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赤壁大戰)은 없다 ①-④
필자가 프랑스의 과학기술연구단지인 지중해 인근에 있는 <소피아안티폴리스>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라디오를 틀었다가 ‘한국에서 대단히 놀라운 오페라를 보았다’는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의 오페라는 단 두 사람이 하는데
한 사람은 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다른 한 사람은 북을 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오페라가 있다는 것도 생소하지만 공연 시간이 8시간이나 되어 더욱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채를 든 가수가 8시간이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데도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자신 또한 끝까지 한국의 오페라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체험한 것은 우리의 판소리였다. 당시 필자는 한국의 판소리 공연이
한 외국인에게 이처럼 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판소리를 한국형 오페라라고 주저없이 설명하는 데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우리 판소리가 프랑스인뿐 아니라 온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은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회의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데서도 알 수 있다.
▲ 조조(좌측)와 서서(우측) 서서는 유비에게 자신보다 훨씬 재주가 많은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서 모시라고 말하여 '삼고초려'를 유도한다. |
세계 무형유산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준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무형문화유산의 집합체이자 역사적, 예술적 민족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문화적 표현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판소리가 이 같은 기준을 거뜬히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바로 「적벽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의 결론은 적벽(赤壁)에서 적벽대전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적벽대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삼국지』를 통해 적벽대전을 익히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에 대한 인기는 근래 개봉되어 크게 흥행에 성공한 오우삼 감독의「적벽대전 (1), (2)」로도
알 수 있다. 아시아 영화로는 드물게 8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이고,
양조위, 금성무, 장첸, 조미 등 중국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 했다.
더구나 적벽대전은 오딧세이의 트로이전쟁, 아틸라의 살롱전투,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등과
견줄 수 있는 동양 최대의 전쟁으로 워낙 광대한 스케일이므로 영화로 제작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평이
있었지만 적벽대전을 스크린에 옮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는 아시아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조조의 80만 대군, 거울을 이용한 전투, 팔괘진 전투 등 소설로서는 다소 정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스크린을 통해 제대로 재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특히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인 제갈량과 주유,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손권, 조조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금까지 『삼국지』를 원작으로 만든 어떤 영화들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흡사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하튼 「적벽대전 (1), (2)」을 보더라도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의 파괴력을 볼 수 있는데
적벽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애초에 조조와 유비, 손권과의 전투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알려진 전투가 적벽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에 하나인 소위 적벽대전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烏林, 현재 하북성 홍호현 동북쪽 장강 북쪽 연안)에서 일어났다는 설명이다.
판소리 「적벽가」가 아니라 「오림가」로 불려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전투를 꼽으라면 어느 전투가 제일 중요하다고 단정해서 이야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크므로
시대별 전투의 성격은 물론 파급 효과 등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나 전투 사상 가장 흥미 있는 전쟁의 시기를 꼽으라면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다.
한 제국의 성립과정에서 일어난 ‘초·한전’과 한 제국의 패망 이후의 ‘삼국쟁패’가 바로 그것이다.
▲ 유비의 삼고초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관우 장비와 함께 세 번을 찾아간다. |
‘초 · 한전’은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한나라라는 통일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혈투를 벌인 전쟁이다.
‘삼국쟁패’는 그 초한전의 승자인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의 패망에서부터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서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싸웠던 전쟁이다.
이 두 전쟁은 대중들에게는 가장 돋보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전쟁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전쟁은 초한지와 삼국지라는 문학으로 대중들이 즐겨 읽는 고전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삼국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토가 결국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거의 100여 년에 걸친 혈투를 벌이는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갖게 한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갈리고 또 항상 영웅이 나타나지만
이 두 시대처럼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두 시대의 전투가 박진감 있게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반면 그 시대의 전투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이 두 전쟁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물론 두 시대는 여러 면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초·한 간의 쟁패 시기에는 인재가 한 편으로 몰려있어 곧바로 통일 제국이 성립될 수 있었지만
삼국시대의 인재들은 각각 세 집단으로 나뉘어 혈투를 벌였기 때문에
중원이 통일되지 못하고 결국 삼국으로 분리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역사가들은 중국이 삼국시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적벽(赤壁)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진
이른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손권 ·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배한 사실을 든다.
더욱이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조가 손· 유 연합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가 많았을 뿐 아니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국의 정사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에서처럼 명료하지도 않을 뿐더러 요약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나관중의 『삼국지』의 영향이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보다 엄청나게 커져
적벽대전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나관중이 그린 『삼국지』의 내용을 진실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격히 따져보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속하는 『삼국지』는
정확치 않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얼버무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처럼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이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판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달라지므로
독자들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필요가 없이
흥미 있는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베스트셀러는 책의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많이 팔린 책을 가리킨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든 그 책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에게는 독자들을 빠져들게 하여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상상력과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삼국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식자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알려진 ‘적벽대전’이
실제로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학자들은 역사상 ‘적벽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여 말한다.
이른바 ‘적벽대전’이 실은 적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유비가 용을 얻다
『삼국지』 전반부에서 조조는 동탁과 원소 세력이 제거되자 명실상부한 후한의 실권자가 됐지만
중원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바로 유비 세력이다.
유비는 당대의 군벌들과는 달리 특정한 거주지가 없고 출신도 돗자리를 만드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지만
항상 세간의 높은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漢)제국의 황제와 같은 유씨로 소위 족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군벌들은 유비가 자신보다 부상하는 것만 견제할 수만 있다면
그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에 손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돗자리를 짜던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 예우와 환영을 받은 이유이다.
원소가 실패한 후, 유비가 형주(荊州)로 나가자
유표(劉表 142-208)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그를 맞은 후 상빈으로 대할 정도였다.
