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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데라우치문고 - 조선 시,서,화 보물전(4-25-6.11)

Gijuzzang Dream 2007. 11. 30. 03:22

 

 

 


 

 데라우치문고  -  조선 시ㆍ서ㆍ화 보물전 

 

 
 
 

부        제 : 경남대학교 개교60주년 및 데라우치문고 반환10주년기념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명가명품콜렉션 ⑥

 


전 시 기 간 : 2006년 4월25일(화) - 2006년 6월11일(일)


전시없는 날 : 2006년 5월29일(월) 

시          간 : 11:00-20:00 

 

장        소 : 서울서예박물관


 

 

 



 

 

 

 

 

 



 

 

 

 

일본 약탈 《데라우치 문고》첫 공개

 

 

예술의 전당 내 서예박물관에서는 4월 25일(화)부터 6월 11일(일)까지 경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 문고》중 131점을 전시하는 ‘시ㆍ서ㆍ화에 깃든 조선의 마음’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데라우치 문고》는, 일제 강점기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가 전문학자 등을 동원해 1910년부터 5년간 약탈ㆍ수집했던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자료들로, 문집류ㆍ서화류궁중자료 등 희귀한 우리나라의 기록 문화재 1,000여 종 1,500여 점에 달하는 우리 문화재를 사후 일본 야마구치현립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데라우치문고의 반환은 1994년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가 공동으로 해외유출 문화재에 대한 환수사업을 추진하며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경남대 박재규 총장의 지속적인 노력과 한일의원연맹의 협조로 1996년 1월 24일 자매대학인 야마구치현립대학으로부터 반환되었다.

이번 전시에선 1996년 돌려받은 98종 135점 중 대다수인 131점이 공개된다.

반환 직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구체적 연구성과 없이 40여 점 정도가 한 번 공개된 적이 있지만 작품 가치 등은 알리지 못한 ‘책 표지’전시회 수준이었다.

경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문고는 주로 17∼19세기 작품인 간첩(簡帖)· 시첩(詩帖)· 서화첩(書畵帖) 종류들이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사료로 보관상태도 대부분 양호하며, 주제별로 작품을 엄선하고 평가를 거쳐 미공개작을 대거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회화, 글씨, 한시를 고루 망라하고 있어 그 자체로 조선 초기∼말기의 서예사와 회화사를 일별할 수 있다.

예술의 전당 김영순 전시예술감독은 “10여 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작품의 내용과 문화재적 가치가 처음으로 해석되고 알려지는‘지적 공개’”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경남대는 이 유물들의 가치 평가를 위해 5월 13일(토) 오후 1시,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는 박재규 총장이  '일제시대 반출문화재 환수 사례 - 데라우치문고 반환 경위와 의의', 김영순 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이 '식민시대 해외반출문화재 환수에 대한 국제동향'에 대해 각각 기조 강연을 가질 예정이며, '경남대학교 박물관 《데라우치문고》소장 유물의 가치와 평가' 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갖게 된다.

 

경남대학박물관 김원규 연구사는 "반환된 유물 전부가 공개되기는 처음으로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해외에 유출된 한국문화재에 대한 환수사업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전시를 통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인 데라우치문고에 대한 가치의 재평가가 이뤄 질 것"이라며, "한자리에서 조선 후기의 시·서·화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 전시구성


 

Ⅰ부 : 유학자(儒學者)의 시문(詩文) -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생활의 발견

Ⅱ부 : 어제어필(御製御筆)과 궁중기록화 - 시(詩)로 국사(國事)를 논하다

Ⅲ부 : 별장첩(別章帖) -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

Ⅳ부 : 서화명가의 그림 - 관념과 사실주의

Ⅴ부 : 서화명가의 글씨 - 절제(節制)와 개성(個性)의 미덕

 


 

 회화(畵) 분야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왕족화가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ㆍ1545∼1611)의 화첩집 《낙파필희(駱坡筆戱)》이다.

