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년 전 청동거울 ‘신비한 비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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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의 ‘초정밀 문양’ 제작 비법 실마리 나왔다
꼭지도 중앙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두 개 또는 세 개가 달려 있다. 거친무늬 거울에서 발전하여 문양의 선이 가늘고 정교해진 것이 잔무늬거울이다. 가는선을 여러 방향에서 촘촘히 새겨 햇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거울의 몸체는 태양을 뜻하며 잔무늬는 태양에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효과를 연출한 것이다. 청동방울류와 함께 이 시기 대표적인 의식용도구이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한반도에 최첨단 나노 기술이 존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기원전 4세기 무렵 청동기 시대에 만든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紐細汶鏡)은 이 시기 한반도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정밀 기술이 존재했음을 웅변하는 유물이다. 다뉴세문경 제작 방법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금껏 수차례 복원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다. 다뉴(多紐)란 뉴(끈으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다는 뜻으로, 거울 뒷면에 달려 있는 고리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이 고리에 끈을 걸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 뒷면에는 직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다. 세문(細汶)은 이 문양이 정밀하다는 뜻에서 붙은 것으로, 무늬가 굵고 거친 거울은 따로 다뉴조문경(多紐粗汶境)이라고 부른다. 다뉴조문경은 청동기 전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도 같은 종류의 청동 거울이 발견된다.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숭실대 국보경)은 1960년대 충남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100여 점의 다뉴세문경 중 가장 크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숭실대 국보경은 한때 출토지가 강원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고(故)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을 빌려 국보경은 원래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이 발견했는데 중간상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원도에서 발견한 것으로 둔갑했다고 전했다. 국보 다뉴세문경은 지금껏 발견된 것 중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지름이 21.2㎝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좁은 공간에 무려 1만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불과 0.3㎜에 불과한데다, 원과 직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 최고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과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을 받아 그린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오로지 육안과 초보적인 수준의 기구에 의존해서 이처럼 정교한 문양을 그렸다는 것 때문에 신비감은 물론,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위조 논란까지 일고 있는 것이다. 위) 수많은 직선을 이어서 그린 다뉴세문경의 삼각 문양. 아래) 다뉴세문경 외구의 동심원. <국립중앙박물관> 도안이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그 도안을 바탕으로 주물을 떠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물 기술이 필요하다. 주물 기술에 문제가 있을 경우 도안의 정교함이 희생되어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거울이 도안과 같은 수준의 정밀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푸집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거푸집의 재질과 형태는 더욱더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발표한 두 개의 논문이 그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7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올해 8월까지 거울 표면이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한 다뉴세문경에 대한 보존 처리를 진행하면서 제작 방법을 규명했다. 보존과학팀은 이 과정에서 국보경을 발견 당시와 같은 19개의 파편으로 분리하고 파편의 단면을 X-선형광분석기와 입체 현미경 등을 동원하여 분석했다. 주석과 구리의 비율, 거푸집의 재질, 문양 제도 방법 등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우선 국보 다뉴세문경은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중요한 것은 주석 함유량이 많을수록 거울의 반사율이 높아지지만 주석 함유량이 일정 비율을 초과하면 인장 강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작은 충격만으로도 쉽게 깨지기 때문이다. 보존과학팀에 따르면 다뉴세문경의 구리 대 주석 비율은 65.7 : 34.3으로 다른 청동 거울에 비해 주석 함유량이 높은 편이고, 제작 당시 거울면의 빛깔은 은백색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거푸집의 재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았다. 몇 차례 복원 시도에서도 동판이나 납 등에 무늬를 새긴 뒤 밀랍판으로 눌러 모양을 본뜨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최종 주물에서 무늬가 망가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보존과학팀은 거울 면과 문양 면에 걸쳐 있는 주조 당시 발생한 결함 부위를 분석했을 때 거푸집에 사용한 주물사(거푸집 모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거푸집의 재질이 모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완성된 거울의 단면에 모래가 밀려 올라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이 그리 튼튼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과학팀은 화상분석기로 21개의 원에 대해 반지름을 구한 결과, 반지름 분포가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미루어볼 때 이 원들은 다치구(일종의 컴퍼스로 여러 개의 바늘을 갖고 있어 한 번에 여러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컴퍼스를 사용하여 한 번에 원을 하나씩 그린다면 이처럼 일정한 분포의 반지름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존과학팀은 또 각각의 선과 동심원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도 분석을 내놓았다.
