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①
중국의 역대 황제는 209명으로 이 중 63명이 자살을 하거나 암살을 당했다.
무려 중국 황제의 3분의 1이 자연사가 아니며 209명의 평균연령은 불과 38세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궁정 암투나 왕조의 멸망 등으로 인해 살해된 왕자나 왕손은
살해된 제왕의 수십 배 내지는 수백 배에 이른다.
태자로 책봉되기까지 궁정 내에서 암투가 수없이 펼쳐지고
태자가 황제를 승계할 때는 각 파벌이 내홍을 거듭하는 일이 많았다.
황제 한 사람이 등극하는 사건에 휘말려 죽는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암중암투의 와중에서 승리한 황제들은
패자들을 죽여 그 인육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이에 더불어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도 패배한 적장들을 죽여 그 인육을 먹었다. 한마디로 중국에서
권좌나 패권을 다투다가 패배한 자는 승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유독 황제나 장군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유별나지 않다는 것은
중국 4대 기서인 『수호지』와 『서유기』에도 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나타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식인 습관이 낳은 구루병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당이 등장하고
『서유기』에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다.
물론 손오공의 활약으로 삼장법사가 영약이 되지는 않지만 삼장법사를 먹기 위해
요괴가 계속 등장한다는 것은 인육이 『서유기』의 기본 플롯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 은의 주왕 은의 주왕이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은 살인 방법이 극히 잔인했기 때문이다. |
『삼국지』의 경우도 다름이 없다.
『삼국지』는 통일제국 한나라가 패망하는 과정과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세 사람이 서로 쟁패하였으므로 보다 심각한 전쟁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유비가 여포에게 패배하여 조조에게 의탁하려고 도망갈 때 한 촌부의 집을 들리자 촌부는 유비와 같은 인물에게 대접할 음식이 마땅치 못하자 아내를 죽여 식탁에 내놓는다.
유비가 이 사실을 조조에게 이야기하자 조조는 그 말을 듣고 촌부를 의기 있는 남자라고 말한다.
당대의 권력자들이 인육을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설명은 우리들에게 광우병 파동을 상기시킨다.
광우병은 사실 매우 특별한 질병 중의 하나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을 경우 인간도 걸린다는 것이
광우병 공포를 몰아 온 요인인데 일반적으로 종種)이 다르면 같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인수(人獸) 공통 질병이라 하여 동물과 사람 모두 걸리기도 하는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질병이 광견병이다.
문제는 광견병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광우병의 경우 일단 발병하면 치료약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다소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광우병은 호흡기를 통한 감염이나 접촉 등으로 감염될 수 있는 전염병(infectious disease)이 아니라
변형 프리온(PrPsc)을 섭취했을 경우에만 사람에 발병할 가능성이 있는
전달병(transmissible disease)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식용으로 수입하는 소가 국민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이들 소고기를 먹을 경우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태풍의 핵이 된 것이다.
학자들은 광우병에 걸리는 요인으로 변형 프리온 단백질을 섭취했을 경우로 인식하는데
변형 프리온 단백질은 99.7%가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에 축적되므로
쇠고기 섭취를 통해 사람에서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유 등과 같은 유제품과 소 부산물이 포함된 화장품, 약품 사용 등을 통한 감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설명이지만 수혈 등 병원기구 및 치료행위를 통한 사람 간의 감염가능성은 제기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외국인들이 잘 먹지 않는 뇌, 척수, 내장 등에 SRM이 주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광우병 파동이 일파만파를 장식한 것이다.
소의 광우병과 유사한 인간의 질병이 구루병이다.
인육 특히 뇌수와 척수를 먹는 식인 습관이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는 구루병에 걸리면
대부분 1년 이내에 사망하며 길어도 2년을 넘기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서도 인육을 먹기 때문에 이들 병이 발병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의기남아 유안
유비가 여포에게 패배하여 허도에 있는 조조한테 몸을 위탁하러 갈 때
조그만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가난한 사냥꾼인 유안은 유비를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자 했지만 불행하게도 식량과 돈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유안의 생각이 놀랍고도 끔찍하다.
그는 아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귀한 손님 유현덕을 굶겨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죽여 요리를 만들어 유비 일행에게 대접했다.
유비는 배고픈 김에 고기를 맛있게 먹고 무슨 고기이냐고 질문했더니
유안은 주저하다가 이리 고기(狼肉)이라고 말했다.
유비가 새벽에 길을 떠나려고 할 때 한 여인이 부엌에 죽어 있고 팔과 다리에 살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유안에게 질문하니 그는 유비와 같은 귀인에게 대접할 것이 없어 아내를 죽여서 살을 삶아 대접했다고
대답했다. 유비는 유안의 지극한 마음씨를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여인이 측은하기
그지없었지만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가 조조를 만나 유안이 아내를 죽여 자신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조조는 돈 백 냥을 손건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안이란 사람은 과연 의기남아요. 돈 백 냥을 줄 테니 유안에게 새 아내를 맞게 하시오.”
위 내용은 『삼국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인데
일본의 소설가 길천영치(吉天英治 1892~1962)는 이 구절을 번역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실토했다.
“이 부분을 생략할까도 생각했지만, 원본이 유안의 행동을 지극히 아름다운 행동으로 취급하고 있고
일본과 중국의 도의관(道義觀)이나 민정(民情)의 차이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원본대로 번역했다.”
▲ 「양들의 침묵」 연쇄살인범인 한니발 렉터는 살인한 후 인육 먹는 것을 즐긴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
사실 이 기사의 목적이 『삼국지』를 과학으로 풀어보자는 것인데 중국의 식인 문화를 과학과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식인문화 자체가 놀랍게도 일상적인 어투로 서술되는 장면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더라도 끔찍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기 부인을 살해하여 손님 대접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금기이자 야만적 살인행위일 뿐더러 고의는 아니지만 인육을 먹은 유비로서도 그 죄 또한 가볍지 않다. 그런데 유비와 조조의 반응이 놀랍다.
이들이 식인 행동을 오히려 칭찬하고 있으며 유안의 행위를 지극히 아름다운 행동으로 본 것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미식가이자 연쇄살인범인 한니발 렉터가 살인한 후 조리한 인육 요리를 씹는 장면을 보면 식인의 전 과정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식인 장면이 「양들의 침묵」의 후속편인 「한니발」보다 더 길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식인풍습’이란 용어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적 늦게 나타났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확신하며 아메리카의 한 섬에 도착한 후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자신이 발견한 대륙에 식인종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식인풍습을 의미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은 서인도 제도 ’카리브 족‘의 이름에서 차용되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식인 풍습이 고대 일부 지역 사람들의 제사의식이나 복수 또는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식인 풍습은 거의 전 세계에 통용된 풍습 중 하나이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425?)는
‘세상 끝’ 아시아에 식인종이 살고 있다고 기록했으며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르페우스(Orpheus)는 인간에게 식인을 금지시키고 농사 짓는 법과 문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 800?~750)는 『오디세이』에서
사람 잡아먹는 거인족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순종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되리라고 경고한다.
