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①
『삼국지』의 약 1/3은 중국인과 소위 오랑캐와의 싸움이다.
삼국 중에서 북방에 위치한 위나라는 동쪽에 있는 연나라는 물론
남만의 맹획(孟獲, ?~225 이후)과도 혈투를 벌이는데
이들은 당대 중국인의 기준으로 볼 때 오랑캐와의 전투였다.
『삼국지』가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삼국 간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오랑캐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대의 패권을 잡기 위해 부단히 오랑캐와 전투를 하였고
또한 오랑캐만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이 『삼국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에서 매우 의아한 것은
천하의 작전통으로 알려진 제갈량의 매우 이상한 원정을 대단히 길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국이 전통적으로 오랑캐로 인식한 남만(南蠻)의 맹획과 전투를 거듭한 제갈량의 남만정벌이다.
▲ 당대의 전략가인 촉나라의 제갈량 |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남만의 왕인 맹획을 7번 사로잡은 후 7번 풀어주는 소위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아량을 베푼다.
소위 술래잡기에서 맹획이 7번이나 잡히는데 결론은 남만의 왕인 맹획이 제갈량의 신출귀몰하는 재주와 아량에 감복하여 마음으로 촉나라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의 전반에 흐르는 전투 상황을 볼 때 제갈량의 행동은 그야말로 이해하기 힘들다.
당대의 전투 공식에 의하면 패자를 죽이거나 살리는 것은 승리자의 몫이며 패배자가 갖고 있던 영토는 승리자가 흡수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제갈량은 많은 장병들이 열대 지역에 적응하지 못해 괴질에 걸려 사망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맹획을 7번이나 사로잡았음에도 7번이나 풀어주어 마음으로 복종케 했다고 한다.
문제는 맹획을 7번이나 사로잡을 때 공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촉나라 군사는 수많은 습지와 열대 우림을 돌파하면서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다.
만두가 만들어진 이유도 습지를 지나기 위해 사람을 희생물로 삼지 않기 위해 만든 고육지계이다.
더구나 제갈공명은 남만을 공격하면서 받은 피해가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맹획에게 다시는 반란하지 말라고 다독거리며 철수했다.
그야말로 당대의 전략가인 공명이 밑지는 장사를 했다는 것으로 그 이유가 의문이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제갈공명이 그와 같이 해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악전고투하는 남만정벌
『삼국지』에는 공명이 남만을 공격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갈량이 남만을 원정하겠다고 하자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유명한 마속(馬謖, 190~228)이 공명에게 말한다.
“남만은 중원과 거리가 멀고 산천이 험하므로 항상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비록 오늘 승리를 거두어도 내일 또다시 반할 것입니다.
승상의 대군이 나서면 평정이 되기는 하되 만약 군사를 돌려 북벌에 나간다면 곧바로 반발할 겁니다.
대저 용병하는 법은 공심(公心)이 상공(上攻)법이고 공성(攻城)은 하계입니다.
그러므로 심전(心戰)이 상승이요 병전(兵典)은 하책입니다. 승상께서는 마음으로 복종시키도록 하십시오.”
결론은 제갈량이 마속의 건의를 받아들여
맹획을 7번이나 잡았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7번 풀어주어 마음으로 복종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갈량이 무슨 이유로 남만을 공격했는지는 이것만 보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진수의 『삼국지』 <제갈량전>에는 건흥 3년(225)에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적었다.
‘제갈량은 군대를 인솔하여 남쪽으로 정벌을 나서 이 해 가을, 전부 평정시켰다.’
그야말로 간단하기 짝이 없는 설명인데
『삼국지』에는 남만의 맹획이 건령태수 옹개(雍闓, ?~225)와 연합하여 10만 명의 병사를 움직여
국경을 침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명의 침입을 받은 맹획의 이야기는 이와는 다르다.
그가 첫 번째 포로가 되었을 때 공명에게 다음과 같이 대든다.
“나는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사람이다.
너희들이 무례하게 내 땅을 침범했으면서 오히려 나더러 배반했다고 하느냐.”
위의 내용 중 어느 설명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나 옹개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공명이 이어서 맹획까지 공격한 것은 의아한 일임에 틀림없다.
맹획의 이야기처럼 공명이 자기 땅을 침공했다면 이에 대항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유채꽃 핀 곤명 현 곤명 지역으로 추정하는 남만은 중국이 전통적으로 오랑캐국으로 인식했다. |
그런데 사건의 정황은 이와 같이 단순하지 않다.
『삼국지』에도 남만 지역은 불모지지(不毛之地)인데다 역질(疫疾)이 유행하는 곳이므로
공명에게 남방원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명은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무려 50만 명을 동원했고 예상대로 남만의 기후 등으로 그야말로 악전고투한다.
노수(瀘水) 하류를 건너다가 독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고
나는 새, 기는 짐승도 살 수 없다는 독천(毒泉)에서도 많은 군사를 잃는다.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만든 만두
맹획의 영토를 병합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오로지 맹획을 마음으로 복종시키기 위해
이와 같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실제로 장사 비위(長史 費褘)가 점령한 남만의 땅에 한인(漢人) 관리를 두어 통치하자고 하자
공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데 세 가지 문제가 있소.
첫째 한인의 관리를 둔다면 군대가 주둔해야 하며
둘째 이번 원정에 만인(蠻人)이 많이 죽었으므로 이들이 군대를 공격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만인은 항상 폐살(廢殺)하는 일이 많으니 서로 의심한다면 문제가 생기오.
그러므로 관리와 군대를 두지 않는 것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무사하도록 하자는 것이요.”
공명이 퇴각할 때도 문제가 생긴다.
물속에 있는 창신(猖神, 원귀가 된 미친 귀신) 때문에 배를 탈 수 없게 되자 맹획은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제사에는 49명의 머리와 흑소(黑牛), 흰양(白羊)이 필요했다.
공명은 전쟁이 겨우 끝났는데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유명한 만두(饅頭)를 만들게 한다.
『삼국지』에는 소와 말을 잡아서 면(麵)으로 고기를 반죽해서 만든 사람의 머리를 만두라고 했다.
공명이 만들어 제사 지내며 노수에 뿌리자
노수가 잔잔해져 공명의 군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송나라의 고승(高承)은 『사물기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 당시의 정황을 적었다.
당시 남만 지역에는 사람의 목을 잘라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이를 금지하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밀가루로 싼 다음 사람 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더니 귀신이 속아 넘어가 군대를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제갈량이 만두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남만 정벌에서 악전고투했다는 뜻인데
중국 역사학자들은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제기한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복한 일은 당시의 전설로서 과대 포장된 점이 있다.
맹획이 일곱 번 풀려났다가 일곱 번 사로잡혔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는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사실 『삼국지』가 나관중에 의해 여러 장면에서 역사가 가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예로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제갈량과 맹획의 술래잡기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위연에게 생포되고
두 번째는 자신의 부장인 동도나와 각 부장의 추장들에게 잡혀 제갈량에게 끌려간다.
세 번째는 마초의 4촌동생인 마대(馬岱, ?~234 이후)의 꾐에 빠져 붙잡혔으며
네 번째는 제갈량과 좁은 길에서 맞닥뜨렸다가 함정에 빠졌다.
다섯 번째는 연회가 벌어지는 도중 사로잡혔고
여섯 번째는 맹획이 체포된 것처럼 위장하여 거짓 투항한 후 제갈량을 죽이려다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역시 마대에게 생포되었다.
이에 비로소 맹획이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준 예가 자고로 없습니다.
제가 비록 오랑캐이지만 예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승상의 하늘 같은 위엄에 우리 남쪽 사람들은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무릎 꿇고 사죄했다.
맹획은 원래 초나라 사람
그런데 『삼국지』의 가장 유명한 장면 중에 하나인 ‘칠종칠금’의 주인공인 옹개와 맹획의 인물 설정은
완전한 변형인물로 사실 현대와 같았으면 옹개와 맹획이 명예훼손죄로 고발했음이 틀림없다.
옹개는 삼국시대 익주군(益州郡, 현재 운남성 일대)의 지방 호족으로 유비 편에 섰다가 유비가 사망하자
촉에서 임명한 태수 정앙을 죽이고 오나라에 항복해 손권이 임명한 영창태수가 된 사람이다.
또한 225년 제갈량이 남방 정벌에 나서 진군 중일 때 부하인 이왕(夷王) 고정(高定)의 부하에게 피살되어
제갈량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삼국지』에서는 건녕 태수로 변형되어 맹획과 손잡는 반란의 주도자로 나온다.
▲ 맹획 제갈량은 남만의 맹획을 7번 사로 잡은 후 7번 놓아주어 남만을 평정했다. |
맹획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원래 초나라의 익주군 사람으로 한나라 사람과 인근의 소수민족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는데 223년 태수 옹개가 오나라에 항복할 때 함께 투항한 장군이다.
물론 제갈량에 의해 포로가 되어 다시 촉나라에 투항하며 어사중승 벼슬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에서는 남만의 왕으로 변형되어 제갈량과 7번이나 맞서다 번번이 살아나는 장군으로 나온다.
맹획이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높이기 위해 철저하게 각색된 장군으로 변형되지만 실제로 제갈량이 남만 정벌에 나선 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제갈량이 이와 같이 악전고투하면서 남만을 정벌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촉나라가 북쪽의 위나라와 동쪽의 오나라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남쪽 대문을 철저하게 방비해야 한다는 것은 전략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 정도로 상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촉의 남쪽에 있는 남만은 기후와 지형이 달라 함부로 정벌할 수도 없었다.
설사 정벌하더라도 공명의 이야기처럼 통치하는 것도 역시 만만하지 않다. 그러므로 두고 두고 속을 썩일지도 모르는 남만을 정벌한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대대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인근 국가를 복속시키려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다.
첫째는 정복된 피지배자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노예 또는 병사 등을 전력 보강에 충당하는 것이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승자로 보아서 매우 골머리 아픈 존재이다.
패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승자와 다름없이 식량 등 필수품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물론
반란이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감시해야 한다. 한마디로 관리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므로 전쟁에 패배한 사람들을 승자가 곧바로 죽이지 않는 것은
살려두어 재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포로들을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은 전투에서 화살받이로 몰아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군을 포로로 잡기 위해서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공격에 성공할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제갈량이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오지 중에 오지인 남만인들의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감안하면서 대대적인 군사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남만 정벌의 목적이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제갈량이 적자를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남만을 공격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제갈공명에게 남만을 반드시 공격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제갈량 문화 유산 답사기』, 제갈량편집팀, 에버리치홀딩스, 2007
『본 삼국지(11)』, 리동혁, 금토, 2005
『삼국지 강의』, 이중텐, 김영사, 2007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8.12.16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1]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② |
『삼국지』에는 오랑캐의 습속이나 장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마술, 각궁, 동복 등도 그 중의 한 예이다.
그 중에서도 기마술은 고대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조조가 위험을 무릅쓰고 오환을 정벌하고
유비군에 서량의 마초가 합류한 것은 이들 모두 기마부대를 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마부대는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뉜다.
서량태수 마등의 아들 마초가 유비에 항복하기 전 공명의 지휘에서 움직이는
유비의 장군 위연(魏延 ?~234)과 마초의 동생 마대가 격돌할 때이다.
‘위연과 마대가 어우러져 싸운 지 10여 합,
마대는 위연의 무예를 당할 수 없다는 듯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위연이 급히 마대를 쫓았는데
홀연 몸을 피해 달아나던 마대가 급히 몸을 돌리며 활에 살을 메겨 위연의 왼편 팔뚝을 맞혔다.’
오랑캐의 비밀병기를 확보하라
마대가 몸을 돌려 화살을 쏜 그런 방법을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하는데
조조의 장군들도 이를 숙지하고 있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후 동작대(銅雀臺)를 건설하여 경축하는 잔치를 벌였다.
