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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나는 춤이다> - 춤으로 세상 위에 군림한 여자, 최승희

Gijuzzang Dream 2008. 10. 20. 20:12

 

 

 

 

 

 

 춤으로 세상 위에 군림한 여자, 최승희

 

 

나는 춤이다
김선우 · 실천문학사 · 2008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아라고 부르는 그것, 선택, 고투(苦鬪), 우연, 시대가 비벼져서

한 사람의 실존이 빚는 풍경이 출현한다.

그 풍경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삶은 행위함인데,

그 실존적 기투(企投)의 본질은 먹고살기 위해,

혹은 자기실현을 위한 모든 수고를 함축한다.

행위와 수고는 등이 맞붙은 샴쌍둥이다.

수고는 현재를 가로지르는 주체를

익명들로 붕붕거리는 잡음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주체로 나타나게 하며

현재에 닻을 내려 그것을 고정시킨다.

수고는 자아와 세계가 연루되는 사건이다.

사람은 수고를 통해 그 존재를 세계에 등록한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함은 “정복이자 속박”(레비나스)이며,

현재라는 짐을 짊어지고 시대 속으로 뛰어듦이다.

아니 시대의 인력 속으로 빨려 들어감이다.

시대는 자아의 의지와 관련해서,

때로는 그것과 무관하게 수고를 부과하고 피로를 분출하게 한다.

사람들이 피로를 피처럼 내뿜고 있을 때 도약은 멈춰진다.

피로는 자기 자신과 현재에 대한 멈춤이고 지연됨이다.

삶은 지속이 아니다. 다만 지속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은 무수한 피로들로 인한 멈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수고는 욕망의 현재를 무화시키며 다시 또 다른 현재를 향해 나아간다.

수고함의 결과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그 욕망의 빈곤을 확인하는 일이며,

피로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다.

수고는 피로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육과 정신을 소모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수고는 피로에서 나오며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친다.”(레비나스)

누가 삶을 도약이라고 말하는가 ? 누가 삶을 극복이라고 말하는가?

삶은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피로의 감당이며,

피로함의 본질인 그 경직, 그 마비, 그 오그라듦으로 곤두박질치고

그 곤두박질에서 그것을 넘어감이다.

삶은 피로라는 실존이 앓는 불치병의 흔적을 그 안쪽에 무늬로 새기는 것이다.

피로는 삶에 따르는 부수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피로에서 나와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삶을 생각하며

김선우가 쓴 ‘나는 춤이다’를 읽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춤꾼 최승희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 쓰기는 최승희라는 “검은 불꽃, 강력한 죽음의 느낌, 초혼과 위령의 흐느낌”을

느끼게 하는 타자를 인간 보편의 조건 속에서 다시 살기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자아 안으로 이 타자가 얼마나 녹아들었는지를 보는 것은

곧 이 소설의 밀도를 살피는 일이다.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산야는 어디나 춤과 음악이 가득했다.

나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춤쟁이들이었고 구름들이 보여주는 온갖 몸짓은

한나절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라보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여자가 모르는 것들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고,

모르는 그 세계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모두 익숙한 리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지 땅속을 제외하고 말이다. 세상은 춤이구나…

몸을 가진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어떤 형태로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대목은 최승희라는 타자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기를 보여준다.

자아와 타자의 섞임, 서로를 향한 녹아듦이 일어나는 대목인데,

사실은 작가 자신의 세계 바라보기다.

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인력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간 최승희라는 타자는

곧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내 삶의 가능성으로서 작가의 자아 안에서

충분히 다시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구성은 그 다시 살기를 위한 장치들일 것이다.

우선 소설은 1인칭과 3인칭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최승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여러 위성이 맴돈다.

최승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기타로,

남편이자 매니저인 안, 중국 경극 제일의 배우 매란방,

이시이와 일본의 무용연구소 동료들이 그 위성이다.

그 위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최승희의 삶이 재구성되고,

또한 그 눈으로 최승희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관측이 이루어진다.


최승희는 강한 여자다. 춤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 위에 군림한다.

