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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에서 배우는 왕릉조각의 조형미

Gijuzzang Dream 2008. 11. 28. 17:41

 

 

 

 

 

 

 

 

 융건릉에서 배우는 왕릉조각의 조형미

 

 

 

 

 정조의 국장 반차도 '대여' 부분

 

선사시대부터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한 조형 행위는 계속되어 왔다.

전통조각 예술의 대부분은 신앙의 대상인 불교조각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그와 다른 의례 조각이 국가 주도로 제작되었고, 그것이 왕릉 조각이다.

왕릉의 조성은 '국조오례' 중 흉례(凶禮)의 하나로 봉릉(奉陵) 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봉릉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공식화하는 행사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시각적 효과로 의식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이 조각이다.

조선 왕릉 조각은 고려 공민왕의 현정릉(1372년)을 모본으로 하여

조선 태조 건원릉(1408년에 조성)에 이르러 기본체제를 이루었다.

그 후 성종 5년(1475) 『국조오례의』를 제정한 후 제도상으로 확립되었고,

그것을 기본으로 현실적으로 많은 가감을 하면서 변화되었다.

 

그중 조각적 측면에서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왕릉은 사도세자 융릉과 제22대 정조의 건릉이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왕릉(隆健陵)

 

왕릉의 석물 중 가장 힘있게 만든 조각은 단연 석인(石人)이다.

왕릉 석인들은 모두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장엄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12면의 병풍석에도 문신의 얼굴을 한 십이지신상이 능침을 보호하지만

수호의 상징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조각은 석인이다.

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석인 조각은 직선적이며 무게감이 강하고

얼굴이나 지물(持物)을 쥔 손 등의 세부 표현에서 생동성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실제 문무관이 조례에 참석할 때 동서로 반열하여 선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며

한 발자국 뒤로 석마(石馬)를 각자 대동하여 엄숙함을 더한다.

석마는 고려시대에는 없던 것으로 조선에 이르러 등장하고 완성된 특징이다.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 '건릉'

<건릉산릉도감의궤>에 나오는 도설과 실제 건릉 석인은 매우 유사하다.

 

 

조선 왕조 518년을 거치면서 왕릉 석인은 시대별 차이점을 드러낸다.

15세기 초반의 왕릉 석인은 2m 남짓의 등신보다 약간 큰규모에

비교적 인체의 곡선이 드러난 곡선미와 힘찬 생동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5세기 중반 이후 3m가 넘게 대규모로 조성하면서 묵중한 괴체감을 강조하기 시작하고,

16세기에 이런 현상은 극대화되었다. 따라서

무석인(武石人=武人石)이 현실감을 잃은 호랑이 같은 용모를 하거나

문석인(文石仁=文人石)의 소매 자락이 심하게 과장되기도 했지만

손의 표현, 이목구비, 무관 복식은 이전보다 부드러우며 안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듬직한 구도와 명확한 윤곽으로 머리와 앞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의습선은 단순하면서 절제된 미를 표출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형태보다는 딱딱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며 석인의 규모는 다시 작아지면서 유연한 곡선미가 절정을 이룬다.

옷주름은 가볍고 섬세하며, 이목구비는 실제적이고 인체의 곡선에도 현실감이 한층 드러났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근대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향하게 된다.

 

순종 유릉의 문무석인상

근대조각의 느낌이 풍긴다. 문인석은 건릉과 같이 양관을 쓰고 있다.

 

 

정조의 걸작, 융릉(隆陵)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 중량포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시립대학교 내)에 조성되어

‘수은묘(垂恩墓)’라고 하였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묘소의 명칭을 ‘영우원(永佑園)’으로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바꾸었다가,

1789년(정조 13) 花山(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고,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추존(推尊) 격상했다.