조조는 부하들의 무예를 시험하기 위해 서천 홍금전포(紅錦戰袍) 한 벌을 수양버들 나무에 걸어놓고
과녁을 백 보 밖에 세운 후 내기를 걸었다. 과녁 한복판 홍심(紅心)을 맞추는 사람에게 홍금포 한 벌을 주되
못 맞히는 사람에겐 벌로 냉수 한 사발을 먹인다는 것이었다.
▲ 무용총의 고구려벽화. 말을 타고 뒤로 활을 쏘는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사법이다. |
이때 발군의 활 솜씨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장합(張閤, ?~231)과 하후연(夏侯淵, ?~219)이다.
장합은 말을 타고 원을 그리며 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배사(背斜) 소위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활을 쏘아
한 대는 과녁의 중심을 맞히고 사지전(四枝箭)으로는 일제히 과녁을 뚫었다.
그가 홍금전포를 달라고 하자 하후연이 파르티안 기사법이야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후연이 말을 달려 선 밖에 당도하자 몸을 틀어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활을 당기니
살은 네 화살이 꽂혀 있는 한복판을 맞추었다.
이후 서황(徐晃 ?~227)도 활 솜씨를 보여주면서 서로 홍금전포를 갖겠다고 싸우자
조조가 이들의 싸움을 멈추게 하고 촉금(蜀錦) 한 포씩을 모든 장군들에게 수여한다.
이 장면을 보면 조조의 맹장들이 파르티안 기사법에 익숙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 조조군 장군들이 원래 하북(현 북경 인근) 출신으로 말을 잘 탔기 때문이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용총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 무사가 말을 달리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의 줄을 귀에까지 당기고 짐승을 겨누어 쏘는 방식이 파르티안 기사법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파르티안 기사법은 기본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마궁술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사법은 말만 잘 타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활이 몸을 돌려 뒤로 쏘는 데 적합해야 하고 또한 몸을 뒤로 돌릴 때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버팀대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만궁이고 후자는 등자이다.
만궁과 등자에 대해서는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4), (5)」
(사이언스타임스, 2007.6.27 및 2007.7.3)에 약간 다뤘지만 이곳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이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과 3명의 평복 차림 인물이 있고 표적은 5개이다.
그림 우측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 외에도 마장(馬場) 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의 인물은 ‘사희주기인(사희 기록을 주재하는 사람)’
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말 탄 무사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으로 보인다.
선수는 4명이다. 두 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겨누고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한 순을 돌아 나왔거나 아니면 준비 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과녁은 5개의 장대 위에 송판을 붙인 것 같은데
2개는 누가 쏘아 맞혔는지 두 동강이 난 채 땅 위에 떨어져 있다.
이 그림에서도 과녁을 겨눈 채 말을 달려 나가는 왼쪽 무인은
완전한 형태의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활을 앞으로 쏘려면 말 머리의 방해로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구는 모두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사람이 말 등에 올라앉기 위한 안장, 발을 딛는 등자, 말 다래
그리고 그것을 장착하는 말 띠와 띠고리이다.
둘째는 말을 다루기 위한 자갈· 굴레· 고삐 등이며,
셋째로 이들 기구들의 장식으로 행엽(杏葉) · 운주(雲珠) · 방울 등이다.
마구 중에서 가장 늦게 출현한 '등자'
마구 중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말 자갈이고 가장 늦게 출현한 것이 등자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등자가 발명되기 전에 말 등에 올라탄 기수는 자리가 불안정하므로
허벅지와 발로 말의 몸통을 꽉 조여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련한 기병조차 한두 시간만 말을 타고 달려도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온통 멍과 물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등자가 없는 경우 혼자 말에 오르기조차 어려우므로 기수는 다른 사람의 허리를 밝고 올라가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긴박한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쟁터에서 말 타는 것조차 어려우므로 말의 효용도는 단지 이동에만 사용되었다.
▲ 등자의 발명으로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
등자가 어떤 경로로 유럽까지 보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7~8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 기원 8세기경까지 유럽의 장수들이 말을 탄 이유는 전투장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전장에 말을 타고 가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말에서 내려 전투에 참여했다.
8세기 전에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공격하는 영화의 장면들은 모두 허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듯이 보이는 등자가 개발되자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삼국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제갈량도
당대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기마무사의 중요성을 남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삼국지』에서 전투는 수없이 벌어졌지만 적벽대전과 같은 수전.
관도대전과 같은 공성전 등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 보병과 기병의 전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당대에 일시라도 패권을 잡았던 동탁, 공손찬, 원소 등이
모두 기마무사를 주력으로 삼았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삼국지』를 보면 촉, 오나라가 기본적으로 위나라와 유사한 장비를 동원하여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 연결되어 있는 위나라와는 달리
촉과 오나라가 기동력 있는 기마부대를 확보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촉과 오나라의 상황도 다소 달랐다.
엄밀한 의미에서 오나라는 지형상 수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으므로
위와 초에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전투상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제갈량으로 보아 위나라와 오나라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위나라와 같은 기마부대 즉 비밀병기를 확보하는 길이다. 당시 기마부대를 확보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자신이 직접 기마부대를 운용하는 것과 용병을 이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위나라의 경우 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과 연접해 있으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통적으로 중국은 흉노를 비롯하여 선비, 오환을 외인부대로 활용했다.
당대의 강력한 전력을 갖고 있는 위나라를 격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제갈량으로서도
기마부대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요소였다. 역사상 제갈량은 유명한 비군(飛軍)을 운용했는데
이는 기마궁수부대를 의미한다. 학자들은 제갈량이 기마부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촉 진영에는 유명한 서량의 마초 등이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기마부대가 말만 있다고 해서 운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마무사가 파르티안 사법으로 화살을 쏘려면
중국의 한(漢)족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던 한식 활과는 분명히 다른 활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 궁수들이 사용하는 활은 기마부대에서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비장의 무기 만궁
등자가 마련된 말을 타면서 흔들림 없이 뒤로 몸을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세에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활이 있어야 한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여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했다는 것은 중국 측의 사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후한서』 : 고구려의 별종이 소수(小水)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다.
『진서(晉書)』 :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석자 다섯 치의 단궁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주(周) 무왕 때 그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도 다음과 같다.
① 부여(夫餘) : 활 · 화살 · 칼 · 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②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③ 읍루(挹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적중되면 모두 죽는다.
④ 예(濊) : 낙랑의 단궁(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된다.
⑤ 진한(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 각궁과 화살통. 한국의 각궁은 만궁 중에서도 휘는 정도가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
'진서(秦書)'에는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삼국지』는 관로(管輅, 208~256)의 놀라운 점술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뤘다.
관로의 자는 공명(公明). 평원(平原) 사람으로 얼굴이 추루한 중에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호방한데
천문지리와 관상 보는 법에 능통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낭야 태수가 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선비 백여 명을 초청해 놓고 그를 부르니 관로는 태수에게
“저는 나이가 아직 연소하여 담이 굳지 못하니 우선 술 석 되를 마신 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중요한 회의나 연설 등을 할 때 약간의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관로는 적어도 석 되씩 마셨다는 것이다.
여하튼 관로의 점술은 매우 유명하여 안평태수 왕기(安平太守 王基 190~261)가
그의 부인이 두풍을 앓고 아들이 가슴앓이 병이 있으니 점을 쳐 달라고 했다.
관로는 점을 친 후 이렇게 말했다.
“이 집 서편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둘이 있는데 한 시체는 창을 가지고 있고
다른 시체는 활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는 벽 안에 두고 다리는 벽 밖에 두었으므로
창을 가진 시체가 머리를 찌르므로 항상 두통이 나고
활을 가진 시체는 배와 가슴을 찌르는 까닭에 항상 가슴앓이를 하는 겁니다.”
왕기가 곧바로 땅을 파니 그의 말대로 두 개의 관이 나오는데
한 관에서는 시체와 함께 창이 나왔고 다른 관에서는 각궁(角弓)과 화살이 나왔다.
태수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니 비로소 아내와 아들의 병이 나았다고 적혀 있다.
『삼국지』에서도 각궁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이형구, 김영사, 2004
『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크리에디트, 2007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크리스 피어스, 수막새, 2005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8.12.30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2]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③ |
활은 일반적으로 단순궁, 강화궁, 합성궁으로 나뉜다.
나무 등의 단일 소재로 만든 활을 단순궁이라고 하며
활채를 나무껍질이나 힘줄 등으로 감아 보강한 것을 강화궁,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활채의 탄력을 극대화시킨 것을 합성궁이라고 한다.
한국의 활은 합성궁에 해당되는데
특히 활채가 활시위를 묶는 고자 부분에서 한 번 더 휘는 이중 만곡궁의 일종이다.
기본적으로 조선 각궁의 재료는 물소 뿔, 산뽕나무, 대나무, 소 힘줄, 벚나무 껍질 등이며
이들 재료를 민어 부레풀을 이용하여 접합한 후 활을 만든다.
이런 활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궁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길이가 매우 짧아 말 위에서 사격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군수물자가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활 유물은 평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고구려의 활이며
고분 벽화에도 전형적인 이중 만곡궁이 그려져 있다.
각궁의 원형이 없으므로 정확하고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한민족의 활이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활로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세조 4년(1458)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군사(軍士)로서 활 1백 20근(斤)을 당기는 자를 가려서 만강대(彎强隊),
강궁(强弓)을 당기는 자로서 편성한 시위대(侍衛隊))라 일컫고
행행(行幸)할 때에 시위(侍衛)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활 120근(77㎏)을 당기는 사람을 만강대(彎强隊)라는 시위대로 편성했다는 뜻인데
120근이라면 현대 양궁(약 11.3~20.4㎏)의 약 3~4배 가량 된다.
그만큼 조선시대 활의 성능이 뛰어났다는 말이 되지만
활을 다루는 무인들의 솜씨 역시 대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활은 그 용도에 따라서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군궁(軍弓),
활쏘기 연습에 사용하는 평궁(平弓, 현재의 국궁),
의례에 사용하는 예궁(禮弓, 군궁과 동일한 재료로 활의 길이는 6척),
무과시험에 사용하는 육량궁(六兩弓, 무거운 화살인 육량시(六兩矢)를 쏘는 활로 무과시험에 사용)으로
나뉘는데 이 중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군궁은 이중 만곡궁인 각궁으로
이는 고대와 다름이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궁은 흑각(黑角), 수우각(水牛角) 등으로 불리는 물소뿔로 만든다는 데 특징이 있으며
이를 흑각궁(黑角弓)이라고도 부른다.
물소뿔 중에는 흰색이나 황색도 있으므로 이를 백각궁(白角弓), 황각궁(黃角弓)이라 불렀다.
각궁을 만들 때 물소 뿔의 바깥쪽 한 면만 쓸 수 있고 뿔 2개로 활 한 자루를 만들기 때문에
각궁 제조에는 물소뿔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조선에는 물소가 없어 수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몇 차례 물소를 수입해서
남부 지방에서 키워보려고 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
▲ 이강 물소 물소뿔은 활을 당겼을 때 당시의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각궁을 만들때 가장 중요한 재료이다. |
구하기 힘든 물소뿔을 활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 것은
물소 뿔을 활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당시의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물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승기에 따르면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
활채를 접합시키는 접착제로 원래 소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아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세종 전후로 민어의 부레로 만든 어교(魚膠)를 사용했다.
민어 부레풀은 접착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다 마른 후에도 실리콘처럼 상당한 유연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연신율(延伸率)을 가진 여러 종류의 재료를 접합시켰을 때에도
재료 간의 연신율 차이로 인한 힘의 손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복합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각궁이 활시위를 풀었을 때 재료 간에 풀림이 없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휠 수 있는 것은 어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각궁에도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물소뿔을 접착한 어교는 비가 오거나 기후가 습해지면 물을 먹어 녹아 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습할 때는 각궁을 사용할 수 없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는 활을 따뜻한 온돌방에 넣어서 보관해야 했다.