▲ 융중에 있는 제갈량 동상 |
건안 12년(207년), 조조가 북으로 오환(烏桓)을 정벌하러 나서자 유비가 유표에게 이때를 타서 허현을 습격하라 말했지만 유표는 응하지 않았다. 이때 유비에게 큰 행운이 따른다.
유비가 삼고초려의 형식을 빌려 그의 제일 중요한 참모라 할 수 있는 제갈량(諸褐亮 181~234)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삼국지』는 온통 제갈공명의 무대가 된다.
실제로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 유비· 손권이 아니라 제갈공명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이다.
여하튼 조조는 북방에서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기마민족인 오환을 격파하여 휘하에 편입시킨 후 삼공(三公)제도를 폐하고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하후돈(夏候惇 ?-220)을 총대장으로 하여 박망성(博望城)으로 진출한다.
조조가 우선 유비를 격파해야 한다는 뜻을 세운 것은
자신보다 명성을 얻고 있는 유비를 계속 자라게 한다면
결국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이런 생각은 중국의 고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유명한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 관계이다.
초·한 간의 전반적인 전투를 볼 때 승자는 항상 항우였고 유방은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유방인데
그 이유는 유방이 항우보다 백성들로부터 높은 신임, 즉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조는 유비가 자신을 넘보기 전에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론을 말하자면 조조의 생각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유비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는 부하들은 없었지만
유비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고 조언했다. 그가 얻은 무기는 바로 제갈공명이다.
조조가 제갈량의 친구로 이름이 높았던 전략가인 서서(徐庶 ?~230년경)에게
제갈량의 재주가 어떠냐고 묻자 천하의 서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반딧불이의 형광(螢光)이라면 제갈량은 호월천리(晧月千里)의 밝은 달입니다.’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설정하고
서서의 입을 통해 그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는데 그것은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임은 물론이다.
서서는 영천 사람으로 제갈량의 ‘융중 문화 살롱’에서 함께 교유한 친구 중의 친구이다.
융중이란 제갈량이 유비에게 발탁되기 이전에 기거했던 곳으로
그는 융중에서 당대의 소위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여하튼 유비의 책사로 융중 문화 살롱 멤버인 서서가 제일 먼저 발탁된 후 제갈량을 곧바로 천거했다.
이때 서서는 제갈량은 절대로 부른다고 달려올 사람이 아니므로 직접 찾아갈 것을 권했다.
유비가 제갈량의 존재를 알고 세 번 찾아가 겨우 그를 만났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제갈량이 스스로 유비를 찾아가
『삼국지』에 나타나는 삼고초려는 다음과 같다.
서서의 말을 들은 유비는 제갈량을 청해 천하를 얻기 위해 관우 · 장비와 함께 그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이 집에 있지 않아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며칠 후 제갈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유비는 다시 관우 · 장비와 함께 눈보라를 맞으며 찾아갔으나
제갈량이 마침 외출하여 다시 한 번 허탕쳤다.
▲ 융중 살롱의 사마휘 사마휘는 융중살롱을 열어 당대의 지식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좌로부터 최주평, 방통, 사마휘, 석광원) |
세 번째에 비로소 제갈량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유비는 제갈량이 천하의 형세를 매우 예리하게 분석하는 데 탄복했고 제갈량도 유비가 세 번이나 자신의 초가집을 찾아온 것에 감동하여 산을 내려가 돕겠다고 말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로 모시고 관우 · 장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에게 공명이 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그러나 『삼국지』에 그려진 삼고초려에는 다소 이견이 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제갈량이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갔지만 유비는 제갈량과 면식이 있는 사람도 아닌 데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 서먹서먹하게 대했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으로 유명한 삼고초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기록이지만
『위략』의 다음 글을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계속 박대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우대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가 서먹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신임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제갈량의 계책을 따르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유비는 제갈량이 뛰어난 계책을 가졌음을 알고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이 설명만 보면 삼고초려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위략』의 기록을 볼 때
제갈량이 스스로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간 것도 사실이며
유비가 추후 세 번 찾아가 초빙한 것도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이 유비의 책사가 될 때 유비의 나이는 48세, 제갈량의 나이는 27세였다.
유비가 처음에는 의기투합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약간 삐진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제갈량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해 서서(徐庶)를 또 한 번 극적으로 활용한다.
서서는 208년 조조가 형주를 치자 유비를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어머니가 조조 군사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부득이 조조 수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도 강골이라 서서가 유비를 섬기기를 바라며 자살을 한다.
이후 서서는 마음을 항상 유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조조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문열은 이의 원형을 『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항우가 유방 휘하에 있던 장수 왕룽의 어머니를 잡아 회유하는 장면으로,
이 부분에서 왕룽의 어머니는 유방이라는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항우에게 가지 말라며
목을 찔러 자살한다는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단순하게 동 시대의 단편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체 역사를 아우르면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임을 다시 한 번 알려주지만
역사를 마음대로 각색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서가 조조 진영으로 들어간 후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않고
죽는 날까지 유비에게 충성을 지켰다고 했지만 이것도 사실과 부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서서가 단 한 번도 계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그는 위나라에서 우중랑장(황제의 시종관)과
어사중승(전국의 지방관들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직책)조차 임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두 관직은 제갈량에 비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이 사실로
제갈량조차 서서의 품계가 너무나 낮다고 아쉬워했다.
228년 제갈량이 북벌할 때 위나라 서서의 벼슬이 높지 않은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이다.
“위나라에 인재가 그렇게도 많은가? 어찌하여 서서와 석광원(石廣元) 같은 사람이 중용되지 않는가?”
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조조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 실력을 발휘한다.
박망파에서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박망파 전투는 건안 7년(202)에 벌어졌는데
제갈량이 초야에서 나온 것은 건안 12년이기 때문이다.
