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Gijuzzang Dream 2008. 12. 3. 21:17

 

 

 

 

 

 

 

 창덕궁에 새끼를 친 어미 호랑이

 

 

최근 전남 광양의 백운산 일대에서 출몰하는 괴물 멧돼지와의 전쟁이 화젯거리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멧돼지는 3년째 그 일대의 10개 부락에 나타나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논바닥을 공사장처럼 깊게 파헤쳐 놓는가 하면

고구마밭이나 감나무ㆍ배나무ㆍ밤나무 등을 닥치는 대로 망쳐놓는다는 것.
이 고약한 녀석을 잡기 위해 주민들이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녀석의 덩치가 워낙 커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몸길이 1.8m에다 몸무게가 240㎏의 웬만한 송아지 크기만한 덩치에다

8~10㎝에 이르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냥꾼들이 괴물 멧돼지를 잡기 위해 모여 들었지만 역시 별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녀석한테 당해서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냥개만 해도 10여 마리에 이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 사냥꾼의 총에 두 번이나 맞아 머리와 엉덩이에 총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신출귀몰하게 산을 휘젓고 다닌다.

따라서 사냥꾼들과 그 지역 주민들은 녀석한테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 산신령으로 추앙받던 호랑이는 민화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친숙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신령으로 추앙 받던 동물은

단 하나, 호랑이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도 우리나라의 산야에 호랑이가 산다면 전남 광양과 같은 괴물 멧돼지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처럼 멧돼지가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호랑이라고 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아주 먼 옛날 옛적 이야기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해도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는 호랑이가 우글거렸다.

1405년(태종 5) 7월 25일에는 밤에 호랑이가 궁궐의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고, 1603년(선조 36) 2월 13일에는 창덕궁 소나무 숲속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심지어 1607년(선조 40) 7월 18일,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호랑이가 임금이 사는 궁궐까지 침입할 정도였으니

산간 지대의 고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홍명희가 쓴 <임꺽정>을 보면

‘밤에는 호환이 무서워서 이웃 간에도 놀러 다니지 못 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당시만 해도 그만큼 호랑이에게 화를 당하는 호환이 무섭던 시절이었다.

1402년(태종 2) 5월 3일자 <태종실록>에 의하면
“경상도에 호랑이가 많아 지난해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이 기백 명입니다”라고 대호군 김계지가 임금에게 아뢰고 있다.

영조 때에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734년(영조 10) 9월 30일자의 <영조실록>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하여 사람과 가축을 상해하였으므로 팔도의 정계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으니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총계가 140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호랑이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 단번에 공격하는 사냥기술을 지니고 있다. 

또 다음해인 1735년(영조 11) 5월 29일에는

“팔도에 모두 호환이 있었는데 영동 지방이 가장 심하여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자가 40여 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서식했던 시베리아 호랑이는

얼굴에 있는 ‘임금 왕(王)’자가 특징인데, 몸무게가 275~300㎏ 정도로 호랑이 아종 중에서도 가장 큰 개체에 속했다.

몸통 길이는 173~186㎝, 꼬리 길이 87~97㎝ 정도인데,

가장 큰 것은 몸 전체 길이가 390㎝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주로 해가 진 뒤부터 이른 아침까지 활동하며, 먹잇감은 멧돼지나 노루ㆍ산양ㆍ사슴 등의 대형 초식동물이었다.

잡은 먹이는 서늘한 곳에 옮겨놓고 여러 날에 걸쳐서 먹기도 하는데, 한번에 많은 먹이를 먹으면 열흘 정도 먹지 않고 견딜 만큼 강인했다.

사냥을 할 때는 몸을 숨겨 매우 조심스럽게 사냥감에 접근한 다음 매복해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공격하는 패턴을 구사한다. 특히 대형 동물을 공격할 때는 큰 앞발로 쳐서 덮친 다음

목 부위를 물어서 기도를 절단하고 중추골을 부숴서 단번에 죽여 버린다.
그런데 호랑이는 사람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왜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사람이 많았던 것일까.
호랑이는 12월에서 1월까지의 추운 겨울에 교미를 하는데,

이때가 되면 수컷은 짝을 찾아 멀리까지 돌아다니며 포효를 한다.

