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Gijuzzang Dream 2008. 10. 15. 13:57

 

 

 

 

 

김홍도 '소림명월도'의 달

 

 

 

달에 집중되는 시선을 잡목으로 분산, 은은한 정취 살려내
세 부분의 농묵으로 '삼각 구도'
달을 가린 단원의 정면승부 주목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보물 782호)

<병진년화첩> 1796년

종이에 담채, 26.7×31.6㎝. 리움미술관.

조선시대 그림에는 달이 등장하는 그림이 몇몇 있다.
 
남리 김두량의 '월야산수도'에는
초겨울의 깊은 계곡에 보름달이 떠 있고,
남녀의 밀애를 그린 혜원 신윤복의 '월하의 정인'에는
초승달이 떠 있다.
 
또 단원 김홍도(1745~1805)의 '송석원시사야연도'(1791)에도
야외에서 시 짓는 문인들의 모임을 보름달이 비추고 있다.
그런데 단원의 그림에는 특이한 달이 하나 있다.
앞의 세 그림에서 달은 모두 밤하늘에 둥실 떠 있지만
단원의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1796)'에는
달이 나무에 가려져 있다. 흔치 않은 경우다.
왜 굳이 나무 뒤에 달을 배치했을까?
이 그림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둥근 보름달이 보이는 풍경을 그린 이 작품에서,
단원은 단순하고 평이한 장면을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절경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야말로 단원의 비범한 천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얽히고 설킨 나뭇가지를 능란한 붓놀림으로 묘사한 수지법(樹枝法)은
만년의 단원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개울물 소리가 잔잔히 들리는 가을밤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성긴 숲을 어루만지는 달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잡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숲. 나무 뒤에 둥근 달이 떠 있다.
한쪽에서는 개울물이 졸졸거린다.
소림명월(疏林明月), '성긴 숲에 뜬 달'이란 뜻이다.
나무와 달이 연출하는 가을의 소슬한 적막감이 일품이다.
그림의 심리적인 중심은 둥근 보름달이다.
또 실제로 달이 화폭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나무들 역시 중앙에 집중 배치된 채 달을 가리고 있다.


이런 그림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잠시 에돌아갈 필요가 있다.
단원이 먼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는 '소림명월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자연 속에서 시 짓는 모임을 포착한 이 그림은
당시 중인들의 문학운동을 주도하던 '송석원시사'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실경이 아니다. 모임에 참석한 문인에게 정황을 듣고 그린 것이다.
단원은 어디에 그림의 비중을 두었을까? 세부적인 디테일이었을까?
아니다. 자연 속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문인들의 감흥에 공을 들였다.

'소림명월도'도 마찬가지다. 가을 달밤이 주는 정취를 은은하게 우려낸다.
아무렇게나 자란 잡목들이 적막하면서도 쓸쓸하다. 가난한 숲이다.
고목이 멋들어진 '월야산수도'에만 달이 뜨는 것이 아니다. 소박한 잡목에도 달은 뜬다.
그것도 '쟁반 같이 둥근 달'이다. 보잘것없는 잡목을 위로하듯이 달이 비친다.
김종삼의 시 '묵화(墨畵)'에서 할머니가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듯이,
달이 나무의 허리춤을 부드럽게 감싼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묵화' 전문)
 
그처럼 적막하다. 가난한 숲에도, 소박한 삶에도 달은 뜨는 법이다.


달과 나무의 이중주

이 그림은 대개 분위기에만 주목한다. 그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법과 구도는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법과 구도를 보면 그림이 심장이 더 잘 보인다.
먼저 짙은 먹(농묵)과 엷은 먹(담묵)이 나무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든다.
달의 위치도 절묘하다.
나무를 보면 농묵으로 된 부분이 세 곳이어서 삼각형을 이루는데, 삼각형 안쪽에 달이 배치돼 있다.

즉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아래쪽과 왼쪽, 그리고 이 나무의 위쪽에 농묵으로 된 가지가 조밀하게 모여 있다.
이 세 곳을 서로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따라서 이들 삼각형을 구성하는 나뭇가지는 감상자의 시선을 끌어 모아서, 달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이 그림에서 가장 과감한 시도는 달의 위치다.
'월야산수도'처럼 달을 빈 하늘에 배치하지 않았다.
오른쪽 위의 빈 공간에 달을 배치할 수도 있었지만 단원이 주목한 곳은 중앙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화폭의 중앙에 소재를 배치하는 구도는 피하는 편이다.
구도의 목적이 감상자에게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폭의 중앙에 소재를 배치하면 주변 소재들이 소외된다. 또 그림이 단순해지고 불편해진다.
단원도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달을 중앙에 배치한다.
 
감상자의 시선이 달 부근에 집중된다. 나머지 공간은 소외된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단원은 정면승부를 건다. 달로 집중되는 시선을 분산시킨다. 어떻게 했을까?
간단하다. 달의 전면에 잡목을 배치한 것이다. 그의 재능이 빛나는 순간이다.
달을 중심으로 모이던 시선이 잡목으로 고르게 분산된다. 오른쪽의 도랑물 소리가 비로소 눈에 잡힌다.
이때 두드러지는 것은 달도 아니고 잡목도 아니다. 달과 잡목이 어우러진 은은한 정취다.
단원의 노림수도 결국 가을 달밤의 적막한 분위기에 있었다.

단원의 '병진년화첩'에 실린 20점의 그림 중 '소림명월도'는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51세의 무르익은 필력으로 소박한 장면을 절경으로 승화시켰다.
- 2008.09.17ⓒ 국제신문(www.kookje.co.kr)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 정민영 (주)아트북스 대표

 

 

 

 

 

 

 

  

 

 

<병진년화첩>은 김홍도가 52세 원숙기에 그린 화첩이다.

 

그는 육십을 갓 넘어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만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첩은 전체 20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주석은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보다는 <단원절세보첩(檀園折世寶帖)>이라는 명칭이 정당하다고 논했다.오주석은 <병진년화첩>이 제작시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지칭하는 바가 없으므로

작품 제목으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건조하므로,

‘절세(絶世)의 보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단원절세보>라는 명칭이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고 했다.

<단원절세보>는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한지가 쓴 것이므로

본래의 화첩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화첩에는 11월과 2월의 나무들이 등장하는데,

그 나무들은 이제 보편적 조형을 획득한 듯 시절을 불문하고

여러 그림에서 그 허름한 골간을 은연히 드러내고 있다.

늙어서 되돌아보는 생의 풍요로움은 결국은 다 스러지는 것들이 아닌가!

결국은 스러지고 남는 것이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다.

 

소림명월도. 호암미술관 사진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병진년화첩>에 실려 있는 ‘소림명월도’는 11월이나 2월 어느 날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쓸쓸하거나 처연하지 않다. 나무의 메마른 잎들은 까칠하지 않고 부드럽다.

나목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보통은 겨울 찬바람에 스산하기 마련인데,

이 그림은 그런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 <단원 김홍도> 오주석, 열화당, 1998년

- <단원 김홍도> 오주석, 재출간, 솔출판사, 2006년 

-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솔출판사, 1999, 2005

-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솔출판사, 2006

-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 돌베개, 1998

    :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 / 부제 : <단원절세보첩>을 중심으로

-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삼성문화재단

- <단원 김홍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통천문화사,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