우선 다치구를 사용하여 원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그 다치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1㎝ 길이 안에 무려 20개의 바늘을 박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초정밀 기계의 도움 없이 어떻게 다치구를 만들어냈는지는 수수께끼다. 또한 직선과 동심원이 그려진 순서를 추정했다고 하지만 확대경이나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 없이 청동기 시대의 장인이 어떻게 그처럼 복잡한 문양을 그려냈는지도 상상력의 영역에 있다. 무엇보다도 제작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과 실제 복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현대의 장인이 실제 복원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비밀이 완전히 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다뉴세문경 복원에 도전했던 한 장인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면서 그 정밀한 제작 기술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비밀을 간직한 채 현대인들에게 지속적인 찬탄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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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이 소장한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정확한 출토지는 확인되지 않았찌만 가짜 유물일 가능성은 '제로'라고 최병현 관장은 자신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존과학자나 전문가들이 그 복원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다. 현대의 어떠한 기술로도 복제 불가능하니 "어찌 가짜이겠느냐"는 것이다. 이 다뉴세문경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그 비밀의 문이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
기독교박물관 의뢰로 지난해 7월부터 이 국보경에 대한 과학적 보존처리를 맡아온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이 성분을 분석하고 제작 방법을 구명하려는 노력을 펴왔다. 그 구체적인 성과가 16일 오후 2시 기독교박물관이 이 대학 한경직기념관에서 개최하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과학적 보존처리' 학술대회에서 공개된다.
이에 따르면 우선 이 거울은 구리(Cu)와 주석(Sn)을 65.7 대 34.3 비율로 섞어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를 주물해 낸 거푸집을 입자가 가는 모래를 재료로 해서 만들고
그에다가 각종 문양을 조각한 "사형(砂型)임을 확인함으로써 그동안 다뉴세문경의 제작에 사용한 거푸집의 재질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고 보존과학실은 말했다. 지름 21㎝인 이 다뉴세문경은 거울 뒷면에 0.3㎜ 간격으로 무려 1만3천개에 이르는 가는 선을 새겨넣은
섬세한 제작 기법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말기 한반도에서 어떤 기술로 이처럼 정교한 금속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보존과학실은 이 거울을 만든 거푸집이 사형(砂型)이라는 사실은
"거울 면과 문양 면에 걸쳐 있는 주조 결함에서 거푸집에 사용한 주물사(鑄物砂. 거푸집 모래)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런 흔적은 사진에서 보이는 주연부(테두리)에 존재하는 주조 결함을 분석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번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구리와 주석의 혼합비율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라는 중국 고대 문헌에 보이는 동경 제작 기법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보존과학실은 덧붙였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2)
국보 제 141호 다뉴세문경(多紐 細紋鏡)의 제조 비밀이 밝혀졌다.
지난해 7월부터 다뉴세문경을 조사해온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다뉴세문경 제작에 사용된
거푸집이 모래를 굳혀 만들고 위에 각종 문양을 조각해 완성한 사형(砂型)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발견으로 그동안 다뉴세문경 거푸집 재질에 관한 논란이 해소됐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은 14일 “사형주조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거울면과 문양면에 생긴 조그만 틈에서 거푸집에 사용한 모래 알갱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다뉴세문경의 성분도 낱낱이 드러났다.
다뉴세문경은 구리, 주석, 납이 혼합된 청동 거울이었으며
구리(Cu)와 주석(Sn)의 혼합비율이 65.7대 34.3이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라는 중국 고대 문헌에 적혀 있는
당시 거울을 만드는 황금비율인 66.7대 33.3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뉴세문경은 지름 21㎝짜리 청동거울 안에 0.3㎜간격으로 가는 선 1만3000개를 새겨넣은
섬세한 문양 덕에 최고의 청동거울로 알려졌다.
보존과학팀은 “초기 철기시대에 제작된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한국식 동검문화의 발전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라며 “외형적인 우수성뿐만 아니라 청동기 제작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했을 때
동경이 가질 수 있는 황금비율로 제작됐다.
색상이나 반사율 면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기원전 4세기께 제조된 이 잔무늬 청동거울의 뒷면에는 거울을 멜 수 있는 고리[紐]가 2~3개 있다.