이경윤은 동생 이영윤, 아들 이징과 함께 대표적인 왕족 화가로 알려졌으며 숨어 사는 선비들(은일고사ㆍ隱逸高士)에 관한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안휘준(安輝濬) 문화재위원장은 “ 《낙파필희》에 동시대 인물인 오봉(五峰) 이호민(李好民ㆍ1545~1611)과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ㆍ1559~1623)의 찬문이 등장해 호림박물관 소장 최립의 찬문이 적혀있는 주도(詩酒圖)」와 함께 이경윤의 진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첩에는 선비가 말 위에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를 구상하는 모습을 담은 「연자멱시도를 비롯, 소나무 아래서 바둑 두는 장면「송하탄기도」, 「묵죽도」, 「노안도」등 7폭의 산수화를 담고 있는 《낙파필희》는 지금까지 전칭작(傳稱作)으로만 전하는 이경윤 그림의 진위를 판단할 기준작이 될 전망이다. 이경윤은 조선왕조실록에‘선조의 임진왜란 피난길을 수행하지 않은 죄를 물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올 뿐, 행적이 뚜렷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작자가 명확하지 않은 처사(處士)풍 그림 상당수가 그의 이름을 빌어 전해지는 등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안휘준 문화재위원회위원장은 “그간 이경윤 작으로 칭해온 작품에는 낙관이 없어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었다”며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의 큰 소득이라고 평했다또,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를 구상한다’는 뜻의 「연자멱시도(撚자覓詩圖)」는 조선 중기 관념산수(觀念山水)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 이경윤 연자멱시도


「연자멱시도」는 흑백 대비가 강하고 도끼로 찍은 듯한 부벽준(斧劈?) 기법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유행한 절파화법의 전형이며, 인물이나 배경 묘사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수작이다.


=====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ㆍ1545∼1611)의 화첩집 《낙파필희(駱坡筆戱)》에는

 선비가 말 위에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를 구상하는 모습을 담은 「연자멱시도」를 비롯, 소나무 아래서 바둑 두는 장면의「송하탄기도」, 「묵죽도」, 「노안도」등 7폭의 그림이 있다. 





 

 

홍운당첩(烘雲堂帖)에는 윤두서(尹斗緖),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김홍도(金弘道), 석양정(石陽正), 신위(申緯), 조세걸(曹世傑), 성재후(成載厚), 이유신(李維新), 송민고(宋民古), 홍득구(洪得龜) 등 조선 중후기 유명 화가들의 사군자, 산수, 동물 등 작품 28점이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 겸재(謙齋) 정선(鄭敾ㆍ1676~1759)의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지금까지 알려진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평가된다.


- 정선(44세때) 한강독조도, 홍운당첩(烘雲堂帖)》

특히 《홍운당첩》에 실린 홍득구의 그림은 현전(現傳)하는 유일한 그의 그림으로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  
홍득구(洪得龜, 1653∼?)의 그림, 홍운당첩(烘雲堂帖)》


-
세걸(曹世傑,1635~?)「풍중소류도」,홍운당첩(烘雲堂帖)》


- 심사정(沈師正,1707~1769), 홍운당첩(烘雲堂帖)》


- 윤두서(尹斗緖,1668~1715),
홍운당첩(烘雲堂帖)》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급제한 선비들이 30년 뒤인 1602년(선조 35) 10월 경북 안동에서 만나는 광경을 그린 계회도(契會圖) 등이 있는 《계묘사마동방계회도첩(癸卯司馬同榜契會圖帖)》은 조선 중기 문인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1603년에 작성한 발문(跋文)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계회도로는 연대가 아주 이른 시기 작품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동방(同榜)’이란 같은 시험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합격자 명단이니 요즘으로 말하면 고시 합격 동기생들이다. 계회도란 이런 동창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

따라서 이 계회도는 1573년(선조 6)에 사마시(司馬試)라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30년 뒤인 계묘년 1603년(선조 35) 10월16일에 안동에서 동창회인 계회를 열면서 그 광경을 화가를 시켜 그리게 한 그림이다.

안휘준 위원장은 "이 작품이 가치를 갖는 것은 산을 표현할 때 미법준(米法峻)을 사용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사실"이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미법준을 기준으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가 조선에 도입된 상한시기를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도입된 것으로 보고, 17세기 중반으로 잡곤 했으나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 계회도는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적어도 17세기 초반 이전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근거”라고 평했다. 