모든 기록들은 하나의 공통된 패턴을 보여준다.
즉 문명화되지 못한 미개한 종족들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일,
즉 동족을 잡아먹는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중국으로 시각을 돌리면 이런 설명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당대에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중국에서 식인 행위는 색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유비와 조조가 식인행위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지』전체를 통해 식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식인은 중국 황제의 고유 권한
오늘날과는 달리 중국에는 아주 먼 과거부터 식인 행위와 도덕관이 존재했다.
『삼국지』는 나관중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필되었는데
이 내용이 삭제되지 않은 것도 그 도덕관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식인문화 즉 사람을 먹는 행위는
야만적인 혐오스러운 행위,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놀라운 것은 육형(肉刑)으로 식인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황문웅(黃文雄)은 중국에서 육형이 정당화된 이유로 전쟁, 지배층 간의 갈등 등을 꼽았다.
중국의 식인문화는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반적으로 하는 전설상의 왕조이고 후예(後예)도 전설상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중국 식인사에 당당히 제 1선에 서 있다.
기원전 2188년 경, 후예는 악정국(樂正國)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伯封)의 궁전에 들어가
모든 재산을 약탈함은 물론 백봉을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왕인 중강(仲康)에게 보냈다.
적국 왕의 인육 요리를 전리품으로 하여 하왕에게 헌상한 것이다.
그러나 후예도 백봉의 왕비이자 애비(愛婢)로 삼았던 현처(玄妻)에 의해 살해되어 육장이 된다.
중국 사회는 유교 사상에 의해 ‘복수주의’를 인정함은 물론 장려하기도 한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특히 부형(父兄)의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여 심할 경우 29대까지 원수를 갚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복수할 때 구적(仇敵)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천도만할(千刀萬割)’이라 하여 사람의 몸통을 완전히 분해하고
때로는 연육(臠肉, 고기를 잘라 생식하는 것)하고 심장과 간을 씹어 먹으며 심지어는 뼈까지 갈아 먹었다.
▲ 산동성 곡부의 자로의 사당 공자는 자로가 육장형을 당하자 더 이상 육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사기』에도 식인 사례가 적혀 있다.
은 왕조의 주왕(紂王)은 중국의 대표적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다.
‘주왕은 처음 미자(微子), 비자(比子), 기자(其子) 등의 도움을 받아 선정을 베풀었는데 유소씨(有蘇氏)가 바친 미녀 달기를 사랑한 뒤부터 폭군이 되었다.
그는 세금을 무겁게 물리고 궁을 넓혀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고 외설적인 향락에 빠져들었다.
주왕은 대신인 구후(九候)의 딸이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비(妃)로 삼았는데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살해했고 그녀 아버지 구후를 해(醯 - 소금에 절인 고기)로 만들었다.
대신인 곽후가 이를 말리자 그를 포(脯, 말린 고기)로 만들었다.’
주왕은 또한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간한 익후(翼候)는 자(炙, 불고기), 귀후(鬼候)는 포(脯, 말린 고기),
매백(梅伯)은 해(醯, 소금에 절인 고기)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주왕을 거론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달기이다.
주왕은 기름 바른 구리 기둥을 불 위에 걸치고 그 위를 맨발로 걷게 하는 포락(怖烙)형을 발명했는데
달기가 죄인이 미끄러져 불 속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자
달기의 미소를 또 보려고 포락형을 계속 명령했다고 한다.
결국 주왕의 종말이 좋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耿氏)를 희롱하려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황비호에게 주었다.
이에 비호가 분노를 못 참고 대군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주왕은 주(周)의 무왕(武王)이 이끄는 연합군에 패망해 분신자살하고 말았다.
이것은 승자인 주나라 측의 기록이므로 과장이 없을 수 없겠으나
고대 중국에서 싸움에 패배한 왕과 그 신하가 승자의 인육이 되었음은 흔히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반역은 매우 중한 벌로 다뤄졌는데 공자의 제자인 자로의 일화도 유명하다.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인 자로는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했는데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왕권다툼에 연루되어 처형될 처지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로가 의를 지키자 화가 난 위나라 왕은 그의 시신으로 육장을 만들게 했다.
이를 전해 들은 공자는 집안에 있는 육장을 모두 버리게 한 후 평생 육장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론 공자의 육장이 반드시 인육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으나
여하튼 당시 승자들에게는 살인과 식인이 오늘날처럼 대 죄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생물학 카페』, 이은희, 궁리, 2002
『역사의 오류』,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열음사, 2008
『중국의 식인문화』, 황문웅, 교문사, 1992
『끔찍한 인육섭취의 력사』, 대중과학, 2007년 제7호
유비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②
『삼국지』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아들 조조를 만나기 위해
연주로 향할 때 서주(徐州) 땅을 지나야 했다.
조조의 증조부는 조절(曹節), 할아버지는 환관인 조등(曹騰), 그의 양자가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다.
조숭의 원래 성은 하후씨로 알려져 있는데
진수는 ‘그의 출생의 본말을 상세히 알 수 없다’고 기록할 정도로 신분이 매우 낮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조조는 평생 두 가지의 콤플렉스로 갖고 있는데
첫째는 자신의 아버지가 환관의 양자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외모로 진수의 『삼국지』에는 외모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위씨춘추』에는 ‘외모가 왜소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조의 심복으로 하후돈, 하후연 등이 있는데 이들과 조조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서주 태수 도겸(陶謙)은 조조와 연줄을 만들려고 했으나 방법이 없어 섭섭해 하던 차에
조숭이 자신의 영지를 지난다는 말에 직접 나가 조숭을 맞이하여 공경을 표한 후
크게 후대하고 많은 선물을 주었다.
