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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구 시인과의 만남 | ||||||||
한숨에도 불녀갈듯 보-하니 떠잇는 대부분 김현구(金炫구) 시인의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럿습니다”라는 시를 처음 접할 것이다. 필자는 5년 전에 민간단체인 강진문예마당 회원들과 “강진의 인물전”에서 시인의 유고(遺稿)와 관련 사진 등을 접하면서 반세기 전에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진솔한 인간의 감정을 노래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30년대 영랑 김윤식과 용하 박용철과 같이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문학(詩文學)』이나 『문학(文學)』등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지만, 생전에 시집을 발표하지 못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에 돌아가셨다. 그의 유고시집은 1970년에 임상호(전 강진신용협동조합 이사장)를 비롯한 현구기념사업회와 유족에 의하여 『현구시집(玄鳩詩集)』으로 발간되어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진 후, 1977년에 김학동 교수의 『한국현대시인연구』와 1981년에 김현의 『한국현대시문학대계』7 등에 관련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1996년에 광주여대 김선태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인「김현구 詩 연구」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었다. 또한 현구기념사업회 주최로 1992년에 강진군립도서관 경내에 『시문학』 2호에 발표한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럿슴니다”를 새긴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문헌과 증언의 한계로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03년에 현구시인에 관한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생전에 시인과 인연을 맺었던 분들을 만나서 시인과 관련된 일화를 녹취하여 정리하였다. 당시 현구시인의 전시회는 유족이 소장한 유고(遺稿)와 새로 찾은 사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전시회를 계기로 유족들이 친필 유고와 시문학 등의 자료 일체를 강진군에 기증하였다.
영랑생가를 찾는 이들은 많지만, 현구의 생가와 시비를 찾는 이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전시회는 이렇게 도외시되었던 시문학파의 한 사람을 지역의 민간단체 회원들이 관련 증언을 수집하고 전시함으로서 그가 차지한 문학사의 위상과 시작(詩作) 활동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루어졌다.
현구 시인과 동향(同鄕)이면서 정지용 선생에게 수업을 받은 김병국 선생의 증언에 “정지용 시인이 내가 강진 출신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라 '현구 시가 좋다! 현구 시가 좋다!'를 되풀이 하였다”와 “현구와 지용은 두 분이 겪은 고난과 가난 속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현구 시가 좋다! 현구 시가 좋다!'라고 되풀이 한 정지용은 그대로 김현구의 절규가 아닌가 싶다“ 라고 하였다.
근대문학사의 거봉(巨峰)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현구의 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지역에서라도 존경받는 시인으로 되살아난다면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남도의 자연을 구수한 사투리로 풀어낸 시인의 마음을 한 줄이라도 새기고 싶다. - 최선일,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8-11-08,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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