 

양주 영우원에서 화성 현륭원으로 옮길 때

정조는 석수 159명을 동원하여 석조각들을 새롭게 조성하는데,

당시 왕세자의 격식으로서는 유일하게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사후 세계도 지켜드리겠다는 아들 정조의 의지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융릉의 석조각들은 1789년에 조성된 것이고,

그 당시는 왕세자의 격식으로 조성된 원(園)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왕릉의 격식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석물의 수준이나 능의 규모, 배치 등은 왕릉에 버금가는데다가

16세기 이후 일반사대부 묘(墓)나 왕실 원(園)에서 조성한 형식인

양관(梁冠)과 조복(朝服)을 갖춘 석인을 만들어

원(園)의 자유로운 형식에 왕릉의 격식을 적절히 조화시킨 정조의 걸작이다.

 

 

융릉의 석양

봉분을 보호하는 동물들은 담장쪽을 향해 서 있다.

 

 

현종과 함께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崇陵)에 있는

현종비 명성왕후(1643-1682)의 산릉도감의궤에 실린

<사수도(四獸圖)> 중 백호 / 조선 1684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능침 안의 네 벽에는 네 상서로운 동물그림이 그려 있다.

 

 

융릉의 석물은 매우 화려하다.

특히 모란과 연꽃무늬가 유려한 병풍석과 연잎에 받쳐진 연꽃봉오리 형상의 인석(引石)은 눈길을 끈다.

 

 

융릉 인석(引石)의 연꽃봉오리

연꽃을 통하여 다시 탄생한다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의 강한 의지를 담은 듯하여 애틋하다.

연봉의 바깥쪽에는 12방위를 상징하는 간지문(干支文)을 깊게 음각했다.

 

과거 왕릉의 병풍석에 등장하던 불교적 모티프인 영탁문(鈴鐸文 : 금강령)과 영저문(鈴杵文 : 금강저)은

문종 현릉(1452년 조성)이후 사라지게 되었고,

1731년에 조성된 인조 장릉에서는 모란, 연꽃 등을 부조하여 그 이후로는 십이지신상도 조각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흉례 절차가 완벽하게 정착한 결과다.

 

융릉 병풍석 면석에는 모란무늬를, 양 우석(隅石, 모퉁이돌)에는

다른 형태의 연꽃무늬를 얇게 부조했는데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노련하고 사실적인 솜씨를 보인다.

구도가 안정될뿐더러 18세기 모란 및 연꽃의 일상적 도상을 모티프로 하고 있어서

화원(畵員)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병풍석의 하단에는 지붕의 기와를 형상화한 와첨상석(瓦檐裳石)을 화려하게 조성하여

그 완성도를 높였다.

   

 

정조는 “와첨상석(瓦檐裳石)을 이번에 특별히 사용함은 오로지 미적 아름다움을 위해서이고

아울러 정성을 바친 나의 마음을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직접 밝혔다.

(『현륭원 원소도감의궤』1789년) 

 

융릉 석인은『현륭원 원소도감의궤』에 그려진 도설과 유사하다.

문인석은 양관을 쓰고 조복을 갖춰 입고 길게 내려진 허리끈과 소매 아래로는 패옥(佩玉)이 보인다.

 

융릉의 무인석은 투구와 삼지창 정개(頂蓋), 어깨에 두른 운견(雲肩 : 어깨덮개),

팔꿈치 아래의 굉갑(肱甲 : 팔목보호대) 문양 등 도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산릉도감의궤』의 도설과 실제 석인이 유사한 형상은 아들 정조의 건릉에서 절정에 이른다.

눈은 가늘게 뜨고 입에는 미소를 살짝 띤, 사실적으로 조각된 안면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옷주름은 부드럽고 실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우며

갑옷과 후수(後綬, 조복 뒤에 늘어뜨린 수)의 문양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석인의 주요 목적인 ‘장엄함’보다는 ‘아름다움’의 미적 표현에 충실한 것이다.

기념조각을 뛰어 넘어 감상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시대였다.

 

융릉의 장명등은 팔각의 형태로 거대하게 조성되었다.

