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령총 (金鈴塚)
신라의 땅, 역사서에는 많은 왕들이 등장하지만
왕의 모습과 세계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무덤이다.
무덤은 사람이 죽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공간, 즉 有에서 無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다시 有로 되어 신라를 말하고 있다.
무덤과 무덤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은 신라와 왕의 찬란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를 말할 때 경주시내 곳곳에 작은 동산처럼 솟아있는 무덤이 가장 먼저 떠오르듯,
신라를 대표하는 거대한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국력과 문화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조형물로,
신라가 대내적으로 팽창하던 마립간기인 5세기에서 6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무덤은 지상 또는 지하에 덧널(木槨)을 설치한 뒤,
덧널에 주인공의 시신이 안치된 널(木棺)과 다양하고 화려한 껴묻거리를 부장하였다.
덧널 주위에 냇돌로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이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는 금관, 금허리띠, 유리잔 등 화려하고 많은 유물이 부장되었으며
이들 유물은 주변국가와는 차별되는 신라만의 독특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불행히도 그 주인공이 밝혀진 것이 없다.
경주시내에 위치한 무덤들은 그 주인공을 밝히지 못한 채 1-155호까지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으며,
일부 무덤은 금관이 가장 먼저 출토되었다고 하여 ‘금관총(金冠塚)’,
천마도가 출토되었다고 하여 ‘천마총(天馬塚)’ 등으로 후세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크고 작은 무덤 중에서 경주 노동동에 위치한 ‘금령총(金鈴塚)’이라는 작은 무덤과
무덤에서 출토된 금방울이 주목을 끈다.
‘금령총(金鈴塚)’은 1924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무덤의 구조와 크기가 밝혀졌는데
지름이 약 18m 크기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무덤은 상자형의 덧널 속에 길이 1.5m, 너비 0.6m 내외의 작은 나무널이 놓여졌는데,
널 속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둥근고리자루칼을 허리에 찬 채 안치되었다.
특히 주인공의 허리부분과 금관에 매달린 드림장식에서 각각 한 쌍의 금방울이 출토되어
금방울무덤이란 의미의 ‘금령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허리띠 외에도 목걸이, 귀걸이, 가슴드리개, 팔찌와 반지 등의 장신구와 함께
말탄사람모양토기, 배모양토기, 등잔모양토기, 유리잔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천마총 등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 보이는 최상급의 장신구가 모두 출토되었지만
그 크기가 매우 작은 것이 특징이다.
경주 시내 중심부인 노동동 일대에는 봉황대, 식리총, 금령총 등의 큰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봉황대(125호)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98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며,
봉황대 남쪽에 있는 식리총(126호)은 문양이 독특한 금동제신발(식리, 飾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924년 금령총 발굴 모습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127호)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으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의 구조를 최초로 확인한 뜻깊은 무덤이기도 하다.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금령총은 말 그대로 ‘금령(金鈴)’, 금방울이 처음으로 발견되어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무덤 속에서 금방울만 나온 것은 아니다. 금관과 금허리띠를 비롯하여
말탄사람토기, 배모양토기 등 신라를 대표할 만한 국보급 유물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으며 금관이나 금허리띠, 꾸미개의 크기가 작고
말탄사람토기와 배모양토기 등 상형토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령총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금방울을 살펴보면,
중심고리(主環)는 없는 상태이며, 작은고리 아래에 사슬로 엮어 내려가고
그 아래에 지름 1.4㎝ 정도의 금방울을 매단 형태이다.
이 금방울 안에는 작은 구슬이 들어가 있어 흔들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금방울의 표면에는 가는 금테를 마름모 모양으로 붙여 새김눈(각목, 刻目)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구획된 마름모 모양 안에도 역시 가는 금테를 둥글게 붙이고 새김문 처리한 후
그 안에 푸른색의 유리옥을 감입시켰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도 지름이 16.5㎝에 불과하다.
관테에 3개의 세움장식(입식, 立飾)과 2개의 사슴뿔장식을 부착한 것은 전형적인 신라금관과 같으나
곱은옥(曲玉)이 없고 크기가 작은 점이 특징적이다.
교동금관과 함께 무덤의 주인공이 유소년(幼少年)일 가능성이 높다.
금허리띠 역시 총길이가 71㎝에 불과하여 다른 허리띠에 비한다면 최고 50㎝ 가량이나 작다.
기본 형식은 황남대총 남분 이래 신라 금제허리띠의 형식을 잇고 있으나 드리개가 매우 소략하다.
띠꾸미개는 모두 23매인데 꾸미개에 표현된 인동무늬가 매우 간략화 되어 있다.
허리띠에 매단 드리개 중 여러 개의 금판을 이어서 만든 것은 7줄이며,
그 외에 연필모양 장식 2개, 곱은옥 3개 등 모두 13개이다.
띠꾸미개와 큰 드리개에는 금판을 오려 만든 달개를 매달아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금령총에서는 굵은고리 귀걸이와 가는고리 귀걸이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는고리 귀걸이 2쌍이다.
먼저 1쌍은 지름 1.4㎝ 크기에 2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그 중 1줄은 가는 금판을 이용하여 샛장식과 드림을 매달았으며,
샛장식은 상하에 모자모양 장식(帽子形裝飾)이 있고,
그 속에는 원래 유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부식되어 없어져 있는 상태이다.
또 다른 1줄에도 금판으로 중간식과 수하식을 매달았는데,
샛장식은 굵은고리 귀걸이의 샛장식처럼 고리를 여러 개 연접시켜 만든 구체와 반구체로 장식하였으며,
구체에 9개의 달개를 매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드림에는 금모(金帽)를 씌운 곱은옥(曲玉)을 매달았는데 무령왕의 귀걸이와 비교된다.
다른 1쌍은 주환이 없어 드리개 수식(垂飾)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연결금구는 금판이며
소환연접입방체(小環連接立方體, 작은고리이은입방체, 둥근고리 6개를 정사각형으로 붙여서 만든 것)로
중간을 장식하였는데 작은 고리 안에는 푸른색 유리옥을 끼워 넣었다.
드림으로는 오목한 삼엽형(三葉形)의 장식을 4개 매달았다.
주연부에는 각목대를 돌렸다. 2쌍이 출토되었는데 수하식에는 푸른색의 유리를 덧씌워 장식하였다.
이처럼 유리로 장식하는 기법은 앞 시기보다 훨씬 세련된 기법으로,
금관총과 금령총 단계만의 특징이다.
금령총에서는 비슷한 모양을 한 2점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다.
아가리가 약간 외반되어 있는 유리잔이다.
기포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양질의 유리기로서 연녹색을 띤다.
몸체의 중간에는 2줄의 물방울무늬를 청색반점으로 찍어 돌려 장식하였다.
이렇듯, 금령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황남대총 북쪽무덤에서 출토된 허리띠의 길이가 120㎝ 내외인 것에 비해 매우 짧으며,
금관의 밑지름 또한 15㎝ 내외로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에 비해 작은 편이다.
또한 반지, 팔찌, 목걸이 등도 어린아이의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 초 신라의 왕족, 특히 어린 왕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허리에는 딸랑거리는 금방울을 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라왕족의 위엄을 보이고자
화려한 황금으로 치장한 무덤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신라실, 홍진근, 김현희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67회, 제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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