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장신구
장신구(裝身具)란 신체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장식하는 도구로,
때로는 권위나 위세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백제의 장신구로는 일반적으로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비녀 등이 있으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관(冠)꾸미개, 허리띠 꾸미개 등도 이에 해당된다.
백제의 목걸이는 주로 금, 은, 옥, 유리 등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한성시기부터 사비시기까지 지속적으로 그 출토 예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둥근 금구슬 목걸이와 주름이 잡힌 금구슬 목걸이는 반구형의 얇은 금판을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속이 비어있고 실을 꿰어 연결할 수 있도록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탄목 금구슬목걸이는 탄화된 나무에 금테두리를 두른 납작한 구슬로
최근 조사된 부여 왕흥사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금제 목걸이(왕비), 공주 무령왕릉 출토
왕흥사지 출토, 탄목 금구슬목걸이 부분
왕비의 관 꾸미개 근처에서 발견된 금제 7절목걸이는 각이 진 금막대 7개를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금막대의 끝부분을 늘려 고리를 만든 후 이를 다시 몸체에 감아 고정시켰다.
이러한 방법은 백제 특유의 기법으로 목걸이 이외에도 팔찌나 귀걸이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왕비의 머리와 가슴 근처에서는 작은 고리를 여러 개 붙여서 공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목걸이가 발견되었는데,
부여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구슬이 출토되고 있다.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금 알갱이 구슬/ 유리구슬
유리로 만든 목걸이 역시 한성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풍납토성, 화성 마하리, 나주 복암리, 공주 무령왕릉, 수촌리, 서천 봉선리, 서산 부장리,
부여 염창리,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익산 왕궁리 등지에서 출토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 귀걸이는 크게 굵은고리귀걸이(태환, 太鐶)와 가는고리귀걸이(세환, 細鐶)로 구분되는데,
백제의 귀걸이는 모두 가는고리귀걸이다.
주로 금이나 금동으로 제작되었으며, 고구려나 신라의 것에 비해 간결한 형태이다.
한성시기 귀걸이의 일반적인 모습은 가는 고리에 공 모양의 중간장식이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로 하트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서울 석촌동, 천안 용원리 9ㆍ37ㆍ129호분, 원주 법천리 1호분, 청주 신봉동 54호분,
청원 주성리 2호분 출토품 등이 있다.
금제 귀걸이, 청원 주성리 출토
금제 귀걸이(왕), 공주 무녕왕릉 출토
금제 귀걸이(왕비), 공주 무녕왕릉 출토
웅진시기 귀걸이는 백제 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5세기 말-6세기 초는 금속공예의 제작기법이 가장 발달한 시기로,
삼국의 귀걸이는 형태나 제작기법 등에 있어 유사한 점이 많다.
공주 송산리 6호분, 무령왕릉, 교촌리, 주미리, 익산 입점리 1호분 출토품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공주 무령왕릉 출토 귀걸이는 백제 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며, 뛰어난 금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금 알갱이나 금선을 표면에 붙어 장식하는 누금세공기법이 사용되었다.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고리에 2개의 드림부를 단 화려한 형태로
경주 황오동 34호묘, 일분 구마모토형 에다후나야마고분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사비시기에 이르면 단순한 형태의 귀걸이가 주로 만들어지는데,
중간장식과 연결금구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들거나 중심고리로만 구성된 귀걸이가 대부분이다.
부여 능안골 고분군 32ㆍ36ㆍ49호묘, 관북리, 염창리 독널무덤 등
주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백제의 팔찌는 금속막대를 둥글게 구부린 것, 표면에 톱니모양을 새긴 것 등이 있는데,
부여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나주 덕산리 4호분, 신촌리 을관 등에서 출토 예가 확인된다.
톱니모양 팔찌는 백제지역 이외에서도 많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양식으로 보인다. 재질은 금, 은, 동제가 모두 제작되고 있다.
이러한 톱니모양무늬는 팔찌 이외에 반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공주 금학동 14ㆍ18호 석실분 출토품 등에서 확인된다.
이외에도 백제의 팔찌로는 무령왕릉 출토의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진 은제 팔찌와 2절 팔찌가 있다.
4절 팔찌는 7절 목걸이와 같은 형태의 팔찌로 금막대와 은막대가 번갈아 연결하였다.
금제 팔찌(왕비), 공주 무령왕릉 출토
백제의 머리꾸미개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 뒤꽂이다.