유비도 박망파 전투는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고 적었다. 유비의 몇몇 안 되는 승리 중 하나인 것이다.
여하튼 유비가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유표를 공격하여 형주를 취하라 건의한다.
유비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삼국지』에서 형주는 삼국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요충지 중의 요충지로 그려지는데
그것은 형주가 ‘중국의 배꼽’ 즉 지리적 중앙부에 있기 때문이다.
후한 말 형주는 인구가 전국 17개 주 가운데 2위인 650만 명에 달했다.
형주를 장악하면 익주(益州)는 물론 오나라를 침공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한 것은 사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제갈량의 조언을 거절한 유비
형주자사인 유표는 『삼국지』에서 무능한 사람의 대표적인 주자로 거론될 정도로
매우 유약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유표는 190년 형주자사 왕예가 장사태수 손견에게 피살되자
형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으로 상당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 장판파에서 혈투를 벌이는 조자룡 |
당시 형주는 매우 불안정하여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적이 활보하는 세상으로
소위 무법지대와 같았다. 유표는 남군 사람 괴월, 양양 사람 채모 등을 활용하여
강남 3군의 반란을 평정하고 점차 형주 8군을 통일해 당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할거 세력이 되었다.
형주가 지형상 삼국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형주는 중국 지도를 볼 때 중앙으로 천하 통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조조는 남으로 확장해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고 동오의 손권도 이곳까지 세력을 확장해야만
패권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형주가 비교적 안정된 것은 유표에게 남다른 정치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형주에 있는 19년간 중국이 한 치도 알 수 없는 와중에 휩싸여 있었지만 형주가 비교적
안정적인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도 남다르게 정세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에서 그의 역할이 매우 미미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유표에게 당대의 영웅과 호걸에 비해 담력과 재간이 다소 부족하다고 나관중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유표도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으므로
중국의 패권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형주만 안전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유표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건 당대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주가 삼국 패권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라는 것은
삼국의 누군가에 의해서 언젠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형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비상대책을 세워야 했다는 것이다.
형주의 상황을 가장 잘 꿰뚫어 보고 있던 사람이 바로 조조이다.
그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 형주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대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지형을 확보하고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유표만 제거하면
삼국은 저절로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유표에게는 조조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유비가 의탁하고 있으므로
형주를 접수한다는 것은 유비의 세력도 자동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면으로 흘러간다.
조조가 건안 13년(208년) 7월 대군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남정에 돌입하자
나름대로 유비를 포섭하여 형주를 수호하고 있던 유표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유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 ?~209)가 아니라
차남 유종(劉琮, ?~208 이후)으로, 그는 곧바로 조조에게 형주와 양주를 바치겠다면서 항복의사를 밝혔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유표에게는 큰아들 유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표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유기의 동생인 유종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나이 어린 유종은 형주를 지키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재목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나이 14세에 불과했으므로 그럴 만도 한 일이다.
▲ 양번(양양+번성) 고성 양양에 있던 유종이 조조에 항복할 때 번성에 있던 유비는 곧바로 하구로 퇴각하여 손권과 연합을 모색한다. |
이는 조조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사실 형주를 조조에게 헌납한 사람은 유표가 아니라 그의 아들과 형주의 집권세력이지만 이 일로 유표는 삼국시대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의 대명사로 거론된다.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자식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해 그동안 쌓아 놓은 공과가 모두 허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표의 형주를 접수하라고 조언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유표의 자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이유는 유표가 바로 제갈량의 근친이 되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의 누이동생이 유표와 결혼했다.
사실 제갈량은 당초 형주목인 유표의 우산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유표가 제갈량의 근친이 되기는 하지만 제갈량은 유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표가 백성을 아끼고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등 어느 정도 명망을 갖고는 있었으나
아쉽게도 너무 보수적이고 성격이 흐리멍덩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자신의 웅지를 펼치는 데 결정적인 흠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제갈량은 삼고초려를 통해 자신을 초청한 유비에게 형주를 접수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유비로서는 선뜻 제갈량의 말을 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비가 그때까지 얻은 명성은 유씨라는 족보 때문인데 자신이 유씨를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론을 따진다면 유비의 말도 맞고 제갈량의 말도 맞았다 볼 수 있다.
결국 유비가 추후에 형주를 접수하였지만 형주를 접수하기 전에 유비가 많은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유비가 초창기 제갈량의 건의를 곧바로 받아들였다면
『삼국지』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적벽대전 전야
형주의 유종이 갑자기 조조에게 항복할 때 유비는 당시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조조가 남하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조조가 완성(宛城)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당양으로 퇴각한다.
이때 유종이 있는 양양(襄陽, 현재는 양양과 번성을 합하여 양번이라 부름)을 지나치게 된 유비에게
제갈량은 양양을 취하라고 간했지만 유비는 은인(유표)의 기업을 빼앗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정순태는 유비의 이 행동이 유비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평가했다.
설령 혼란의 와중에 양양성을 점령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내의 관민을 포섭하여
조조의 대군을 방어하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특히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수군 전함 1천 척을 확보한 것도
유비가 전력의 열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유비는 우선 관우에게 병력 1만과 선박 수백 척을 주어
한수를 따라 하구(현 무한시)로 후퇴하도록 했다.
문제는 유비가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강릉(江陵)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강릉에는 형주의 군수물자가 비축되어 있으므로 유비가 조조와 대결하기에는 적격이었다.
갑작스럽게 형주를 손에 넣은 데다 형주의 함선 1천여 척까지 덤으로 얻은 조조는
양양성에 입성하여 유표의 큰 아들인 유기를 청주(靑州) 자사로 임명하고
형주의 중신 15인에게 작위를 내리는 등 민심을 얻으려 했다.