포효를 하는 까닭은 암컷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수컷들을 위협하기 위해서다.

▲ 추운 겨울 교미기가 되면 수컷은 멀리 돌아다니며 포효를 한다. 

이때 위협을 당한 어린 수컷 호랑이들이 영역 싸움에서 쫓겨나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왔을 수 있다.

새끼 호랑이가 태어나 어미에게 젖을 얻어먹는 수유 기간은 6개월 정도지만, 3년 이상을 어미와 함께 생활하고 생후 4~5년이 지난 후에야 독립할 수 있다. 따라서 미처 독립 시기가 되지 않은 호랑이가 어미를 잃었을 경우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의외의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의 추리가 가능한 것은 호랑이를 민간인이 물리쳤다는 기록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에는 안동의 정구지란 이가 어느 날 밤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아내와 두 딸이 함께 쫓아가 몽둥이로 때려서 남편을 빼앗아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구지는 그 후 10여 일 만에 치료를 받다가 죽어버렸다.

1478년(성종 9)에는 경상도 곤양군(지금의 사천 일대)에 사는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 11살짜리 아들이 낫을 휘둘러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서 자신의 가족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호랑이를 잡아본 포수들에 의하면 사람이 호랑이와 싸워서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호랑이의 몸 구조상 그 큰 머리와 앞다리의 무게만으로도 쉽게 사람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힘이 얼마나 센가 하면,

황소를 물고 울타리를 넘어 도망갈 때 황소가 땅에 닿거나 끌리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볼 때 민가에 내려와 사람을 해친 조선시대의 호랑이들은 대체로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어린 개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또 하나, 조선시대에 호환이 유난히 많았던 이유는 한국 호랑이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6년 미국 국립암연구소 연구팀은

사자ㆍ호랑이ㆍ재규어 등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 37종의 DNA를 조사해 진화계통도를 작성했다.

그 결과 현재 살고 있는 고양이과 동물은 1천110만년 전에 등장한 공통 조상에서 진화했으며,

그 공통 조상이 처음 등장한 지역은 아시아인 것으로 밝혀졌다.

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ㆍ벵갈호랑이ㆍ중국호랑이ㆍ수마트라호랑이ㆍ인도차이나호랑이ㆍ자바호랑이

ㆍ발리호랑이ㆍ카스피호랑이 등 8개의 아종으로 분류되는데,

모두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 중 발리 호랑이는 1960년대에, 카스피호랑이와 자바호랑이는

1990년대에 밀렵과 서식지 파괴 등으로 이미 멸종했다.

나머지 아종도 전 세계의 극소수 보호구역에서 약 7천여 마리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 정호군을 조직한 야마모토(오른편)와 조선인 포수 최순원이 사냥한 호랑이 두 마리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 호랑이는 학명으로 ‘판테라 티그리스 알타이카(Panthera tigris altaica)’라고 불리는 시베리아호랑이에 속한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극동의 호랑이는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와 우수리호랑이(동북호), 한국호랑이의 별도 3개 아종으로 분류되었었다.

사실 이 호랑이들은 원래 한 종의 호랑이가 각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지역 환경에 적응하고 변형된 지역적 개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지구촌에 서식하는 호랑이 중 덩치가 가장 큰 극동의 호랑이는 다른 종에 비해 활동 영역이 매우 넓은 편이다. 따라서 지역의 경계 구분도 모호할 뿐더러 교잡종도 많아서 이 같은 지역별 분류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주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우수리호랑이와 한국호랑이만 해도

외양과 성격면에서 차이가 꽤 있었다. 우수리호랑이는 연한 색에 긴 털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호랑이는 좀 더 짙은 색깔에 짧은 털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한국호랑이는 선명한 검은 줄무늬가 절묘하게 배합돼 가죽으로서의 상품 가치가 매우 뛰어나고,

주둥이 위에 마치 임금 왕(王) 자를 연상하는 검은 무늬가 선명해

중국인들로부터 마력적인 숭상을 받곤 했다.

또 우수리호랑이는 온순하고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드물었던 반면 한국호랑이는 매우 사납고 잔인하여

인가를 침입해 가축을 해치는 것은 물론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도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난다.

