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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요시노가리 한국展

Gijuzzang Dream 2007. 11. 22. 13:09

  

 

 

 

 

 

 

  

 

 2007년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


ㅇ전  시  명 :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 
                      YOSHINOGARI, Ancient Korean Culture in Japan
ㅇ전시  기간 : 2007. 10. 16 - 12. 2
ㅇ전시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2,000년 전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교류했던 한일 양국의 문물 600여 점 비교전시
일본 최대의 마을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 출토유물 국내 최초 공개

 

 

 

국립중앙박물관은 2007년도 기획특별전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을

일본 사가현 교육위원회와 공동으로 10월 16일부터 12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00년 전의 한·일 양국 문물을 비교 전시하는 최초의 기획특별전으로

양국의 유물 600여점이 전시된다.

특히 일본 유물 중에는 요시노가리 유적 출토 세형동검 등 국가중요문화재 2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특별전에는 일본 야요이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독무덤, 토기, 꺽창, 본뜬거울 외에

한반도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인 덧띠토기, 청동기 거푸집, 한국식동검 등이 비교·전시된다.

이와 함께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식 토기와 청동기도 전시되어

당시의 활발한 교류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한반도에서 유입된 벼농사와 농경기술로 출발한 초기의 작은 요시노가리 마을이

야요이 후기(기원후 1세기~기원후 3세기)에 대규모의 주거 공간과 마을 공동의 제사 공간,

생산물 보관창고와 시장 등을 갖춘 도시 또는 초기국가의 중심 마을로 번창한 발전과정도 보여준다.

요시노가리유적은 일본 북부 규슈의 사가현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마을유적으로,

1986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규모와 발굴성과는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유적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 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 문화의 특징과

한반도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요시노가리유적은 이 시기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고대사회 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밝혀주고 있다.

전시는 크게 한반도의 농경문화와 일본 전파, 야요이 마을의 탄생,

고대 한반도와 야요이 마을의 생활, 한반도 출토 일본유물과 한일문화교류 등으로 구성된다.


제1부 ‘한반도의 농경문화와 일본 전파’에서는

진주 대평리, 부여 송국리 등 벼농사 관련 유적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벼농사의 시작과 발전을 밝히고,

일본 야요이시대 초기의 벼농사 유적인 나바다케(菜畑)유적 출토품을 전시하여

일본의 야요이시대 벼농사 문화가 한반도 벼농사의 일본 전파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2부 ‘야요이 마을의 탄생’에서는

요시노가리 유적의 초기 출토품들을 통해 요시노가리 유적의 탄생이

한반도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이와 함께 현재 복원된 요시노가리 유적을

사진 자료로 소개하여 관람객들이 요시노가리 유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3부 ‘고대 한반도와 야요이 마을의 생활’에서는

한국식동검, 다뉴세문경, 점토대토기 등 한반도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한반도 출토 관련 유물과 비교 전시하여 당시 문화교류의 양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출토 일본유물과 한일문화교류’에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 시대 유물을 통해

한·일 양국의 문화 교류가 가지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08년 1월 1일부터 2월 11일까지 일본 사가현립미술관에 순회 전시된다. 
 

 


[요시노가리 유적 복원 전경]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은 일본 북부 규슈의 사가현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고대 마을유적으로,

1986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규모와 발굴성과는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유적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 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 문화의 특징과

한반도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야요이시대 전기에는 소규모였다가 야요이시대 후기가 되면

넓이 40만㎡가 넘는 대규모의 마을로 발전하게 된다.

이 마을에는 지배자의 생활 공간 및 마을의 제사 공간, 수확물 등을 보관하고

주변마을 사람들과 교역交易을 하였던 시장 겸 창고 구역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규모로 보아 야요이후기의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종의 도시(都市) 또는 초기 국가의 중심 마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
길이 44.8cm(오른쪽), 일본중요문화재, 사가현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의 분구묘에서 출토된 한국식동검이다.

