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오원 장승업의 성공기

Gijuzzang Dream 2008. 10. 8. 20:44

 

 

 

 

 어수룩한 시골 총각 오원 장승업의 성공기

 


조선의 3대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평안도 출신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애초 어수룩한 시골 총각이었다.

그는 어느 때인가 서울에 올라와 지전(紙廛), 즉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지물포에서

민간에서 쓰이는 그림 등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의 나이 20세를 전후하였을 때일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이윽고 고종 임금의 눈에 들게 되었다.

 

더벅머리 시골 총각에서 일약 화단의 스타로 떠오른 드라마틱한 일대기 덕분에

그에 관한 많은 구전과 일화가 생겨났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상경과 성공 이력이 더더욱 궁금하게 여겨진다.


장승업이 언제부터 서울에서 생활하며 시골티를 벗기 시작하였을까?

정확한 때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그나마 대강의 시기 정도는 재미있는 한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장승업은 소실과 말다툼을 하였는데, 다름 아닌 장롱사건이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도 기세등등하게 이렇게 내뱉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걱정 말아! … 며칠 있다가 그 놈의 장롱 열 바리만 실어다 주마”
그러던 중 경복궁 단청공사의 책임을 맡아 공사를 마친 고종 5년(1868) 6월 오원(吾園, 장승업)은

단청(丹靑) 폐백으로 받은 수천 냥의 엽전을 손에 쥐었다.

이 돈을 가지고 무조건 술집부터 들러 거나하게 마시고 난 후 발걸음을 옮겨

관훈동의 장롱가게로 갔다.
“주인장, 장롱 세 바리만 실어주쇼.”

또 다음 집에 가서 두 바리를 더 사가지고 관수동(觀水洞)의 소실 집으로 갔다.
“아니 이게 어쩐 일이오?” 대경실색하여 묻는 소실에게
“많이 갖다 줘도 싫어” 하고는 호기를 부렸다.

마치 소설처럼 들리는 이 글은 화백 김은호가

스승인 조석진과 안중식을 통해 들은 장승업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내용 중에 장승업이 1868년에 경복궁 단청공사에 참여하였다고 하므로,

그는 적어도 26세경에 이미 서울에서 생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실을 두었으니 그림으로 재미 좀 보았는지 크게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이때가 갓 상경한 시기는 아니었을 것이며, 꽤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10세부터라고 보기도 힘드니 그의 서울 생활의 시작은 아마 20세를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위 글을 통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1868년 전후에는 서울에 큰 변화가 있던 때인데,

당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그 조치 중 하나로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의 중건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해 6월이면 근정전을 비롯해 경복궁내 많은 건물들의 중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점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종은 7월 2일 이후에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고

왕실이 차례로 이어하게 되어, 경복궁은 다시금 조선왕조의 본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해 6월은 단청과 같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글은 단지 전해지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즉, 그간에 익힌 그림 실력으로 경복궁 중건의 단청 공사 책임을 맡은 것이다.


장승업은 단청 공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직책을 맡았을까?

김은호의 글에는 장승업이 단청의 책임을 맡았고 이로 인해 수천 냥의 폐백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장인(匠人)의 급료가 매월 쌀 4석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이 부분은 그가 단순히 단청을 칠하는 소임을 맡은 것이 아니라

김은호가 남긴 글대로 감독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승업은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조금 더 넉넉해지고

그림과 관련된 일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려나갔을 것이다.

이후 12년이 흘러 1879년에 장승업이 얼마나 화가로 성장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해 11월 14일에 훗날 순종이 될 세자의 가례처인 안국동 별궁(일명 안동별궁)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아래는 완공된 때의 기록이다.

제조(提調)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나 조카 가운데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교관을 공석으로 만들어 추천(三望)하고 …

전 첨정(僉正) 오경연(吳慶然), 전 지사(知事) 이용숙(李容肅), 한문규(韓文奎), 변원규(卞元圭)는

모두 수령자리가 난 곳에 추천(三望)하고 …

화원 조중묵(趙重묵)은 수령에 바로 임명하고, 김시영(金始榮)은

임시로 실관을 주었다가 자리가 생기면 실관으로 승진시키고,

장승업(張承業)은 도화서 실관을 바로 주었다가(直付) 자리가 생기면 실관으로 승진시키고,

화원 이경록(李慶祿) 등 7인과 사자관 김광묵(金光묵)은 모두 품계에 맞는 직에 골라서 등용하고 …

위 글은 1880년 9월 21일의 기록으로,

훗날 순종이 될 세자의 가례처인 안국동 별궁( 안동별궁) 건립의 수고를 치하하는 내용 중의 일부이다.