순조 17년(1817) 3월 11일, 조선조 23대 순조의 아들(효명세자, 익종)인 왕세자가 9세 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입학할 때의 여러 의식(儀式)을 서화로 표현하고 축하시문을 붙인 《정축입학도첩(丁丑入學圖帖)》. 

 
맨 앞에 통훈대부 홍문관 부응교 겸 시강원 겸 필선 동학 교수 홍경모(通訓大夫弘文館副應敎兼侍講院兼弼善東學敎授 洪敬慕)의 서문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 출궁의(出宮儀), 작헌의(酌獻儀), 입학의(入學儀), 수하의(受賀儀)의 의식절차에 대한 설명과, 각각의 의식을 표현한 6폭(幅)의 그림이 있다.

출궁의(出宮儀), 작헌의(酌獻儀), 수하의(受賀儀)는 각 1폭씩이나 입학의만은 3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부분에는 세자시강원(世子 侍講院)의 좌빈객(左賓客) 이만수(李晩秀), 우빈객(右賓客) 남송철을 비롯한 11인의 하시(賀詩)가 실려 있으며, 박사 겸 우빈객(博士兼右賓客) 남송철의 발문(跋文)이 첨부되어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순조의 세자는 뒤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는데, 순조 9년에 탄생하여 동 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760년 청계천 준설공사의 모습을 담은‘어제준천제명첩’등은 궁중기록화의 백미로 꼽힌다.


 

《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중 「춘당대영화당시사후사선도(春塘臺暎花堂試射後賜膳圖)」에 나오는 장면이다.


  “지금에야 준천공사가 완성되니 신민의 효력이었네 (于今濬成  臣民效力).

    반드시 이 정성으로 한 번 강한 나라를 세워보자  (須將此誠  一施軍國).”


조선 영조는 재위 36년째이던 1760년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이 시를 지었다.

 20여 만 명을 동원한 청계천 준설 공사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영조는‘강한 조선’을 염원하며‘힘ㆍ력(力)’,‘나라ㆍ국(國)’두 자를 운(韻)으로 하는 시를 입시(入侍)한 관인 24명과 함께 주고받아 시첩으로 묶은 「제신제진(諸臣製進)」이 전시된다. 

 

 

 

 서예(書) 분야

 

추사 김정희의 서법(書法)을 추사의 친필로 기록한 「완당법첩조눌인병서(阮堂法帖曺訥人幷書)」


- 추사 44세때의 사언시(四言詩)


석봉(石峰) 한호(韓濩ㆍ1543~1605)가 자기 글씨의 변화 과정과 조선 서예에 대한 자부심을 직접 기록한 「석봉필론(石峰筆論)」이 처음 공개된다.

석봉필론(石峰筆論)」은 석봉 서예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으며, 나아가 이렇게 개발한 조선의 서예에 석봉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던 지를 생생히 증언한다. 

 

    "우리 동방의 신라 김생(金生)도 서예에 뛰어나 행서 초서 해서의 법에 신통해

    우군(右軍.왕휘지)과 거의 비길 만 했다 … 비해당(匪懈堂) 청지(淸之. 안평대군 이용)는

    자앙(子昻.조맹부)을 배웠으나 그보다 뛰어났다."

 

이런 말로 동방의 서예 대가들이 결코 중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음을 주장한 석봉은 그 자신의 서예에 대해서는 "이전에 익힌 것을 모두 버리고 길이 두 가지 신묘함을 대하니 오늘 한 글자를 쓰고 내일 열 글자를 배워 달마다 연습하고 해마다 터득"한 결과 "비록 왕희지에는 미치지 못하나 조맹부보다 못하지 않으니 어찌 다행이 아닌가"라는 말로 강렬한 자부심을 표출하고 있다.

 

       “오늘 한 자를 쓰고                (今日畵一字)

         내일 열 자를 배워                (明日學十字)

         달마다 연습하고 해마다 터득하니  (月習歲得)

        마음이 가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不覺心之所之) …

 

  
이 밖에도 미수 허목, 지봉 이수광, 백사 이항복, 이순신 등 당대 명문장가 및 정치가· 학자· 명필들이 망라되어 있다.