1463년(세조 9) 3월 12일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집에 호랑이가 침입해

집에서 기르던 양이 물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바로 다음날에는 군마를 사육하던 녹양목장에서 말 4필이 호랑이에게 물린 사건이 발생했다.

▲ 야마모토 타자부로와 정호군 본대 일행 

이 보고를 접한 세조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해,

녹양목장 사건을 일으킨 호랑이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66년(세조 12) 1월 28일에는 호랑이를 포위하여 잡다가

박타내라는 군사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호랑이의 출현은 조선시대 내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는데, 성종 때에는 마침내 병조에서 호랑이를 잡은 이에 대한 상벌 규정을 만들어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에 따르면 대ㆍ중 크기의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면 면포 3필, 작은 호랑이나 표범 한 마리를 잡으면 면포 2필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산간지대의 고을에서 1년에 호랑이에게 해를 입은 자가 한 사람이 나올 경우

수령을 파면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이 상벌안은 법이 너무 과중하다는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시행되지 않았다.
특히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많이 발생했던 영조 때에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이의 가족들에게 휼전(정부에서 이재민 등을 구하기 위해 내리는 특전)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조선 팔도에 들끓었던 한국호랑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지난 1996년 4월 우리나라 환경부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 사무국에

“국내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호랑이는 19세기 말까지 남한에 서식했으나 1943년 이후 완전 멸종되었으며,

다만 북한 백두산 등지에 10마리 내외의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되어 있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 삼림을 지배했던 한국호랑이들은 왜 이처럼 짧은 기간에 멸종되고 만 것일까.

▲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의 모습 

1917년 11월 12일 부산항에 야마모토 타자부로라는 일본 고베의 사업가가 도착했다.

이틀 뒤 매일신보에는 “정호군의 총대장 야마모토 씨 입경”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정호군(征虎軍)이란 바로 호랑이를 잡기 위한 군대를 일컫는 용어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정호군은 11월 15일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인 사냥 여정에 올라 그해 12월 5일 조선호텔에서 해산식을 거행할 때까지 조선 팔도를 누비며 호랑이 2마리를 비롯해 표범과 곰ㆍ멧돼지ㆍ노루 등의 대형 포유류를 무차별적으로 포획했다.

이 정호군에는 최순원ㆍ강용근ㆍ이윤회 등을 비롯해 당시 이름 꽤나 날리던 조선의 사냥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몰이꾼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호랑이 같은 날쌘 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 야마모토라는 일본인은 왜 조선인을 고용하고 거금의 돈을 들여가며

조선의 호랑이와 맹수들을 잡아들인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300여 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로 진격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을 펼친

일본의 전설적인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 사냥꾼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가 임진왜란 기간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한 조선의 호랑이만 해도 모두 5마리에 달할 정도다.
그는 추위와 오랜 타지 생활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마다 호랑이 사냥을 하여

기세를 다시 떨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일본은 섬이라는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호랑이 같은 대륙성 동물은 살지 않으므로,

호랑이를 잡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야마모토가 노린 것은 바로 가토 기요마사처럼 되기 위해서였다.

1917년이면 제1차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정치ㆍ사회적으로 불안하던 시기였다.

그 같은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일본은 젊은이들의 사기를 높이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기발한 아이디어로 등장한 것이 야마모토의 정호군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부터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펼쳤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호랑이는 서양 사냥꾼들의 좋은 표적이 되기도 해,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호랑이 원정대들이 조선을 휘젓고 다녔다.

▲ 2001년 대구 문화방송에서 촬영한 야생동물 사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등의 자료를 취합해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잡혀서 죽임을 당한 호랑이의 수는 141마리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취합한 통계일 뿐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호랑이들이 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널리 알려진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2년 10월 2일 경상북도 경주 대덕산에서 포획된 수컷 호랑이다.

구정주재소의 미야케 요조 순사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사냥한 이 호랑이는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일본 황족에게 헌상되었다.

그 후 1924년 2월 1일자 매일신보에

“1월 21일 강원도 횡성 산중에서 팔척짜리 암컷 호랑이가 송선정이라는 자에 의해 포획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모습이다.