1701년 숙종의 석물 간소화령에도 불구하고 팔각으로 조성된 융건릉의 장명등은

조선 후기의 희귀한 팔각등이다. 이 등은 3단의 대석(臺石, 받침돌) 구조가 안정적이고

경쾌한 옥개석(지붕돌) 아래의 처맛골이 조화를 이루어 매력이 있다.

 

 

융릉의 장명등은 규모가 큼에도 안정적인 구성을 보인다.

특히 상대석에 연꽃, 국화, 모란, 영지문을 섬세하게 부조하고,

하대석은 운족(雲足 : 굽은다리)형태로 조각하여 장식적이고 공예적인 미감이 짙다.

 

 

오로지 미적 아름다움을 위해서

 

정조 건릉(健陵)은 1821년 지금의 터로 옮길 때

1800년에 만든 석물들을 그대로 운반했으므로 현재의 석물들은 그때 조성한 것들이다.

석물은 융릉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한 듯하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도 서거 후 현륭원 동쪽 구릉에 있던 것을

효의왕후와 합장할 때(1821년) 서쪽 구릉인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두 왕릉은 같은 권역 안에 좌우로 조성되었고 시기적으로도 11년 밖에 차이나지 않으며

작업한 석수 145명 중 35명이 중복되어 제작에 참여하여 공통점이 많다.

 

18세기말의『산릉도감의궤』에는 화원 김응수(金應洙)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화원이 석물조성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명확하지 않지만

의궤의 도설과 분명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원은 오례에 관련된 왕실용 물품제작이나 건축 조영에 관련된 기화(起畵 : 윤곽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석물의 제작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조 왕릉 <건릉산릉도감의궤>의 유문도 

 

건릉 석인들은 융릉과 마찬가지로 대규모로 조성하였고,

인체의 비례와 윤곽을 비교적 정확히 표현하면서도 유연한 선이 살아 있다.

다만 융릉과 비교하면 어깨를 움츠린 형상이 다소 부자연스럽다.

얼굴은 넓고 펑퍼짐하게 만들어 나이 든 문무관을 잘 포착했다.

의습선은 가볍고 현실감을 돋우도록 표현하였고,

갑옷 세부 문양이나 문관의 사실적 후수 모습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얼굴에 비해 길어서 안정된 신체 비례와 얼굴의 미소는 사실적 세부묘사와 어우러져

문예부흥기의 세련되고 숙달된 기법을 잘 보여준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건릉 문인석은 조선 왕릉 최초로 양관과 조복을 착용한 점이다.

융릉은 원래 원(園)의 격식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보편적 형식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왕릉에서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公服)을 입은 전통적 형식을 벗어난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건릉의 장명등도 융릉의 것과 닮았다.

규모가 크지만 구도가 안정적인데다 문양이 화려하고 섬세하여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융릉 장명등과 다르게 상대석 팔면에 국화, 모란, 불로초, 석류, 선도, 불수감(관상용 귤), 난초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여 그림같기도 하고 공예품 같기도 한 뛰어난 조형감을 지니고 있다.

 

건릉의 석물 중 융릉과 가장 다른 점은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이 설치된 점이다.

이는 정조의 당부에 따른 것이었다.

정조는 원(園)에서 사용할 수 없는 병풍석을 현륭원에 사용한 것은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앞으로는 병풍석을 사용하지 말라고 못박았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대체하여 왕릉임에도 왕비릉의 격식과 유사하다.

 

정조는 즉위기간 동안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하여 화성 천도를 꿈꾸었다.

도성인 화성과 왕릉인 융건릉 그리고 융건릉의 원찰인 용주사(龍珠寺) 구석구석에는

정조와 그 시대의 예술혼이 그대로 묻어나 우리에게 많은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사후세계를 영원히 지키고자

 

조선 왕릉의 조각은 사후세계를 지키려는 염원에서 조성되었고,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장엄과 수호라는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정착시켜 왔다.