한반도의 신기(神器) 다뉴세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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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해성(靑海省)의 귀남(貴南)에서 출토한 직경 6cm 정도의 작은 거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거울 뒷면에 기원전 1천 년 대에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거울에서 보이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 똑같이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뒷면에 두 개 혹은 세 개의 꼭지가 달리고, 기하학무늬가 장식된 것을 주요 특징으로 하므로 다뉴경, 다뉴기하학문경, 다뉴세문경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초기형은 무늬가 거칠어 조문경(粗文鏡)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8세기 전후하여 요하(遼河) 상류와 대릉하유역에서 발견되었다. Z자가 연속하여 장식된 번개무늬를 모티브로 한다.
중국 청해성의 예와 유사한 것은 기원전 4~3세기경 등장하는 그 다음 형식의 조세문경(粗細文鏡)으로서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데, 대동강유역의 전 맹산 거푸집, 금강유역의 부여 연화리 등지의 예가 있다. 부여 연화리의 예 또한 직경 10cm 정도의 소형으로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끈으로 매달기 위한 꼭지가 중국거울은 그 한가운데에 한 개인 것과 달리 한쪽에 치우쳐 두 개가 있다는 점이다. 시간은 2천 년 차이가 나므로, 상호 관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의 내부를 여러 평행선으로 채운 도형을 똑같이 사용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갖는 심리적 제일성(齊一性)에 기인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거울이 갖는 기능과 관련된 상징성, 그것은 햇빛 반사라는 물리적 현상을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중국의 청해성 귀남 거울이나 한국의 부여 연화리 거울은 바깥쪽으로 빛을 발산하는 형상으로 무늬가 구성되었으며, 기원전 3~2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세문경의 거울 또한 그 외구(外區)의 디자인은 이를 따르고 있다.
역시 기하학무늬 동경이 출토된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의 고대동경은 고대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용 등의 사신이나 괴수, 복희와 여와 등을 형상화한 구상계열이 주요모티브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고대신앙, 도교사상이나 신선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이러한 모티브의 동경이 기하학문경을 대체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한(漢)의 진출 이후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각집선문의 기하학무늬가 중국 거울이 수입되기 전까지 기원전 1천년기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동북아지역에서 유행한 거울에 지속적으로 주요 모티브인 것이다.
그 모티브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발견된 세문경에서는 더욱 절정에 달한다. 10~20cm 내외의 지름을 가진 거울 뒷면을 동그라미 선으로 3대 혹은 2대 구분을 하여 외구(外區), 중구(中區), 내구(內區) 혹은 외구와 내구를 구획한 다음 각 구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삼각집선문을 채워 놓는다. 외구에는 꼭지점을 상하 엇갈린 방식으로 삼각집선문을 장식하고, 내구와 중구에서는 사각문을 대각선으로 구획하여 생성한 여러 개의 삼각문으로 구성하였다.
그 사각문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다양한 무늬구성을 연출하는데, 장인 집단마다 각기 다른 구성 원리를 선택한다. 그 무늬를 장식한 수법이 최고도로 발달한 것이 기원전 2세기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등장하는 다뉴세문경으로, 원형거울의 둘레에 단면이 반원형인 테두리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거울의 외형은 활석제로 만든 거푸집에 주물을 부어 제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대동강유역의 맹산이나 성천,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영암 등지에서 발견된 거푸집 실물을 통해서 확인된다.
석제 용범으로써는 도저히 연출하기 어렵다. 거울의 한가운데를 중심점으로 하여 콤파스로 그린 여러 줄의 동그라미와 길이 1cm도 되지 않는 사각형, 삼각형의 내부 빈 공간에 20여 개의 세선을 채워 표현한 수법은 지금의 숙련된 제도가도 쉽게 엄두내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외구에 지름 2cm가 채 되지 않는 동그라미 내에 20여 개의 동심원을 그린 수법은 경이롭기까지 한데, 이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자세를 갖춘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할 작품이다.