▲ 조조 조조가 아버지 조숭이 살해된 것을 빌미로 서주 사람 수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 후대에 조조를 잔혹한 간웅이라고 부른 단초 중 하나이다. |
그런데 조숭을 호송하던 장개는 원래 황건적 일당의 하나로 도겸에게 항복했으므로 그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한데 조숭이 갖고 있는 100대나 되는 수레의 재물이 탐이나 조숭 일가를 모두 살해한다. 조조는 이 사실을 알고 대군을 일으켜 서주를 소탕하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가 동탁으로부터 도망칠 때 도와준 진궁이 원래 조숭을 살해한 사람은 도겸과는 전혀 다른 장개의 짓이라고 해도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겸이란 놈은 우리 집 일가족을 죽였으니 맹세코 이놈의 쓸개를 뽑고 염통을 도려내서 나의 한을 씻을 작정이오.”
조조는 도겸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잘못 알고 그를 죽여 쓸개와 염통을 도려내 먹겠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를 공격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무고한 백성 수십만 명을 살해했다.
당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사수(泗水)에 쌓여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조조에게 두고두고 잔혹한 간웅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 계기이다.
상대를 말로써 죽인 제갈량
마초가 현덕 유비를 만나기 전의 일이다. 마초는 한나라 충신 마등의 아들로 오호대장 중 한 명이다.
양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가 조조에게 대패한 후 장비와 일전을 겨룬다.
이에 제갈공명은 이간책을 써서 마초를 귀순케 하려고 이회(李恢)를 마초의 진중으로 보낸다.
마초는 이회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온 것을 눈치 채고
도부수 20명을 장막 아래 매복시킨 후 부하에게 명령한다.
“내가 손을 들어 군호를 하거든 칼로 찔러서 육장(肉醬)을 만들어라.”
결국은 이회의 언변에 설득되어 마초가 현덕의 수하로 들어갔지만
여기서도 공연히 사람을 죽여 육장을 만들 뻔했다.
천하의 제갈량이 출사표를 내고 위나라 조비를 공격하자
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왕랑(王郞)이 대항해온다. 제갈량은 왕랑을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나는 대대로 조조 집안을 잘 알고 있다.
대대로 동해빈(東海濱)에 살아 처음엔 효렴(孝廉)으로 뽑혀 벼슬하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광군보국(匡君輔國)하여 한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유씨(劉氏)를 흥하도록 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역적을 도와서 찬위했으므로, 죄악은 깊고 무거워서 천지가 용납하지 아니하며
사람들은 너희들의 고기를 씹지 못해서 한이다.”
제갈량의 이 말을 들고 왕랑이 대답할 말이 없어 숨이 막히더니 말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전한다.
이를 제갈량이 왕랑을 말로 죽였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역적의 고기를 먹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왕랑이 제갈량의 말만 듣고 말도 없이 숨이 막혀 죽었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의학자들은 가능하다고 한다. 극도의 공포나 긴장, 스트레스는 물론 충격적인 장면 등
소위 기가 질릴 때 심장마비 등이 올 수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제갈량을 보고 말을 듣는다는 자체가
당대에 얼마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를 죽일 수 있었느냐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여하튼 중국의 황제들이 인육 먹는 것을 거의 당연하게 생각했으므로
일반인들도 식인 행동을 꺼리지 않았다. 다소 후대이지만 아랍 상인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중국인의 법은 인육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며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인육을 판다.
(중략) 중국에서 황제의 노여움을 산 관리는 참수되어 인육이 된다.’
황제의 허락 없이 반란자를 먹어서는 안 된다
당태종 때의 매우 놀라운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평원군공(平原郡公) 유란(劉亂)이 반란죄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구행공(丘行恭)에게
잡혀 요참형에 처해지는데 구행공이 참형된 유란의 간장을 꺼내 먹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구행공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 당 태종 당 태종은 ‘황제의 허락 없이 신하가 반란자의 간을 먹는 행위는 괘씸한 짓이다’라고 질책했다. |
“형전(刑典)에 분명히 벌이 적혀져 있지만 반란자의 간을 먹어도 좋다고는 적혀 있지 않다. 너는 그렇게 해서 충성심을 보이려고 했는가? 만약 유란의 심장이나 간을 먹는다면 태자나 왕후들이 먼저 먹었어야 한다.”
모반자의 간을 먹으려면 태자가 먼저 먹어야 한다는 말도 흥미롭지만 ‘황제의 허락 없이 반란자의 간을 먹는 행위는 괘씸한 짓이다’라는 태종의 말은 중국의 황제들이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죄를 진 자의 인육을 먹는 것을 자신들의 권한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증언해 준다.
실제로 중국에서 황제의 명으로 사형집행을 당한 사람의 고기는 허가 없이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황제가 먹으라는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런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상대가 제후이건 대신이건 그들을 잡아먹거나 또는 신하에게 먹일 수가 있었다. 이것은 오직 황제의 특별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한 고조 유방도 모반 혐의로 공신인 팽월을 처형했을 때 그의 고기로 해를 만들어 제후들에게 하사했다. 모반을 일으키면
너희들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제후들은 좋든 싫든 하사받은 해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처형의 한 방식
학자들은 중국의 식인 문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고대 중국으로부터 내려 온 징벌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주나라에서는 중죄인에게 5형을 내렸다.
묵죄(墨罪), 비죄(鼻罪), 궁죄(宮罪), 월죄(刖罪), 살죄(殺罪)이다.
묵형은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먹을 집어넣는 문신형으로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대사상가인 묵자(墨子)도 이 형을 받았다.
비형은 코를 자르는 형이고, 궁형은 거세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 형이다.
병법가인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렸고 사마천은 궁형을 받았다.
물론 사마천은 이 형을 평생의 수치로 여겼지만 『사기』를 저술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사형에는 요참(腰斬, 몸뚱이와 허리를 자르는 벌), 효수(梟首, 목을 잘라 옥문에 거는 형),
차열(車裂, 팔다리를 마차에 묶어 잘라 죽이는 형) 등이 있다.
그런데 육형(肉刑)도 빠지지 않는데 죄인을 공개처형하고 관중들이 그들의 인육을 먹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처형방법인데『자치통감』에 수(隨) 말의 처형방법이 적혀 있다. 하북 지방의 비적(匪賊) 수령인 장금칭을 처형할 때의 일이다.
‘형리(刑吏)가 시내 광장에 세워진 기둥에 그의 목을 매달고 손발을 묶었다.
구적(仇敵)은 명령에 따라 고기를 잘라 씹어 먹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대에 혹리(酷吏)로 악명을 얻은 내준신(來俊臣)을 처형할 때의 기록은
보다 적나라하다.
‘구적은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잘라 먹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 짓이겼다.’
