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홍도 - 나룻배와 강 건너기 / 이형록 - 나룻배

Gijuzzang Dream 2008. 10. 26. 17:51

 

 

 

 

 

 나룻배와 강 건너기  

 

 

 

조선의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

 

원래 조선의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일제시대 이후 평저선이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보는, 바닥이 삼각형인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다만 유원지 같은 곳에서 두세 사람이 타는 작은 배의 바닥을 보면 모두 평평하다.

안정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배가 과연 조선 배의 전통을 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지금도 조선 배의 전통에 따라 평저선을 뭇는 장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 ‘나룻배와 강 건너기’ 를 보자. 나룻배가 두 척이다. 이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배의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홍도의 그림 "나룻배와 강 건너기"

 

그림에는 나룻배가 둘이다. 위쪽 나룻배에는 사람 열 둘과 소 두 마리가 타고 있다.

소까지 태웠으니, 꽤나 큰 배다.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자. 고물 쪽의 두 사람은 사공인데, 큰 배라 힘이 드는지 둘이 같이 노를 젓는다.

바로 그 앞에 더벅머리 총각 하나와 맨상투의 상한(常漢)이 앉았는데,

마주 앉아 곰방대를 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분명하다.

두 사내 앞에 아이를 동반한 아낙네 한 사람이 있다. 머리에 올린 것은 옷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에 옷을 올리는 장면은 신윤복의 그림에도 나오니, 이 당시 풍습이었던 것이다.

 

아낙네의 앞에 삿갓을 쓴 사내가 있는데, 아마도 상한일 것이다. 그 뒤에 갓을 쓴 양반이 있다.

양반은 뒤에 길쭉하게 포장한 것을 지고 있는데,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옆에 소 두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 있다. 등에 잔뜩 진 것은 땔나무다.

서울의 저자에 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 사이에 더벅머리 총각이 곰방대를 물고 있고, 왼쪽 소의 왼쪽에 다시 삿갓을 쓴 사람이 있다.

아마도 삿갓을 쓴 두 사내와 총각은 땔나무를 팔러가는 일행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앉아 있고, 또 그 왼쪽에는 갓을 쓴 양반이 장죽을 물고 있다.

 

아래의 나룻배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역시 오른쪽 끝에는 사공이 등을 돌리고 노를 젓고 있고, 그 왼쪽에는 망건 바람의 사내가,

그 오른 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있다. 삿갓을 쓴 사내도 셋이 있고, 아이를 업은 아낙도 있다.

맨 왼쪽에는 학자풍의 양반이 점잖게 앉아 강을 보고 있다.

배의 왼편에는 빈 길마를 얹은 소가 한 마리, 말이 한 마리다.

그리고 왼쪽 소의 옆에 검은 물체가 보이는데, 역시 말로 보인다. 어린 총각이 말을 돌보고 있다.  

 

두 척의 나룻배는 조선사회의 상하, 남녀를 모아놓고 있다.

김홍도의 다른 풍속화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26명의 인물은 표정이 없다.

무료해 보인다. 인물들이 너무 작게 그려져 그렇다고. 천만에!

화가는 작은 얼굴일지라도 표정을 드러내 보인다. 아마도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말수가 많은 사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갑자기 조용해진다.

더구나 여기는 강 한 복판이다. 탁 트인 넓은 공간,

그것도 일상에서 늘 경험하지 못한 공간에 오면 그저 강물을 바라볼 뿐이다.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 속에서 멍해지는 느낌!

 

  

 

이형록(1808∼?)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그림 ‘나룻배’를 보자.

배가 두 척인데, 위쪽의 배는 햇볕을 가리는 포장이 쳐져 있고, 배에 탄 사람은 모두 갓을 쓴 양반들이다.

아래쪽의 배에 탄 사람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토록 다양한 신분의 많은 사람, 그리고 장사꾼과 소와 말까지 태워

동시에 두 척의 배가 강을 건너는 곳이라면 한강의 어느 나루에서 출발한 나룻배일 것이다.

서울의 나루터라면 어디인가. 나는 이것을 밝혀낼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전 이형록(1808~) "나룻배" 지본담채 28.2x38.8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광나루 · 노량진에 별감 첫 배치

 

다만 말이 난 김에 한강의 나루터에 대해서 몇 마디 덧보탤까 한다.

‘태종실록’ 14년 9월 2일조에 의하면

처음으로 광진(廣津)과 노도(露渡)에 별감을 두었다고 하는데, 곧 지금의 광나루와 노량진이다.