『삼국지』에서는 항복한 유종이 임지로 부임하면서 우금(于禁)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것으로 꾸며지지만
이는 조조의 ‘간악(奸惡)’을 강조하려는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조조는 유비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당초부터 유비를 제거하려고 했음에도 실패했는데 유비가 강릉을 접수한다는 것은
유비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것이 되며 큰 후환이 될 우려가 있었다.
또한 조조로서도 강릉의 비축물자가 필요했다.
조조는 기병 5천을 이끌고 하루 밤낮에 130킬로미터나 달려 유비가 백성들과 함께 후퇴하는 것을 쫓았다.
조조는 양양과 강릉 사이에 있는 당양(當陽)에서 유비군을 포착했다.
조조군의 공격이 거세자 유비는 그의 장기라고도 볼 수 있는 꼬리를 과감히 끊어버리는 줄행랑
즉 심지어 처자식까지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병만 이끌고
강릉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진(漢津, 현 종상시)으로 도주했다.
▲ 아두(후주)를 던지는 유비 조자룡이 아두를 구해오자 유비는 아두보다 조자룡이 더욱 중요하다며 아두를 땅에 던진다. |
이 당시의 상황을 『삼국지』에서는 매우 극적으로 그렸다. 즉 조자룡이 장판파(長板坡)에서 조조군에 포위되자 유비의 아들 아두(阿斗)를 가슴에 품고 단신으로 혈투를 벌이면서 겨우 탈출한다.
조자룡이 아두를 데려가자 유비는 아두를 내팽개치며 조자룡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 후 조자룡은 비록 유비와 장비, 관우처럼 도원결의를 하지는 못했지만 장비, 관우보다 오래 살면서 유비 곁을 지켰고 유비의 죽음마저 목격한다.
일본인들은 『삼국지』의 인물 중에서 일반적으로 조자룡을 으뜸으로 친다. 조자룡이 항상 주군인 유비와 함께 했고 유비의 죽음까지 지켜보아 소위 사무라이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조자룡은 공손찬의 부하였으므로 공손찬이 죽자
당대의 패자라고도 볼 수 있는 원소에게 갈 수 있었음에도 군세가 형편없는 유비에게 갔다.
이는 조자룡이 원소가 재목이 아니라 유비가 재목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만큼 유비는 나름대로 부하들을 이끌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었다.
장판교에 혼자 버티고 선 장비
유비의 패주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장비의 활약도 크게 기여한다.
『삼국지』는 장비가 장판교(長板橋)에서 혼자 버티고 서서 큰 목소리로 덤비라고 하자 조조가 퇴각한다.
그야말로 용맹한 장비가 혼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나 공명은 장비가 꾀가 없음을 한탄한다.
장비가 장판교에서 단신으로 조조 대군과 맞섰을 때 조조가 공격하지 않은 것은
장비의 후미에 대군이 매복하고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조가 철수하자 장비는 퇴각하면서 장판교를 파괴한다.
제갈량은 만약 장비가 장판교를 끊지 않았으면 조조가 더 이상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을 것으로 설명했다. 결과론으로만 본다면 적벽대전이 벌어졌더라도 상당히 후에 일어났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 장판교의 장비 장판교에서 장비가 단독으로 조조군과 맞서자 조조는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퇴각했다 |
현재 장비가 조조군과 대결했다는 장판교는 사라지고 당양제2교가 건설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장판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각도 몇 년 전 수해 여파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사건을 그린 조각상과 비석들이 당양의 장판파 공원에 세워져 있다.
『삼국지』에서는 장비가 우뚝 서서 호령하는 장판교가 매우 작은 규모로 그려지는데 장판교가 있었던 한수(漢水)는 서울의 한강처럼 매우 넓은 강이다.
공교롭게도 한수는 한강을 뜻한다.
두 가지 사건은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
진수의 『삼국지』 <조운전>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비가 당양 장판에서 조조에게 추격을 당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날 때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을 껴안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후주(後主)였고 또한 감부인(甘婦人)을 보호했는데 그녀가 바로 후주의 생모였다. 이들은 모두 조운의 노력으로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진수의 『삼국지』 <장비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비는 조조가 갑자기 추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장비에게 기병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후방을 막게 했다.
장비가 강물을 이용하여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며 창을 잡고 말했다.
‘나는 장비다. 나에게 덤비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라.’
적들은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결국 유비가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장비가 대갈일성으로 다리를 끊어 물이 거꾸로 흘렀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만한 사실로 전설일 뿐이다.
그런데 장비의 큰 목소리에 조조의 대군이 놀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장비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세기는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세기의 1조 배까지이다.
그러나 소리 크기의 차이는 이보다 훨씬 적다.
귀가 듣는 상대적 소리의 크기를 음량이라 하고 데시벨(db) 단위로 측정한다.
데시벨은 ‘로그(log) 눈금'을 사용하므로
10데시벨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인 0데시벨보다 10배, 20데시벨은 100배이다.
일반적으로 집에서의 라디오 소리는 40데시벨, 집에서의 대화소리는 65데시벨,
귀에 장애를 주는 소리는 85데시벨, 매우 혼잡한 교차로는 90데시벨,
도로공사 시 굴착기의 소음은 100데시벨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큰 소음은 제트기 이륙 때 나는 소리로 140데시벨로 본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소총 사격음과 같이 120db 이상의 큰 소리에 1초만 노출돼도
영구적으로 이명, 감각신경성 난청 등 음향 외상을 받을 수 있다.
큰 소리가 청각 신경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달팽이관의 유모세포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140데시벨에서는 고막에 통증을 느끼며 방향감각을 일시 잃는다. 140데시벨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가는
일반 소음계(sound level meter)의 측정 범위가 30~130데시벨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완충지대 사라진 손권과의 연합
장비가 대갈일성으로 조조군이 추격을 막아냈다면 그 목소리가 우렁찼음은 틀림없을 것 같다.