식인형을 당한 양귀비
▲ 거열처형 시연장면 중국이 죄인을 공개처형하는 징벌 방식이 중국의 식인 문화를 조장했다. |
이들의 예를 보면 식인형(食人刑)이 사법처리의 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원수에 대한 복수 의식으로 처형 당한 사람들 고기를 공개적으로 먹었는데 이런 것이 중국의 전통적인 풍습으로까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 아라비아 상인이 쓴 책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중국에서 기혼 남성이 기혼 여성과 간통했을 경우 그들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도적이나 살인범도 마찬가지다. 사형수를 처형할 때 죄인의 목숨이 붙어 있는데도 그의 고기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잘라 준다.’
『삼국지』 초반 환관 십상시가 문제가 되었을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 정치의 옳고 그름을 황제에게 지적해 바로잡도록 권하는 신하) 유도(劉陶, ?-185)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내시와 잔치를 한다고 영제(靈帝)를 비방하자 영제는 유도를 처형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사도(司徒 : 태위, 사공과 함께 삼공의 벼슬이나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명예직) 진탐(陳耽, ?-185)이
유도의 처형이 부당하다고 다음과 같이 간한다.
“천하의 백성이 모두 십상시의 고기를 씹어 먹으려 하는데 폐하께서는 그자들을 부모같이 공경하고
털끝만한 공이 없는데도 제후로 봉하시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여기에서도 백성들이 간신들을 죽여 그 인육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런 간언에도 불구하고 유도와 진탐은 십상시에 의해 살해된다.
식인형에 대해서는 유명한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도 거론된다.
양귀비의 오빠인 양국충은 양귀비 덕에 승진가도를 달려 당나라의 재상에까지 오르는데
안록산의 난은 양국충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결국 현종은 사천으로 도망가면서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양귀비와 양국충을 내어준다.
기록에 의하면 병사들이 다투어 그들의 인육을 먹고 목을 내걸었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영웅의 역사(5)』, 토모노 로, 솔, 2000
『제갈량 문화 유산 답사기』, 제갈량편집팀, 에버리치홀딩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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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③
식인문화를 더욱 재촉한 것은 중국 특유의 빈번한 천재와 기근이다.
『중국구황사(中國救荒史)』에 의하면 상탕(商湯, 기원전 1766년)부터 1937년까지 3,700여 년 동안
수해, 한발, 황해(蝗害-메뚜기의 창궐에 의한 피해), 태풍, 지진, 대설 등의 천재만 모두 5,258차례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반드시 일어난 셈이다.
특히 기원전 206년부터 1936년까지 직접 기근에 결부되는 자연재해가 2,072차례나 발생되어
중국 대륙은 거의 매년 어딘가에 기근이 휘몰아쳤다.
더구나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기근이 끊이지 않은 것도 식인문화에 일조했다.
전란에 의한 살육(殺戮), 기근에 의한 아사(餓死) 이외에도
서로를 죽여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식육으로 이용했다.
놀라운 것은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2,100여 년 동안
중국의 ‘정사’에 기록된 식인 기록만 해도 무려 220차례나 된다.
특히 한나라 때 인육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그것은 이 시대에 유달리 전란과 함께 기근이 많았기 때문이다.
천재(天災)도 식인문화에 기여
기원후 26년의 기록을 보자.
‘매년 한발이 계속되어 북방 변경과 청주(淸州), 서주(西州)의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죽여 고기를 먹었다.’
‘백성들은 굶주린 나머지 서로 죽여 그 고기를 먹었는데, 죽은 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장안(長安)은 폐허가 되고 성안에는 행인이 끊겼다.’
▲ 사마의 고구려와 연합하여 강력한 공손연을 공격하여 승리했고 궁극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진나라 건설의 기초를 만들었다. |
왕충(王充)은 서기(西紀) 27년부터 97년까지 살았던 대학자로 『논형』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책에서 ‘패란(敗亂) 때 사람들은 서로 상담식(相啖食) 한다’라고 적었다.
109년 대기근 때의 상황은 더욱 놀랍다.
‘대기근 때문에 수도인 낙양에서 시민의 공식(共食)이 일어났다.’
수도인 낙양에서조차 식인행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중국 전역에서 식인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59년에는 민중의 공식(共食) 행위가 장강에서 회하 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삼국지』가 전개되는데 이 당시의 100여 년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로 이는 동시에 처참한 지옥도를 그려낸 시대로 간주할 수도 있다.
추후에 실질적으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만드는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238년 양평성(襄平城)을 포위했을 때 기록도 있다.
‘양평성에서 식량이 떨어져 성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되자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공손연(公孫淵 , ?~238)의 부자 이하 1천수백 명의 목숨이 달아났다.’
『진서(晉書)』에도 삼국시대의 참상을 적고 있다.
‘괴리(槐里)의 성안에 기근이 심하여 사람들이 서로 죽여 인육을 먹었으며 도망자를 다스릴 수 없었다.’
전쟁 때문에 기근이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삼국지』 초반 조조가 황건적을 토벌하고 승승장구할 때 아버지 조숭이 서주 도겸에게 살해되었다고
잘못 알고 진공하자 이때를 틈타 여포가 복양(樞陽)을 공격한다.
전투 자체는 여포와 일진일퇴 하였지만 조조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돌아가고
여포도 군사를 거두어 산양으로 돌아간다.
그 원인은 전력상의 불균형 때문이 아니라 바로 황충(蝗蟲, 메뚜기)이다.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황충의 피해를 적고 있다.
‘이때 황충이 창궐해서 익어가는 벼를 모두 먹어치웠다.
관동 일대에는 곡가가 천정 모르게 올라가 곡식 10두(斗)에 50관(일반적으로 50꾸러미)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난치병 치료로 적격
중국에서 식인 문화는 통상 기아, 복수, 종교적인 의례 혹은 기호(嗜好)로 분류되지만
이와는 달리 충성심은 물론 효행의 발로로도 인육이 제공되었다.
유안이 유비에게 자신의 부인을 죽여 식사로 대접한 것도 그 예로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자(覇者)로 볼 수 있는 제(齊)의 환공(桓公, 기원전 685~기원전 643년)은
재상인 관중(管仲)의 부국강병책을 채용하여 천하를 통일한 사람인데 그는 상당한 미식가로 알려진다.
미식가로서 환공은 그야말로 최고의 진미만을 요구했는데
이를 잘 아는 역아(易牙)는 자신의 장남을 죽여 증육(蒸肉, 삶은 고기)을 만들어 환공에게 바쳤다.
역아가 환공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여 인육을 만든 것이다.