 

 

 

■ 시(詩) 분야

 

당대 문인 154명의 시 158편을 묶은 무진조천별장첩(戊辰朝別章帖)(1628)과 150여 편을 모은정해부연별장첩(丁亥赴燕別章帖)》(1628)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두 차례에 걸쳐 연경을 방문했던 문인 민성휘가 한양을 떠날 때 당대 학자들이 써준 송별 시집이다.

1628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즉위식 참석을 위한 진하부사(進賀副使)로, 1647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방문하는 민성휘(閔聖徽, 1582-1647)를 송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모은 별장첩(別章帖)이다. 이 두 시첩은 17세기 초 이호민(李好閔), 이덕형(李德炯), 김류(金류), 김상헌(金尙憲) 등의 당대 지식인 154명이 쓴 육필 원고 뭉치라는 점, 또한 명-청 교체시기의 우리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한 대 중국인식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그 외에,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ㆍ1418~1456년),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ㆍ1489~1546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ㆍ1552~1617) 및 정철(鄭澈)ㆍ곽재우(郭再祐)ㆍ양사언(楊士彦)ㆍ임제(林悌) 등의 육필 시고(詩稿)가 5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큐레이터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시ㆍ서ㆍ화 작품이 망라돼 있다”며 “시대에 따라 달라진 미학적 관점에 따라 선비의 이상적 인격미가 어떻게 예술 작품에 녹아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 《동국제현유묵(東國諸賢遺墨)》

고려시대의 이조연, 이암, 조선시대의 성삼문, 양사언, 정철 등 15인의 글이 실려 있다. 이황(李滉, 1501-1570)의 글.


- 《서화첩(書畵帖)》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산수(彩色山水) 및 죽란(竹蘭) 등의 그림이 있으며, 그림 가운데에는 강세황의 인(印)이 찍혀 있다.

그림 외에 강세황, 한욱(韓旭)을 비롯한 7인의 글과 그림이 실려 있다.


- 《유근첩(儒近帖)》

3첩 / 1첩(21매), 乾첩(18매), 坤첩(16매)


크기가 다른 1첩과 크기가 같은 건· 곤첩의 세 첩으로 되어 있으며, 각기 표지의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

제 1첩에는 향월황각(鄕月黃閣), 건첩에는 중신아향(重臣亞鄕), 곤첩에는 황각서공이라 씌어 있고 각 책에 모두 '연전서옥장' 이라는 제자(題字)를 병기하고 있다.

크기가 작은 한 첩은 앞부분에 채색도로 고양이 그림과 신선도 한 폭이 그려져 있고, 김조순을 비롯하여 14인의 글이 실려 있다.

건첩은 한용화 등 16인의 글이, 곤첩은 조인영 등 10인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 흥진첩(興盡妾)》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지만 흥진첩(興盡帖)에 실린 산수화(山水畵)이다.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 ?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는 일제 강점기 조선 3대 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을 거쳐 일본 총리대신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가 한국에서 통감과 총독을 역임하면서 수집했던 문헌을 바탕으로 자신의 야마구치현에 개설한 사설문고이다. 데라우치 사후 1922년 유족에 의해 ‘오우호데라우치 문고’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집한 동양 3국의 고문헌 1만 8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한국관계 고전적(古典籍)은 데라우치가 총독으로 있을 때 수집한 문집류, 서화류, 궁중자료 등 모두 1,000여종 1,500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그가 총독 퇴임 후 일본으로 가져간 자료들이다.


1996년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일본 야마구치현립대학(山口縣立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었던 데라우치 문고 중 한국관계 전적류(조선시대 유학자 친필유묵, 그림, 어필, 궁중 관련 자료, 금석문 등) 98종 135점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다.


환수된 유물들은 주로 조선후기(17~19세기)의 간첩(簡帖, 편지 모음집), 시첩(詩帖, 시 모음집), 서화첩(書畵帖, 글씨와 그림 모음집)들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고 탁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이며, 보관 상태 또한 양호하다.

