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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조각, 삶을 전하다 | ||||
뜨거워도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라진 자리는 늦가을의 산그늘처럼 서늘하다.
비를 품은 바람처럼 눅진거리더니, 천지에 가득한 봄빛으로 나른히 졸고 있던 조선의 들판에는 이내 가늠할 수 없는 공포를 따라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아! 그 징한 전쟁이 아니었다면 ‘막동’이 이렇게 살기와 광기로 번뜩이는 망나니의 칼 아래에서 처참히 죽음을 마주해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충주의 사기장(砂器匠) 한막동(韓莫同)이 왜놈의 첩자(細作)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는 흉악한 사실을 고하고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할 것을 청하자, 임금(宣祖)은 “그리하라”고 짧게 말하였다. 산 그림자가 반쯤 내려앉고, 멀리 새 우는 소리 아득하던..... 그 때는 초가을 햇살에 한층 헐거워진 산색도, 그 짙은 그림자도 시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등은 파르르 떨고 있다. 이렇게 사기장 한막동의 삶은 무참히 깨어지고, 스러졌다. 막동이 전쟁이 없는 시절을 살았더라면, 전라도 완주의 ‘막생(莫生)’처럼 진실로 평화로운 때를 살았더라면 목이 베어지고 저자에 내걸리는 무참함은 없었을 것이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그 해 여름은 가마 뒤로 둘러선 숲이 내내 물기를 내뿜고, 한낮에 열기가 더해져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콱! 콱! 숨이 멎는듯했다. 그래도 틈틈이 가마주변을 정리하고 흙에 채운 물을 비우고 다시 채우기를 반복했다. 이제 가을이니 여름 내 비워둔 가마에 불을 지필 참이다. 이웃한 숯가마에도 곧 기척이 있을 것이다. 막동의 일상이 평안하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몇 해 전, 고을 수령이 공물(貢物)로 바친 사기그릇들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문책을 받았고, 이 일은 여러 고을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공조(工曹)에서 세금으로 만들어 바치는 그릇마다 장인(匠人)의 이름을 쓰라하였으니 새 임금님(世宗)이 왕위에 오르고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부역은 이전보다 좋아졌다. 풍년인 해는 열흘을 더 해야 하지만 흉년이 들면 열흘을 감해주어 힘들 때를 살펴주니 고마운 일이다. 올 해는 농사가 그저 그만하니 스무날동안은 관아(官衙)에서 이르는 대로 그릇만드는 공역을 감내해야한다. 막생(莫生)은 동료 ‘막삼(莫三)’과 함께 일할 참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성부(漢城府)에 사는 공인(工人)의 월세도 벌이가 가장 좋은 자가 매달 전(錢)으로 일백 이십 문(文)씩 내던 것을 매달 구십 문씩으로 감해 주었다고 들었다.
처참히 죽은 충주의 ‘莫同’ 또한 그러했으며, 막동보다 한 세대 쯤 앞에 태어나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또 다른 莫同’도 마찬가지였다. 기유년(世宗 11 : 1429)에 열 두 살이 된 막동의 아비는 종 복진(福眞)이었고 어미 단정(端正)은 양인(良人)이었으나 아비가 노비였으므로 막동 또한 노비였다. 상전(金務)께서 늙고 병을 얻어 네 아들과 두 사위에게 이백여구가 넘는 노비들은 나누어 물려주시기로 하셨으니 막동은 큰 아드님(金坦之)에게로 가게 되었고, 할머니 감장(甘莊)도, 어머니 소사(召史)도, 대대로 상전댁 가문의 종이었던 열 세 살 난 막동(莫同)은 셋째 아드님(金崇之)에게로 가게 되었다.