더구나 각궁은 제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각궁 하나를 완성하는 데 최소한 5년 이상이나 걸린다.
그럼에도 고구려 등 승마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기마병들이 이 같은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하고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기병이 사용하는 활은 매우 작다.
기병용은 보통 80㎝(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인데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물소뿔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조금 변형된 활이 제작되었다.
후궁(帿弓)이 그것으로 이는 활 안쪽의 일부에만 물소뿔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물소뿔이 정 없으면 황소뿔도 사용했는데 이를 향각궁(鄕角弓)이라 한다.
그러나 향각궁은 흑각궁에 비해 위력이 떨어졌고 또한 자주 부러지기도 했다.
『만기요람』에는 흑각궁보다 향각궁이 약 30퍼센트 정도 저렴하다고 적혀 있다.
물소뿔 대신 사슴뿔을 이용한 녹각궁(鹿角弓)을 사용하기도 했다.
흑각궁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주어야 하므로
평소에 녹각궁을 사용하고 여름철에는 흑각궁 등을 사용했다. 녹각궁은 우천시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슴뿔은 긴 것 하나를 이음매 없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활시위를 풀었을 때 활채가 완전히 만곡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흑각궁은 상황에 따라 사용에 제한이 있으므로 보조활도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마무사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흑각궁이다.
당연히 물소뿔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보아도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유목민이 살고 있는 초원에는 없으므로
물소뿔은 결국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됐을 것이다.
기마민족의 필수 전투장비 제작에 꼭 필요한 물소뿔은 중요한 군수물자로 이를 확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남만은 물소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으로서는 물소뿔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원이 꼭 필요했으며
위나라와의 대전을 앞두고 남만을 먼저 정벌해야 했던 것이다.
▲ 여자양궁 북경올림픽 여자양궁 6연패 시상식 |
활을 이야기하면 2008년 북경에서 올림픽 6연패에 성공한 한국의 여자 양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언론은 「한국 양궁, 이길 방법이 없다」며 다소 자조에 찬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세계新 女양궁 대표 - 그녀들에겐 넓기만 했던 6.1cm 동그라미」라고까지 말했다.
사실 올림픽에서 개인전도 아니고 단체전에서 6연패할 수 있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각국에서 올림픽 금메달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20여 년 동안 정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한국 양궁에 남다른 비밀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규태는 그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상(樹上)생활 시대 사람의 손은 무지근(拇指筋)이 발달하고,
물건을 들어올리던 시대의 손은 삼각근(三角筋)이 발달했으며,
손의 작업이 필요하게 되면서 손가락과 손바닥을 관장하는 손목근이 발달했다고 했다.
농경민족으로 가장 손을 많이 쓰는 생업을 유지해 내린 한국인의 손과 중추신경 간의 연관이
상대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곧 국제대회에서 한국여성들의 양궁 연패의 과학적 요인으로 이 손목근육인 장장근 발달을 들 수 있다.
옛 어머니들 논·밭갈이, 길쌈, 바느질, 빨래, 설거지 등 아버지보다 자주 손을 썼기로
한국여성의 장장근 발달도가 100이라면 한국남성의 그것은 80이란 것도
여궁이 남궁보다 강한 이유로 꼽음직하다.
사물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좌뇌가 서양사람들에게 발달하고
심정적으로 파악하는 우뇌가 한국인에게 발달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중략)
곧 뇌와 손끝을 잇는 자율신경이 무심 상태에서 맥락되는 경지라 했으며
이 무심으로의 지름길이 좌뇌 아닌 우뇌로 통한다는 것이다.
궁도나 사격뿐 아니라 유도 · 검도 · 역도 · 태권도 등 도(道)가 붙은 경기의 선수들이
무심으로의 길을 찾는 좌선(坐禪)으로 수련을 쌓는 이유가 이에 있다.
셋째로 고대 한국인의 특성으로 단궁(檀弓), 맥궁(貊弓) 등 활 잘 쏜다는 대목이
중국 문헌들에 빠지지 않았음이며,
큰 활을 뜻하는 동이(東夷)라 불렸음도 선궁(善弓) 유전인자가 고대부터 흘렀음을 말해준다.
그 전통을 이어 의주나 북청 등 변방지역의 여인들은 말을 달리며 쏘는 치마사(馳馬射)에 능했고
큰 고을들에서는 남촌 북촌 편을 갈라 여궁을 겨루어
예로부터 “조선은 활, 중국은 창, 일본은 조총”이란 말이 나돌았었다.
여궁의 6연패는 이 세 가지 요인의 복합과 피나는 연습이 뒷받침하여 얻어진 필연으로 본다.’
한국인은 우뇌, 서양 사람들은 좌뇌가 발달했다는 설명이 다소 미흡하기는 하지만
여자 양궁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활을 잘 쏠 수 있다는 지적은 신선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한국인의 경우 남녀 모두 활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다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물에 가라앉는 흑단
제갈량이 맹획을 3번 사로잡은 후 다시 풀어주자 맹획은 이를 분하게 여기고
다시 10여 만 명의 만족들을 규합하여 공명을 공격할 차비를 한다.
공명이 맹획을 다시 사로잡을 수 있다면서 서이하(西耳河)로 가는데
물길은 급하지 않으나 배가 한 척도 없었다.
공명이 장병들로 하여금 인근에 있는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강물에 띄우게 했으나
뗏목이 모두 물속에 가라앉았다.
결국 공명은 서이하 상류에 있는 대나무를 사용하여 죽교(竹橋)를 만들어
장병과 말들로 하여금 서이하를 건너게 한다.
여기에서 나무로 뗏목을 만들었는데 가라앉았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배를 나무로 만드는 이유는 나무가 물에 뜨기 때문인데 제갈량이 만들게 한 뗏목은 뜨지 않고 가라앉았다.
그 재료가 흑단이었기 때문이다.
▲ 흑단은 물보다 비중이 높을 정도로 단단하여 마차바퀴는 물론 고급 가구에 사용되었다(사진 나들목) |
흑단은 감나무과로 세계적으로 약 200여 종이 있는데
아프리카, 아메리카보다도 주로 아시아에 많이 분포해 있다.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인도차이나, 말레이, 수마트라, 보르네오, 스라웨시 등이 이에 포함된다.
높이 30여 m에 직경 40㎝까지 자란다.
수피는 일반적으로 얇고 색깔은 흑색, 녹흑색, 함호색, 암회갈색 등 흑색계통이며, 표피 내측에 흑색 띠가 있다.
내수피는 황색 또는 적색계통이며, 내측으로 있는 변재와 거의 같은 색이다.
목질은 변재, 심재의 색깔과 폭은 수종에 따라 차이가 있어 흑단, 청흑단, 호적단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흑단으로 통칭하는데 연마할 경우 광택이 난다.
흑단의 특징은 매우 무겁다는 점이다.
비중이 0.80~1.10 정도이고 어떤 종류는 1.20이 넘기도 하여 물에 가라앉을 만큼 비중이 높다.
흑단의 사용도는 퍽 다양하다. 예로부터 고급가구는 흑단으로 만들었으며
현재도 흑단으로 만든 목검을 최고의 목검으로 여긴다.
흑단과 같이 단단한 목재의 또 다른 용도는 마차의 바퀴 제작이다.
사실상 고대 전투에서 전차를 비롯한 마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최초의 마차는 수메르인들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들은 4개의 튼튼한 바퀴 위에 네모난 상자형 차체를 얹은 육중한 차로
여러 마리 소나 오나거(야생 나귀의 일종)를 메워 끌었다.
말이 끄는 전차는 기원전 1600년경에 출현했는데
이는 마차를 만드는 획기적인 기술이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 전반기에 장인들은 열로 나무를 구부릴 수 있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기술은 그동안 사용됐던 무거운 원반형 바퀴 대신에 살이 달린 바퀴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4개 또는 5개의 살이 구부러져 주의 깊게 연결된 바퀴테로 만들어
마차 바퀴의 무게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드디어 기동력을 가진 전차가 태어날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 바퀴살에 가죽을 씌워 살이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조치를 취했다.
참고문헌 :
『조선의 무기와 갑옷』, 민승기, 가람기획, 2004
「왜 여궁인가」, 이규태, 조선일보, 2004.8.19
『고대의 여행 이야기』, 라이오넬 카슨, 가람기획, 2001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01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3]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④ |
전차는 춘추전국시대에 전쟁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는데
한나라를 거쳐 삼국시대에는 기병과 보병이 주력을 이루어 퇴조했지만
수송용으로서의 마차 활용도는 더욱 높아진다.
대규모 장병을 동원해야 하므로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품 운반에 마차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군사병법가로서는 물론 신병기 개발에도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목우유마(木牛流馬)이다.
군수품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목우유마는 기동력이 좋아
현대의 로봇보다도 뛰어났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이다.
제갈량의 목우유마(木牛流馬)
『삼국지』에는 목우유마의 구조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적었는데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목우는 배가 네모지고 머리가 구부러져 있으며 다리 하나에 발이 네 개 달려 있다.
머리는 목에서부터 나오고 혀는 배 쪽에 있다.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으나 걸음은 느리다.
따라서 대량 수송에는 사용이 가능했지만 소량 운반에는 적절치 않았다. (중략)
목우는 한 쌍의 원(轅, 수레 앞쪽 양옆에 대는 긴 채)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람이 가면 여섯 자리를 목우는 네 걸음에 간다. 한 번에 1년치 식량을 싣고 하루 20리를 간다. (중략)
유마의 갈빗대의 길이는 3자 5치, 너비는 3치이며 두께는 2치 3푼으로 좌우가 같다.
앞 축에 있는 두 개의 검은 구멍에서 머리까지는 4치이며 지름은 2치이다.
앞다리에는 2치쯤 되는 두 개의 검은 구멍이 있는데 그곳에서 앞 축 구멍까지 4치 5푼이며 너비는 1치다.’
▲ 목우유마, 그림에서는 살아있는 황소처럼 그려졌지만 학자들은 목우유마를 소의 모습을 가진 단륜차로 추정한다. |
『삼국지』에 매우 상세하게 구조가 설명되어 있지만 실물이 없으므로
아직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목우유마란 간단하게 말해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쌍륜마차를 단륜차로 바꾼 것으로 추정하는 데는 견해가 일치한다.
쌍륜차는 평지대에서는 활용도가 높지만 구릉지대와 산 속의 복잡한 지형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특히 『삼국지』에서는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였으므로 어느 지형에서 전투가 벌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북진할 때마다 구릉 지역을 수없이 통과해야 했으므로 군량 운반이 무엇보다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군량 수송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목우유마를 설계하여 포원(蒲元)에게 제작하게 하였다.
『삼국지』에도 매우 자세하게 목우유마를 제작하는 방법이 나와 있지만 문자가 난해하여 근대의 학자들도 정확하게 그 모습을 복원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목우는 한 사람이 미는 소형 단륜차이며,
유마는 두 사람이 밀고 끄는 보다 큰 단륜차이다.
『포원별전(浦元別傳)』에 의하면 소형의 목우는 한 사람의 일 년치 양식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목우유마는 복잡하고 험준한 구릉지대와 산속 오솔길에서 군량을 쉽게 운반할 수 있음은 물론
행군 시에 각종 무기와 공성장비 등을 운반할 수 있다. 또한 숙영 시에는 진지로도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단륜차는 명나라 때까지 전장에서 사용되었는데
서양에서는 기원 11세기에서야 비로소 단륜차가 나타났다.
그런데 쌍륜차에서 단륜차로 바뀌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생긴다.
필연적으로 바퀴에 부과되는 하중이 매우 커진다는 점이다.