특히 장비의 목소리가 제트기의 소음과 같을 정도인 140데시벨 이상이었다면
조조군이 방향감각을 잃고 장비를 추격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도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실제로는 조조가 장비의 뒤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알고 퇴군한 것이다.
▲ 당양제2교 장판교 전투가 있었다는 장판교는 매우 큰 강으로 현재 당양제2교로 되어있다. |
강릉으로 향하던 유비는 조조의 추격에 놀라 처자까지 버리면서 도주하지만
결국 강릉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유비가 강릉으로 들어가려고 한 이유는 곡량 등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곳을 포기했다는 것은 전쟁에서 절반 정도 지고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차포 떼고 장기를 두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유비는 강릉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수의 나루인 한진(漢津, 현 종상(鍾祥))을 거쳐 장강 쪽으로 향했는데
다행하게도 1만여 명의 군사를 갖고 장강을 거쳐 퇴각하고 있던 관우와 회합한다.
곧바로 이들은 유표의 장자이지만 유표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강하태수 유기(劉琦)와 합류한다.
그는 하구(夏口)에서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유비와 유기의 군세는 총 2만여 명이었다.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남정을 시도한 조조의 생각은 단순했다.
형주를 접수했으므로 여세를 몰아 오나라의 손권을 격파하고
더불어 유비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로서는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온 모든 명성을 한꺼번에 잃는 것은 물론
패배자로서 목숨조차 부지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비로서는 어떠한 경우이든 조조와 대항해야 했는데 마침 오나라의 손권이 있었다.
강동의 손권은 사실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만 해도 '삼국지'에서 중요 세력은 아니었다.
당대의 패권은 원소 조조 등 강북의 실권자들 간에 벌어진 데다가
강동은 전력에 있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동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형주가 방패막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삼국지' 초반 비교적 안정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방패막이 되어 준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했으므로
손권과 조조 사이의 완충지대는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유비가 착안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조조와 손권 간에 언젠가 전면전이 일어나야 하는데
손권에게 힘을 실어주면 조조와 대항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고 결국 승리하였지만
당대의 정황을 볼 때 이들이 연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 군진을 종횡무진하면서 탁월한 정세를 논하여
오나라 수뇌진을 설득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형주를 접수하고
자신의 취약점인 수군을 확보하자 동오 공격에 자신감을 얻은 조조는
곧바로 손권에게 공갈의 의미를 지닌 다음과 같은 초항서를 보냈다.
▲ 적벽산의 주유 동상 적벽대전은 손권이 감독을 맡고 주유가 군대를 통솔했으며 유비와 유기가 행동대원으로 참가하고 제갈량은 조연에 머물렀다는 것이 정설. |
‘최근에 나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들을 정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은 바로 손을 들어 투항했고 형양(荊陽)의 백성들도 모두 귀순했소. 이제 나는 다시 80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그대와 함께 그대가 머무는 오나라 땅에서 사냥이나 하며 유비를 치고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며 오래 동맹 관계를 맺고 싶소.’
조조가 80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겠다고 하지만 조조의 모든 병력을 다 합쳐도 80만 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조조의 초항서가 도착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항복하기를 원했다. 당시에 강북의 세력들은 육군이 주력이므로 오나라는 수군으로 이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조조가 형주의 수군을 접수했기 때문에 오나라의 전술적인 이점마저 상실된 상태였다.
손권의 신하들이 전투가 벌어지면 오나라가 백전백패하므로 사전에 항복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건의했다.
실제로 오나라의 건국공신으로 손책이 죽은 뒤 손권의 정신적인 고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소(張紹 156~236)조차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가 천자의 이름을 빌려 사방을 정복하는데 만약 이를 막는다면 불순(不順)이 됩니다.
더구나 오가 지금까지 조조에게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강(長江) 때문이었는데
이제 조조가 형주를 얻었으니 장강의 험한 요새를 우리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조조의 대군과 대적하기는 어려우니 항복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손권과 유비의 연합
조조의 막강한 육군에 형주의 수군이 합세했으므로 이들을 격파할 재간이 없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손권과 장소의 사이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나라 중신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한 것은 아니다. 이의 선봉장이 노숙이다.
노숙(魯肅, 172~217)은 유표가 죽은 것을 알고 즉시 손권에게 유비와 협력하여
조조와 대적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노숙은 '삼국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은 주유이다.
주유가 손권에게 노숙을 추천한 추천서는 그야말로 화려하다.
‘노숙은 자를 자경(子敬)이라고 하며 임회군 동성현 사람입니다.
모든 병서를 두루 공부했고 지략과 무용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재산도 많습니다.
제가 옛날 거소(居巢)의 현장(縣長)으로 있을 때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임회군에서 군량미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숙에게 부탁했더니
쌀 창고 한 채를 전부 제공해 주었고 그 후 저는 그를 최고의 벗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품도 훌륭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도 지극한데
다른 사람이 그를 차지하기 전에 신속하게 교섭하여 우리 군에서 영입해야 할 것입니다.’
▲ 노숙은 손권에게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하여 적벽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
노숙은 당대의 재력가로서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는데 소호(巢湖)의 정보(鄭寶, 2세기 말)로부터 벼슬자리를 권유받았음에도 주유의 추천으로 손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노숙은 손권의 진영에 합류하면서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제갈량보다 다섯 살 위인 제갈근(諸葛瑾 174~241)이다.
적벽대전이 벌어질 때 제갈근은 오나라, 동생인 제갈량은 유비 측에서 싸웠으므로 사실 두 형제가 힘을 합하여 조조에 대항했다는 설명도 과언은 아니다.
