트장

바로 옆에 2002년 2월 복원 후 2003년 3월 재복원 작업을 거쳐

조선시대 겨울철 야채를 재배했던 온실이 복원(溫室)됐다.

 

복원된 온실은 실내 넓이가 10여 평 정도이며, 가로 7m, 세로 6m에 정남향의 가장 낮은 쪽이 50㎝,

정북향의 가장 높은 쪽이 3m 크기이며 햇볕이 최대한 들어올 수 있도록 경사형 지붕으로, 

지붕은 한지(韓紙)를 바른 창호로 덮여져 햇볕 투과율이 45%를 넘고,

한지에는 비를 맞아도 끄떡없게 기름을 발랐다.

황토흙으로 만들어진 온실 벽은 40cm 두께로,

내벽에는 역시 기름을 바른 한지로 도배해 햇볕이 실내에 골고루 반사되게 만들었다.

또 온실 바닥은 온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45cm 두께의 흙을 쌓았다.

가마를 통해 온돌을 덥히고, 온실 외벽에 설치한 2개의 솥에 물을 계속 부어 솥과 연결된 둥근 통을 통해 수증기가 안으로 들어가 실내온도가 15도 이상 유지되도록 했다.

 

온실 복원에는 황토 60여t이 사용됐고,

창호 제작 무형문화재 18호인 조찬형(64)씨 등 연인원 100여 명이 동원됐다.

김영진(金榮鎭·72) 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산가요록에 나오는 온실은 이제까지 세계 최초로 알려졌던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적어도 17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라며

“이번 복원작업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겨울철 꽃 생산에 대한 의문점 등이 해소됐다”고 말했다.


'(사)우리문화가꾸기회' 이훈석회장은 '세계 최초로 알려졌던 1619년 독일의 초보적인 온실보다

우리가 170년이나 앞선 것이며 시설면에서도 월등하다'며 이번 온실 복원에 의미를 부여했다.

 

  

 

 

 세계 최초의 온실은 바로 조선

  

冬月開花出於人爲子(동월개화출어인위자).

“겨울 달에 핀 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다.”

 

성종실록 제13권에 기록된 왕의 전교(傳敎)의 한 부분이다.

때는 1471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궁궐에 쓰이는 꽃을 키우는 기관인 장원서(掌苑署)에서

철쭉과의 일종인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임금께 올리자,

왕은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바치지 말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겨울에 피운 봄꽃을 좋아하고 말고는 성종 임금의 취향 문제이나,

그 옛날에 어떻게 겨울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조선시대에도 온실이 있었을까?

세계 최초의 온실로 알려져 있는 독일의 온실이 1619년에 지어졌다던데….

 

그런데 2001년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란 책이 그 해답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15세기 중반 의관(醫官)으로 봉직한 전순의(全循義)가 쓴 생활과학서로서

당시의 농업기술과 술 빚는 법, 음식 조리법, 식품 저장법 등 생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동절양채(冬節養菜)」편, 즉 ‘겨울에 채소 키우기’ 항목에

당시 온실 건축에 관한 세 줄의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진흙과 볏짚으로 쌓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고 그 위에 30센티미터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로 경사진 남쪽 면은 창살에 기름먹인 한지(韓紙)를 붙여 막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한지온실의 성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온실은 난방, 가습, 채광이라는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유럽으로부터 전해진 현대 온실은 난로로 데운 공기를 바람으로 불어넣어

온실 안의 공기 온도를 높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 방식은 식물에 많은 스트레스를 주면서도 차가운 땅까지는 데우지 못하는 단점을 갖는다.

그래서 최근에는 땅에 난방 파이프를 설치하여 뿌리가 미치는 흙의 온도를 높이는

‘지중가온방식(地中加溫方式)’이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온실에는 이미 온돌이 설치되어 흙의 온도를 25℃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온돌은 아침과 저녁으로 두 시간씩 때었는데 이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였는데

수증기가 온실 안으로 흐르게 하였다. 이로써 실내 온도와 함께 습도를 높일 수가 있었다.

 

조선이 유럽보다 최소한 170년 이상 앞서서 우수한 온실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역할이 컸다. 판유리가 없던 시절인 조선의 기술자들은

책 종이와 창호지로 쓰이는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서 채광창으로 이용하였다.

 

유리나 비닐 온실에는 실내외의 온도차에 따라 새벽에 이슬이 맺힌다.

찬이슬은 오전의 햇볕을 차단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고 식물의 광합성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작물에 그대로 떨어져서 큰 해를 미치게 된다. 하지만 한지 온실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는다.

들기름은 종이 섬유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 한지가 방수성을 갖게 한다.