당연히 바퀴의 구조가 튼튼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은 제갈량의 목우유마는
원래 그의 부인인 황씨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음이 틀림없다고 추정한다.
제갈량의 장인은 면남(沔南)의 유명인사 황승언인데 그가 제갈량을 만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 제갈량의 황부인 |
“그대가 아내감을 고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게 못생긴 딸이 하나 있소. 머리는 노랗고 피부는 검지만 재주가 비상해 그대와 잘 어울릴 것이요.”
이 당시 노란 머리와 검은 피부는 양갓집 규수라기보다는 거친 일을 하는 하녀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노란 머리와 검은 피부는 추녀의 대표적인 특징인데 이는 유전이나 영양부족, 산성 체질 등을 요인으로 본다.
명문가인 황승언의 딸이므로 영양부족은 아니겠지만 당대에 추녀로 알려진 황씨와 제갈량이 결혼하자 주변 사람들이 손책과 주유가 당대의 미인인 대교 · 소교와 결혼한 것을 빗대서 ‘공명이 배필 고르는 것만큼은 배우지 말라. 아내를 골랐는데 바로 황승언의 못생긴 딸이다’라고 조롱까지 했다고 한다.
주유는 스물네 살인 198년에 소교와 혼인했고 제갈량은 약 200년 전후인 20살 경에 결혼했다.
결혼의 효과를 볼 때 가(可) · 감(減) · 승(乘) · 제(除)로 설명하기도 한다.
경제력을 갖춘 두 젊은 남녀가 결합하는 것이 ‘가’이고
경제력을 가진 남자(여자)가 경제력이 없는 사람을 배필로 맞는 것은 ‘감’이며,
배우자의 집안까지 돌보아야 하는 것이 ‘제’이다.
그런데 제갈량의 결혼은 바로 ‘승’이다. 황씨에게 재주가 있는 데다 명문가의 딸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결혼할 때 그는 인맥을 쌓고 학문을 닦는 데 여념이 없어서
집안 일을 전적으로 처리하고 관리해 줄 안주인이 필요했는데 황씨는 적격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와 만나기 전에 융중(隆中)에 머물면서
사마휘가 운영하는 소위 ‘융중 문화 살롱’의 주요 멤버로 명성을 높였으므로 친구들이 자주 찾아왔다.
이때 그의 집을 뻔질나게 찾았던 사람들은
사마휘의 가르침을 받은 방통, 서서, 맹공위, 석광원, 최주평 등이 있고
마량, 마속형제, 이엄, 진진, 양의, 요화 등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쌀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의 집에 가기만 하면 손님이 오자마자 쌀밥이 든 국수 등을 바로 차려나오는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손님이 부엌을 보니 나무인형이 맷돌을 돌리고 나무당나귀가 절구를 찧고 있었다.
황씨가 정말로 ‘로봇’을 만들어 맷돌을 돌리고 밀가루를 빻았다면
그녀야말로 최고의 요리사이자 엔지니어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부엌은 자동화 시스템이 갖추어진 최첨단 부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송나라 시인 범성대는 『계해우형지』에서
공명이 훗날 목우유마를 만든 것은 부인인 황씨의 재주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한편 황승언의 딸, 즉 제갈량의 부인인 황씨가 추녀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황승언은 당대의 재력가이자 실력자이므로 사위감을 구하기 위해 남다른 공을 들여 제갈량을 점찍었다.
당시에 제갈량은 융중 살롱의 스타 중에 스타였다.
그러므로 재주 많고 혈기가 왕성한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소개하면서
굳이 추녀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추녀라고 거론한 것은
자신의 딸이야말로 제갈량에게 적합한 배필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제갈량이 집안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 황부인의 로봇, 황부인은 가사를 돕는 로봇을 만들어 제갈량의 많은 손님들을 대접했다고 알려져 있다. |
실제로 양번의 융중무후사에 복원된 제갈량의 초가에는 황부인과 그녀가 사용했다는 로봇의 그림과 모형이 있는데 황부인의 재주가 만만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당대에 로봇과 같은 개념을 상상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여하튼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한 후에 목우유마가 제작됐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위나라와의 혈투를 각오하고 북벌을 추진하는 제갈량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군수품의 보급이므로 목우유마에 대해서는 제갈량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생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목우유마를 만들기 위한 질 좋은 자재가 남만 지역에서 생산된다면
남만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흑단이라는 나무의 성질을 몰랐으므로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게 했지만
이는 나관중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제갈량이 물소와 흑단 등의 생산지가 남만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만을 공격하여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퇴각할 때 맹획으로부터 상당한 재물을 받는다.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금, 은, 주(珠), 보(寶), 단(丹), 칠(漆), 약재(藥材), 소(牛), 말 등을 바쳐 군용에 쓰도록 하고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군용으로 남만에서 생산되는 물소와 말은 물론 단을 제공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때의 단은 흑단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제갈량은 상이한 기후와 풍토병, 고약한 지형 등으로 고초를 겪으면서까지
남만 정벌에 나서서 맹획이 완전히 촉에 복종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
제갈량과 같은 천하의 전술가가 굳이 남만의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이유가 불분명한데
남만의 물소뿔과 흑단 등의 전략 물자를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소뿔을 신하의 예로 보내라
삼국시대에 물소뿔이 매우 중요한 전략물자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삼국지』 <오주전>에 적힌 조비와 손권의 머리싸움에서도 알 수 있다.
220년, 조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비가 위나라의 황제가 되고 다음 해 유비가 촉나라의 황제가 되자
오나라의 손권은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조비에게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자처한 것으로 한마디로 더 이상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겠다는 뜻이다.
손권의 항복서를 받은 조비는 손권의 항복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어
작두향, 대패(大貝), 명주, 상아, 서각(犀角, 물소의 뿔) 등을 보내라고 했다.
조비가 손권에게 정말로 항복했는지를 알기 위해
당대의 전략무기로 볼 수 있는 물소뿔 등을 보내라고 한 것이다.
조비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손권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형주와 양주에서 바치는 물품들은 일정한 법도가 있는데
위나라에서 진귀한 애완물을 요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 맹획의 귀순, 제갈량은 귀순한 맹획으로부터 상당한 재물을 받는데 그 중에 다량의 물소가 포함되어 있다. |
신하들이 전략물자인 물소뿔 등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손권은 조비의 뜻대로 물건들을 보내라고 했다.
물소뿔은 그동안 오나라와 혈투를 벌이던 위나라의 전력을 증강시키는 역할을 함에도 손권이 이를 허락한 것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손권이 황제를 칭한 조비에게 예상치 않은 행동 즉 항복서를 보낸 것은 진짜 오나라를 넘겨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비가 손권을 오왕으로 봉하고 구석(九錫)으로 삼으면서 손권의 아들을 임자(任子)로 임명하려고 하자 이를 거부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임자’란 일종의 인질제도로 당시대의 임자 제도는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자신의 자식이 조정에 있으니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조비가 손권에게 항복한 사람의 관례대로 자식을 인질로 보내라고 했는데 손권이 이를 거절했다.
당시의 정황상 이런 거부는 항명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조비도 섣불리 손권을 응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조비는 다음 대안으로 전략물자인 서각 등을 보낸다면 손권이 진실로 자신에게 순종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손권이 조비에게 항복서를 보내면서도 인질을 보내지 않은 것은 손권의 행보에도 나타난다.
조비가 손권을 오왕으로 봉하는 사신으로 신하를 보내자
형주에서 예법에 따라 손권이 성 밖에서 사신을 영접해야 한다고 하자 고옹(顧雍)이 결사반대한다.
손권이 당당한 상장군 구주백(九州伯)인데 그런 벼슬을 받아서 무엇하느냐이다.
손권은 유방도 항우가 주는 벼슬을 받은 고사가 있으며 조비에 항복서를 보낸 것은
오나라를 위한 임기응변책임을 알아야 한다고 조비의 사신을 성 밖에서 맞이했다.
손권의 이러한 처신은 당시의 상황을 예리하게 꾀뚫고 있는데다
그 역시 황제가 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손권은 조비와 유비가 황제를 칭하자
별점을 잘 치는 자를 불러 자신의 성기(星氣)가 어떠냐고 물었다.
역술가가 그의 입맛대로 황제의 재목이라고 말하자 그 역시 참칭할 의사를 갖게 되는데
문제는 오나라의 전력이 촉과 위나라를 동시에 대항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손권이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한 것으로도 설명되는데
손권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당대의 삼국 정황 때문이다.
손권이 갑자기 조비에게 항복하고 오왕으로 책봉되겠다고 자청한 것은
촉나라에서 황제로 등극한 유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손권의 계략에 의해 219년 관우 부자가 살해되자
유비는 ‘도원결의’를 명분으로 오나라의 손권에 복수하겠다고 대군을 동원했다.
일반적으로 이 때 유비가 동원한 병사의 수는 60여 만 명으로
조조가 적벽대전에 동원한 병사보다 많다고 알려진다.
장비가 술 마시고 부하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살해된 것도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침공에 앞서다가 일어난 일이다.
여하튼 유비가 촉나라의 대군을 동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자
손권은 촉나라의 승상인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을 유비에게 보내어 화평을 청했다.
손권은 그동안 오나라와 분쟁의 대상이던 형주는 물론
친정으로 돌아와 있던 유비의 부인인 손부인 즉 자신의 동생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비는 일거에 손권의 제의를 거절하고 오나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자면 유비는 손권을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지만
현재의 장강 삼협(三峽)에 있는 호정(琥亭)과 이릉(夷陵)에서
오나라의 수군도독 육손(陸遜)에게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퇴각한다.
이것이 삼국시대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대 전투 중에 하나인 ‘이릉대전’이다.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09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4]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⑤
▲ 화공으로 유비군을 공격하는 육손, 유비는 화공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격파했으나 이릉전투에서는 역으로 육손의 화공으로 참패했다. |
이릉대전은 호정과 이릉 등 삼문협(서릉협, 무협, 구당협)에서 벌어졌는데 이곳은 촉나라의 관문이자 험준하기로 이름난 곳으로 예로부터 ‘촉도(蜀道)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 할 정도였다.
고대 삼협의 교통은 오직 수로에 의존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근래에도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는 데 문제점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직접 배를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홍수가 나면 배는 멈추고 교통은 완전히 두절되므로 고대에는 군수물자 등을 수송하기 위해 잔도(棧道) 즉 삼협 절벽에 길을 뚫었다.
일반적으로 잔도는 폭 2-3m(넓은 곳은 8인 대교(大轎)가 지날 수 있음), 강면으로부터 높이는 10m 이하인데 중국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로 알려진 삼협댐 준공으로 대부분 물 속에 잠겼지만 해전이 벌어졌던 이릉전투 유적지에는 아직도 잔도가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구당협 인근의 잔도로, 절벽에 구멍을 뚫고 말뚝을 박은 다음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길을 낸 것이다.
지금도 맹량제(孟良梯)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구당협에 있는 백제성은 빼어난 풍경으로 이름나 중국의 10원짜리 화폐에 나온다.
유비는 이릉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할 때까지 백제성에서 거처했는데
현재 삼협댐이 준공되어 섬으로 바뀌었다. 물론 육교가 설치되어 배를 타지 않아도
백제성까지 갈 수 있는데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흔들지게’를 타고 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유비의 패배
여하튼 이러한 좁고 험준한 잔도를 통해 유비가 60여만 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자
당연히 전선이 길어져 무려 700여 리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촉이 대패하는 요인이 된다.
초전에는 촉이 오군에 연전연승했지만 오나라의 총대장으로 임명된 육손은 촉군을 유인하기 위해
계속 패배하는 척하며 유비의 군을 유인했다. 유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에
앞서 원정 전쟁에서 금기인 전선을 길게 만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신하들이 비록 관우를 손권이 살해하기는 했지만 촉의 적은 오가 아니라 위라고 건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했다.