이 뒤꽂이는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얇은 금판을 두드려 문양을 도출해냈는데, 아래쪽에는 넝쿨무늬가, 위쪽에는 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부여 함양리에서는 은제 비녀가 출토되었는데
비녀의 끝부분에는 누금세공기법으로 만든 꽃받침 모양의 금장식이 끼워져 있다.
또한 부여 능안골 44호 돌방무덤에서는 남성의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머리에 꽂는 꾸미개인 동곳이,
왕흥사지에서는 옥으로 만든 비녀가 출토되었다.
은제 비녀, 부여 함양리 출토
금제 관(冠) 꾸미개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의 것 각각 2점이 출토되었다.
왕의 관꾸미개는 금판에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文)와 불꽃무늬(화염문, 火焰文)을 투조하여
제작하였으며, 127개의 작은 달개(영락, 瓔珞)를 금실로 꼬아 달았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조에는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바지를 입고,
오라관(烏羅冠)에 금화(金花)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와 <신당서(新唐書)> 백제조에서도 확인된다.
무령왕의 관꾸미개는 문헌기록이나 출토 위치 등으로 미루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제 관꾸미개(왕), 공주 무령왕릉 출토
금제 관꾸미개(왕비), 공주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관꾸미개는 대칭형의 구도로,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풀꽃무늬를 투조하였으며
영락은 달지 않았다. 중앙에 7판의 복련(伏蓮) 위로 병을 배치하며,
병 주위로는 연꽃과 인동당초무늬가 뻗어있다. 왕의 관꾸미개에 비해 도식화되어 있다.
은제 관(冠)꾸미개는 은판을 꽃모양으로 오려 만든 꾸미개로
논산 육곡리,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 복암리 3호분, 부여 하황리, 염창리, 능산리 능안골고분 등
백제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에서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데, 얇은 은판을 오려 줄기와 좌우 곁가지에 꽃봉오리를 만든 후
가운데를 V자 모양으로 접었다. 좌우 곁가지는 1단 또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줄기의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은제 관꾸미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오라관, 烏羅冠)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奈率) 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라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은제 관꾸미개, 부여 능안골 36호분 동편 출토
관모 철제 테, 부여 왕흥사지 출토
은제 관꾸미개, 부여 능안골 36호분 서편 출토
부여 능산리 능안골 36호분에서는 은제 관꾸미기개와 함께
모자의 심(心)으로 추정되는 역삼각형 모양의 철제테(鐵製心)가 발견되었다.
철제테는 부여 능안골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운모장식은 0.008㎝ 두께의 얇은 운모판을 오려 연꽃모양(6엽, 복엽)으로 만든 것으로
꽃잎 사이에는 금박을 넣어 장식하였다. 이 운모 관꾸미개는 백제 세공기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허리띠는 옷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장신구로,
허리띠 꾸미개는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의 표면을 장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띠고리(교구, 鉸具), 띠끝장식(대단금구, 帶端金具), 띠꾸미개(교판, 鉸板),
띠드리개(요패, 腰佩)로 구성된다.
한성시기에는 중국 진(晋)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금동제 허리띠장식이
서울 몽촌토성에서 출토되었으며,
웅진시기 허리띠꾸미개는 공주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다.
백제의 허리띠는 웅진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며 사비시기에 이르면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부여 능산리사지 목탑지, 능안골 36호분 동편ㆍ44호분ㆍ50호분,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묘 출토품 등은
못을 박거나 땜질을 하여 금속판을 고정시킨 반면,
부여 능안골 36호분 서편ㆍ염창리 고분군 V-55호분ㆍ가곡리, 나주 복암리 3호분 6호묘 출토품은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
허리띠꾸미개, 부여 능안골 36호분 동편 출토
한편 착용방법에 있어 무령왕릉이나 신라의 허리띠장식은
띠고리에 끼워진 뾰족한 걸이에 허리끈을 끼워 걸도록 제작되었으나
부여 능안골 출토품에는 이러한 걸이부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띠고리에 허리띠 끈을 넣어 한번 감아 아래로 늘어뜨려 착용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띠끝장식이 아래로 드리워지기 때문에 별도의 드리개는 달지 않았다.
백제의 허리띠 착용방법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도깨비무늬벽돌의 도깨비 허리띠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백제실, 노희숙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108회>, 2008년 10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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