손권은 노숙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형주로 파견하였지만 조조의 진군이 재빨라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한 후였다. 그러므로 설사 유비와 유기가 연합하였다고 하더라도 형주를 손에 넣은 조조에 비할 때 유비와 유기는 큰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손권은 알아차렸다.
한 마디로 노숙의 건의대로 유비와 연합하려고 생각하였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변했으므로 유비와 연합하는 것이 유리할지 불리할지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유비가 제갈량에게 손권의 휘하에는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 174~241)이 있으므로 함께 손권을 설득하라고 제갈량을 사자로 파견했다.
이때 제갈량이 주유와 노숙을 만나며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 항복하지 못하는 장면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제갈량이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오나라 집권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공명이 말했다.
공명 : 조조는 본래 호색지도(好色之徒)라 오래 전부터 강동 교공(喬公)에게 두 딸이 있는 것을 알고
이들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큰딸의 이름은 대교(大喬)요 작은딸의 이름은 소교(小喬)인데. (중략)
조조는 극히 화려하고 장려한 동작대(銅雀臺)를 짓고 맹세하기를 내 사해를 소탕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제업(帝業)을 이루게 될 때 강동의 이교(二喬)를 얻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조조가 백만 대병을 거느리고 강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이 두 여자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교공을 찾아가서 천금으로 두 여자를 매수하여
조조에게 보내면 조조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갈 것입니다.
주유 : 조조가 이교를 손에 넣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공명 : 조조가 어린 아들 조식에게 명해서 「동작대부(銅雀臺賦)」를 지어
글 속에 천자가 되어 맹세코 이교를 취한다고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나관중은 조식이 지은 동작대 원문에는 ‘연이교어동서해(連二橋於東西兮)’로 되어 있는데
‘이교(二橋)’를 음이 같은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인 이교(二喬)로 고쳐 불러
‘남이교어동남혜(攬二喬於東南兮)’로 말했다고 적었다. 동작대부의 원문을 모르는 주유가
공명의 이 말을 듣고 발끈하며 크게 노하자 공명은 그의 화에 불을 붙인다.
“옛적에 흉노 선우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니
한나라 천자께서는 공주까지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서 화친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민간의 두 여자를 조조에게 보내는 것이 무어 그리 아깝다고 하십니까.”
공명의 설득
공명은 손권의 부인이 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이 소교인 것을 알고
그들의 분노를 재촉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실제로 동작대는 적벽대전이 일어난 2년 후에 건축되었으며
「동작대부」는 그보다도 2년 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아무리 신묘하다고 해도 4년 후에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를 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때 노숙은 또 다시 손권에게 조조와 일전을 겨루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노숙은 동오의 모든 사람이 조조에게 항복할지언정 손권은 불가하다고 말한다.
“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저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자사(刺史) 등의 벼슬을 주어
금의환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이 항복한다면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잘해야 후(候)로 봉할 정도이며 시종도 겨우 두어 명에 불과할 겁니다.
신하들이 항복하자는 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겁니다.”
제갈량도 손권을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어나, 장군(손권)이 병사를 일으켜 강동을 거점하고,
유예주(유비) 역시 무리를 이끌고 한남을 수복하여, 조조와 함께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가 대란을 평정하여 그 위세가 사해를 진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유비도 이곳까지 도망했습니다. 장군이 만약 오월의 무리로 중국과 대항할 수 있으면
일찍 그와 단절하는 것이 순리이며 만일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병기를 버리고 갑옷을 묶어 둔 후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장군이 밖으로는 복종의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망설이며 계략을 세우지 못하니, 사정은 급하되 결단하지를 못하여,
화가 올 날이 멀지 않을 겁니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유비가 하구로 도망쳐왔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손권이 유비보다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하여 유비와의 결합을 반대하는 측으로 하여금
유비가 손권을 이용하여 자신을 구하려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강조했다.
둘째는 손권에게 결단력이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는 점이다.
사실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다는 비난을 가장 싫어하는데
제갈량이 바로 손권의 취약점을 정확히 꼬집었다.
이때 손권은 제갈량에게 ‘만약 당신의 말이 옳다면 유비는 왜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
이때도 제갈량은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 대교와 소교 공명이 손권의 부인 대교와 주유의 부인 소교를 이용하여 조조와의 전쟁을 촉구했다고 알려지지만 이 일화는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
‘전횡(田橫, ?~기원전 202)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과함에도 의를 지키고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하물며 유비는 왕실의 자손으로 뛰어난 재명이 세상에서 으뜸가고,
수많은 사내들이 앙모하여 바다로 물이 돌아가는 것과 같다.
만일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하늘의 뜻으로, 어찌 조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제갈량이 유비가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이유를 이와 같이 설파한 것은
고단수의 심리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제갈량의 말은 손권이 유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위에 있지만
유비는 항복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고 손권은 항복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영웅으로 자처하고 있던 손권에게 제갈량의 설명은 모욕이나 마찬가지이다.
손권은 발끈하여 조조와의 결전을 다짐하면서도 작전가다운 질문을 한다.
동오는 조조에 대항한 경험이 전혀 없으므로 유비에 의지하여 조조와 대적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비는 조조에게 이미 패했으므로 자신과 연합할 병력은 물론 장병들의 사기도 떨어졌음이
분명하지 않은가를 물었다. 즉 유비가 조조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에 제갈량은 손권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한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패하였지만, 현재 관우군과 유기의 병사를 합하면 수만이 된다.
조조는 장거리 행군으로 매우 지쳐 있으므로 이들을 격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북방인들은 수전을 잘 모르는 데다 그에게 항복한 사람(형주 수군)들은 일시에 패했기 때문에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이지 심복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비와 정말로 힘을 합치면 반드시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
이것이 전력상 현저한 열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와 손권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조조군에 대항하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벌어지게 되는 배경이다.