한국식동검은 청동 혹은 백동으로 만든 단검으로,

검몸(劍身)의 폭이 좁고 끝이 뾰족하며 양날이 직선적이어서 세형동검(細形銅劍)이라고도 한다.
한국식동검은 기원전 4세기 충청도지역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종종 한국식동검문화라고 불리는 특징적인의 유물과 함께 출토된다.

처음에는 부채날도끼(扇形銅斧) · 거친무늬거울(多紐組文鏡)등과 함께 출토되지만

이후 꺽창(銅戈) · 네모도끼(銅斧) · 잔무늬거울(多紐細文鏡) · 각종 청동방울(靑銅鈴) 등이

새롭게 나타난다.
이러한 한국식동검은 일본 규슈 북부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일본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한국식동검 · 투겁창 · 꺽창 · 거울 · 방울 · 옥 · 덧띠토기 ·

검은간토기 등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야요이시대 규슈 북부에서 유력한 집단 중의 하나인 요시노가리 유적의 거대한 분구묘에서도

한국식동검과 유리대롱옥이 출토되어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얘기해 주고 있다.



[덧띠토기(粘土帶土器)]
높이 18.7(좌) · 23.4cm, 아산 남성리(좌) · 사가현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아가리에 점토띠를 덧붙여 만든 토기이다.

덧띠토기는 한강 하류에서 금강 하류에 이르는 중서부 해안지역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주변지역으로 전해지는데, 영·호남 등 한반도 남부지방뿐만 아니라

규슈를 중심으로 한 일본열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덧띠토기 외에 한반도계 무문토기도 함께 출토되어

당시의 교류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잔무늬거울(多紐細文鏡)]
지름 16.2(좌) · 10.5cm, 횡성 강림리(좌) · 사가현 혼손고모리(本村籠)
잔무늬거울은 한국식동검문화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청동기문화를 상징한다.

원형의 거울 뒷면 중앙에 두 개 또는 세 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나머지 공간에 정교한 집선문(集線文)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잔무늬거울은 단순히 거울 본래의 기능을 넘어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였다.

특히, 거울과 함께 출토되는 청동방울도 제사와 같은 의식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기 때문에

이 유물들이 함께 출토된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최고 지배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반도의 잔무늬거울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규슈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모두 10여 점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로 독무덤과 같은 지배계급의 무덤과 제사유적에서 발견된 점에 비추어 볼 때

덧띠토기문화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투겁창(中細形銅鉾)]
83.9cm, 일본중요문화재, 사가현 겐미다니(檢見谷)

겐미다니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이다. 창의 표면은 대부분 구분연마(區分硏磨)하였는데,

구분연마는 창의 몸통을 등날에서 약 70°방향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비스듬하게 대칭되도록

2cm 정도의 너비로 갈아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빛을 난반사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청동투겁창은 실제 전투에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 제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제사용의 청동기는 한국으로 전해지는데,

주로 장례의례(葬禮儀禮)에 사용하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자들이 의도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한국

- 쌀농사, 일본을 바꾸다 -

 

중국에서 시작된 농사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 4천년 경 신석기시대로,

처음에는 밭에서 잡곡농사를 지었다.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논이 아닌 밭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런 밭벼(陸稻)는 본질적으로 논에서 재배하는 논벼(水稻)와 차이는 없지만,

밭벼를 재배하는 화전(火畑)은 연작(連作)이 불가능하여 일정한 휴한 기간이 필요하므로

논에 비해 생산성이 현저히 낮다. 이와는 달리 논농사는 생산성이 높아 잉여생산물의 비축이 가능하다.

 

벼는 산성에 강하여 어떠한 산성토양이라도 물만 있으면 재배할 수 있으며,

물이 가지고 온 유기질에 의해 토양의 비옥도가 자연히 유지되기 때문에

잡초처리만 잘하면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여 송국리유적 출토, 불탄 쌀(탄화미, 炭化米) 

 

우리나라에서는 논농사는 송국리형토기, 반달돌칼, 돌널무덤 같은 송국리유형을 지표로 하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청동기시대 전기 혹은 그 이전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높은 논이 조사되고 있다.