현대미술사가들은 이를 자칫 습관적으로 감상의 대상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미적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명제 앞에서 필자는 항상 당혹스럽다.

불교 조각은 이상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시각적 조형행위였다.

그리고 그 장엄을 통해 불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다.

왕릉 조각은 배경도 목적도 발원자도 다르다.

삼국시대의 불교 조각보다 직선적이고 무게감이 있으며 추상적 형상이 드러난다.

어느 시기든, 당시 미의식을 기본으로 목적에 맞게 만들어졌을 때 우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시각을 밑바탕으로 왕릉 조각을 접한다면 조금은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정조는 화성을 지으면서 인근에 아버지의 능인 융릉을 건설했으며,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웠다.

이는 도성과 왕릉, 그리고 원찰을 잇는 도심 구도의 완성인 예다.

용주사 효성전에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정조, 효의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김은선,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한국조각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대전선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다.

- 문화와나, 2008년 가을호, 삼성문화재단, p24-27

 

 

  

 

 

 

 조선왕릉은 어떻게 구성되나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국장을 치르고 산릉을 만들기 위한 임시기구(도감, 都監)가 설치되었다.

도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절차는 꼼꼼하게 기록해 의궤로 정리했다.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 왕과 왕비의 장례를 담당한 국장도감에서 왕의 장례식 전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국장은 왕의 관(재궁, 梓宮)이 궁궐을 떠나 장지인 산릉(山陵)에까지 이르는 과정이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정례는 예장(禮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 한다.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殯殿)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빈전도감은 요즈음으로 치면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는 일을 주로 담당했다. 

 순종황제의 국장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 왕실의 무덤인 산릉(山陵)을 조성한 과정을 정리한 의궤이다.

왕의 관이 장지에 도착하면 정자각에 모시고, 찬궁(攢宮)에서 관을 꺼내 하관하였다.

왕을 가리켜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숙종’ ‘영조’ 등의 이름은 종묘에 모셔질 때의 묘호(廟號)이고,

산릉에는 ‘건원릉’ ‘명릉’ ‘원릉’ 등의 능호(陵號)가 따로 붙여진다. 

순종황제 국장  

 

한편 왕릉에는 통일신라시대 형식의 기본이 갖추어져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으나

독창적인 모습은 조선왕릉에서 그 형식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단릉(單陵)’ -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

‘쌍릉(雙陵)’ - 한 언덕의 평평한 곳에 하나이 곡장으로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상우하(左上右下)의 원칙에 의해 쌍분으로 한 것

‘합장릉(合葬陵)’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줄기의 용맥에서 나누어진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

‘동원상하릉(동원상하릉)’ - 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로

                                          조성한 것

‘삼연릉(三緣陵)’ -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 -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

 

 

조선 왕릉은 유교의 예번에 따라 진입공간 - 제향공간 - 성역(능침)공간이라는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기본적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능침(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성역(聖域)의 공간이며,

정자각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은 성(聖)과 속(俗)의 만남의 공간이자,

사자(死者)와 생자(生者)의 만남의 공간, 반 속세의 공간이며,

진입공간은 제례의 준비와 속세를 나타낸다.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 - 외홍살문, 재실, 지당(池塘,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 - 홍살문, 배위(拜位, 望燎位, 板位 : 가마에서 내려 절을 하는 곳), 참도(參道),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예감(瘞坎), 소전대, 비각, 산신각, 신도(神道)

死者의 공간인 성역공간(능침공간) - 능침, 혼유석(魂遊石), 석망주(石望柱), 장명등(長明燈),

                                                       여러 석물(석수, 石獸), 곡장(曲墻) 등이 있다.

이밖에 향탄산, 원찰(願刹) 및 조포사(造泡寺) 등이 능역 외곽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능역의 구성요소는 왕릉을 향하여 진입하는 동선을 중심축으로 하여 배치되고 있다.

 

성역공간은 다시 3개의 권역으로 구분한다.