이 중 신라시대의 김생(金生)·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고려말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조선시대의 안평대군(安平大君),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비롯한 220여 학자들의 글씨를 모은 《명현간독(名賢簡牘)》은 우리나라 서예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무진조별장첩(戊辰朝別章帖)》과 《정해부연별장첩(丁亥赴燕別章帖)》은 1628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즉위식 참석을 위한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또 1647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방문하는 민성휘(閔聖徽)를 송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모은 시첩이다. 이 두 시첩은 명과 청의 왕조 교체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조선사대부의 중국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그리고 순조의 세자가 시강원(侍講院)에 입학하는 장면이 담긴 《정축입학도첩(丁丑入學圖帖)》(1817년), 청계천 준설 후 그것을 기념하여 만든 《제신제진(諸臣製進)》(1769년) 등 궁중의례에 관한 것들과 김홍도(金弘道), 홍득구(洪得龜) 등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홍운당첩(烘雲堂帖)》역시 아주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홍운당첩(烘雲堂帖)》에 실린 홍득구의 그림은 현전(現傳)하는 유일한 그의 그림으로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 밖의 다른 많은 첩들 역시 문화재전문위원의 조사 결과 모두 국보급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임창순 선생 등 전문가들의 선별작업을 거쳐 학술적 가치가 높다.


조선시대 말과 일제 침략시기 동안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들은 외국세력의 약탈 대상이 되어 해외로 유출되었다. 경남대학 박물관으로 환수된 데라우치문고의 일부는 국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의 환수를 위한 선례(先例)가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국제간의 학문적 교류, 나아가 국가간의 관계 교류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특히 야마구치대학측은 자신들이 소장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국에 이 같은 자료가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본교에 기증하게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도 지속적인 문화재 환수 사업은 한 · 일 공동연구의 장을 마련하고 학문적 교류는 물론이며 나아가 한· 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Terauchi Masatake, 1852~1919)


본의 군인·정치가로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우타다 쇼스케[宇田多正輔]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나,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 데라우치[寺內]의 성을 잇게 되었다.

12세에 입대하여 근대 일본군의 창설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심복이 되었다.

1898년 초대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이어 참모본부 차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의 육군장관이 되어 이후 10년 동안 유임되었다.

1910년 조선에서 통감을 겸임, 이완용(李完用) 친일내각으로부터 경찰권을 이양받아 헌병· 경찰을 동원한 삼엄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 국권탈취 후 초대 조선총독이 되어 언론을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武斷)식민정책을 폈다.

1916년 10월 야마가타의 강력한 지원으로 새 내각의 총리가 되어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을 수행하였다(1916~18). 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던 당시에 비정치인을 총리로 임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데라우치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초연내각(超然內閣)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강경노선을 취하여 중국의 친일군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전쟁 기간에 연합군을 돕는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협약들은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준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그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주장했는데, 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대한 관리권을 확보하고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8년 도쿄에서 쌀소동이 일어나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그의 내각은 총사퇴했다.


 

- 데라우치총독(寺內總督) 암살미수사건 = 105인 사건(百五人事件)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확대·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투옥한 사건.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지만, 제1심 공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명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는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 참석차 신의주(新義州)까지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은 선천역(宣川驛) 부근에서 데라우치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안명근은 10년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일제는 이 사건을 기화로 일제는 처음에는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서북지방의 풍문을 조사하던 중 점차 총독암살기도가 실제로 추진되었다는 단서를 잡아, 추적한 결과 평양·선천·정주 등에서 기독교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입수했다고 조작했다.

이 각본에 따르면, 1910년 8월 이래 서울 신민회(新民會) 본부의 지휘하에 5차례에 걸쳐 '총독모살' 계획이 서북지방의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평양·선천·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이 일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작업을 수행했으며, 191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의선열차편으로 총독 데라우치가 서북지방에 오자 그를 암살하려고 각기 준비한 단총(短銃)을 지참하고 각 지방의 역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암살행위는 없었으나 이 사건을 암살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11년 9월부터 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昇薰)을 비롯하여 양기탁·임치정·유동열·안태국 등 전국적으로 600여명을 검거하게 하여 105인사건을 조작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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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베르트 즉흥곡 D.899 N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