빗방울과 같이 큰 액체 입자들은 기름 때문에 종이 섬유 사이의 공간을 통해 온실 안으로 들어올 수

없지만 들기름이 종이 섬유 사이의 공간을 완전히 메우는 것이 아니어서

작은 수증기 입자들은 한지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기름먹인 한지는 ‘고어텍스’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온실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빛의 투과성이 좋아야 하는데, 한지가 빛을 투과시킬 수 있을까?

한지는 불투명하지만 기름 먹은 한지는 팽팽하게 얇아지면서 반투명해진다.

한지를 구성하는 종이섬유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의 빛 굴절률은 다르다.

굴절률이 다른 두 물질이 함께 섞여 있으면 빛은 산란되어 반사되게 된다.

기름의 굴절률은 종이섬유와 비슷하여 산란되는 빛의 양이 적어지므로 빛의 투과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지 온실에서는 파종 후 3~4주면 채소를 수확할 수 있었으며,

한겨울에도 여름 꽃을 궁궐에 공급할 수 있었다. 한지로 채광창을 만들고 온돌을 이용하여

기온과 습도를 조절했던 조선시대 15세기 온실은 현대 온실보다도 더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기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 글: 이정모, 과학칼럼니스트

- 2005.03.02, 한겨레,  Kisti의 과학향기에서

  

 

 

 

 

 

 

 

 

 

 세계 최초의 ‘조선온실’

 

- 15세기에 과학적 영농온실을 사용한 우리 선조

 

 

 

지금까지 최초의 온실은 1619년 더운 공기를 실내로 유입해 온풍을 하는 난방법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조선 초 의관출신인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의 '동절양채(冬節養菜)'를 통해

우리나라가 그보다 179년이나 앞선 1450년경에 만든 것으로 밝혀져 학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폐지더미에서 발견된 한문필사본 <산가요록>에는

다양한 농법과 함께 연화주(蓮花酒) · 이화주(梨花酒) 등 69가지의 술 빚는 법과

음식 조리법, 식품 저장법 등 275가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需雲雜方)>보다

80여 년 정도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온실’ 복원에 참여한 한국기술연구원 조동우박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글 : 오혜은 기자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겨울철에도 과일과 채소를 먹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사)우리문화만들기를 통해 발견된 이같은 사실은

조선초, 의관출신이었던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5세기에 가온가습방식(특히 온돌난방)의 과학적 영농온실을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측우기, 훈민정음, 거북선 등과 더불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라고 ‘조선온실’ 복원에 참여한 한국건설연구원의 조동우 박사는 말한다.

그는 조선의 산가요록에 적힌 그대로 온실을 짓고 책에 쓰인 방법대로 난방을 하고 실험을 한 결과,

550년 전에도 한겨울에 채소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어

학계 상식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역사 바로알기 위해 조선온실 복원

시대를 앞서갔던 첨단 영농기술

 

(사)우리문화가꾸기회는 산가요록을 발견하고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 자료를 토대로,

경기도 양평에 농림부, 문화관광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2002년 ‘조선온실’을 복원했다.

 

온실의 전체적인 규모는 약 60㎡로 전면이 10m, 측면이 6m, 높이 0.6-2.0m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축방법은 자료대로 삼변에 황토담을 약 30㎝두께로 쌓고 북쪽면이 높고 남쪽면이 낮았으며,

남쪽엔 한지에 기름을 바른 창들을 경사지게 달아 햇볕을 투과할 수 있도록 했다.

바닥에는 구들을 설치한 후 약 40㎝ 두께가 되도록 흙을 쌓고

그 위에 목재를 대고 45㎝의 흙(배양토)을 깔아 채소와 꽃을 재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북측면의 온실 벽과 맞붙여 주택의 부엌구조와 유사하게 불을 때

구들과 밑바닥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부뚜막을 설치했고, 온실이 있는 고래 쪽으로

가열된 열기가 통과해 남쪽의 양측에 있는 굴뚝을 통해 연기가 배출될 수 있도록 했다.

부뚜막 위에 솥을 걸고 불을 때어 물이 끓으면

온실 안과 연결된 연결구를 통하여 잠열을 갖고 있는 수증기가 온실 내에 유입되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다.

   

 

 

<산가요록>에 따르면 식물의 생장을 위해 크게 3가지 방법으로

온실 내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있었다고 한다.

첫째, 태양의 방향을 고려해 남향으로 살창을 두고 햇볕이 투과할 수 있는 재료로써 한지를 이용했고,

투명성과 방수효과를 높이기 위해 한지에 기름을 입혀

온실효과와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겨울철에 땅의 온도가 내려가기 때문에 흙을 파고 그곳에 구들을 두고

흙을 약 3자 이상 두껍게 덮었다.