계체석(장대석)이라고 불리는 긴 돌에 의하여 계단식으로 층을 지어 구분하였는데,

맨 위의 상단은 상계(흔히 일계), 가운데는 중계(혹은 이계), 가장 아래는 하계(혹은 삼계)이다.

상계에는 석난간(石欄干=欄干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혼유석(魂遊石), 석망주(石望柱=望柱石),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문인석)과 석마(石馬)를 배치하였으며,

하계에는 무석인(무인석)과 석마로써 치장하였다.

 

 

그리고 제향공간에 마련된 신도비 및 능표석(碑閣), 정자각 양 계단에는 소맷돌 등이 조각되었다.

각 석물들은 모두 상징적이고 실용적인 용도로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조성되었다.

능침과 석관을 보호하고 무게를 받치기 위해 조성한 병풍석과 석난간(난간석),

능침을 사방에서 호위하는 석수(石獸),

어두운 곳을 밝히고 공손함을 요하는 장명등

가장 높이 솟아있어 먼 곳에서도 눈에 띄는 석망주(망주석),

그리고 주인이 누구임을 밝히는 신도비와 능표석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그 완성도를 높인다.

 

이렇게 조성된 조선왕릉 주변의 관리는

산불 방지, 토양 유실이나 장마비에 대한 대책, 정자각이나 비각의 개수 등 훼손을 대비해

철저한 관리방안을 마련해서 시행하였다.

산불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재난으로 하물며 왕이 안치된 왕릉은 오죽했을까.

건조한 봄철에는 산불 예방차원에서 화소(火巢)에 불을 놓아

왕릉 주변 울타리 밖까지 나무나 잡초까지 자라지 못하도록 태워 산불이 발생할 소지를 없앴다.

왕릉 주변에 능역을 보호하기 위해 빙 둘러 도랑을 파서 해자(垓字)를 조성한 다음에 그 바깥쪽으로

잡풀을 미리 태워 유사시 불길이 능침 안쪽으로 번지지 못하게 하는 화소를 설치한 것이다.

 

여름철 우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빈번했다.

장마비에 잔디가 파헤쳐져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가 올때면 재빨리 잔디 위에 기름종이(油芚)를 덮어 능침을 보호하기도 했다. 

 

또한 가을에는 능역 주변에 떨어진 낙엽을 긁어모아 청소를 실시하였다.

청소는 단기간(3일내)에 처리하도록 했으며, 동네사람들을 청소에 동원할 수는 있었지만,

우마차를 동원하여 낙엽을 실어나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우마차를 동원할 경우,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상할 수 있으며,

토양 또한 다져지거나 훼손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사항들은 이른바 산림 생태계의 전반적인 보호관리 방안으로 요즘에도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다.

 

 

 

 

 

 

 

 

 

 

 

 


 

 

한(恨)과 효(孝)가 하나가 되는 곳

완연한 봄기운을 받은 나무와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강지원 변호사는 오랜만에 융 · 건릉을 찾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외쳐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 너무나 많은 그 무언가들로 가득한

서울은 이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서울을 나왔다.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융릉 · 건릉을 자주 갈 수 있음에 기뻐했다.

 
사적 206호로 지정된 융 · 건릉은

그 유명한 수원 화성을 찾는 답사객들에게 또 하나의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신도시를 향한 정조의 열망을 수원 화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면,

정조의 지극한 효심은 융 · 건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소 청소년과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원 변호사는

‘효’에서 가족학의 모티브도 받았다.

그리고 ‘효’를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발전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에게 융?건릉은 우리 옛 군주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장소였다.

 
오랜만에 흙을 밟으면서 옛 이야기 속으로 향하는 길은

분주한 오늘날의 이야기와는 달리 여유롭고 상쾌했다. 고요하게 난 외길을 따라 융릉에 도착하니

당파싸움의 희생자가 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사도세자의 능을 크게 축조하고 기렸던 정조의 효심 서려 있는 기가 막힌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는 세계효문화재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온 세계에 ‘효’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보았지만 사도세자와 정조 같은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보다 유난히 ‘효’와 관련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많았다.

