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위해 그린 그림 '석가팔상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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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 흥국사
에 불화(佛畵) 한 점을 마련했다.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눠 그린 ‘석가팔상도(釋迦八相圖)’였다.
조선의 몰락과 더불어 이 그림은 잊혀졌고, 최근까지 흥국사의 어느 건물 안에 초라하게 모셔져 있었다.
불교미술사학자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이 최근 흥국사 불교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이 불화를 ‘발견’해 동국대 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 그림은 4폭으로 된 비단 화면 안에, 폭을 다시 둘로 나눠 여덟 장면을 그렸다.
작품에는
무인년(1818년)에 태어난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 1818~1897) 두 분(양위, 兩位),
그리고 을사년(1845년)에 태어난 맏아들 이씨(이재면, 李載冕. 1845~1912)와
갑진생(1844년)인 부인 홍(洪)씨 두 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발원, 發願)이지만, 구체적인 소원은 잘 적지 않는 편이다.
이 작품에서도 흥선대원군과 가족의 소원은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정우택 관장은 “그림의 격이 무척 높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특별 전시된다. 입장은 무료다. 오전 10시~오후 4시까지. 일요일 휴관. (02)2260-3722
- 2007년 11월 24일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 참고 ****
■ 남양주시 흥국사
위 치 :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331
흥국사는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의 골짜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 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다.
신라 599년(진평왕 21) 원광(圓光)법사가 창건, 처음에는 절 이름을 '수락사(水落寺)'라고 했다.
그 이후의 내력은 한동안 끊겼다가,
1568년(선조 1)에 이르러 선조가 그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願堂)을 이곳에 지으면서
<흥덕사(興德寺)> 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그 뒤 1626년(인조 4)에 절 이름이 지금의 '흥국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흥국사는 조선중기 이후 왕실의 원당으로서 발전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백련사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사찰로
선정되면서 사격(寺格)이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오규정소(五糾正所) 는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머물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동시에
관할 사찰들을 관리하던 곳이다.
1793년(정조 17) 왕실에서 기허스님에게 내탕금을 주어 사찰 전체를 중수하게 했다.
1818년(순조 18)에는 만월전과 양로실을 제외한 절 전체가 소실되었는데,
그 4년 뒤인 1822년 다시 왕실에서 내탕금을 내려 기허스님으로 하여금 중수케 했다.
절 안에 법당 지붕보다 높은 향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한편, 흥국사는 덕흥대원군의 원찰이므로,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덕릉'으로, 또 흥국사를 '덕절'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 중기, 명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붕어하였는데
조선 왕실에는 정비 소생의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덕흥군의 제3왕자인 하성군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니
그가 곧 선조가 된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중종의 제8왕자로서 이름은 초(1530-1559)이다.
선조는 즉위한 뒤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그리고 어머니 하동 정씨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였고,
이어서 흥국사에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덕흥대원군은 현재 왕인 선조의 부친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왕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무덤은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리게 되었다.
선조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당시 궁궐의 땔감을 동대문 밖에서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것을 구입하는 사람에게 시키기를
덕릉, 곧 덕흥군의 묘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값을 넉넉하게 쳐주고 사들이지만,
덕흥군의 묘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땔감을 사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민간에서는 어느덧 덕흥대원군의 무덤을 ‘덕릉’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에 따라 흥국사도 아울러 '덕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조의 효심은 묘를 능으로까지 격상시켰던 것이다.
흥국사는 덕흥대원군의 덕릉의 원찰로써 발전했기 때문에 수준 높은 성보문화재가 많은 편이다.
서울의 다른 절에서 흔히 말하기를,
"덕절 중은 불을 때면서 불 막대기로 시왕초를 그리고, 회계 중은 불 때면서 초갈향을 한다."고 할 만큼
불화들이 많은데,
대웅보전과 만월보전, 영산전 등 각 전각 안에는 불보살상과 불화들이 빠짐없이 봉안되어 있다.
만월보전에는 ‘석가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석가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요약 압축한 그림으로,
1869년(고종 6)에 봉안되었고, 크기는 가로 109cm, 세로 214cm.
팔상도는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도솔내의상, 兜率來儀相),
②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③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릉(신덕왕후 강씨)의 원찰 봉국사와 관련하여,
남양주 별내면의 흥국사 연혁에 소개되어 있는 글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의 출가한 딸이 유점사에 있었는데 건강을 잃은 이태조를 위하여 약사여래를 조성하여
정릉의 봉국사에 모시고 기도를 드려 태조의 병이 완쾌됐다는 것.
이러한 소문 덕에 봉국사에는 약사여래께 기도를 드리려는 신도들이 몰려드려 사세가 커졌는데
어느 날 약사여래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 후 이 부처님은 어느 시냇가에서 발견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움직이려 해도 꼼짝도 않더니 “흥국사로 가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번쩍 들렸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흥국사에 모셔진 약사여래는 오늘도 기도와 공양이 끊이지 않으며
특히 신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지성으로 기도드리면 반드시 그 가피를 입는다고 한다.
흥국사의 만월보전에 있는 약사여래불이 이때 봉국사에서 온 약사여래불이고,
봉국사의 만월본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불은 그 후에 조성된 석불인 듯하다.