적벽대전은 없었다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장차 중국의 전체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투로서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적벽대전’이란 말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보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적벽지전(赤壁之戰)’이라고 부른다.
‘전’이란 회전(battle)을 가리키는 말로 적벽은 회전이 발생한 지점이다.
예로 들자면 해하지전(垓下之戰)은 바로 초· 한 양군이 해하에서 한 판 벌인 회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벽지전’이란 적벽에서 발생한 한 번의 회전을 뜻한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적벽대전으로 적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런데 적벽대전이라는 대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적벽대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점 때문이다.
▲ 융중 제갈량서원의 제갈량 |
이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당시 조조 진영과 연합군 진영의 배치에 대해 설명한다.
우선 손권과 유비의 연합이 확정되자 곧바로 조조에 맞설 전투 부대가 구성된다.
손·유 연합군 5만여 명(기록에 따라 7∼8만여 명)은 장강을 따라 서진하여 장강 남쪽 적벽에 주둔했다.
노숙의 건의로 손권의 어릴 적 친구인 주유가 대도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손권의 선친이 "나라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 결정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자질이 있는 강골이자 전략가였다.
주유도 손권에게 일단 결심이 섰으면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는 북방의 조조가 말안장을 벗어나 선박에 앉아 오나라와 다투는 것은,
자신의 주무기를 버리고 전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조조가 수많은 기병을 끌고 왔지만
기병의 기본 전투력인 말을 먹일 여물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기병들이 제대로 활약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또한 조조군이 지형을 잘 몰라 악전고투하면서 내려왔으므로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이야말로 적벽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주유가 원정군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손권은 주유의 말을 듣고 전의를 다지는데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의 모든 면이
제갈량의 의중대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의 활약상이 그 어느 곳보다도 자세하게 기술되었는데
그것은 제갈공명에 의해 적벽대전의 승패가 갈리고
그 때문에 삼국이 정립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당시 제갈량의 나이는 고작 28세로 도략(韜略)과 병법에 능통하다고 하더라도
실전에 있어서는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따라서 적벽대전은 손권이 감독을 맡고 주유가 군대를 통솔했으며
유비와 유기가 행동대원으로 참가하고 제갈량은 조연에 머물렀다는 것이 정설이다.
참고적으로 적벽대전이 벌어졌을 당시 주인공들의 나이를 보면
조조 54세, 유비 48세, 손권 27세, 주유 34세, 노숙 37세이다.
적벽대전은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3대 전투 중에 하나이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적벽대전이 아니라 오림대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적벽대전이라 부르는 데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진수의 『삼국지』는 사마천의 『사기』와 달리,
여러 부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 많은데 ‘적벽대전’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투인 ‘적벽대전’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이 없어
전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적벽’이란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수가 『삼국지』에 적벽대전을 묘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적벽산의 적벽석각 전해지는 말로는 주유가 조조 군사를 격파한 후 승리를 자축하며 검으로 새긴 것이라고 알려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
①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으며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삼국지』 <무제(조조)기>)
② 손권은 주유· 정보(程普 2세기말~220년대) 등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유비)와 힘을 합쳐 조공과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
(『삼국지』 <선주(유비)전>)
③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삼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를 뵙고 힘을 합해 조공(조조)에 대항하였다.
조공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
(『삼국지』 <제갈량전>)
④ 주유와 정보를 보내 선주와 힘을 합쳐 조공과 맞서 적벽에서 조우하였다. 그때 조공의 군대에는
이미 질병이 퍼져 있어 처음 교전하자 조공의 군대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다.
(『삼국지』 <주유전>)
⑤ 주유와 정보가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벽에서 조조군을 만나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조공이 남은 함선을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퇴각했다.
(『삼국지』 <오주전>)
⑥ (정보)와 주유가 좌·우독이 되어, 조공을 오림(?林)에서 물리쳤다.
(『삼국지』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
이상이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에 관한 기록인데
이 내용만 보면 도대체 적벽대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주전>에서는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이겨 그 배를 불태웠다고 적었고
<제갈량전>에서는 조조가 적벽에서 패해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이 두 설명에 기초한다면 회전지는 ‘적벽’이 틀림없으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의해 조조가 패배하자 조조는 곧바로 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유전>에서는 쌍방이 적벽에서 조우했지만 조조가 패퇴하여 강북으로 후퇴하였는데
막상 강북이 어디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사에 기록된 설명만 보면 적벽대전이 적벽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에서는
조조를 물리친 지점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이라고 확실하게 적었다.
전투 현장을 찾는다
중국의 판도를 좌우하는 적벽대전의 위치가 어디인가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지만
결국 학자들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즉 실제 전투가 일어났다면 어디에서 일어났겠느냐 하는 것이다.
▲ 동호의 황학루 중국 3대 누각으로 알려지는 황학루(黃鶴樓)는 223년 손권이 세운 것으로 오나라 수군을 조련할 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
그런데 학자들의 결론은 다소 놀랍다.
그들이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실제로 적벽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오림에서 벌어졌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적벽지전(적벽대전)’이 아니라 ‘오림지전(오림대전)’이 맞는다는 설명이다.
고대 전투에서 수륙 양진을 펼치면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북방의 조조 육군이 강을 따라 행군하고 조조가 접수한 형주 수군은 이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동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 유의 연합군은 이들에 맞서 수군은 수군으로 육군은 육군으로 격퇴할 방안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현재 호북성의 적벽시 인근의 적벽이라고 알려진 곳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적벽은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 동정호와 파촉에 이르고 동으로는 오월과 소주 · 형주에 이르며 북으로는 한강 유역의 천리 평야가 보인다.