 

고종은 상량문을 제술한 신료들을 비롯해 공장에 이르기까지 시상을 명하였다.

이중에는 장승업을 비롯한 여러 화원의 이름이 보인다.

즉, 1879년에 안동별궁 건영을 시작하면서 조중묵(趙重묵)을 책임으로 하는

약 10여 명 화원들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당연히 회화와 관련된 직무가 주어졌을 터이므로,

건물의 단청에 쓰일 안료와 도안의 결정에서부터

문과 벽을 장식하는 십장생 등의 회화류를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안동 별궁>은 원래 현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1956년에 해체 이전되었다.
위 건물은 모 골프장으로 이전된 현광루와 연경당이다. 현재 안도 별궁은 다시 복원중이다.

 

 

장승업, <추남극도인>, 종이에 담채,
134.7×64.1, 간송미술관소장

별궁이 근 10개월 만에 건립되었고

그 노고에 대한 시상으로 장승업은 직함만 있는 것이 아닌

정식 실관의 자리를 보장 받았다.

그렇다면 그는 경복궁 단청공사에 참여한 시기인 1868년에서 1879년 사이에 실관은 아니지만 도화서 화원에 임명되어 직함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궁건립 참여 시기 즈음에 장승업은

조선말의 문신 변원규와 통역관 가문인 오경석 집안 등의

후원마저 얻게 되면서 그의 회화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심지어 장승업의 화명은 궁중에게까지 소문이 나,

고종은 장승업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장지연이 지은 <일사유사>에 따르면

고종은 장승업에게 병풍을 그리게 하였지만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궁궐을 몰래 빠져 나와 술을 마시곤

하였고, 결국 고종의 노여움을 샀으나 민영환이 자신 집에

가두어 두고 그림을 끝내도록 하겠다고 청을 올리자

고종이 허락하였다.

그렇지만 결국은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이 그리다가 만 병풍은 어떤 종류일까?

장승업의 그림 중에는 이 일화와 관련이 있을 법한 예가 남아 있다.

‘대령화원 신 장승업 진상(待令畵員 臣張承業 進上)’이라는 관지가 적힌

<춘남극노인(春南極老人)>과 <추남극노인(秋南極老人)>으로,

여느 그림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음을 필묵의 운용에서 느낄 수 있다.

장승업의 그림 중에 이렇게 공력을 들인 예는 없을 것이다. 즉, 임금에게 바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병풍 속 그림 역시 이런 식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용은 다를지라도 필묵법 등은 유사하였을 것이다.

붓을 기분대로 휘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공력을 드려야 하니,

분방한 기질의 소유자 장승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였을 법하다.

 

이후 장승업은 관복을 벗어던지고 도화서 소속 화원이 아닌 자유로운 직업화가의 길로 나섰다.

그가 활동 본거지로 삼은 곳은 바로 조선 최대의 서화시장인 청개천의 여섯 번째 다리 광통교 일대였다.
서화 유통 시장으로서 광통교 일대의 역할은 정약용이 자신이 받은 신선도의 구입처를

광통교로 지목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18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그 기능이 확대되어 본격적인 서화유통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장승업은 이곳에서 육교화방이라는 간판을 건 개인 화실을 열고

해학미와 골계미로 가득한 작품을 제작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나갔다.

화실을 연 시점은 정확하지 않으나, 그가 1880년에 도화서 실관의 자리를 보장받았으므로

이때에 바로 자신의 화실을 개설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한편 안중식이 1891년에 장승업의 육교화방을 방문하였으므로

적어도 개설 시기는 1880년이 좀 지난 시기에서 1891년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개인화실에서 왕성한 회화 활동을 하여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이 1890년대 전반에 몰려 있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이곳 육교화방은 광통교내 서화시장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승업은 촌티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자유분방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당시 화단을 이끌었으며,

그러다 보니 그의 주위에는 김영과 정학교와 같은 문자 꽤나 쓰는 중인들까지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내 합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장승업이 그림을 그리면 이들은 제발을 쓰곤 하였다.

천재 화가와 출중한 서예 실력의 소유자간의 합작품은 당시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감상자와 수집가의 눈에 들어갔고 이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근대 서울화단을 이끈 안중식 같은 화가들이 그림을 배우고자 육교화방으로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근대화단에는 이른바 오원화풍이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조선말 화단의 사교 장소였으며, 제자를 가르치는 학습 장소였으며

조선 최고의 아뜨리에였던 것이다.

장승업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기전까지 이곳에서 소설같은 일화를 만들어내며,

조선 3대화가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창작을 이어갔던 것이다.

- 김현권, 문화재청 인천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8-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