따라서 논농사는 청동기시대 전기 혹은 그 이전에 발생하여

후기에 정형화된 형태로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 전기와 후기를 거쳐 정형화된 논농사는

일본에 영향을 미쳐 야요이(彌生)문화를 탄생시킨다.

야요이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논농사가 시작된다는 것으로,

조몬(繩)시대에서 야요이시대로의 전환은 돋은띠무늬 토기, 단지, 굽다리접시로 대표되는

한반도 무문토기와 함께 일본 북부 규슈지방을 중심으로 등장한다.

 

사가(佐賀)현 나바타케(菜畑)유적과 후쿠오카(福岡)현 이타쓰케(板村) 유적에서는

돋은띠무늬 토기와 반달돌칼, 불탄 쌀과 함께 용수로가 갖춰진 논이 확인되어

야요이시대 초기에 일본에서 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달돌칼(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 

 

이처럼 일본 야요이문화는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요소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농경문화요소와 더불어 이루어진 기술혁신과 사회변화는

일본재지사회에서 새로운 집단관계를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잉여생산물, 즉 쌀의 저축에 의해 얻어진 부(富)는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집단 사이의 분쟁을 유발시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야요이인들은 이웃 마을과 분쟁애 대비하기 위해 거대한 환호취락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요시노가리 유적은 규슈에 있었던 가장 큰 환호취락이다.

거대한 환호취락을 중심으로 한 야요이사회는 더욱 발전하여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 박진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 기획전시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61회>

 

 

 

 

 

요시노가리 유적이란?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의 야요이(彌生)시대는

일본에서 벼농사문화가 시작되고 정주(定住)문화가 뿌리 박힌

일본문화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이다.

 

야요이시대 유적 중에서도 요시노가리 유적은

사가현(佐賀縣) 간자키(神岐)군 간자키정(神岐町), 미타가와초(三田川町), 히가시세후리무라(東背振村) 등

3개 마을에 걸친 일본 최대의 유적으로

야요이시대 ‘구니’의 중심적인 취락의 전모와 야요이시대 700년간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일본 고대역사를 해명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자료와 정보가 집결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모습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오는

‘야마타이코쿠(邪馬台國)’시대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 국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요시노가리의 역사

 

야요이시대는 약 700년간이나 지속된 긴 시대이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이 긴 야요이시대 전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각 시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이 시대에 어떻게 사회가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매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에서는 ‘야요이시대 후기후반(서기 3세기경)’을 복원정비 대상 시기로 하고

지금까지 발굴조사 성과와 민족학 등 다양한 전문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복원정비를 실시하고 있다.

 

<야요이시대 전기(기원전5세기-기원전 3세기)>

요시노가리 구릉 일대에 나뉘어 ‘무라(마을)’가 탄생했다.

그리고 남쪽 일대에 환호가 있는 취락이 출현하고 ‘무라’에서 ‘구니’로 발전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요이시대 중기(기원전 1세기-기원전 1세기)>

남쪽 구릉을 일주하는 큰 바깥 환호가 만들어진다.

수장을 매장하는 ‘분구묘’와 많은 ‘옹관묘지’가 보이게 된다.

취락의 발전과 함께 방어도 엄중해진 점으로 미루어보아 ‘분쟁’이 심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야요이시대 후기(기원후 1세기-기원후 3세기)>

국내 최대급의 환호 취락으로 발전해 대규모의 V자형 환호 해자(垓子)로 둘러싸고

특별한 공간인 두 개의 내곽(북내곽/ 남내곽)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북내곽에서는 대형건물이 등장하고 요시노가리의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야요이 상식

 

Q. 어떤 것을 먹었을까?

A. 야요이시대에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전래되었다.

또 쌀 외에도 바다와 산에서 나는 다양한 산물들을 먹었다.