“내가 이 말을 했던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기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 나는 내가 구할 거야”라고 말할 때

최승희는 세상의 모든 악덕과 맞서 싸울 만큼, 싸워서 자신을 구원할 만큼 강하다.

 

또 한편으로 최승희는 한없이 약한 여자다.

온갖 악덕과 혼란으로 미쳐 돌아가는 나쁜 시대의 격랑을 이기지 못하고 낙하하는 나비다.

“그러나 세계는 아름다움 따위와 상관없이 미쳐가고 있었다.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아름다움이 찬양되었다.

노구치 같은 작자도 아름다움을 입에 올렸다.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총칼과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나는 더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무용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게

이 전란 속의 우리에게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밥도 물도 얇은 옷가지 한 장도 되지 못하는 내 춤이 ?

여자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몸서리쳤다.”

 

시대의 인력이 커지면 춤이나 시와 같은 것들은 그 인력 안으로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춤과 시가 세계에 대한 도발과 공격을 담고 있더라도 그것들은 덧없이 사라진다.

그때 예술가에게 남겨진 몫은 실존의 열망을 안고 자멸함으로써

세계의 추악과 부당함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일이다.

“따스한 붉은 핏물이 스민 검은 나비가 텅 빈 벽을 날았다.

기타로가 가만히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처럼, 잡히지 않았다”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시대가 이 천진무구한 예술가에게 불우한 배역을 맡겼다.

나쁜 시대의 벽을 향해 날아간 검은 나비는 물론 최승희다.

 

‘나는 춤이다’는 찢긴 날개에 붉은 핏물을 머금은 채

찬연하게 공중으로 도약하며 날아올랐던 한 무희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해방 이후, 북조선의 관리 감독 아래에 놓인 최승희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소설은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단속적으로 먼 시간과 가까운 시간을 끊고 이어가며 진자운동을 한다.

그 속에서 최승희의 여리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여린 모습이 그려진다.

격동하는 시대가 후경이라면

거칠고 도도한 시대의 인력 앞에서 춤추는 무희(舞姬)의 불우한 삶은 그 전경이다.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른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

몸을 버림으로써 다른 몸을 얻은 이 무희의 불우는 춤으로 충분히 보상된다.

시대가 불가피하게 강요한 수고와 피로들마저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시점과 구성이 잦은 분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면의 빠른 전환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소설 읽기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게 빠르게 장면이 바뀌었으니

그것은 미덕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점과 구성의 잦은 분절들은 소설을 하나의 큰 호흡 속에서 읽는 걸 방해한다.

왜 그렇게 썼을까. 그 비밀을 ‘작가의 말’에서 풀 수 있었다.

 

‘나는 춤이다’가 있기 이전에 시나리오가 먼저 있었다. 소설은 그 다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문장이 돋보였다.

뜨거운가 하면 차갑고 차가운가 하면 뜨거운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감각적인 깊이를 가졌다.

이 문장이 죽은 최승희를 김선우의 최승희로 생생하게 부활시켰다.

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의 칠 할쯤은 그 문장이 불러일으킨 감흥에서 비롯되었다.

어쨌든 시인 김선우의 첫 장편소설을 축하한다.

- 장석주

- 2008 10/21  위클리경향 796호 [독서일기]

 

 

 

 

 

 

 

 

 

 

- 출판사 서평 -

 

“나비를 품은 고치와도 같은”, 아주 특별한 예술가 성장소설

「작가의 말」에도 언급되었지만

그전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관련한 한 지면을 통해 알려진

조세희 선생과의 ‘아름다운’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작가 김선우에게는 일찍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

단 한 권의 소설로 한국문단의 지형을 바꿔버린 조세희 선생의 밝은 눈이

미리 그것을 감지했으니 두 예술가의 이심전심이라 할 만하다.

조세희 선생이 추천의 글에서 말하였듯,

이 소설은 “인간적인 실존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온몸으로 춤을 살고자 했던 여자, 춤추는 그 몸이 조국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천상 무희였던

그녀가 마음껏 날아오르기에는 시대가 너무 불우했다.