그런데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아직도 남한에 살고 있다는 목격담이 최근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또 그를 근거로 하여 남한의 호랑이 생존설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의 대구문화방송 사건이다.

대구문화방송의 호랑이특별취재팀은 그해 6월 22일 오전 3시 34분 경북 청송군의 깊은 산속에서

야생 호랑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무인카메라에서 4.5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찍혀 조명 범위 밖에 있었지만,

취재팀은 화면개선작업 결과 호랑이 특유의 줄무늬가 뚜렷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확인 결과 카메라에 찍힌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 1998년 임순남 소장이 화천에서 찾아낸 발자국 

1998년에는 강원도 화천의 두메산골 주민들 사이에서 호랑이 목격담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순남 한국야생호랑이ㆍ표범보호보존연구소장이 인근 산골을 샅샅이 뒤져 9.5㎝ 크기의 야생동물 발자국을 발견했다.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담뱃갑보다 더 큰 그 발자국을 놓고 임 소장은 지금도 호랑이 발자국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또 1989년에는 DMZ에서 근무하던 미군들의 레이더 촬영시스템에 거대한 야생 호랑이가 촬영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밖에도 홍천과 인제ㆍ평창ㆍ원주ㆍ부산 기장 등의 지역에서 호랑이 목격담이 나온 바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어떻게 다시 남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는 넓은 활동 영역을 가진 시베리아호랑이의 특성상 백두대간을 따라 남하해

산세가 험한 강원도와 경상도 주변에 분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호랑이의 이동속도로 볼 때 시베리아에서 강원도까지 내려오는데 3~4일이면 충분하고,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ㆍ21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2중 3중의 완벽한 휴전선 철책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한 차례 점프로 보통 4~5m까지 몸을 날리는 호랑이의 괴력을 감안할 때

3m짜리 철책선을 능히 넘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지난 1999년 EBS가 러시아에서 20여 년간 시베리아호랑이를 연구한 전문가와 함께

4개월여에 걸쳐 호랑이 목격담이나 출몰설이 있는 곳을 추적한 결과,

발자국 및 배설물 등 호랑이 흔적으로 알려진 것 중 90% 이상이 호랑이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한때 산신령으로 불리며 한반도의 숲을 지배했던 한국호랑이는

과연 우리로부터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일까.

- 이성규 기자, 2noel@paran.com

- ⓒ ScienceTimes <이야기실록, 26, 27>/ 2008.10.23, 10.30.

 

 

 

 

 

 

 

 

 사자와 호랑이

 

 

요염한 처세술로 사자王 권력 ‘슬쩍’
와일드사파리 女帝 비너스가 사는 법… 관능미로 힘센 수사자들 포박
 

 

한국호랑이 십육강이 사자집단 2인자인 테크노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있다. 한국호랑이는 덩치가 커 사자와의 일대일 싸움에서 유리하다.

벵골호랑이는 사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암사자 비너스(11세)는 색공을 무기로 수사자를 거느리며 실력자로 군림한다.

비너스가 으르렁거리면 수사자들의 갈기털이 곤두선다.

비너스는 마음에 안 드는 호랑이가 있으면 그 앞으로 다가간다.

그러면 사자들이 떼로 그 호랑이에게 덤벼든다.

호랑이들은 얼어붙은 듯 오금을 펴지 못한다.

영특하면서도 비겁한 처세술로 비너스는 승승장구해왔다.  

12월16일 오후 와일드사파리(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비너스는 흙냄새를 맡으며 사자왕 아이디(8세) 곁에 앙칼진 자태로 앉아 있었다.

수사자들의 목덜미, 옆구리를 핥는 비너스의 혀는 현란하다.

‘큰 대(大) 자’로 누워 속살을 보여주며 앙탈도 부린다.

비너스는 사람의 눈으론 종잡을 수 없는,

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다.

 

 

학명 Panthera tigris
분류 식육목(食肉目) 고양잇과의 포유류
분포지역 한대, 열대, 온대
수명 15~20
몸길이 186∼400cm

‘집단의 힘’ 사자에 눌려 호랑이는 눈치만

 

비너스는 2002년 여비(9세)가 집권했을 때부터 여제로 군림했다. 비너스의 관능에 포박당한 젊은 수사자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새 권력자가 노쇠하면 또 다른 젊은 수사자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맹수제국의 왕위를 이었다.