『삼국지』에도 충성심과 애국을 위해 인육이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도태수(東都太守) 장홍(臟洪)이 동무양(東武陽)을 지키고 있을 때
원소(袁紹, ?~202)의 군에 포위되었다. 원소가 수차례 투항할 것을 종용했으나 장홍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구원부대도 오지 않자 장홍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소는 잔학무도한 인간이다. 나는 대의를 위해 죽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제군들은 이번 싸움에 희생될 필요가 없다. 성이 함락되면 이미 늦으니 처자를 데리고 성을 빠져 나가라.”
▲ 황충(蝗蟲,메뚜기)의 공격 중국의 메뚜기 공격은 상상을 초래하는 극심한 기아와 재난을 초래했다. |
장홍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모두 울면서 말했다.
“장군과 원소는 원래부터 원수가 아닙니다. 본조(本朝, 후한)의 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저희들도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장병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을 모두 동원하여 심지어는 쥐도 잡아먹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구할 수 없었다.
주부(主簿, 회계관)가 쌀 3말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조금씩 죽을 쑤어 주겠다고 말하자 장홍은 자신 혼자 먹을 수 없다고 말하고 죽을 묽게 쑤어 모두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마지막 쌀도 떨어지자 장홍은 자기의 사랑하는 첩을 죽여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병사들은 눈물이 나와 장홍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중국에서 식인문화는 당시의 보편화된 사회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전란에 의해 농경이 피폐해져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을 때는
인육이 비상시의 대용식 내지는 주식이 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약육강식의 무질서한 상황에서는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가 그야말로 강자이지만
당대의 사상관에 비추어 가족을 인육으로 제공하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은 잉카나 마야처럼 종교 의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윤리로서 인육을 먹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미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식인행동이 비인간적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인육이 색다른 분야의 절대 필요한 재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약용으로서의 효과이다.
의서에 따르면 인간의 넓적다리와 옆구리 살, 사람의 허파와 간, 뇌 등이 약이 된다고 하여
인육을 난치병을 앓는 친족이나 상관에게 제공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환자의 치료약으로 인육이 제공되었으므로 누구도 이를 나쁜 행동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이는 일이 흔히 있었다.
물론 중국에서 약용으로서의 식인 문화가 특히 유행한 것은 다소 후대인 당나라 때부터로 생각된다.
중국 정사 중에 하나인 『신당서』의 진장기(陳藏器)가 쓴 『본초습유』에
인육이 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본초습유』 원본은 사라졌지만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그 내용이 인용되어 있는데
제52권 <인부(人部)>에 사람의 머리카락, 손톱, 이, 오줌, 월경, 정액 등에서부터
피, 뼈, 인육, 머리에 이르기까지 35항목이 기입되어 있다.
이시진에 의하면 인체의 대부분이 한방약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효행으로 변한 인체 제공
인육이 제공되는 일화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효행 또는 부부 간의 덕목이다.
사실 효행으로 인육이 제공되었다는 기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신당서』<열녀전>에 미담으로 소개되는 이야기이다.
‘주적(周迪)이란 행상인이 있었다. 장사 수완이 좋아 자주 광릉 지방을 오갔는데
불행하게도 필사탁(畢師鐸)의 반란을 만났다. 사람들은 서로 붙잡아 시장에 팔고 인육으로 식용했다.
주적도 이 난리에 휘말려 굶어죽을 상황에 이르렀다.
동행하던 아내는 “이렇게 된 이상 둘 다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함께 죽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니 저를 팔아 귀국 비용으로 쓰세요”라고 말했다. 주적은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지만 아내는 억지로 남편을 시장으로 데려가 스스로 팔린 후 남편의 손에 여비를 쥐어 주었다.
주적이 성문을 나오려는데 수상히 여긴 병졸이 그가 어떻게 그처럼 많은 여비를 갖고 있는지 추궁했다.
두 사람이 함께 시장에 가 보았더니 아내의 목이 벌써 대들보에 걸려 있었다.’
부모나 친족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제공하는 것을 최상의 효행이라고 여긴 인육제공이
도덕의 척도로 작용한 것은 그런 행위가 사회적으로 큰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효행으로 식인 행위가 얼마나 성행했는가는 중국 정사에서 다룬 역사적인 인물만
약 100여 명이나 된다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르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 『본초강목』 이시진은 인체 대부분이 한방약이 될 수 있다고 적었다. |
‘주운손(朱雲孫)은 길주(吉州) 안복(安福) 사람으로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넓적다리 살을 잘라 죽을 쑤어 드리는 등 정성껏 치료해 병을 낫게 했다.
그 후에 어머니가 또 병에 걸렸는데 그때는 아내가 대신 넓적다리 살을 잘라 약을 만들어 드리자
병이 나았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효행을 칭찬하여 ‘효부시(孝婦詩)’를 지었다.’
‘호반려(胡伴侶)는 균주(鈞州) 밀현(蜜縣)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쓰러졌지만 의사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반려는 목욕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한 뒤 자신의 칼로 오른쪽 옆구리 아래에서 지방 한 조각을 잘라내
약초에 달여 아버지에게 먹였더니 곧 병이 나았다. 조정은 이를 알고 그에게 표창을 했다.’
문제는 약용으로써의 식인문화가 상당한 폐해를 낳아 자주 정치논쟁의 쟁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식인풍습이 유행했는지 양태조는 907년 각 군현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 살을 자르는 일이
있더라도 상주(上奏)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원나라 때(1270)는 다음과 같이 ‘할고(割股) 장려 금지조령’이 명문화되기도 했다.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 부모에게 바치는 것은 효행의 일단임이 분명하다. (중략)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손상시키는 일은 성인(聖人)이 경계하는 바다.
어리석은 백성이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몰라 악습에 따라 감히 지체를 훼손하고 생명까지 훼손한다면
오히려 부모에게 염려를 끼치는 결과가 된다. 앞으로 넓적다리 살을 자르는 사람이 있어도 표창하지 말라.’
물론 효행으로 자신의 신체를 제공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잣대가 달랐다.
명나라 때는 ‘할고(割股)’를 장려했다.
명대(1393년)에 심덕사(沈德四)는 할머니가 병이 나자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 치료했다.
할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도 간장을 떼어내 국을 끓여 주었더니 나았다.
그래서 명의 태조는 ‘태상찬예랑’이란 관직을 수여했다.
마찬가지로 요금옥(姚金玉), 왕덕아(王德兒)도 간장을 잘라내 어머니의 병 치료에 제공하여
심덕사와 같은 관직을 받았다.