부뚜막에서 장작을 때서 토양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온돌방식의 지중가온(地中加溫) 을 했다.

셋째,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어 불을 때서 물이 끓으면 온실 안으로 연결된 관을 통해

수증기가 온실 내로 유입되면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공중가온(空中加溫)을 한 것이다.

   

 

 

 

 

이렇듯 온실 내 온도를 높이기 위해 온돌을 이용한 지중가온(地中加溫) 시설과

가마솥에 물을 끓여 발생한 수증기를 온실 내부에 전달하는 공중가온(空中加溫)의

2가지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박사는 “이같은 방법은 현대화된 온실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과학적으로 설계되었고

습도까지 조절되는 등 시대를 앞서갔던 첨단영농기술들“이라고 설명했다.

 

온돌을 과감히 농사에 도입

흙과 한지, 생활 속 재료를 온실적합 소재로 활용

 

조박사와 연구진들은 <산가요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기능과 환경을 갖출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2002년 3월21일 -30일까지 데이터로거를 이용한 열환경 특성측정분석에 들어갔다.

측정결과 실외평균 온도가 3.5℃일 때, 온실 내 평균온도는 10.9±4.6℃를 유지하고

실외기온이 13℃일 때 온실 내는 한낮의 최고온도가 24.6℃까지 상승했다.

측정기간 중 실외온도가 가장 낮은 -5.2℃일 때에도 온실 내의 최저온도는 4.6℃ 이상을 유지했다.

 

한지 온실 내에서 측정된 실내온도, 실내복사온도, 한지의 표면온도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는

온실 내의 평균온도가 10.9±4.6℃를 유지하고 있을 때

실내 평균 복사온도는 약 1.8k 정도 높은 12.7±6.8℃로 나타났다.

실내복사온도는 주간에는 일사의 영향을 받아 실내온도보다 높게 유지하고 있으며,

야간에는 실내온도와 동일한 변화를 나타냈다.

한지표면온도는 평균 9.9℃로 나타났고, 주간에는 실내복사온도와 동일한 온도분포를 유지하며

야간에는 온도가 매우 떨어졌지만 0℃ 이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바닥면과 식재면의 표면온도는 거의 유사한 온도를 가지면서 변화했는데

이는 구들 위에 충분한 두께의 흙이 있어 아래에서 공급된 열이 아주 서서히 위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이같은 온도범위는 겨울철에도 과일과 채소가 성장하기에 적절한 온도라고 조박사는 설명했다.

약 20㎝ 정도의 구들과 흙의 영향에 의한 축열(Thermal storage)과 시간지연(timelag)효과는

장작불을 때서 부족한 열량을 공급하더라도 바닥면의 온도편차는 2k내로 매우 안정될 수 있었다.

한편 그 위에 식생을 위해 마련된 토양층 부분에서는 온도편차가 1.5k 정도로 더욱 작게 나타났다.

이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는 온돌방식의 조선온실이

식물생장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주거용으로 개발된 온돌을 과감하게 농사에 도입하고

흙이나 한지 같은 평범한 재료들을 온실에 적합한 소재로 활용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선온실의 온열환경 특성 분석

 

조선온실은 태양복사열이 기름을 입힌 한지의 투과체를 통해 태양복사열이 온실 내로 투과된다.

그 후 실내 바닥과 황토 벽체에 흡수되고 장파장의 복사열로 바뀌면서

한지를 통해 다시 투과해 나가지못해 온실 내의 온도가 상승하는 온실효과를 볼 수 있다.

이것으로 한지온실은 일사가 실내로 투과되어 실내온도를 상승시키고 식물이 성장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면서 보온을 하는 온실로서의 기능을 뚜렷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한지온실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

비닐에 의한 온실모형 공간과 한지에 의한 온실모형 공간을 소규모로 제작해 보았더니

한지는 통기성(공기 및 수분 투과성), 유연한 접힘, 강인성 및 빠른 흡수성, 보온성 등이

비닐에 비하여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온실이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첨단 영농시설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조박사는 “세계최초 온실인 조선온실을 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하는 것과 세계에 알리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며, 세계최초의 과학적 기술들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이를 계승발전시켜

실생활에서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임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2년에 남양주 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된 온실은

비바람 등에 의해 훼손되고 별도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사)우리문화가꾸기회에서 2006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에 있는 세미원(洗美苑) 내의 실내공간에

교육을 위한 조선온실을 복원해 놓은 상태이다.

- 傳統의 再發見 / 세계최초의‘조선온실’ - 15세기에 과학적 영농온실 사용한 우리 선조

- 신재생에너지 - 2006년 9월호, 한국에너지정보센터 p10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