해서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는 그녀를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인물의 단선적 묘사와 서술을 버리고 과감하고도 입체적인 시점과 구성을 이용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작품으로 일궈냈다.

 

작품 내에서 주요한 이미지는 “검정”과 “빨강”이라는 색채이다.

“검정”이 죽음, 식민치하라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한다면

“빨강”은 생(生 )이며 빛으로 대변되는 자유의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증적 결합은 ‘검정을 스프링 삼아 도약하는 빨강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연상케 한다. “빨강”에 있어 “검정”은 거부의 대상이자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에두르는 듯하지만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김선우 식의 담백한 문체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더불어 1인칭과 3인칭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승희의 주변 인물들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지점에 배치하여

시대적, 인간적 모순을 담백하게 담아냄으로써 끝까지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은

이 장편소설이 지닌 최대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작가의 탁월한 산문성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시와 소설의 간극은 크다.

그 간극을 뛰어넘는 데는 시나리오 집필도 한몫했다.

동화 『바리데기』를 본 한 영화사의 대표가 무희 최승희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 집필을

작가에게 의뢰했고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고 작가는 말했다.

등장인물들의 입체적이면서 개성 있는 캐릭터가 거기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가 짐작된다.
“곧 물의 살을 찢고 눈부신 가시연꽃이 필 것이다.”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의 뒷표지 글을 쓴 나희덕 시인의

 ‘예언’대로 시인 김선우는 첫 장편소설인 『나는 춤이다』로

거대한 가시연꽃 봉오리의 첫 꽃잎을 열었다.


“자유인 춤, 자유인 예술, 자유인 영혼…”,
춤이 조국이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적 무희 최승희


『나는 춤이다』에서 그려지는 최승희는 춤꾼 최승희이다.

춤과 관련되지 않는 최승희 삶의 전후는 모두 배제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해방 이후, 북조선의 관리 감독을 받고 있는 최승희의 모습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후 시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3인칭 작가 시점으로 그려지는 “여자” 최승희는 여린 듯 강인하다.

춤을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에서건 단호해질 수 있고

얼마든지 정치적일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최승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는 기타로와 남편이자 매니저인 안,

정신적 조력자인 중국 경극 제일의 여역(女役)배우 매란방,

그리고 최승희의 선생, 이시이와 일본의 무용연구소 동료들의 눈에 비친 최승희는

이기적일 만큼 자신만 아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로 그려진다.

 

춤추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를

때로는 연민하고 때로는 질투하며 때로는 숭배하는 그들의 주관적인 시선을 통해

작가는 춤꾼 최승희의 모습을 객관화한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주변 인물은 “민”이라는 젊은 청년을 매개로 하여

이어질 듯, 말듯 끝까지 긴장감을 주는 조선의 예기 “예월”이다.

요즘 식으로 보면 스타와 팬의 관계라 할 수 있을까,

식민지 조선의 여자로 일본 남자와 결혼하여 만주와 조선, 일본을 오가면서 춤추는 최승희를

동경하여 먼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응원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최승희 춤의 한 모티브를 제공해주기도 하는 예월이라는 여성은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빚어낸 가장 빛나는 소품이 아닐까 한다.

 


“춤추는 이 몸이 제 조국이에요.”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 나는 내가 구할 거야.”

작가의 등단작인 「대관령 옛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조선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댄서이자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21세기의 감각으로 20세기를 살았던” 불우한 예술가,

그녀는 시대를 앞서는 뜨거움으로 “너무 일찍” 빙점에 도달해버린 혁명가였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폭압적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의 언어인 춤의 자유를 위해

오직 춤으로써 항거했던 여자,

자신의 몸과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춤 이외에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던 지독한 에고이스트,

그녀의 노마드적 감수성이 갈구했던 것은

그저 “자유인 춤, 자유인 예술, 자유인 영혼”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예술에 의한, 삶의 조건을 향한 지극한 열망이었다.
-
YES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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