사실 이릉전투에 앞서 촉나라의 맹장이던 관우, 장비가 죽고 또한 전투 중에 황충마저 전사하여
촉나라는 차포를 떼고 손권과 대결한 셈이다.
더구나 유비는 전투에 관한 한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원결의에 집착하여 오나라 공격에 앞장섰다.
유비는 전쟁의 ‘전’자도 모를 정도로 무리한 강수를 두다가
육손의 화공을 포함한 수륙양면 작전에 의해 대패했고 결국 촉나라가 멸망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릉전투에서 육손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육손이 지연작전(遲延作戰)을 유효적절히 사용했기 때문인데
지연작전을 정황에 따라 청야(淸野) 작전이라고도 부른다.
큰 틀에서 청야작전은 아군이 불리한 상황 하에서 전투를 회피하고
차후 작전에 대처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하거나 적으로부터 이탈하는 작전으로 설명된다.
즉 청야작전은 지역을 양보하는 대신 시간을 획득하여 적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적의 병참선을 길게 만들어 불리한 상황으로 적을 유인하는 한편
아군의 전투력을 보존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하여 적을 격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45만의 대군으로 러시아 원정에 돌입했다.
나폴레옹의 작전은 우익에서 적을 고착시키는 한편
좌익을 선회시켜 러시아군 주력을 국경지대에서 포착 섬멸하는 것이다.
▲ 삼협의 잔도, 유비는 험준한 잔도를 통해 대군을 동원하다 이릉과 호정에서 참패했다. |
그러나 예기치 않던 혹서로 인한 일사병 등으로 장병들이 쓰러지고
현지에서 공출한 사료의 부적합으로 군마(軍馬) 3만여 필이 죽는 것은 물론
현지 지휘관들의 우유부단 등으로 러시아군은 피해를 면하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때 러시아가 철수하면서 펼친 작전이 청야작전으로
그들은 철수지역에서 프랑스군에 도움이 될 것은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또한 모스크바 서부 스몰렌스크와 브르디노 지역에서는 예상치 못한 역공에 나서
프랑스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킨 후 모스크바로 후퇴했다.
이 일련의 후퇴와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고
그들의 전력은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12만6천 명으로 감소되었다.
천하의 작전통으로 알려진 나폴레옹도 러시아에서 겨울을 보낸다면
러시아군의 유인작전에 휘말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계속 진군을 명령한 것은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러시아 알렉산더 황제가 강화를 제의해 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편 나폴레옹의 대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사수할 것인가 또는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더는 모스크바 사수를 원했지만 러시아군 총사령관 구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내어 주더라도 군대만 건재하면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며
모스크바와 군대를 동시에 잃어버릴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결론은 모스크바를 포기하는 청야작전을 수립하고 칼루가로 러시아 전군을 철수시켰다.
즉 모스크바를 포기하면서까지 나폴레옹군과의 전투를 기피함으로써
병력을 온존하게 퇴각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구투조프 사령관은 나폴레옹군을 동장군(冬將軍)이 오는 겨울까지만 묶어두면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할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러시아의 수도를 프랑스군에 내주는 수모와 엄청난 손실을 각오하면서도
병력을 보존하고 동장군이 합세한다면 언제든지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폴레옹은 텅 빈 모스크바로 입성하여 강화 제의를 기다렸으나 설상가상으로 대화재가 발생하자
프랑스군 병영지를 모스크바 교외로 옮겨야 했다.
모스크바의 대화재는 청야작전에 따라 철수할 때 죄수까지 동원하여 시가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심리작전도 구사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의도를 꿰뚫고
그의 기대대로 러시아가 강화를 제기할 것이라는 풍문을 퍼뜨리면서
나폴레옹이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떠나지 못하게 묶었다.
결론은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작전을 알아차리고 자발적인 철수를 시작했지만
이미 철수 시간을 놓친 후였다.
세계 최강을 물리친 러시아의 청야 작전
러시아의 청야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또 한 번의 위력을 발휘한다.
1941년 6월 독일은 300만 대군을 독 · 소 국경선에 투입하여 일제히 소련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정면의 적을 고착시키는 한편 좌우 양익에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신속한 진격으로 후방을 차단한 후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실패를 밟지 않기 위해 진격작전을 계속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모스크바 서측 400㎞에 있는 스모렌스크에서 소련군 30만 명을 포로로 했으며
전차 4천500대, 각종 포 3천300문을 노획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공격으로 독일군 중앙집단군은 또 다시 65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혹한은 러시아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한파가 몰아치자 지면이 동결되어 독일군의 기동력은 현저히 저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독일군의 현장 지위관들이 후퇴를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하고 계속 진격을 명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독일군은 모스크바 교외 40㎞ 거리까지 진출했으나
동계 작전에 대한 준비가 별로 없었으므로 영하 40도라는 혹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역시 소련군이 독일의 대규모 침략에 대항하여 구사했던 청야작전의 일환이었다.
소련은 독일군이 미끼를 덮썩 물자 계속 초토화 작전과 게릴라전을 병행하여
독일군의 병참 지원을 방해했고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자 공세로 돌아섰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러시아의 청야작전에 의해 완벽하게 참패한다 (자료 화상). |
놀라운 것은 소련군이 반격을 나섰을 때 투입한 병력은 무려 100개 사단이나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독 · 소 초반전 독일이 소련군 포로를 100여 만 명이나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련의 주력부대는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러시아가 전력면에서 절대 우세했던 프랑스와 독일에 대항하여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특유의 청야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으나 광활한 국토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적을 깊숙이 유인하고 철수지역을 초토화하면서 병참선을 길게 만들었다.
일단 병참선이 길게 되어 중간 중간에 결함이 노출되자 시종일관 치고 빠지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격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청야작전의 장점은 공격군의 약점이 러시아와 같은 수비군에게는 장점이 된다는 점이다.
소련군이 후퇴를 거듭하였지만 이것은 역으로 소련군으로서는 병참선이 단축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군수지원이 원활해짐으로써 전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한파까지 러시아를 도와주었다. 다소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는 역사상 가장 추운 해 중에 하나였다.
결국 전격작전을 구사하려던 프랑스와 독일군은 기아와 혹한 속에서 궤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야작전 자체는 아군에게도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지만
궁극적으로 적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임은 역사가 증명한다.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도시는 물론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청야작전으로 공격군의 의지를 꺾음으로써 반격의 기회를 포착했는데
이는 반격에 나설 수 있는 병력을 온존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손이 유비를 상대로 채택한 작전이 청야작전이다.
그는 촉나라에 비해 병사가 절대적으로 약세이기 때문에 정면공격을 회피하면서
계속 유비를 자신이 원하는 전투장소인 호정과 이릉으로 유인했다.
그런데 유비가 전략과 전술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자란 사람이므로 육손의 청야전투에 휘말리면 패배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론은 유비의 생각과는 달리 육손의 의도대로 되었다.
청야작전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선 공격자가 유인될 수 있는 미끼를 던져주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 청야작전은 방어와 철수가 결합된 방법으로 상황에 따라 다소 무모한 공격을 자행하는 등
과감한 공세 행동을 멈추지 않도록 하여 공격군이 청야작전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즉 청야작전을 당초에 계획할 때부터 아군과 적군의 상황과 지형 등을 면밀하게 고려하여
상황에 따라 소규모 전면전 등을 펼치면서 후퇴하는 척하면서
공격군이 결정적인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적에게 파격적으로 양보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면 자신이 확실하게 승리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
청천강에서 일거에 임진강까지 약 150㎞에 달하는 지역을 양보하면서 지연전을 거듭했다.
결국 중공군의 병참선이 길어지고 전력이 약화되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 이 당시 리지웨이 장군은 청야작전의 성격을 명쾌하게 표명했다.
‘우리의 관심은 부동산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손실로써 적에게 최대한의 인적 손실을 가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이 철수할 때는 이를 추격하고
적이 진격할 때는 지연전을 실시하는 기동전을 수행했다.’
대단한 지략가, 손권
육손이 유비의 대군에 맞서 수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려 계속 패배하자
유비는 계속 승리에 도취되어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유비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전선이 700여 리가 될 정도로 길게 되었는데
이는 육손이 고의적으로 계속 패배하면서 유비를 계속 유인했기 때문이다.
작전에 관한 한 유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제갈량이 유비의 진형도를 살펴본 후
유비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 되었다.
결론을 본다면 육손의 청야작전에 유비가 휘말릴 정도로 육손의 작전이 교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육손을 발탁한 손권의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권이 물소뿔이 당시대의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조비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유비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조비가 적어도 오나라를 침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소뿔이 앙숙인 위나라의 전력을 강화시킨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조비에게 위장 항복서를 보내는 굴욕을 참으면서도 유비의 공격을 상대하는 주도면밀한 작전을 구사했다.
▲ 섬으로 변한 백제성, 백제성 후면의 구당협은 중국 10원 지폐에 나올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
손권의 계략은 성공하여 유비를 철저하게 격파하자 이릉전투에서 승리한 당해연도인 222년 독자적으로 연호를 황무(黃武)로 정하면서 독립을 표방했고 229년에는 황제를 칭했다. 위 · 촉 · 오의 삼국 간 쟁패에서 손권이야말로 대단한 지략가이자 정치술이 남다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비는 손권에게 호정과 이릉전투에서 철저하게 패한 후 백제성에서 재기를 노리다가 다음 해인 223년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아들 유선(後主)의 뒷일을 부탁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백제성 안에는 백제묘(百帝廟)가 있고 백제묘 안에는 명량전 · 무후사 · 관성정 · 관음동 등이 있다.
그 중 명량전에는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의 낯익은 소상이 보이며
유비가 제갈량에게 그의 아들의 뒷일을 부탁하는데
실제로 유비가 죽을 때 후주가 되는 유선은 현장에 없었다.
이백(李伯)은 백제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침에 구름 늘 끼는 백제성을 떠나
천리 강릉 길 하루에 되돌아온다.
양안 가에 원숭이 소리 그치지 않는데
배는 벌써 첩첩 산간을 사뿐히 지나간다.‘
유비의 뒤를 이은 유선(장판파에서 조자룡이 구한 아두)은 곧바로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로 봉하며
제갈량은 225년 앞에 설명한 것처럼 남방으로 원정 나가 맹획을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복종시켜
남방으로부터 전략물자와 인원을 확보하는 등 군세를 증강시킨다.
이처럼 제갈량이 남만을 어느 곳보다 먼저 원정 나간 것은 227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벌린 북방 정벌,
즉 ‘육출기산(六出祁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남선북마 중국대륙을 돌아드니』, 조일문, 삼화출판사, 1994
『용병의 원리와 실제』, 정호용, 삼화인쇄주식회사, 1985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13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5]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⑥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③」(2009.01.01)에서
한국인은 우뇌, 서양 사람들은 좌뇌가 발달했다는 이규태의 설명이 다소 미흡하다고 설명하자
독자가 보다 자세하게 그 부분을 설명해달라고 연락해왔다.
이 부분은 ‘「한국인 얼굴형 남방계 · 북방계 · 귀화계 」(국정브리핑, 2005.12.13)에 다룬 적이 있으므로
상당 부분 보완하여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의 해부학연구실에서는 한국인 약 2만 명을 조사했다.
이 조사기록은 한국인은 남쪽으로부터 이주해온 남방계와
북쪽으로부터 이주해온 기마민족인 북방계가 섞이거나 혼혈되었다고 적었다.
그 증거로 북쪽 지방, 북한 사람들의 체형과 남한 사람들의 체형이 상당히 다른 점을 들었다.
▲ 인류기원 논쟁을 다룬 「네이처(1995년11월)」, 인류의 기원은 유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아프리카가설과 고고학 유물을 기본으로 하는 다지역기원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
이 연구결과는 근래 학자들이 유전자 분석을 동원하여 한민족을 북방계와 남방계로 분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단국대학교의 김욱 교수는 Y염색체를 이용한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한민족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70~80%는 북방계이고 20~30%는 남방계이며 나머지는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고 발표하여 한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자료에 따라 북방계가 60~70%, 남방계가 30~40%라는 분석도 있음을 덧붙인다.