노비 아비와 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주인댁의 노비가 된 것은 삼십여 년 후에 태어나 이웃 풍산현 안동 권씨家에서 살게 되는 사내종 막생(莫生)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비인 아비 이동(李同)과 良人 어미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같은 상전댁의 노비인 莫同과 莫生처럼 더러 영리하고 손놀림이 민첩한 어린 종들은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전문 공장이(工匠)로 훈련시키기 위해 특별히 뽑혀가는 일도 있었다. 이 땅에서 귀하지 않은 신분으로, 특별할 것 없는 흔하고 비슷한 이름으로, 더러는 역사의 질곡에 휘말리기도 하고 더러는 평온하기도 했다. 열두 살, 열세 살의 어린 莫同과 莫生의 삶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오백여 년이란 시간의 강을 훌쩍 뛰어 넘어 그들 삶의 터전이던 깊은 산중의 가마자리도 골프장이 되고, 아파트가 되고,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고속도로가 되어 현대인의 삶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현장이 되었다. 뒤로 흐르지 않는 시간의 방향성은 지면 아래 켜켜이 누워있던 그들의 얼굴을 오늘을 사는 나에게 한 조각 또 한 조각으로 조심스럽게 실어다 주었다. 때로는 위풍당당한 힘으로 포장되는 문명의 폭력성에 느닷없으면서도, 깨어진 사금파리 조각에서 묻어나는 시간의 비늘에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리는 경험은 벼락같은 축복이다. 그 순간 아득한 과거의 화석 속에 잠자던 ‘莫生’과 지문(指紋)으로 남은 ‘또 다른 그’는 우리 곁에 실존한다.
-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박성종(朴盛鍾)의『조선초기 고문서 이두문 역주(吏讀文 譯註)』(서울대학교출판부, 2006년)에 실린 ‘김무도허여문기(金務都許與文記)’(1429년)와 ‘권이동복화회문기(權邇同腹和會文記)’(1470년-1473년, 보물 제1002호)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가마터 발굴에서 출토된 자료를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하였다. - 박경자,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8-10-20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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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권주종손가소장문적 [權柱宗孫家所藏文籍]
보물 1002호 /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 보관)
권굉자녀역중분급문기
고문서와 전적이다. 총 9종 14점이다. 보물 제549호로 지정된 권심처손씨분급문기(權深妻孫氏分給文記, 세조년간) 및 권주(權柱)의 가사매매명문(家舍賣買明文, 연산 4년)과 함께 같이 보관되어 있다.
권주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 공조정랑 등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성종 13년(1482)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벼슬을 빼앗겼으나, 임무에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고 귀양을 떠났다. 그러나 1505년 6월 다시 그 문제가 불거져나오자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고문서(古文書)로는 15∼16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세종 23년(1441) 권항(權恒)에게 발급한 문과급제교지(文科及第敎旨)를 비롯하여 연산 3년(1497) 충청관찰사 권주(權柱)에게 발급한 교서(敎書) 연산 9년(1503) 경상관찰사에게 권주(權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유서(諭書), 성종 5년(1472) 권이(權邇)의 동복화회성문(同腹和會成文) 등 분재기(分財記) 3건 등 총 4종 7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적(典籍)으로는 성종 12년(1481)에 작성된 성균관 생원, 진사들의 시문을 모은『성균관동방록(成均館同房錄)』, 성종∼연산 때 작성된 화산(花山) 권주(權柱)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글들을 모아놓은 필첩(筆帖)인『경수첩(敬守帖)』, 권주(權柱) · 이황(李滉) 등의 필적(筆蹟)을 모은『선세수찰(先世手札)』등 총 5종 7책이 있다.
이 문서들은 15∼16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교지(敎旨) · 교서(敎書) · 유서(諭書)는 조선전기 과거(科擧) 및 인사행정제도, 정치 · 사회사 연구의 사료(史料)이고, 분재기(分財記) 3건은 사회 · 경제사연구의 당시 사회상황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된다.
경수첩, 선세수찰 등은 시(詩) · 문학(文學)은 물론, 당시 사회상을 살필 수 있으며 특히 권주(權柱)의 '자필서간(自筆書簡)'은 그 필체가 훌륭하여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한다.
그 외에 '상대계첩(霜臺契帖)' 은 인조 년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같이 재직한 사람들의 계첩(契帖)이며, '종남동도회제명록(終南同道會題名錄)' 은 효종 7년(1656)에 영남인으로서 서울에 사환(仕宦)하는 관료들의 계첩(契帖)으로 각각 계회도(契會圖)가 있는데 계회(契會) 연구의 자료이다. - 문화재청 『동방록(成均館同房錄)』
『경수첩(敬守帖)』
『선세수찰(先世手札)』
'상대계첩(霜臺契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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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동도회제명록(終南同道會題名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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