유비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④
한국도 효도에 관한 한 중국에 비할 바 아닐 정도로 높았으므로
자신의 신체를 부모에게 제공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한국도 빠지지 않는 효행
『삼국사기』에는 웅천주(현 공주 일원) 사람 향덕(向德)과 청주(菁州) 사람 성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덕왕 대(755년)에 현 공주(당시 웅천주)의 향덕(向德)은 기근이 심하여 부모를 봉양하기도 어려워지자
자신의 다리살을 베어 아버지를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왕실은 향덕에게 벼 300석과 집 등을 내려주면서 공주 지역의 민심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 지역을 ‘효가리(孝家里, 현 소학동)’라고 불렀고 향덕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를
세웠는데 옛 비가 파손되자 영조 17년(1741) 마을 사람들이 세우고 충청도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지었다.
향덕은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 신라효자 향덕비 (사진, 국민대학교 역사학과) |
성각은 스스로 거사라 하며 일리현 법정사에 의지하였다.
뒤에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나물밥을 먹기 어려우므로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먹였고 죽게 되자 지성껏 불사를 하여 재를 올렸다. 대신 각간 경신, 이찬 주원 등이 국왕에게 아뢰니 왕은 웅천주 향덕의 고사에 의하여 근현의 벼 3백석을 내렸다.
효행을 으뜸으로 삼았던 조선조에는 보다 많은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5년, 옹진의 아홉 살 된 양귀진(梁貴珍)이라는 백정 아이가 아버지인 양인길이 오랫동안 급질을 앓자 어떤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바로 낫는다는 말을 했다.
어린 귀진은 곧바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구워 먹이자 아버지의 병은 거짓말 같이 즉시 나았다.
이 소식을 접한 황해도 관찰사가 왕에게 사실을 보고하자 세종은 정문을 세워 효행을 표창하고, 복호(부역과 세금을 면해주는 것)를 명하였다.
세종 21년에도 평안도 삼등현의 백정 한설과 황해도 재령군의 양녀 영덕 등의 어버이가 미친병을 앓자 산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곧 낫는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을 끊어서 그늘에 말려 가루를 만들어서 술에 타 마시게 하였더니 어버이의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순조 · 고종 때의 추성원은 12∼13세 때 아버지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가 병마에 신음 중일 때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서
시탕(侍湯)을 올렸으며, 그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하동, 곤양의 선비 30명이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라며 철종에게 표창을 상서(上書)했다.
이들 문서와 그 답서(答書)들은 1997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로 지정되었다.
근세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발견된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효자 진규인(陳奎寅, 1902-1966)의 효행 관련 자료를 소개했다.
진규인은 15살 때 어머니가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낸 피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 20살 때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등창을 앓은 아버지를 살려 내자
당시 유림의 총본산인 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아름다운 미풍 중 하나
식인행동은 때로는 표창 받고 때로는 규제되기도 했는데
중국의 청나라 때는 물론 중화민국이 건립된 이후에도 성행했다.
2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살았던 아서 스미스는 그의 책 『중국의 특성』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마르코폴로와 동방견문록 마르코폴로는 중국인들이 어떤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 인육도 병사(病死)한 것이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고 적었다. |
‘중국인은 부모가 난치병에 걸리면 자녀들이 자주 자신의 살을 떼어내어 부모에게 권했으며 이를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생각한다.
《북경가제트》지에도 종종 이러한 치료 방법이 게재된다. 나도 우측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의 병을 치료했다는 청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들은 흡사 무사가 전장에서 생긴 상처를 보여 주듯이 자랑스럽게 그 흉터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르코 폴로 역시 『동방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로 복주(福州)에서는 주민들이 그 어떤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사(病死)한 것이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특히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맛있게 먹는다.
병사(兵士)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과 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마시고 그 다음에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복건성 병사들의 파란 표식은 문신으로 추정된다.
원(元)은 투항한 남송 병사들의 얼굴에 강제로 문신을 새겼다.
절대군주제도 하에서는 충의를 대단히 중요시하여
왕 또는 중요 인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도덕이고 출세의 비결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충의로서의 식인행동, 즉 사랑하는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에게 바치는 행동은
비난을 받기는커녕 찬사를 받는 아름다운 미풍 중에 하나였다.
남편이나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도 미덕이었다.
중국의 가부장제도와 대가족주의의 원점에 바로 식인문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문화대혁명 중에도 일어나
카니벌리즘(Cannibalism, 인육을 상징적 식품 또는 상식으로 먹는 풍습)에 대해서
그동안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가 미개인의 식인 현상만을 대상으로 취급하고
카니벌리즘을 특수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 홍위병의 지도자 공개 규탄 문화혁명 당시 일부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고 알려진다. |
황문웅은 중국문명을 연구하는 데 식인문화를 규명하지 않으면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중국 식인사에서 놀라운 것은
수당(隨唐)시대에 ‘인육시장’이 출현하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소개되고
원(元)대에는 인육요리법을 자세히 적은『철경록(輟耕錄)』까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식인문화가 불과 몇 십 년 전인 문화대혁명 중에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반체제 성향의 한 중국 언론인은 광서성(廣西省)에서 계급적 반대파의 간을 먹는 식인 풍습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고 적었다.
홍위병 지도자의 한 사람인 능적원(陵狄原)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안휘성의 상황은 복건성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곳 사람들은 풀뿌리나 나무껍질뿐만 아니라 사람의 고기마저 먹고 있었다.
처음 우리들은 반신반의했는데 (중략) 간간이 레일 옆에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 땐가 나는 먹다 남은 어린이의 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중략) 산동성에 들어오자 상황은 안휘성보다 더 처참했다.
사람 먹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식인문화가 보편화된 것은 상황에 따라 죽은 사람을 땅에 묻어 벌레의 밥이 되게 하느니
차라리 식량으로 삼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설명도 있다.
반면에 이와 반대 경우도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댐과 관개시설을 건설하는 등 발전된 공동체를 갖고 있었던 아나사지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식인을 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죽음보다 남에게 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이용하여
식인풍습을 통치의 한 방편으로 유효 적절히 활용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던 시대에 인간을 단지 음식의 한 종류로 인식하거나
이를 역이용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점차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식인문화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형벌로서의 식인, 복수의식으로서의 식인, 충성의 표현으로서의 식인, 약용으로서의 식인 등등으로
변모한다. 이것이 시가(詩歌)나 문학 등을 비롯하여 예술에서도 한 장르를 이룬다.
아이러니한 것은 중국의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식인문화도 발전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중국문화의 최전성기라고 불리는 당나라 때 식인문화가 개화된 것이다.