여하튼 김욱 교수가 발표한 한민족의 원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동아시아인 집단 형성에 관한 과거 인류의 집단팽창 과정과 이동경로, 그 시기 등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류유전학자들이 지지하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가 중동을 경유해 인도 또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한 경우와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경유한 집단이 동남아시아 또는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했을 경우 두 방향을 추정하지만 어느 곳에 먼저 정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국인은 두 갈래
현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현 인류는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이브’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 가설’과, 이와는 달리 적어도 1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에렉투스가
각 지역에 도착한 후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진화되었다는 ‘다지역기원설’이다.
김교수의 설명은 ‘아프리카 가설’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이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다지역기원설’도 참조할 필요가 있으므로
간략하게 양 가설에 대해 설명한다.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의 알란 윌슨은
세계 각지 147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조사하여 계통수를 그린 결과,
현대 인류의 조상은 단 한 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각각 두개골 화석을 비교하는 방법과 분자유전학적 방법(분자시계)으로
현대 인류가 14만 년에서 29만 년 전(이하 20만 년 전으로 적음)에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
이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이브 가설 또는 아프리카 가설(Out of Africa theory)’로 부른다.
영국의 인류유전학자 브라이안 사이크스는 『이브의 일곱 딸들』이란 책에서
전 세계의 미토콘드리아 DNA형을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L형에서 나뉘어 나온 33개로 분류하고,
그 가운데 동양인은 여섯 개의 집단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브의 후예가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택한 경로는 대체로 두 갈래로 추정한다.
첫 번째는 과거 인류학에서 ‘버마 경로’라고 부르던 것으로
인도양과 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로는 히말라야 산맥 북쪽을 택하여 실크로드를 거치거나 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왔다는 것이다.
▲ 아프리카 가설에 따른 인류 분포도, 아프리카 가설은 현 인류가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한 여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 |
한민족의 일반적인 특징은 추위를 이겨내기 쉽도록 진화되어 실눈이 많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동그스름한 콧날, 속 쌍꺼풀, 검은 머리, 단두형의 머리 등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홍규 교수는 바이칼호 근처에서 6만~7만 년 전부터 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던 민족이
약 1만3천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북부 아시아인들이 몽골루트를 거쳐 남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최근 일본 오오사카의과대학의 마쓰모토 교수는 사람 혈청 중의 항체유전자를 연구하여
몽고인종의 기원과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마쓰모토는 몽고인종을 특징짓는 네 가지의 유전자 결합 가운데
몽고인종의 혈청 중에는 Gmab 3st 유전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쓰모토 교수의 혈청에 의한 연구 결과는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질수록 혈청 중에 Gmab 3st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수도 적어지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몽고인종이 시베리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프리카 가설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현 인류의 시조가 아프리카의 이브에서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 가설’은
근대의 유전자기법 사용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으므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연구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인류기원의 가설인 ‘다지역기원설’도 이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설득력과 증거를 갖고 있다.
1950년대 에른스트 마이어는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진화했는데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렉투스로,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커얼리튼 쿤 교수는
1962년 발간된『인종의 기원에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전 세계의 인류가 모두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진 것은 아니다.
세계 인류 중 분류될 수 있는 첫 번째 집단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또한 독자적으로 진화되어 온 영장류, 즉 호모 에렉투스의 여러 종류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결코 우리의 공통적인 조상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지역기원설과 아프리카 가설
쿤 교수에 의하면 25만 년 전에 이미 동아시아인, 폴리네시아인, 아메리카인디언, 중국인과
기타 몇몇 민족을 이루고 있던 몽골로이드와 유럽에 살고 있던 코카소이드,
훨씬 나중에 아프리카 흑인을 이룬 콩고로이드, 호텐토트 및 부시인의 카포이드,
그리고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피그미, 멜라네시아인, 파푸아인을 이루는 오스트랄로이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생 인류가 유럽과 동시에 아프리카, 중동아시아에도 존재했다는 것으로
황인종의 조상은 황인종이라는 것을 뜻한다.
▲ 북경원인 발굴지 주구점 입구, 중국인은 다지역기원설에 의거 북경원인 등이 중국인의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
다지역기원설을 강력히 지지하는 측은 중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국 학자들로서 우선 6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북경원인의 후두골에는 작은 화산형 돌기가 있는데 이것은 현재의 황색인종(몽골로이드)의 특징과 같다.
또 숟가락 모양의 상문치(上門齒)를 갖고 있는데 이 점도 몽골로이드의 특징 중 하나로 북경원인이 몽골로이드의 선조라는 생각을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1989년과 1990년 중국의 운현 청곡에서 운현인이라 불리는 100만 년 전의 고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북경원인보다 무려 40만 년을 더 올라간다.
1990년에 또 다른 완전한 두개골이 발견되자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현대 인간의 조상이 근래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는 아프리카가설의 이론이 위태로워졌다’고 보도했다.
1986년 요동(遼東) 반도 잉커우(營口)현에서 발굴한 금우산인(金牛山人)은
28만 년 전 20~22살의 젊은 여인으로 추정되었는데
중국은 금우산인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아프리카 가설이든 다지역기원설이든
약 100만 년보다 훨씬 전에 호모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떠났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이브 가설을 반박하는 것은
동양에 호모엘렉투스 이래 살고 있던 북경원인 등의 후손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지역기원설은 어느 지역에 새로운 다른 집단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이동해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기존에 살고 있던 호모에렉투스의 후손들을 모두 몰아내고 새로운 강자로 군림한 것이 아니라,
기존 집단에 포함되어 그 지역의 특성에 알맞은 인종으로 계속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네안데르탈인 또는 크로마뇽인이 유럽인의 시조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아프리카를 나와 현재의 동양인 선조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 내내 인구밀도는 놀라운 정도로 낮아 약 1㎢당 1인 이하로 추정된다.
각 집단들은 서로 하루 이상의 거리를 두고 생활했으며 그 구성원은 최대한 100~150명 정도였다.
한 집단에서 100~150명이 넘으면 그들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이 한 집단을 완전히 절멸시키고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것은 아프리카 가설에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왕웨이는 아프리카 가설이 갖고 있는 또 다른 결정적인 결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서양의 구석기 문화를 보면 약 10만여 년 전 어떤 곳에서 기하형의 세석기들,
예를 들면 삼각형기ㆍ신월형기ㆍ제형기 등이 출현하며,
2만 년 전에는 더욱 정밀한 기하형의 세석기가 출현했다.
그 당시에 이런 석기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구석기 문화 중에서는 이런 기하형의 세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세석기 제작 기술의 흔적도 없다.
이런 차이점은 중국의 구석기 문화와 서양의 구석기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 계통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왕 교수는 아프리카 가설에 의해 ‘아프리카 이브’의 후예들이 중국으로 옮겨왔다면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격변을 맞이해야 하는데
3만여 년 전의 중국 신인(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외래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도 없는 것을 볼 때
서양의 구석기 문화와 중국 구석기 문화는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민족과 중국인은 혈연적 갈래가 달라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고학적으로 한 지역의 석기문화가 지속적으로 발달 전개되었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석영을 석재로 사용한 자갈돌석기 전통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 자갈돌석기 전통은 하나의 계통성을 가지고 후기 구석기시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 금우산인 발굴지, 중국은 금우산인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
북한 학자들도 한민족의 경우는 다지역기원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며 이브가설을 강력히 반대한다.
아프리카 가설은 유전자분석을 제시하지만 북한에서는 한민족의 혈청학적 특징을 제시한다.
사람들의 혈액형과 유전자형들은 인종을 식별하고 각 민족들의 친연관계나 차이들을 확증해주는 중요한 지표로 인정된다.
북한의 장우진은 한민족의 경우 적혈구혈액형들인 레주스식 혈액형에서 나타나는 항원들의 양성인자 중 D항원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다고 발표했다.
D항원의 양성인자는 아시아 인종에서는 99~99.5%, 유럽 인종에서는 85%, 아프리카 인종에서는 91% 정도인데 한민족은 D항원의 양성자가 99.71%에 달한다.
특히 유전자 조성에 있어서도 한민족과 중국인들은 흑룡강성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완전히 다르다.
한민족의 레주스식 혈액형의 유전자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작아지는 데 반해
흑룡강성 지역의 중국인에서는 CDe>cDE>cDe>CDE의 관계로 나타나며
귀주성 지역의 중국사람에서는 CDe>cDE>cde>cDe>CDE의 순위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민족이 중국사람과 혈연적 갈래가 서로 다른 집단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혈청학적 연구로 볼 때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형성된 이래
고유한 혈청학적 유형을 이루고 혈연적 공통성을 발전시킨 민족이므로
20만 년 전에 이브의 후손이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한반도까지 도착했다는 아프리카기원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2001년 초 놀라운 소식이 다지역기원설의 지지자들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뉴사우스웨일스의 고대 멍고인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이다.
멍고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오늘날의 인류에게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만약 모든 현대인인 아프리카 가설처럼 가까운 과거에 아프리카를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복잡하고 새로운 학설들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가설이 나올 때는 부계 유전되는 DNA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계유전만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유전학과 고고학의 접목으로 한민족을 포함한 인류의 기원을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중국 북부의 농경문화 민족이 주류 형성」, 김욱, 월간중앙 2003년 7월호 별책부록 <역사탐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조울 아킨박, 내셔널지오그래픽, 2005년 9월
「중국 조상 ‘진뉴산인 기원설’」, 이기환, 경향신문, 2007.10.19
「북경원인의 고향, 주구점을 보고」, 임효재, 1989년 9월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실연대는 무엇인가?」, 檀原撤 외, 동북아세아구석기연구, 한양대학교문화재연구소, 2002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제임스 E. 매클렐란 3세 외, 모티브, 2006
『녹색세계사』, 클라이브 폰팅. 심지, 1995
『미래와 진화의 열쇠 이머전스』, 스티븐 존슨, 김영사, 2004
『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왕웨이 외, 대산인문과학총서(4), 2001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16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6]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⑦
한국인 집단은 동아시아인 집단 가운데서도 중국인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중국의 일부 남부인(예 : 묘족 등)과 베트남인 등과도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일본인 집단은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인 및 만주족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는 약 2천300년 전 농경문화와 일본 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학적인 증거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들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추정하면 한국인 집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경로 이상의 다양한 민족 집단이
혼합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었으며 유전적으로 하나의 민족은 아니라는 뜻과 다름없다.
염색체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가 섞여 새로운 형질을 만들어내지만,
두 염색체는 뒤섞임 없이 한쪽 부모한테서 그대로 유전되는 특성을 지닌다.
Y염색체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만 유전되며, 미토콘드리아는 반대로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된다.
이 때문에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브의 유전자’, Y염색체를 ‘아담의 유전자’라 부른다.
인류학자들은 아시아계 인종 집단을 ‘몽골로이드’이라고 한다.
몽골로이드 중에서도 중국계 민족과 동남아시아인을 제외하고
만리장성 이북과 만주, 한반도 등지의 사람들을 ‘북방계 몽골로이드’라고 한다.
대체로 누런색에 가까운 피부와 몽골주름, 뻣뻣하고 검은 모발, 광대뼈가 솟은 넓적한 얼굴,
많지 않은 체모, 몽골반점 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신체적 특징이다.