통도사 영산전 팔상탱(通度寺 靈山殿 八相幀) - 보물 10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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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가로 151㎝, 세로 233.5㎝의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팔상탱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열반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도사의 팔상도와 같은 대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도사의 팔상탱은 대작이면서도 구성이나 색채의 조화가 뛰어난 작품으로 조선 3대 불모(佛母)로 평가되는 유성(有誠) 스님의 현존 유일한 팔상탱화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건물과 나무, 구름 등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구도를 나누어 해당되는 장면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각 묘사된 장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을 써 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산악이나 바위는 뛰어난 필치로 처리되었고 인물의 묘사도 생동감이 넘친다. 화원(畵員) 포관(抱冠), 유성(有誠), 정관(定寬), 지언(志言), 단오(丹悟), 수민(守旻), 지열(志悅), 오수(悟守), 정순(定諄), 두명(斗明), 상오(尙悟), 광신(廣信), 후문(厚文) 등에 의해 1775년(영조 51년)에 조성된 것이다. 현재 보물 1041호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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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태자로 태어나기 전의 전생(前生)을 나타낸 부분으로 소구담(小瞿曇)의 시절에 도적으로 몰려 말뚝에 묶인 채 활을 맞는 장면이다.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入胎) 장면이다. 이때 바라문이 마야부인께서 성인(聖人)을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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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태자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이를 여러 천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러 천신들이 기뻐하고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라 외치는 장면이다. 아니면 출가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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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쪽문으로 나간태자가 노인을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늙고 추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다. 육신의 고통에 대해 깨닫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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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얽힌 삶에 대해 번민하던 태자가 마침내 궁궐을 떠나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잠들어 있고, 빈 의자만이 태자가 떠났음을 알려 주고 있다. 잠든 문지기의 복장은 조선시대 포졸의 복식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태자가 탄 말의 네 발을 사천왕들이 떠받고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고 있다. 왕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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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가 출가해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궁궐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채 설산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제석천이 가사를 받치는 장면이다. 궁궐로 돌아 갈 것을 간청하고 있다. 천녀들이 공양을 하고 있다. 강에 들어가 몸을 씻은 후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먹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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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선정(禪定)에 들자 부처님의 성도(成道)에 위협을 느낀 마왕 파순이 여러 가지 비술로 방해하는 모습과 석가모니가 마군들을 항복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부처님께서는 병 움직이기 내기를 하는 모습이다. 병을 움직이기 위해 마군들의 힘쓰는 모습이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되었다. 노래와 춤으로 유혹하였으나 부처님이 명상에서 깨어나 한번 웃으니 세 미녀가 갑자기 추한 노파로 변해버린 장면이다. 폭력으로 부처님을 항복시키려는 장면이다. 마왕은 보검을 들고 코끼리가 끄는 수레 안에 앉아 있다.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신(地神)에게 증명토록하는 모습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으로 나타내었다. 옆에는 항복한 마군들이 엎드려 빌고 있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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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룬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최초로 설법하시는 장면이다. 이들은 태자와 함께 6년간 고행 했던 이들이다. 설법하시는 모습이다. 설법하시는 부처님은 보살형에 설법인을 한 보신불(報身佛)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수달다장자는 이 동산에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를 지었다. 부처님께서 이를 탑으로 바꾸는 장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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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나가라 니련선하(泥蓮禪河)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든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열반에 든 부처님을 나타내었다. 열반상을 중심으로 여러 제자·보살·신중들이 둘러싸고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가섭이 관 옆에서 비통해 하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실상을 보이는 모습이다. 이를 받아 모으는 장면이다. 성연(性烟)바라문과 돌로나(突路拏)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를 여덟 등분 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이라하며, 나중에 인도 아쇼카왕에 의해 다시 팔만사천탑(八萬四千塔)으로 건립된다. |
■ 통계로 보는 불화 - 불화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 | |||||||||||||
우리나라 사찰과 박물관에 소장된 불화는 총 3153점이며,
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각단탱(735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7세기 조성돼 남겨진 불화 35점 중 23점이 괘불이며,
지역적으로는 경상도에 전체 불화의 3분의 1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결과는 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이 20여년의 노력 끝에 완간한 <한국의 불화> 40권에 실린 불화를 토대로 집계한 것이다. 11월 10일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10회 불교미술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범하 스님은 ‘<한국의 불화> 조사 회고와 앞으로의 과제’ 주제 발표를 통해 <한국의 불화>에 실린 불화의 종류와 지역적 특성 등을 살펴봤다.
범하 스님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불화>에 수록된 불화의 수는 총 3,153점이며,
각단 이 총 735점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후불탱으로 521점, 각부탱이 506점으로 나타났다.
단일유형으로는 신중탱이 423점에 이른다.
후불탱 중에서는 아미타후불탱이 가장 많은 220점이고
그 다음이 석가모니후불탱인 180점이다.
또 각단 탱에서는 칠성탱이 284점으로
두 번째로 많은 산신탱(155점)보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아미타후불탱과 칠성탱 모두 19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조성된 것으로,
이로써 한국 불교가 내세 기복 위주로 변화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중 벽화가 9점이다.
현재 벽화를 제외한 나머지 10점의 불화는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7세기 조성돼 남겨진 불화는 전체 35점에서 23점이 괘불인 것도 주목된다.
괘불은 전시기를 통틀어 20세기 전반에 조성된 26점을 제외하고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에 대대적으로 조성됐다.
이것은 의례 절차상 괘불이 사용되기 시작했거나 괘불의 사용빈도가 많았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에 우리나라 전체 불화의 30% 이상이 있다. 가장 적은 수의 불화가 남아 있는 곳은 강원도로,
사찰의 수는 많지만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전남지역은 53불탱과 화엄탱, 밀교계 도상인 법신중위회37존도 등 특이한 도상이 전해지는데
이는 지역의 신앙적 특징을 알려준다.
범하 스님은 “앞으로 북한 및 해외소재 불화를 조사할 필요가 있으며, 대중이 불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출판물 발간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 붓다뉴스 / 2007-11-19 | |||||||||||||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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