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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 실천문학사 · 2008 |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아라고 부르는 그것, 선택, 고투(苦鬪), 우연, 시대가 비벼져서
한 사람의 실존이 빚는 풍경이 출현한다.
그 풍경을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삶은 행위함인데,
그 실존적 기투(企投)의 본질은 먹고살기 위해,
혹은 자기실현을 위한 모든 수고를 함축한다.
행위와 수고는 등이 맞붙은 샴쌍둥이다.
수고는 현재를 가로지르는 주체를
익명들로 붕붕거리는 잡음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주체로 나타나게 하며
현재에 닻을 내려 그것을 고정시킨다.
수고는 자아와 세계가 연루되는 사건이다.
사람은 수고를 통해 그 존재를 세계에 등록한다.
그런 맥락에서 행위함은 “정복이자 속박”(레비나스)이며,
현재라는 짐을 짊어지고 시대 속으로 뛰어듦이다.
아니 시대의 인력 속으로 빨려 들어감이다.
시대는 자아의 의지와 관련해서,
때로는 그것과 무관하게 수고를 부과하고 피로를 분출하게 한다.
사람들이 피로를 피처럼 내뿜고 있을 때 도약은 멈춰진다.
피로는 자기 자신과 현재에 대한 멈춤이고 지연됨이다.
삶은 지속이 아니다. 다만 지속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은 무수한 피로들로 인한 멈춤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수고는 욕망의 현재를 무화시키며 다시 또 다른 현재를 향해 나아간다.
수고함의 결과는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그 욕망의 빈곤을 확인하는 일이며,
피로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다.
수고는 피로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육과 정신을 소모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수고는 피로에서 나오며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친다.”(레비나스)
누가 삶을 도약이라고 말하는가 ? 누가 삶을 극복이라고 말하는가?
삶은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피로의 감당이며,
피로함의 본질인 그 경직, 그 마비, 그 오그라듦으로 곤두박질치고
그 곤두박질에서 그것을 넘어감이다.
삶은 피로라는 실존이 앓는 불치병의 흔적을 그 안쪽에 무늬로 새기는 것이다.
피로는 삶에 따르는 부수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피로에서 나와 피로 위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삶을 생각하며
김선우가 쓴 ‘나는 춤이다’를 읽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춤꾼 최승희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소설 쓰기는 최승희라는 “검은 불꽃, 강력한 죽음의 느낌, 초혼과 위령의 흐느낌”을
느끼게 하는 타자를 인간 보편의 조건 속에서 다시 살기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자아 안으로 이 타자가 얼마나 녹아들었는지를 보는 것은
곧 이 소설의 밀도를 살피는 일이다.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산야는 어디나 춤과 음악이 가득했다.
나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춤쟁이들이었고 구름들이 보여주는 온갖 몸짓은
한나절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라보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여자가 모르는 것들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고,
모르는 그 세계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모두 익숙한 리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땅속을 제외하고 말이다. 세상은 춤이구나…
몸을 가진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어떤 형태로든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대목은 최승희라는 타자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기를 보여준다.
자아와 타자의 섞임, 서로를 향한 녹아듦이 일어나는 대목인데,
사실은 작가 자신의 세계 바라보기다.
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인력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간 최승희라는 타자는
곧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내 삶의 가능성으로서 작가의 자아 안에서
충분히 다시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의 구성은 그 다시 살기를 위한 장치들일 것이다.
우선 소설은 1인칭과 3인칭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최승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여러 위성이 맴돈다.
최승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기타로,
남편이자 매니저인 안, 중국 경극 제일의 배우 매란방,
이시이와 일본의 무용연구소 동료들이 그 위성이다.
그 위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최승희의 삶이 재구성되고,
또한 그 눈으로 최승희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관측이 이루어진다.
최승희는 강한 여자다. 춤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 위에 군림한다.
“내가 이 말을 했던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어.
기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 나는 내가 구할 거야”라고 말할 때
최승희는 세상의 모든 악덕과 맞서 싸울 만큼, 싸워서 자신을 구원할 만큼 강하다.
또 한편으로 최승희는 한없이 약한 여자다.
온갖 악덕과 혼란으로 미쳐 돌아가는 나쁜 시대의 격랑을 이기지 못하고 낙하하는 나비다.
“그러나 세계는 아름다움 따위와 상관없이 미쳐가고 있었다.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아름다움이 찬양되었다.
노구치 같은 작자도 아름다움을 입에 올렸다.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총칼과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나는 더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무용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게
이 전란 속의 우리에게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밥도 물도 얇은 옷가지 한 장도 되지 못하는 내 춤이 ?
여자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몸서리쳤다.”
시대의 인력이 커지면 춤이나 시와 같은 것들은 그 인력 안으로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춤과 시가 세계에 대한 도발과 공격을 담고 있더라도 그것들은 덧없이 사라진다.
그때 예술가에게 남겨진 몫은 실존의 열망을 안고 자멸함으로써
세계의 추악과 부당함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일이다.
“따스한 붉은 핏물이 스민 검은 나비가 텅 빈 벽을 날았다.
기타로가 가만히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처럼, 잡히지 않았다”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시대가 이 천진무구한 예술가에게 불우한 배역을 맡겼다.
나쁜 시대의 벽을 향해 날아간 검은 나비는 물론 최승희다.
‘나는 춤이다’는 찢긴 날개에 붉은 핏물을 머금은 채
찬연하게 공중으로 도약하며 날아올랐던 한 무희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해방 이후, 북조선의 관리 감독 아래에 놓인 최승희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소설은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단속적으로 먼 시간과 가까운 시간을 끊고 이어가며 진자운동을 한다.
그 속에서 최승희의 여리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여린 모습이 그려진다.
격동하는 시대가 후경이라면
거칠고 도도한 시대의 인력 앞에서 춤추는 무희(舞姬)의 불우한 삶은 그 전경이다.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른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
몸을 버림으로써 다른 몸을 얻은 이 무희의 불우는 춤으로 충분히 보상된다.
시대가 불가피하게 강요한 수고와 피로들마저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시점과 구성이 잦은 분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면의 빠른 전환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소설 읽기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게 빠르게 장면이 바뀌었으니
그것은 미덕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시점과 구성의 잦은 분절들은 소설을 하나의 큰 호흡 속에서 읽는 걸 방해한다.
왜 그렇게 썼을까. 그 비밀을 ‘작가의 말’에서 풀 수 있었다.
‘나는 춤이다’가 있기 이전에 시나리오가 먼저 있었다. 소설은 그 다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문장이 돋보였다.
뜨거운가 하면 차갑고 차가운가 하면 뜨거운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감각적인 깊이를 가졌다.
이 문장이 죽은 최승희를 김선우의 최승희로 생생하게 부활시켰다.
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의 칠 할쯤은 그 문장이 불러일으킨 감흥에서 비롯되었다.
어쨌든 시인 김선우의 첫 장편소설을 축하한다.
- 장석주
- 2008 10/21 위클리경향 796호 [독서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