 

아이디의 왕위를 노리는 에니카(5세)는 지금 비너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비너스도 에니카를 부쩍 챙긴다. 아직은 아이디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녀석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빌 클린턴이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정치가들은 유권자들의 ‘엉덩이를 핥는(ass-licking)’일에 능란했다고 ‘타임’의 전 편집장 리처드 스텐젤은 말한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아래·윗사람을 다독거리고(stroking) 빨아주는(sucking up) 데 뛰어나야 한다는 것. 비너스가 그렇다.

 

“사자와 호랑이 싸움의 승자는?”이라는 말초적 호기심의 정답은 “살아남은 놈이 강하다” “힘센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뭉칠 줄 모르는 단독자(單獨者) 호랑이와 적에게 떼로 맞서는 사자집단의 싸움에서

패권은 늘 사자의 몫이었다. 호랑이들은 후미진 곳에서 비너스의 눈치를 봤고,

비너스는 무료할 때마다 사자들을 데려가 호랑이를 팼다.  

 

학명 Panthera leo
분류 식육목(食肉目) 고양잇과의 포유류
분포지역 아프리카, 인도
수명 10~15년
몸길이 165∼250cm

비너스는 2006년 1년간 실권했다.

호랑이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2005년 11월 비너스가 사자들을 이끌고 호랑이 구역으로 향했다. 호랑이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한국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십육강(6세)은 예외였다. 녀석은 배를 땅에 붙이고 어깨를 곧추세웠다. 그러곤 뒷다리로 서서 두 앞발로 테크노(8세, 당시 사자집단 2인자)의 관자놀이를 거푸 후려쳤다.

십육강의 별명은 그때까지 ‘마을 이장’이었다. 순박한 데다 멍한 구석도 있었다.

그런 그가 2인자를 때려눕힌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십육강은 아이디마저 무찌른다.

 

사자들은 후미진 곳으로 밀려났고, 호랑이들은 제멋대로 쏘다녔다. 2006년 여름, 십육강은 틈만 나면 아이디와 테크노를 두들겨 팼다. 마을 이장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벼락출세한 십육강은 광포했다.

이빨을 드러내며 사자를 위협하기도 했다.

맹수들의 싸움은 대개 주먹질로 끝난다.

패배한 녀석이 꽁무니를 빼면 그냥 놔둔다. 이빨은 최후의 일격을 의미한다.

야생 호랑이는 상대가 타격을 입고 약점을 보이면 이빨로 숨통을 끊는다.

 

십육강은 결국 사람에 의해 거세됐다.

최강자인 사람이 녀석을 우리 안에 가둔 것이다.

십육강이 축출된 뒤 비너스의 시대가 다시 열렸다. 아이디도 왕위에 복귀했다.

호랑이들은 구석진 곳으로 쫓겨났으며 사자들은 예전처럼 호랑이를 윽박지른다.

벵골호랑이 세강(8세)이 이따금 반항하지만 아이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권력다툼 닮은 맹수의 이전투구

 

맹수의 권력욕은 영토, 먹이, 암컷에서 비롯된다.

권력자는 제멋대로 초원을 쏘다니며 먹이와 암컷을 우선순위로 차지한다.

권력에서 밀려나면 2인자가 아니라 바닥이다.

사람도 돈, 지위, 명예를 놓고 경쟁한다.

맹수의 권력투쟁은 꼭대기에 올랐기에 매섭고, 힘을 가졌기에 더욱 거칠다.

힘센 사람들이 벌이는 권력다툼은 때로 맹수의 이전투구를 닮았다.

비너스는 사람 나이로 쉰 안팎이다. 폐경이 코앞이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털색이 더욱 짙어지고 얼굴엔 검버섯이 늘었다.

암사자 니케(4세)는 비너스를 쏙 빼닮았다.

니케를 따라 수사자들이 호랑이에게 덤벼든다.

- 도움말 : 문인주 에버랜드 사육사, 황수전 전 에버랜드 사육사

- 주간동아, 2008.12.30 667호(p72~73)

송홍근 기자의 동물탐험 ⑦ 사자, 호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