최근에 한 전문연구자가 충남 논산에서 출토하였다고 전하는 숭실대 박물관 소장의 국보 다뉴세문경의 무늬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할 정도이다. 1단계에는 불에 녹는 밀납 등의 고형물질에 무늬를 새긴 다음, 고운 모래가 섞인 점토로 발라 구워 형틀을 만들고, 이 형틀에 청동의 주물을 부어 제작하는 복잡한 공정을 거친 것이다. 크기 자체가 작은데다가, 그 두께가 수mm 밖에 되지 않는 거울이기 때문에 무늬를 그리는 작업 못지않게 주물 제작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제로 숭실대박물관 국보 세문경의 세부를 관찰하여 미세하지만 주물이 한쪽으로 밀려 무늬가 중첩되고, 고운 모래흙이 남아 있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국보경을 통하여 분석한 결과 그 합금비율이 구리 61~62%, 주석 31~32%, 납 5~6 %이라고 한다. 이처럼 다뉴세문경은 중국의 고대문헌인 주례 고공기(周禮考工紀)에서 보이는 거울의 구리 대 주석의 이상적인 합금비율인 67:33에 가까운 수치를 보인다. 그것이 반드시 중국의 합금기술을 전수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기원전 1천년기 초부터 축적된 청동제작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으로 그 주물기술의 절정에 다뉴세문경이 있는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그 실물이 90여 점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은 전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비파형동검과 함께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은 압록강 너머 요하 서쪽에서부터 확인되며, 대릉하 유역의 조양(朝陽)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적이 대표적이다. 요동지역으로 와서는 심양(沈陽)의 정가와자(鄭家窪子) 무덤이 있는데, 동검과 동경은 물론, 각종 무기와 마구, 장신구, 의기가 다량 매납되었다.
거울과 함께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되기 시작한 것은 비파형동검 뒤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의 단계이다. 금강유역의 대전 괴정동, 아산만지역의 아산 남성리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안치한 기원전 4~3세기경의 적석목관묘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남성리의 경우 10여 점의 동검과 함께 방패형동기, 나팔형동기, 원형뚜껑모양의 청동기가 함께 부장되었는 바, 무덤시설이나 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묻힌 사람이 상당한 위세를 과시하는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주는 것이 1980년대 전반에 알려진 영산강 유역의 함평 초포리와 화순 대곡리 유적이다. 함평 초포리 유적은 지역주민이 길을 내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구릉사면에서 거의 바닥만 남겨진 상태로 조사되었다. 당시 국립박물관에 재직한 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현지에 급파되어 구제발굴 조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바닥에 남은 검과 거울 등 몇 점뿐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주민이 수습한 것을 맞추어 본 결과 총 4점의 동검, 3점의 동과, 2점의 동모 등의 무기, 각종 청동 방울 세트, 그리고 크고 작은 세문경 3점이 부장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가 한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쌍두령(雙頭鈴), 간두령(竿頭鈴), 이두령(二頭鈴) 그리고 팔주령(八珠鈴) 등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전부 1쌍 1조를 이루고 있어 양손에 쥐거나, 갖고 흔들게 되어 있다. 흔들어 소리를 내서 신을 부르는 제의(祭儀)에 직접 사용되는 무구(巫具)인데, 동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를 주재하는 종교적 리더임을 추정할 수 있다. 완만한 구릉사면과 저평한 대지가 발달한 곳으로 쌀을 비롯한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 농사가 크게 보급된 지역이라 추정된다. 작물 농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제천행사 때 지역집단의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하였을 것이며, 그 제의를 주재할 때 사용했던 제사장의 도구가 무덤에 부장된 앞서의 청동방울 무구인 것이다. 청동방울을 가진 우두머리가 주관하는 제의행사는 결국은 일정한 산천 경계를 지역 단위로 한 농업공동체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다뉴세문경이 영산강유역을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에 성행하는 시기에 마한(馬韓)을 비롯한 삼한의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함평 초포리나 화순 대곡리와 같이 동경과 청동방울을 포함한 다량의 청동기를 내는 무덤의 주인공은 소국의 우두머리, 군장 혹은 족장일 수밖에 없다. 무덤의 주인공이 신의(神意)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무력적 실력을 갖춘 세속적인 지배자임을 시사하는 무덤의 예 또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20여 개 소가 확인된 바 있다. 청동방울과 같은 제의도구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장으로서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러나 이들 무덤 주인공은 모두 일정지역을 단위로 한 소국 혹은 적어도 소국을 구성하는 읍락의 우두머리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글, 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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