『삼국지』에 면면히 나오는 식인 내용이 결코 저자들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유비를 굶겨서 보낼 수 없다 ⑤
소의 광우병과 유사한 인간의 질병이 쿠루병이다.
인육 특히 뇌수와 척수를 먹는 식인 습관이 쿠루병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는데
중국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식인문화에 접해 있다면
중국인들이 인육을 먹기 때문에 이들 질병이 유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든다.
쿠루병은 염소와 양에게 발견되는 ‘스크래피병’이나 크로이츠펠트-야곱병, 광우병과 유사하여
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인 ‘전염성 해면양뇌증(TSE)'에 속한다고 알려지지만
이곳에서는 쿠루병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뉴기니아에서 발견된 쿠루병
쿠루병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6년 버룩 블럼버그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칼턴 가이두섹(Carleton Gajdusek)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23년 뉴욕주 용커스 시에서 태어난 체코계 미국인 천재로 알려진 가이두섹은
1946년 하버드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존 앤더스(John Enders) 밑에서 수학했고
1950년대 초 미국 육군 의무대 소속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철새를 연구하기도 했다.
뉴기니아의 포어족 |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1960년에 후천성 면역 관용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랭크 맥팔레인 버넷(Frank Macfalane Burnet)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1955년 멜버른으로 초청했다. 멜버른에 있는 <월터엘리자홀의학연구소>에 초청연구원으로 근무하던 가이두섹은 파푸아 뉴기니아 동부 고원지역에 사는 포어족 원주민들에게 덜덜 떠는 쿠루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병에 걸리면 균형감각과 방향감각이 사라지며
나중에 뇌 조직이 점점 심하게 파괴된다.
쿠루병에 걸리면 대부분 1년 이내에 사망하며 길어도 2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잠복기는 6개월에서 8년 정도로 길지만 일단 발병하면 치료약이 없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잠복기간이 긴 데다가 처음에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슬로우(Slow)바이러스병」으로도 알려졌다.
그가 쿠루병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한 추장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식인 풍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이두섹을 사망한 포어족 추장의 장례식에 안내한 사람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말라고 했다.
그가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신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할 때까지는
여느 장례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기도가 모두 끝나자 몇몇 참석자들이 죽은 추장의 배를 갈라
나오는 피를 몸에 바른 후 시체를 완전히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석한 조문객 모두에게 추장의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포어족에게는 고인을 먹는 것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므로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사자의 시신을 먹는 의식은 각기 다른 부락민들을 상호 의무의 연합체로 묶어
부락 간의 격렬한 전쟁을 제한하는 역할을 했다. 초대 받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대접받은 사람들은
예를 갖춘 영접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서로 호혜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했다.
여하튼 추후에 가이두섹에게도 고기를 먹지 않겠느냐고 인육을 주어 심한 구토를 한 후
장례식을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일설에는 그가 받은 추장의 고기를 먹지 않고 연구실로 가져와
실험에 사용했다고도 알려지지만, 이때에는 쿠루병이 식인 풍습에 유발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화론에 역행하는 병
가이두섹은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에서 모든 분야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꼼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쿠루병을 연구하면서 이 병의 분포가 매우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쿠루병은 포어족이 거주하는 지역과 포어족과 결혼한 뉴기니아의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하며
주로 여자와 어린아이에게만 걸린다는 것이다.
추후에 알려졌지만 가이두섹이 추장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매우 희귀한 예였다.
그는 인종, 즉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는 도대체 어떤 돌연변이가 쿠루만큼 치명적이고 쉽게 전파되느냐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돌연변이는 이를 상쇄할 만한 이익을 집단에 가져다주어야 하는데 쿠루병은 진화론에 역행함이 분명했다.
쿠루병은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 여성과 어린이에게 주로 걸리기 때문이다.
여하튼 가이두섹은 10명의 포어족을 미국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면서 그들이 발병하는지를 관찰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쿠루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쿠루병이 인종과 관련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처음에 쿠루병이 바이러스 등 병원균에 의한 감염일 것이라는 생각도 지우지 않았다.
그런데 감염이라면 신체의 림프와 면역 체계가 침입자를 파괴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대응하면서
염증을 유발한다. 염증은 열을 동반하고 척수와 뇌를 에워싼 뇌척수액의 림프 세포 수가 증가하며
그밖에 다른 신체적인 변화를 유발한다. 그런데도 쿠루병 환자들에게서는 그런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쿠루병이 감염에 의한 질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실토했다.
물론 염증이 없다고 해서 감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감염을 일으키는 병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쿠루병은 계절과도 상관 없었고 바이러스 병원균을 추출하는 것 역시 실패했다.
결국 바이러스가 쿠루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두섹은 미지의 원인으로 생기는 중독 현상, 즉 음식이나 환경에서 접하는 병독성 물질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움막 안에 가득한 연기와 식수에 함유된 구리를 의심했다.
그러나 쿠루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집안을 모두 조사해도 다른 보통 가정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포어족이 즐겨 먹는 카사바라는 야채를 조리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독성을 띤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나 그가 먹는 음식물은 물론 흙의 성분까지 조사했지만 쿠루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어떤 영양소가 결핍하여 생겼을 가능성도 조사했지만 포어족이 섭취하는 단백질량은
인근에 사는 다른 주민들보다 더 많았으며 유아들의 영양상태도 매우 좋았다.
쿠루의 증상이 진전섬망(만성 알코올 중독성 정신병의 일종)과 비슷하다는 것에 착안했지만
포어족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식인풍습이 원인일까
그런데 가이두섹과는 달리 포어족의 쿠루병을 조사하고 있던 인류학자인 글래시 부부는
원주민들의 생활습관을 관찰한 결과 쿠루병 환자는 거의 전부 여자들과 아이들인 것으로 보아
그들이 죽은 사람의 뇌를 비롯하여 시신의 모든 부분을 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구루병 걸린 어린아이를 조사하는 가이두섹과 연구원(자료 『죽음의 향연』) |
포어족의 남자들은 여자들이나 아이들과는 따로 떨어져 살았다. 남자들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여자와 섹스를 했는데 그것은 여자들과 접촉하면 약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어족에서 땔감을 모으고 밭을 일구고 음식을 요리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들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생활을 따로 하므로 식사에도 약간 차이가 있었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사냥한 동물들을 먹었지만 여자들은 농사를 지은 콩, 고구마, 사탕수수 등의 채식을 위주로 했다.
그러므로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들은 곤충의 애벌레는 물론 사자가 생기면
주로 여자들만 아이들을 데리고 시신을 분해하여 각자 먹었다.
남자들은 시체를 거의 먹지 않고 붉은 고기만 은밀히 먹곤 했다.