▲ 얼굴유형으로 본 한국인 우측은 남방계, 중앙은 북방계이며 좌측은 귀화계이다. |
반면 아시아 대륙의 남쪽과 오세아니아 대륙, 태평양의 하와이, 폴리네시아 군도 등 비교적 따뜻한 곳에서
적응한 황인종은 현재의 동남아시아인처럼 눈이 북방계보다 크고 쌍꺼풀이 발달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팔과 다리 역시 긴데 이들을 ‘남방계 몽골로이드’라고 부른다.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약 3만 년 전에 해안가에 거주하던 몽골로이드의 일부가
아시아 내륙 즉 오늘날의 몽골 고원, 고비 사막, 티베트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북상했다고 보고 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내륙 아시아로 진출한 이유는
당시에 이 지역에 ‘매머드 스텝’이라 불리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서
들소나 매머드와 같은 먹이가 풍부하여 이들 지역이 살기 좋았기 때문이라고
《지오》의 손현철은 기술했다.
이들은 집단적인 몰이사냥으로 거대한 매머드를 잡아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았다.
투박한 돌날을 나무 막대기에 동여맨 석창이 당시 사냥꾼들의 주무기였다.
그런데 약 2만 년 전부터 사냥무기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민족의 강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동했을 개연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하튼 북방계 몽골로이드들은
현대의 수술용 메스(mes)만큼이나 예리하고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세석기들을
나무틀에 박아 낫이나 칼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무기를 확보한 이들은 내륙 아시아에서 단련된 신체 형질과 함께
자신의 거주 반경을 타이가와 툰드라 같은 낯선 땅으로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 빙하가 내려와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은 새로운 환경과 투쟁하면서 신체적 형질이 서서히 바뀌어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북방계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대표적인 민족은 몽골족, 퉁구스계의 소수 민족들,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지역부터 카자흐스탄을 거쳐 터키까지 퍼져 있는 투르크계(돌궐), 한국인, 일본인,
1만8천여 년 전 북방계에서 갈라져 미 대륙으로 진출한 북미의 인디안, 남미의 인디오들이다.
300년이 지나면 소수의 유전자는 소멸
한민족은 숫자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남방계도 상당수로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또한 북방계라 하더라도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몽골에서 모두 내려왔다는 것도 아니다.
김욱 교수는 한국인의 Y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한국 남자의 유전적 계통이 그룹C(RPS4Y), 그룹D(YAP), 그룹O(M175)의 세 가지 형태를 보이는데
몽골, 시베리아인의 경우 그룹C가 40~50퍼센트를 차지하지만 한민족은 15퍼센트에 불과해
몽골 쪽에서 모두 내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민족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민족이 북방으로 이동했다가 빙하가 녹음에 따라 다시 원래의 한민족 터전으로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첨언한다.
▲ 중국 남부의 묘족 한국인은 중국의 만주족과 가장 가까우며 묘족, 베트남인과도 가까운 특성을 갖고 있다. |
근래의 연구는 한국인의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합에 대해 매우 흥미 있는 가설을 제시했다.
Y염색체 유전형을 보면 북방 루트를 통해 온 사람(특히 남성)이 동아시아인의 주체라는 것이다.
동아사이의 거의 모든 사람은 O형의 Y염색체형을 가지고 있는데, 이 O형은 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 많은 N*의 후손 유전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의 여러 섬, 일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해안 사람에게 많은 C, D형과는 촌수가 상당히 멀다.
특히 말레이 반도에 사는 안다만 섬 사람(초기에 아프리카를 떠난 사람들로 간주됨)이 D형인 것은 이 형들이 남방 루트로 이동한 것이라고 이홍규 박사는 적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Q형도 O형의 사촌쯤 되며, 중앙아시아가 그 기원지인 것으로 판단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한국인의 약 4분의 1이 남방형의 C, D를 가지고 있으므로
4분의 3 정도가 북방계라는 것은 앞에 설명한 것과 같다.
이홍규 박사는 아시아 지역의 미토콘드리아 유전형들이
거의 전부 남방 루트로 이동한 여성들의 것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알타이산맥 이서의 중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부까지 거의 모든 사람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은 N*인데,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인들은 M*와 N*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아프리카 흑인은 L*을 가지고 있다.
(*가 붙은 것은 후손이 되는 유전형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N*에는 A, B, F, H, I 등이 있다).
그런데 이 N* 중에서 동아시아에 있는 A, B, F는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는 동아시아 여성들이 가진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은
거의 전부 남방 해안 루트를 거쳐 이동해온 사람들로 보이며
Y 염색체는 중앙아시아-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온 남자들의 것이 대부분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북방계 남자가 남방계 남자를 몰아내고
남방계 여자들을 취하여 후손을 불려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그 유전자 구성에서 한국, 중국 북부, 일본인이 모두 같다고 설명된다.
물론 한국인이 북방계와 남방계로만 구성된 것이 아님은 틀림없다.
한국의 지리적인 입지에 의해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이 계속 한반도로 들어왔다.
특히 신석기를 지나 청동기로 들어서면서 전쟁이 빈번하자 전쟁의 결과 여하에 따라
많은 중국인들이 한반도를 찾았으며 이들이 계속 한반도에 정착하여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세계 인종 유형 광대뼈가 솟은 넓적한 얼굴, 많지 않은 체모, 몽골반점 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북방계몽골로이드의 신체적 특징이다. |
학자들에 따라 이들을 ‘귀화 한국인’으로 구분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민족을 다룰 때 고조선 등을 감안하면 현 중국의 만주 지역까지 포함하여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이들 지역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으므로 이곳에서는 한반도로 국한하여 설명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부분 중국에서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이들의 시중을 들었던 사람들, 또는 전란으로 피난 온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전북과 충남의 내륙지방, 황해도 등 한반도의 서반부에 걸쳐 살았다.
그러나 한국인의 형태에서 중국인의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혼혈로 한국인에 섞이는 등 한국인 주류에 밀렸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유전자는 그 집단 구성원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점점 많아지지만
10퍼센트 이하의 유전자는 300년 정도가 지나면 거의 사라진다고 설명된다.
유전자 결합의 확률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주류를 북방계와 남방계로 분류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동안 한민족이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장두형에서 단두형으로 변형된 한국인
북한에서 3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대사람, 10만 년 전의 력포사람, 덕천사람,
4만~5만 년 전의 승리산사람, 2만 년 전의 만달사람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이 이들 유골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을 70만~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살았던 원인(호모 엘렉투스)으로부터
일관하게 진화하여 나온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논지는 간단하다. 한국인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단일 민족으로
한국인의 원류가 잘 알려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부터 유입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발상지는 우리나라로 소위 ‘다민족기원설’에 의거한 ‘본토기원설’을 주장하는데
한국인이 북방인과 남방인의 두 갈래로 섞여 있으며
남방인이 20~30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이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을 강력히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평양 유역에서 발견된 신인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과 연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고유한 특징이 평양 유역에서 발굴된 신인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발견된 신인들의 대뇌피질의 앞머리부가 고인과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인인 력포사람이 직계 선조라는 설명이다.
한국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든지 일반적으로 얼굴의 높이는 중간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머리뼈 높이는 상당히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특징이 용곡사람과 만달사람에서도 발견된다.
▲ 력포사람(우), 승리산사람(중), 만달사람(좌) 북한은 고인인 력포사람이 신인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
그런데 북한의 본토기원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 단두형인데 신인단계의 유골에서 단두형이 아니라 장두형의 머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장우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석인류 단계의 머리뼈들은 예외 없이 장두형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오래될수록 원시적인 특징이 많기 때문이다.
눈확부와 뒤통수부의 뼈주름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머리뼈 길이가 길어지므로 자연히 장두형에 속한다.
평양 일대의 신인들이 장두형에 속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단두형은 단두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경우 과거로 올라갈수록 머리뼈 길이가 길어져서 장두형에 속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와 반대로 현대로 내려오면서 단두형이 비율이 많아진다.
그런데 신인과 조선 옛유형 사람, 현대 한국인의 머리뼈 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머리뼈 형태를 규정하는 개별적인 요소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머리뼈 형태는 상당히 단두화되어 장두형은 고작 5~6퍼센트로 추정한다.
그런데 과거로 올라갈수록 장두형이나 중두형의 비율이 높아진다.
함경북도 회령시 검은개봉유적의 10개체 머리뼈도 단두형이 4개체이고 6개가 장두형과 중두형에 속한다.
송평동유적에서 발견된 4개체의 머리뼈도 단두형이 2개체, 중두형이 2개체였다.
이것은 과거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머리뼈의 길이가 길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장우진은 설명했다.
사실 상당히 후대로 볼 수 있는 유명한 안악 3호분,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고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고분, 강원도의 신라무덤 등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모두 단두형에 속한다.
더욱이 한국인의 특징인 단두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하다는 점도 북한측은 강조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 일대와 중앙아시아, 유럽에서는 스위스 일대의 알프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서만 단두형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주위는 모두 장두형이다.
물론 고인인 력포사람, 신인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들을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다. 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 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
비록 후기 구석기인들이 전·중기 구석기인들 보다는 좀 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편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감안한다면
매우 작은 양의 인골을 토대로 과거 한민족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관성 있게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보다 많은 인골이 발견되면 한민족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
- 참고문헌 :
「검은 개봉유적에서 발굴된 머리뼈의 인류학적 특징에 대하여」, 장우진, 조선고고연구, 1993년 2호.
「우리나라의 산악빙하와 그것이 화석인류의 생활에 미친 영향」, 장우진, 조선고고연구, 2002년 2호
「조선 사람의 본토기원설을 정립하는데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 장우진, 조선고고연구, 1996년 4호.
「조선 사람의 머리뼈에서 나타나는 섬세화 경향에 대하여」, 고광렬, 조선고고연구,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통권 113호, 1999
「조선 사람 머리뼈의 몇 가지 관찰 징표에 대하여」, 김광남, 조선고고연구, 1998년 3호.
「조선 사람의 몇 가지 혈청학적 특징에 대하여」, 고광렬, 조선고고연구,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통권 118호, 2001
「한국인 머리뼈에서 체질인류학적 표지점의 3차원적 분석」, 한승호, 선사문화 제 4권,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 1996
「한국인은 어디에서 왔나?」, 복기대, 월간중앙 2003년 7월호 별책부록 〈역사탐험〉
「한국인의 기원과 형성」, 박선주, 선사문화 제4권,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 1996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22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7]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비밀 ⑧
북방계와 남방계의 얼굴은 다소 다르다. 학계에서는 이를 고구마형 북방계와 땅콩형 남방계로 부른다.
남방계 형은 얼굴이 모난 사람이 많아 이 형질이 강하면 땅콩 모양이 되고
북방계는 얼굴이 타원형으로 길고 정수리가 돌출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북방계와 남방계란 반드시 한국의 위도상의 남ㆍ북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함경남도에는 위도상 남쪽인 전라북도보다 남방계 형이 많이 발견된다.
이것은 함경도의 지리적 위치상 북방계의 이주가 타 지역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 남방계 이항복 |
학자들은 북방계란 대체로 2만 5천년 전부터 1만 2천년 전까지의 빙하기에 바이칼호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형질이 생존을 위해 다소 달라진 사람들을 말한다.
동물학에 ‘알렌의 법칙’이 있다.
포유동물의 종은 추운 곳에서 사는 아종일수록 신체의 돌출 부분(코, 귀, 꼬리 등)이 작아지고 둥근 체형으로 간다는 설명이다.
체적에 대한 체표 면적의 비율이 작아질수록 체온 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같은 포유류인 인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방계의 원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는 내륙 아시아에서의 겨울은 보통 영하 50~60도로 내려갈 정도로 혹독하다.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대부분 북극과 남극을 떠올리지만 진짜 추운 곳은 시베리아를 포함한 내륙 아시아이다.
시베리아의 러시아연방 야쿠트자치공화국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50도이며
기네스북에 오른 최저 온도인 영하 71.2도도 야쿠트자치공화국의 오이미야콘 마을이 갖고 있다.
한국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 낮 평균 기온도 영하 30도에 달한다.