 

Q. 마시는 물은 어디서 구했을까?

A. 요시노가리에서는 샘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간단한 울타리로 둘러싸고 식수를 확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야요이시대 끝 무렵, 고훈(古墳)시대 초기 경에 만들어진 우물도 한 군데 발견되었다.

 

Q. 목욕탕이나 화장실도 있었을까?

A.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화장실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유적에서는 원형해자 안에서 사람에게만 있는 기생충이 발견된 예가 있으므로

모아서 원형해자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시대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대신 강에서 멱을 감았다고 추정한다.

 

Q. 옷은 어떤 것을 입었을까?

A.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따르면 남자는 천을 몸에 두를 뿐이고(橫幅衣),

여자는 천 가운데 구멍을 뚫어서 뒤집어 쓴 것(貫頭衣)을 입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옹관 속에서 마(麻) 혹은 비단천 조각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신분에 따라 옷의 재료나 형태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한다.

 

Q. 문자나 언어는 사용했을까?

A. 문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것이 없으며 언어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단 <위지왜인전>에는 위나라와의 교섭, 교류 때 ‘문장을 주고 받았다’  ‘통역이 있다’ 등의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자나 언어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 듯 하다.

또 당시에는 같은 일본 안에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 있어서

현재의 일본어와 같이 전국이 공통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에까지 ‘日 역사왜곡’ 침투

 

지난 10월15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의  ‘요시노가리 한국전’을 개최하고 있다.

12월2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한 · 일 고대 유물의 비교를 통해

일본에 우리 고대문화가 전파된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 · 일 고대사 비교연표’를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요시노가리 유적 연대를 기원전 500년~기원후 300년까지로 설정,

그 시작을 200년이나 끌어올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시대를 원(Proto)삼국시대로 설정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를 원시 삼국시대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필자는 1989년 9월 일본문화청이 후원하고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협력하여

개최된  ‘요시노가리전’을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고고연구소부속박물관에서 참관한 바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사히신문이 제작한 전시도록을 구입하여 펼쳐보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일본 규슈대 니시다니 다다시 교수의 글 때문이었다.

그는 “대수(帶水)를 한강으로 비정하고, 대방군을 서울 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서울 강동구(지금의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주목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사진설명에서는

풍납토성을 중국 한나라 때 설치한 대방군토성(帶方郡土城)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본문에 삽입된  ‘동아시아의 지도’ 에는 한반도의 충남북부까지를 대방군으로 표시해 놓았다.

2001년판 요시노가리전 도록연표에는 백제의 건국을 346년으로, 신라의 건국을 356년으로 기록했다.

그런 니시다니가 정년 후에는 서울 아차산  ‘보루’ 발굴에 지도위원으로 초대된 적도 있고,

지난해부터는 우리나라 모 국립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속칭 지한파(知韓派) 학자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일본 고고학회장을 맡고 있는  ‘극우학자’라는 점이다.

니시다니의 이 망발을 일본의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편찬한  

 ‘2006년판 새로 쓰는 역사 교과서’(후소샤)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즉 “대방군은 중국의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郡)으로, 그 중심지는 현재의 서울 부근”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한·일 양국의 역사교사가 공동 집필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 - 마주 보는 한일사 I’(사계절 · 2006)이

일본 후소샤 발행 교과서의 대방군 지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뿐 아니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이 우리나라에 버젓이, 그것도 국립중앙박물관에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요시노가리 특별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한반도와 일본 규슈’ 논문집을 보자.

이곳에 수록된 한 · 중 · 일 연표를 보면 어김없이

기원전에 건국한 백제와 신라가 4세기 중엽 건국된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번  ‘요시노가리 한국전’은

일본 정부가 후원하고 사가현 교육위가 공동주최하는 형식으로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겉으로는 친선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학계가 이를 모른 채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  [경향] 2007년 11월 18일 / 이형구, 선문대교수 · 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