이 기사에서 경기관찰사는 경기도 안의 임진 · 낙하(洛河) · 한강에는 별감을 두고 기찰을 하지만,

금천 · 노도 · 광주 · 광진 · 용진(龍津)에는 기찰하지 않아 범죄자들이 태연히 드나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은 ‘낙하’를 제외하면 지금 서울 사람들이 잘 아는 곳들이다.

(노도는 노량진, 광진은 광나루, 용진은 용산이다.‘한강’은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말한다)

 

‘연산군일기’ 11년 5월 9일조를 보면

한강 · 마포 · 광진 · 두모포 등의 나루가 보이는데, 마포와 두모포가 새로 추가된 것이다.

마포는 지금의 마포고,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 앞이다.

 

다시 ‘선조실록’ 26년 10월 3일조를 보면,

한강 나루 중 남쪽 길과 통하는 광진 · 한강 · 노량 · 양화 나루는 모두 대로(大路)지만

그 외의 삼전도 · 청담 · 동작은 폐기해도 상관없는 소소한 나루터라고 하고 있다.

나루에도 랭킹이 있었던 것이다.

한강에 이렇게 나루가 많이 생긴 것은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면서부터이다.

한양이 수도가 되니, 한강은 절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경유하기에 두 지방의 세금을 받아 옮기는 길이었고,

또 전라도 일대의 세금과 물자를 바닷길로 옮겨서 다시 서울로 운송하는 길이었다.

 

한강은 또 서울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한강은 동시에 길을 끊는 장애물이었다.

자연히 강을 건너기에 편리한 곳, 또는 꼭 건너야 할 곳에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겼다.

국가에서는 또 그런 곳에 나루를 설치해 관리하기도 하였다.

국가가 관리하는 나루터의 사공은 나라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한다.

이런 나루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나룻배를 타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종 6년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원래 한강의 동작, 노량, 광진, 삼전도, 양화도, 공암 등 나루터에는

병자년 이전에는 모두 위전을 지급하고 나룻배를 책임지고 갖추도록 했는데,

병자호란 뒤 이 위전들을 한강 가에 사는 사대부들이 강제로 점유한 탓에

뱃사공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먹을 것도 안 생기는 일에 열심일 사공은 없다.

배는 만들지도 않고 수리도 않는다. 결과는 뻔하다. 여행객들이 강을 건널 수 없다.

효종은 다시 위전을 찾아서 주고 경기감사에게 나루터의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명령한다.

(‘효종실록’ 6년 10월 7일). 그 뒤로도 나루터 관리를 두고 별별 일이 다 벌어졌다.

나루터의 사공은 천민이었다. 나루를 떠날 수 없는 그 직업은 고달팠다.

한밤중에라도 강을 건너는 양반이 있으면 배를 내어야 한다.

예컨대 현종 때는 종실 몇이 궁노를 데리고 한강 너머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동작나루에 와서 나룻배를 빨리 대령하지 않았다고 사공을 마구 구타했다'

(‘현종실록’ 5년 9월 9일)고 하니, 사공의 괴로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모든 나루터가 국가 직영인 것은 아니었다. 개인이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선(私船)도 있었다.

사선은 관선(官船)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25년 10월 11일조를 보면,

노도 · 삼전도 · 양화도의 관선은 무거워 사람과 말이 쉽게 건널 수 없고,

사선은 가볍고 빨라 쉽게 건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선을 이용하지만

사선은 삯이 비싸 백성들이 어려워 한다는 것이다.

한강 이외의 강의 나루에는 보통 근처 마을에서 배를 장만하고 사공을 따로 두었다.

사공은 봄 가을로 삯을 몰아서 받고 따로 뱃삯을 받지는 않았다.

나룻배로 넓은 한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숙종때 선비 80명 한강서 몰사

 

숙종 44년에 과거를 치르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비들 80명이

한강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몰사한 사건이 있었다.

“배가 뒤집혀 빠졌을 때 애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강 언덕에 퍼져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숙종실록’ 44년 11월 4일)

 

나루라고 하면 뭔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루를 건너는 것은 먼 길을 떠나는 것이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나루’ 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목계 나루의 구름과 바람과 방물장수는 모두 정주하지 않는, 늘 떠나는 것들이다.

나루라, 어쩐지 서러운 말이로구나.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2008년 5월26일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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