문제는 뉴기니의 다른 부족들도 식인 풍습이 있는데 쿠루병은 포어족에게만 발병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포어족의 식인 행위를 질병 원인으로 삼은 학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적어도 쿠루병이 식인 풍습에 의한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었다.
처음부터 식인풍습을 의심한 학자들이 이 가설을 폐기한 이유이다.
그런데 가이두섹은 쿠루병이 1920년 H.G.크로이츠펠트와
1921년 A.야콥이 처음으로 보고한 신경질환인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과 비슷하나
치매가 없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크로이츠펠트 야콥병(CJD)은 유전자 돌연변이 등의 이유로 뇌에 스펀지 모양의 구멍이 나며
치매 증세가 나타났다가 숨지는 병으로, 평균 발병연령은 65세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데
지역 및 인종에 관계없이 보통 인구 백만 명당 연간 1명 발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쿠루병 병원체가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어
냉동 건조시키거나 섭씨 85도로 30분 이상 가열해도 전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에서 나타난 실험결과와 유사했다.
또한 쿠루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뇌조직은 염소와 양에게 발견되는 ‘스크래피병’과 매우 유사했다.
크로이츠펠트-야곱병, 스크래피병, 쿠루병 모두 뇌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어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인 ‘전염성 해면양뇌증(TSE)'에 속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쿠루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예기치 않은 단서가 계기였다.
학자들이 수많은 병인을 검토하여 결정적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자
처음부터 의심을 두었던 식인 풍습을 다시 꺼내었다.
포어족이 식인 풍습에 물든 것은 오래 전부터 물려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근 부락에서
식인 풍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포어족의 여자들이 주로 먹기 시작했는데 쿠루병이 식인행위를 한 후,
즉 단백질 부족을 인육으로 보충하기 시작한 때부터 생겼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외부 사람들과 결혼해 부락을 떠난 지 여러 해 지난 포어족 여인들에게도 발병했다.
원인이 포어족 내부에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포어족에게 쿠루병이 성하기 이전에
기독교리 차원에서 포어족의 식인 행위를 금지토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것이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자료도 제시되었다.
쿠루병으로 일부 마을의 남녀 성비가 1:3 정도로 여성이 줄어들었는데
식인풍습이 금지된 이후로 태어난 아이는 물론 여성들에게 매우 보기 드문 병이 된 것이다.
식육 통해 치명적인 병독성 인자 전달돼
1965년 가이두섹은 쿠루병이 유전이 아니라 감염병이라고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흐의 정리에 의하면 특정 질병에는 그 원인이 되는 병인이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병인을 순수 배양한 것을 실험동물에 투입했을 때 똑같은 질병을 유발하며
그 병인은 그 질병을 반복적으로 다시 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가이두섹은 쿠루의 감염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망한 환자의 뇌조직을 침팬지의 대뇌에 주입했다.
병에 걸린 동물의 뇌 조직이 다른 동물에게도 쿠루를 전파한다면
쿠루가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성이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기가 없기 때문이다.
▲ 쿠루병 걸린 여인과 어린아이(자료 『죽음의 향연』) |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침팬지가 쿠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쿠루병은 전염된다는 것이다.
그는 침팬지의 뇌에서 단백질 입자를 추출하여 분해 효소 처리한 뒤 다른 침팬지에 이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침팬지들이 쿠루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쿠루병의 병원체는 미생물도 바이러스도 아닌 어떤 특정한 단백질 입자다. 이 단백질 입자가 쿠루병을 일으키는 과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사람 또는 침팬지의 뇌 속에서 증식하는 것은 확실하다.’
쿠루병의 기저에는 오랜 잠복기를 가진 전염인자가 있다고 추정했다.
동족 식육을 통해 치명적인 병독성 인자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쿠루에 감염된 어머니에게서 아이로 질병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감염인자는 족내 식인에 의한 것으로 단정했다.
그는 쿠루병이 한 가지 원인, 즉 파괴하기 어렵고 천천히 병을 일으키는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때 가이두섹이 설정한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추후에 문제가 되었다.
바이러스는 본질적으로 단백질에 둘러싸인 핵산으로 세포에 침입해
세포의 자기복제 기구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 또한 바이러스는 세포 입장에서 외부 물질이기 때문에
숙주의 면역반응을 유발하며 그 결과 생긴 항체로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가이두섹이 말한 소위 ‘괴상한 슬로바이러스’는 이러한 특징이 하나도 없었다.
쿠루병을 유발시키는 것은 바이러스와 같은 아형이지만
신체에서 외부 물질로 인식하지도 않는 실로 이상한 병원체로 이 병원체는 DNA가 없었다.
이는 순전히 단백질로만 구성된 병원체라는 뜻으로
그 당시까지의 지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질병이었다.
이들 의문은 199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스탠리 벤 프루시너(Stanley Ben Prusiner)의
광우병의 원인이라 볼 수 있는 프리온(단백질 감염성 입자, proteinaceous intectious particle) 단백질로
연계되지만 여기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여하튼 가이두섹은 이 연구로 버룩 블럼버그와 공동으로 197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블럼버그는 1965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혈청에서 바이러스 비슷한 미립자를 발견했는데
추후에 B형 간염 바이러스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에 의해 B형 간염 예방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중국에서 쿠루병과 같은 질병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결론은 위의 설명을 보면 중국에서는 이들 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쿠루병은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병이 아니고 뉴기니아의 포어족에게만 발생한 특이한 질병이다.
또한 쿠루병은 일반적으로 포어족이 죽은 사람들의 뇌를 포함한 시신을
인척들이 먹는 풍습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포어족은 쿠루병의 질병요인인 뇌에 있는 단백질 등을 상당히 자주 먹을 기회가 있었다.
중국인들이 간헐적으로 인육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쿠루병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 참고문헌 :
『금강문화권』, 국민대학교국사학과, 역사공간, 2005
『베일 속의 한국사』, 박상진, 생각하는백성, 2002
『생물학 카페』, 이은희, 궁리, 2002
『살인 단백질 이야기』, D. T. 맥스, 김영사, 2008
『죽음의 향연』, 리처드 로즈. 사이언스북스, 2008
『노벨생리의학상』, 김영만, 바른사, 2006
「시체를 먹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대중과학, 2000년 1월호
「식인부락의 소름 짓는 괴병」, 대중과학, 2003년 4월호
「끔찍한 인육섭취의 력사」, 대중과학, 2007년 제7호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 ScienceTimes , 2008년 11.11/ 11.14/ 11.25/ 12.0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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