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홍도 - 행상(行商)

Gijuzzang Dream 2008. 10. 26. 16:44

 

 

 

 

 

 

 떠돌이 장사치의 괴로움, 행상

 

      

 

김홍도 ‘부부 행상’(그림 1)

남자는 지게를 지고 여자는 아이를 업은 채 광주리를 이고 가는

모습이 다정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는 김홍도의 ‘부부 행상’(그림 1)을 볼 때마다 애잔한 생각이 들곤 하였다.

남자는 지게를 지고 지게 작대기를 들었고, 여자는 광주리를 이고 있다.

남자의 벙거지는 낡아서 너덜거린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있다.

희한하게도 아이는 처네로 업지 않고 옷 속에 업고 있다. 이들은 부부임이 분명하다.

남편의 지게에는 나무로 엮은 통이 얹혀 있다.

줄로 단단히 묶은 이 물건은 무엇인가, 새우젓인가.

아내의 광주리에 실린 것은 또 무엇인가, 푸성귀인가.

그리고 부부는 마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세금 거두고 행상 면허증도 발급

 

 

김홍도 ‘포구의 여자 행상들’(그림 2)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구의 여자 행상들’(그림 2) 역시 김홍도의 작품이다.

이 그림에 붙은 강세황의 제시는 이러하다.

“밤, 게, 새우, 소금 / 광주리와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새벽녘 포구를 떠나니, 해오라기 놀라 날아간다.”

 

포구에서 이것 저것 이고 지고 도시로 행상을 떠나는 아낙네들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는 농업사회다. 농민은 정주민이다. 농토를 갈아 곡식을 심고 거두어 땅에 붙어 산다.

제 땅이 있다면 친숙한 고향을 떠나 멀리 낯설고 물선 이향을 돌아다니며

오늘은 이곳에서 내일은 저곳에서 잠을 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행로가 만약 반복적 일상을 벗어나 전에 보지 못했던 지리와 문화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림 (1)의 등에 진, 광주리에 인 변변치 않은 물화를 보라. 옷차림 또한 남루하다.

제 손으로 끊지 못한 나머지 고생스레 이어야 하는 목숨을 위해 이토록 타향을 떠돈다면,

그것은 저주에 가깝다.

 

행상의 역사는 오래다.

“달아, 높이곰 돋으샤, 어기야 머리곰 비취 오시라.”로 시작되는,

행상을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을 절절히 노래하는 ‘정읍사’는

저 아득한 옛날 백제의 노래가 아닌가.

 

행상은 역사 이래 없었던 적이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행상은 있었다.

하지만 떠돌이 행상이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고, 또 면허증을 받아야 했다.‘경국대전’ 호전 잡세조에 이런 규정이 있다.

행상에게는 노인(路引 · 여행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세금을 거둔다.

육상(陸商)은 매월 저화(楮貨) 8장, 수상(水商)은 대선(大船)이 100장, 중선이 50장, 소선이 30장이다.

조정에서는 행상을 등록시키고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행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을 억제했던 것이다.

 

조선조의 지배층 양반들은 상행위를 아주 천한 것으로 보았다.

명종 21년 윤연(尹淵)이란 사람이 장연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사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연은 여염의 천인(賤人)이다. 그 아비가 행상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천대를 받았다.

때문에 그는 과거를 보러 가서 이름을 올릴 때 자기 아비를 적어내지 않고 아저씨 이름을 적어냈다.

이 같은 사람이 오히려 조정 반열에 끼었으니, 어찌 통분할 일이 아닌가.

(‘명종실록’ 21년 6월21일).

 

적어도 명종 때까지는 행상을 하던 상인의 자식도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행상을 천시하는 관념은 너무나 깊었다.

그것은 유가가 원래 상업을 물질적 생산 없는 이익추구로 본 데 기인한 것이다.

행상을 천시한 것은, 그것이 또 고되고 위험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행상은 물화를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강도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윤4월10일조에 의하면,

황해도의 강도가 인가를 불태우고, 행상을 살해하며 재물을 강탈했다고 하고,

‘성종실록’ 2년 11월7일조에는

행상에게 강도질을 한 죄로 개성부의 백성 최백이 등 3명이 참형을 언도받고 있다.