착한 심성을 타고 난 우리네 민족성은 ‘효’와 너무나도 밀접한 문화들을 만들어 내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효’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융릉에 대해 경의를 표한 그는 이제 건릉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가득했던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어머니 곁에 함께 잠들어 있었다.

수년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고 그 유품들을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간직하고자 하는

강지원 변호사의 모습에서 정조의 모습이 보였다.

융릉보다 약간 규모가 작고 조금 덜 꾸며진 모습의 건릉이었지만 그는 융 · 건릉을 통해서

이 시대까지 ‘효’에 대한 깊은 생각을 던져주는 정조의 메시지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불심과 효심이 하나가 되는 곳

이제 그는 융 · 건릉에서 2km 정도를 가면 나오는

‘용주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석가탄신일을 기다리며 오색 빛의 찬란한 연등들이

바람소리를 따라 잔잔히 흔들리고 있는 용주사에 들어서니

많은 신도들이 그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불심과 효심의 어우러짐으로 유명한 용주사의 신도들은

이미 그가 어떻게 그의 부모를 섬겼는지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한 분 한 분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꿈꾸는 세상을 오늘의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세상을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스님들의 불공 드리는 소리가 용주사 내에 조용히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쯤 그는 정조가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용주사의 그 맑은 공기 속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빗장을 닫아 두었던 용주사의 ‘범종’(국보 제120호) 도

오늘은 그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방문을 반겼다.

범종의 소리는 본래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용주사의 범종 소리가 이 분열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깊이 울리기를 기대했다.

용주사는 ‘효’와 관련된 많은 프로그램들도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는 용주사가 그 지어진 목적처럼 ‘효’를 널리 알리는 절이 되기를 고대했다.



문화재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곳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서 융릉을 지었지만,

오늘날 정조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를 향한다.

하지만 그는 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들을 발견했다. 융 · 건릉의 능과 능을 눌러싼 숲과 너른 잔디들은 잘 꾸며져 있지만 정작 능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진실 된 가치들이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저 이곳에 나들이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문화재가 가진 가치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 깊은 역사를 가진 문화재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문화재들 가운데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실제처럼 만들어 문화재로 만든 것도 있고,

실제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들도 있다.

당연히 실제 존재한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가 더 가치가 있겠지만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재가 그 가치를 잃는 법이다.

그는 융 · 건릉과 그 이야기가 가진 가치들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이야기 하며 그 빛바랜 가치들에 새로운 빛이 더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당파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내놓은 ‘탕평책’이

사분오열된 이 시대에도 필요한 정치체제라고 하며

한 가정의 평화에서 나라의 평화에 이르는 그 유기적인 흐름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또한 지도자들이 우리네의 아름다운 덕목들을 본을 보일 때 그 파장은 당대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어 그 가치들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는 데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있다.

그는 문화재 자체의 가치를 통해 오래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교훈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제 누구든 융 · 건릉을 찾아 간다면,

사도세자의 깊은 한(恨)과 정조의 효심을 꼭 만나고 오라며 강지원 변호사는 옛 여행길의 문을 나섰다.


강지원
현재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이자 청소년 · 여성 · 장애인들의 인권 지킴이 변호사로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검사가 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법무부 장관과 같은 최고의 법조인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청소년 지킴이가 되어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을 찾아다녔다.

청소년 사업에 몰두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그는

과연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KTV “강지원의 정책데이트”, EBS FM 강지원의 '특별한 만남' 등 다수의 프로그램 진행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바 있으며, 2008년 제3회 대한민국 인터넷 대상 공로상,

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3년 대통령표창 등을 받은 바 있다.

‘강지원 생각 큰 바위 얼굴 어디 없나’, ‘어린이 청소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김진희  / 사진, 최재만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