북방계는 우뇌, 남방계는 좌뇌
그런데 이들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쌍꺼풀진 큰 눈은 반사되는 자외선에 실명되기가 쉬우며
두툼한 코는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또한 긴 속눈썹에 수염이 많으면 겨울에 속눈썹과 입 주위에 숨 쉴 때마다 고드름이 달려 사냥에 불편하다.
모세혈관이 발달한 두꺼운 입술은 열대 지역에서는 체온 조절에 적합하지만
추운 지방에서는 열손실만 가중시킨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가급적 표면적이 작은 납작한 얼굴에 흐린 눈썹,
쌍꺼풀이 없는 가늘고 작은 눈, 낮고 작은 코, 얇은 입술을 갖는 것이 유리하다.
칼귀에 길어진 코도 동상을 예방하고 코로 숨 쉴 때 가온ㆍ가습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격이다.
커다란 몸통에 비해 짧은 팔다리도 요구된다. 동양에서 ‘섬섬옥수(纖纖玉手)의 미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미인의 조건 중에 하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이 짧고 뭉툭하여 섬섬옥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느다란 손이 희소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인의 손가락은 서양인보다 훨씬 짧고 뭉툭하다.
▲ 북방계 서유구 |
얼어서 딱딱해진 육류를 먹기 위해서는 씹는 데 적당한 크고 복잡한 구조의 어금니도 필요하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북방계 몽골로이드라고 하는데 한국인의 78퍼센트가 쌍꺼풀이 없는 눈인 것은 바로 이들이 한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얼굴에서 남방계와 북방계의 얼굴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현재까지 나타나는 것은 이들 두 계통이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혼합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과거의 생활 패턴을 감안할 때 4~5킬로미터 밖 사람들과의 혼인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는 말이 다시 의미를 갖는다.
남방계는 해안가, 북방계는 내륙지방에 많이 분포된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북방계는 계속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로 내륙 지방에서 활동했다.
해안과 강가에 남방계가 많다는 것은 남방계가 해안을 따라 계속 한반도까지 옮겨와서
주로 물가에서 고기 잡고 조개를 캐먹는 등 해안가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북방계가 70~80퍼센트, 남방계가 20~30퍼센트라는 것은
북방계가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를 보아도 삼국의 왕들은 북방계이며 조선도 북방계이다.
이는 조선의 어진(御眞)에 나타난 얼굴이 북방계라는 것으로도 파악된다.
북방계와 남방계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두뇌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북방계 형은 우측 이마가 더 돌출하며 남방계는 좌측 이마가 더 돌출한다.
우측 이마가 크다는 사실은 우뇌 반구가 클 가능성을 뜻하며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좌측 뇌가 큰 경우 좌측 이마가 더 돌출한다.
즉 남방계형은 좌뇌형, 북방계형에는 우뇌형이 많다는 뜻인데
한국인의 경우 7 : 3 정도로 우뇌 반구 우세형이다.
이와 반대로 일본인은 3 : 7로 좌뇌형이 많은데 이 수치는 교육 정도와는 거의 무관하다.
1981년 노벨 생리ㆍ의학상 수상자인 로저 스페리(R. Sperry)의 ‘좌ㆍ우뇌의 기능 분화설’을 발표했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 두 개의 반구로 되어 있다. 반구 하나는 꼭 주먹 하나만 하다.
뇌는 두 개의 주먹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 및 크기를 하고 있다.
두 개의 반구는 뇌량이라고 하는 두꺼운 다리로 연결돼 서로 협력해 정보를 처리한다.
▲ 민족에 따른 시선의 변위 스페인(좌상), 프랑스(우상), 한국(좌하) 앵커는 좌측을 보고 일본(우하)는 좌측을 보며 뉴스를 진행한다.(자료 조용진) |
두 반구는 겉보기에는 모양이 비슷하지만 정보 처리 방식은 딴판이다.
좌뇌는 언어 기능을 주로 담당하며 논리적이고 순차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반면 오른뇌는 시각 기능을 주로 맡아 공간 감각이 뛰어나며 대상을 전체로 보기 때문에 직관적이다.
뇌의 비대칭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말하고, 알아듣고, 글을 쓰는 언어 기능이다.
언어중추는 90% 이상이 좌뇌에 있다. 그래서인지 엄밀하게 말해 뇌의 겉모습도 완전한 대칭이 아니다.
언어중추가 있는 좌뇌 측두엽은 우뇌의 측두엽에 비해 약간 더 크다. 반면 공간 인식 기능은 우뇌에 모여 있다.
뇌졸중으로 우뇌가 망가진 환자는 왼쪽을 잘 보지 않으려 하고 아예 목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기도 한다고 《뉴스와이어》의 신동호는 적었다.
학자들은 좌뇌는 언어뇌로서 순차ㆍ논리ㆍ수리를 담당하는 이성뇌이고
우뇌는 감각뇌로 시각ㆍ청각의 직관적 정보 처리를 맡는 감성뇌라는 설명이다.
물론 좌ㆍ우뇌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며
상호 정보 교환을 하며 교환의 정도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한국인에게 인류학적으로 북방계가 많다는 사실은
우측 뇌의 속성인 감성뇌가 우세한 형이 많다는 뜻도 된다.
흔히 한국인들을 비난할 때 대체로 이성적ㆍ합리적 사고가 모자란다고 하는데
이는 북방계의 우뇌적 속성에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조상들의 업적이 뛰어났던 것도 바로 우뇌의 직관력ㆍ창의력이 우수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 중에서 작곡가나 지휘자보다 연주자가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했다.
작곡가나 지휘자인 경우 좌뇌 반구의 청각령이 월등히 발달되어 있으며
연주가도 성악가인 경우는 언어령이, 기악 연주자인 경우는 운동령과 감각령의 발달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국내 음악가들에서 작곡가는 남방계형이 대부분인 데 반해
연주가는 거의 북방형이라는 설명이다.
참고적으로 각 민족마다 좌뇌와 우뇌를 많이 쓰는 분포가 다르다.
한국은 극우뇌 우세 지역인 데 반해 터키, 이집트 등은 우뇌 우세 지역이며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중국 등은 비교적 우뇌 우세 지역이다.
반면에 인도, 타일랜드, 일본 등은 비교적 좌뇌 우세 지역이고
네덜란드, 영국, 독일, 이스라엘, 그리스 등은 극좌뇌 우세 지역이다.
한국인의 남방계와 북방계로의 분류는 당연히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친다.
북방계는 고구마형이다. 고구마형은 귓구멍에서 정수리까지의 높이가 긴 두이고령(頭耳高經)이다.
그런데 두이고경은 뇌에서 체간을 지배하는 운동령과 감각령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승 세레모니하는 강수연 골프는 체간의 근육이 힘차고 섬세하게 작동할 때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데 역사가 깊지 않은 한국 낭자군들이 골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어떠한 긴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두둑한 배짱과 집중력을 보이는 북방계의 영향으로 인식한다. |
양궁과 골프는 체간의 근육이 힘차고 섬세하게 작동할 때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데 이들 역사가 깊지 않은 한국 낭자군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북방계가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선수들이 대체로 어떠한 긴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두둑한 배짱과 집중력을 보이는데 이것은 북방계의 체형과 우뇌적 속성과 관계있다.
반면에 야구에서 투수는 손가락의 미묘한 제어력으로 볼을 콘트롤한다. 손가락이 길고 뇌에서 손을 지배하는 기능이 잘 분화되어 있으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남방계인 박찬호가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물론 북방계인 선동열이 한국의 ‘국보급 투수’로 불리면서 탁월한 성적을 올린 것을 감안하면 위와 같은 설명이 절대적이 아니라 개인적 특질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은 우뇌형이 많고 일본인은 반대로 좌뇌형이 많다는 것은 두 나라 사람이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얼굴 사진을 섞어 놓고 국적을 가려내라는 한 조사에서 한국인은 83퍼센트의 적중률을 보였고 일본인은 60퍼센트 정도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시지각적 정보 처리 능력이 일본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인에 우뇌성향이 있다는 것은 TV 뉴스에서 아나운서들의 얼굴 방향과 시선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인 아나운서들은 대개 약간 얼굴을 우측으로 틀고 시선을 왼쪽으로 두고 말한다.
남유럽 사람들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 모습을 보인다.
반면 일본인 아나운서들은 같은 뉴스 프로그램인데도 반대로 얼굴을 왼쪽으로 틀고 시선을 우측으로 둔다.
물론 한국인 중에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두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대부분 남방계형 사람들에서 출현 빈도가 높다.
한 가족 중에서도 남방계의 얼굴 특징이 강한 사람은 우측을 본다는 설명이다.
TV를 볼 때 7시 방향에 앉는 사람은 대개 북방형이고
5시 방향에 앉는 사람은 대체로 남방계 형으로 인식한다. 시선두기의 차이도 얼굴형과 관련이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DNA 분석을 통해 볼 때 거의 차이가 없는 분야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일상 행동 면에서 상반되는 일이 많은 것은
바로 일본은 좌뇌형이 한국은 우뇌형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안정된 사회 모델
남부 유럽인들은 북부 유럽인들과 달리 예술적 소양이 많고 감성적이다.
일반적으로 북부 유럽인이 합리적인 데 반해 남부 유럽인들은 명예ㆍ체면ㆍ명분론을 중요시한다.
문화적 측면을 볼 때 스페인의 투우, 이탈리아의 성악, 프랑스의 미술과 포도주 등이 성행하는 반면
네덜란드는 더치페이, 독일은 실용성ㆍ순수음악ㆍ기초 과학 등이 발달했다.
한마디로 남부 유럽인들은 다혈질이며 콩 튀듯 팥 튀듯 하는 데 반해 북부 유럽인들은 매우 냉철하다.
이는 북부 유럽인들이 남부 유럽인보다 좌뇌 반구적이기 때문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 모형으로 보는 대표적인 한국인 유형 <북방계(좌), 남방계(우)> |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우뇌를 자주 쓰는 것은 북방형계의 조상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우뇌는 공간 지각력이 우수하고 언어에 있어서 형용사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개념을 추상화하는 좌뇌적 사고 능력에서는 다소 떨어진다고 알려지는 이유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경우 두뇌 회전이 빠르고 직관력이 높은 사람은 많이 배출되는 데 반해
개념 추상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지 않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이견은 있겠지만 소수의 우뇌적 지도층(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사고의 소유자)에
다수의 좌뇌적 대중(고지식하고 근면하되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사회가
이상적인 안정된 사회의 모델로 제시된다.
이 분야 전문가들은 근대에 들어서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격변을 많이 겪은 이유로
한민족의 구성 분포를 들기도 한다.
한국은 다수의 우뇌적 상층, 소수의 좌뇌적 중산층, 다수의 우뇌적 하층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좌뇌적인 일본과 다소 우뇌적인 미국식 모델이 근대에 한국인의 특성과 접목되어
가치관에 혼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인에 우뇌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 결점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과거 역사에서 모순적인 사건들이 많이 나타난 것은
합리적인 사고를 기본으로 하는 좌뇌 성향과 창조성이 많은 우뇌 성향의 사람들이
보완적으로 균형을 맞추지 못했다는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이 부분은 한국인의 체질에 맞게 한국인의 특유의 우월성을 보존하면서
그 결점을 보완하면 가능할 것으로 여기에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끝.
- 문헌자료 :
『얼굴, 한국인의 낯』, 조용진, 사계절, 2004.
「몽골리안 루트」, 손현철, 지오, 2000년 2월
「한쪽 뇌를 혹사하면 병에 걸린다」, 신동호, 사이언스타임스, 2005.12.4
「광개토태왕의 얼굴 추정연구」, 조용진, 고구려연구회 자료실, 2002
「한국인 주류는 바이칼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안」, 이홍규, 신동아, 508호 1월, 2002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9.01.28 ⓒ ScienceTimes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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