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풍속화에 보이는 조선의 질그릇

Gijuzzang Dream 2008. 10. 9. 18:51

 

 

 

 

 

 풍속화에 보이는 조선의 질그릇

 

 

 

조선의 질그릇은 분청사기나 백자 등의 자기와 함께 일상생활에 보다 널리 쓰였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이 사회의 습속을 개혁하기 위해

유기(鍮器)나 동기(銅器) 등을 대신하여 질그릇이나 자기, 목기 등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143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에 자기와 질그릇을 만드는 곳인 자기소(磁器所) 139개소, 도기소(陶器所) 185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질그릇을 생산하는 도기소가 자기소에 비해 많은 것을 통해

질그릇의 제작이 보다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69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옹장(甕匠) 104명이 경공장(京工匠)으로 등록되어 있다.

15세기 후반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사람들이 사용하는데 질그릇이 가장 긴요하다.

지금의 마포, 노량진 등은 모두 진흙굽는 것으로 업을 삼는데, 이는 모두 질그릇 항아리나 독류이다.”

라고 하였다. 즉 질그릇이 저장용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이는 왕실에서나 관청 그리고 일반 서민층에까지 널리 쓰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질그릇의 형태는 분청사기와 일부 백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물병이나 술병의 용도로 사용되어진 장군이나

편병, 자라병 등과 높이가 낮은 단지나 항아리 등이 그러하다.

한편 분청사기나 백자의 기형이 질그릇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윗부분이 공처럼 둥글고 허리 부분이 잘룩한 매병이나

몸체가 풍만하고 입부분이 넓게 벌어진 병, 태항아리와 같은 긴 항아리 등이 질그릇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조선의 질그릇은 대체로 실생활에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밑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준다.

 

질그릇은 스스로 가지는 숨쉬는 작용과 수분을 조절하고 불에 잘 견디는 기본작용 외에도

청정(淸淨)작용이 있다. 때문에 곡물을 저장하는 독, 항아리, 물동이 등이 질그릇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굽기 전에 표면을 갈고 그 위에 음각으로 문양을 넣는데

표면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으며, 밥통, 시루 등에 이용되었다.

이외에도 번조시 화도를 낮추어 구우면 불에 더욱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에

화로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질그릇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18세기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부엌에서 쓰는 그릇들로 탕기나 자배기,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단지, 병, 대옹(大甕), 중옹(中甕),

술통, 소병 등과 오물 등을 나르는 장군, 의식에 사용되는 술병, 제기(祭器), 술항아리,

다관, 화로와 떡시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질그릇의 형태는

18세기에 활동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그린 주막이나 추수장면 등의 풍속화를 통해

어느 정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병은 입과 목이 길게 곧추서고,

반구형 항아리 등은 입이 넓고 몸체가 직선으로 오르거나 배가 부른 형태이다.

 

 

 

-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중 ‘주막’ / 27×2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홍도, 단원풍속화첩 중 ‘벼타작’ / 27×2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병(甁)/ 오른쪽(높이 25.8㎝), 최영도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필자미상, 풍속화첩 중 ‘독나르기’ / 56.4×36.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손잡이 달린 항아리 / 높이 32.5㎝, 최영도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동우,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최영도실

- 2008년 9월24일,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제 107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