 

 

보부상 단결해 강도 재물 강탈 막아

 

행상을 노리는 도둑은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숙종 때 관료인 민유중(1630∼1687)의 말을 들어보자.

민유중은 명화적이 민가를 약탈한 사례를 열거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

 

전주의 행상 몇 사람은 정읍현에서 숙박하다가 도적의 칼에 찔렸고 그 중 한 사람은 즉사했습니다.

영남 사람은 공물을 받으러 금산 땅을 지나다가 밤에 화적을 만났는데, 한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남원, 장수의 백성 10여명은 소금을 거래하기 위해 전주의 시장으로 가서

관문에서 10리 떨어진 들에서 묵었는데, 초저녁에 도적이 돌입하여

말 7필과 말에 실었던 재물과 포목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두 사람은 피살되고 두 사람은 다쳤습니다.

 

사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행상은 지극히 위험한 직업이었다.

보부상의 단결 역시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상의 활동에 대해서 전하는 자료는 드물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행상이 상당한 수로 불어났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여러 자료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창협(1651∼1708)은

‘홍천에서 인제에 이르기까지 길에서 만난 사람은 대개 과거를 치러 가는 유생이었고,

또 장사꾼으로서 영동 지방에서 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짓는다.’라 하고,

 

나그네 되어 대관령 동쪽 길 가노라니

서쪽으로 오는 사람은 많이 만나누나

책상자를 진 과거 칠 선비거나

생선을 한 바리 실은 행상들이로다

 

김창협은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길에 동해 바다 생선을 잔뜩 실은 행상들을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전국의 사정이 꼭 같았던 것은 아니다.

남구만이 1670(현종 11)년에 올린 상소에 의하면,

충청도 청주는 배가 다니는 길과 멀어 장사할 길이 없고,

시장에는 곡식을 사고파는 행상이 없다고 하였으니,

지역에 따라 행상이 오가며 상업이 활발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던 모양이다.

양반이 상인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를 식견 있는 사람들은 비판하였다.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경우 벼슬하던 사람이 비록 재상까지 지냈다 하더라도

은퇴하면 모두 행상을 하기에 아주 가난한 데 이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대로 경상(卿相)을 지낸 집안이라 하더라도 한 번 벼슬길이 끊어지면,

자손들이 가난해져 다시 떨치지 못하여 심지어 유리걸식하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하니,

단지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거늘, 풍속이 같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

 

 

상인 천시 양반들도 소금장사로 연명

 

정조뿐만이 아니라, 유수원과 박제가 역시

양반이 상업을 천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양반 역시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한데 양반이 상행위에 뛰어든 경우도 없지 않다.

 

홍성민(1536∼1594)은 임진왜란 직전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간다.

이내 빈털터리가 된 그는 먹을 것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닷가의 싼 소금을 사서 곡식이 넉넉한 오랑캐 땅에다 팔아 보란다.

홍성민은 장사치가 될 수 없다며 망설이다가 주림을 참지 못하고 소금 장수를 시작한다.

한데 이 소금 장수가 재미있다. 그는 종에게 몇 되의 곡식을 주어 90리 밖의 바닷가에서 소금을 사서

함경도 북쪽 120리 길을 다니며 곡식과 바꾸어 오게 하였다. 곱이 남는 장사였다.

일시에 굶주림이 해결되었지만, 곡식이 떨어지자 종을 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다가 괴로워하다가

마침내는 장사가 잘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장사하는 일이 양반인 그를 얼마나 괴롭혔던지,

급기야 때때로 혼자 허허 웃다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는 등 아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홍성민은 종을 시켜서 한 상행위에 대해서조차 더할 수 없는 치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귀양에서 풀려나면 한 사람의 착실한 농군이 되어 밭을 갈고 김을 매어 가을에 거두어서

나라에 바치고 자기 한 몸을 먹여 살리겠노라 다짐한다.

사회의 지배층이 상업에 대해 이렇게 뿌리 깊은 수치감을 갖는 사회에서 상인에 대한 처우가 어떠했을까?

상업이 발달할 수가 있었을까.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2008-06-09, 서울신문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