남으로는 옛 성채가 있어 강남의 지형 우세를 전부 포괄하므로 예로부터 전쟁의 활동 무대였다.
실제로 주유가 조조의 대군이 밀려들어오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연합군의 병력은 작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림 또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졌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적벽대전을 엄밀히 검토한 학자들이 적벽에서 대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림에서 벌어졌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적벽 앞은 조조와 손 · 유의 수군이 격돌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림 앞은 바다와 같이 넓은 지역이므로
조조의 수군이 진주하기에도 적합한 것은 물론 손·유의 연합군이 진공하는 데도 문제가 없다.
적벽대전에서 양 진영 수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손 · 유의 연합군은 적벽에 진주했는데
적벽은 장강 동쪽에 있고 조조는 장판을 거쳐 곧바로 강릉까지 남하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강 동쪽을 따라 내려가 장강의 북쪽이자 적벽에서 다소 하류로 장강의 서쪽인 오림에 주둔했다.
두 진영이 서로 장강을 마주보이는 근접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적벽 또는 오림에서 대전이 벌여졌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특히 오나라의 수군 주력부대는 적벽 인근 즉 장강 동쪽에 위치하여 발진했기 때문이다.
▲ 적벽 선착장에서 바라본 오림 오림 앞은 바다와 같이 넓은 지역으로 조조의 수군이 진주하기에도 적합한 것은 물론 손·유 연합군이 진공하는데도 문제가 없다. |
그러나 전투 상황 전체를 볼 때 적벽보다 오림대전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것은 조조의 수군과 육군이 오림에서 주둔하고 있었다는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의 수군은 연환계에 의해 모두 철쇄로 묶어 두었는데 화공으로 공격을 받아 수군의 선박들이 불에 탈 때 조조 육군의 진영까지 불이 옮겨졌다고 했다.
이는 조조의 수군과 육군이 적벽이 아니라 오림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오림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의 수군이 화공으로 격멸되자 손·유의 연합군이 곧바로 오림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의 육군을 격멸했다. 적벽대전에서 수전과 육전 모두 오림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대전이 일어난 곳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적벽대전’이라는 명사가 너무나 잘 알려졌고 특히 나관중의 『삼국지』에 의해 과대 포장되어
전쟁사에 종사하는 학자들조차 명칭이 부정확한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오림대전’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설명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진수조차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적벽대전의 장소 즉 회전 지점에 대해
엇갈리는 기록을 했다. 즉 적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처럼 설명한 것은 물론
<정황한장주진동감영수번정전>에서 단 한 번 조조를 오림에서 물리쳤다고 기록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진수가 이와 같이 부실한 기록으로
중국 전쟁사를 오도했고 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결코 과언은 아니다.
적벽과 마주보고 있는 오림
학자들이 각종 사료와 실제 전투가 벌어졌음직한 현장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구성한 적벽대전의 전투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부대를 정돈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당시 주유는 강의 남쪽에 있었는데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 2세기 말~229 이전)가
“지금 적이 많고 우리가 적으니 시간을 오래 끌기 힘들지만 조조의 군선을 불태우면 승리할 수 있다”
고 말했다. 이에 황개가 수십 척의 배를 하나로 이어서 장작에 기름을 칠한 후 천으로 두르고
조조에게 항복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조조는 정말로 황개가 투항하는 줄 알고 황개가 길게 줄이어 몰고 오는 배를 관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황개가 배를 풀고 불을 붙였다.
마침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 조조군에게로 옮겨갔고 수많은 조조군이 희생되었다.
조조는 즉각 후퇴를 명했고 남은 배들을 모두 불살랐는데
유비와 주유 등의 육군이 곧바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조조를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홀로 북으로 돌아갔다.’
▲ 적벽대전시 화공 받는 위군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손ㆍ유의 연합군의 화공에 의해 참패한다.
여하튼 적벽과 오림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연락선으로 20~30분 거리에 있는데
적벽은 중국 고대 10대 전쟁터 중 유일하게 완전히 보존된 유적이다.
적벽시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삼국지』의 영향으로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전 세계에서 몰리고 있어
적벽대전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려준다.
『삼국지』 대전투가 벌어졌다는 적벽 인근은 현재 세 구역으로 나뉘어진 적벽공원으로 단장되어 있다.
방통이 공부했다는 봉추암이 있는 금란산, 제갈량이 동남풍을 빈 배풍대가 있는 남병산,
적벽이 있는 적벽산이다.
입구에서 봉추암을 지나면 곧바로 배풍대(동풍각)와 무후사가 있는 남병산인데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 도교의 도사들이다.
전하는 말은 공명이 바람을 부른 의식이 도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적벽산은 남병산과 이어져 있는데 정상에 주유의 동상과 적벽대전 기념관이 있다.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이 거의 전부 제갈량의 역할로 되어 있지만
학자들은 적벽대전의 주역은 실제로 주유라고 생각한다.
주유가 패잔병인 유비군과 동오군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않았다면
적벽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선점했다고 하더라도 막강한 조조군에게 패배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적벽산 위에 주유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최대 공로자는 제갈량이며
주유는 제갈량에게 열등의식을 품은 속 좁은 무장(武將)으로 그려져 있지만
이는 제갈량을 신격화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주유는 천재가 갖기 쉬운 독선과는 거리가 먼 화합의 인물이다.
특히 미남이었던 주유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멋쟁이로 ‘주랑(周郞, 멋쟁이)’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악사가 음악을 연주할 때 ‘주랑이 뒤돌아보았다’고 하면 박자나 음정이 틀렸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주유는 적벽대전이란 교향악을 연주하듯 대군을 지휘했다.
그런데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이 조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데는
생각지 못한 행운도 작용했다고 알려진다. 원래 유비를 추격하던 조조는 형주를 접수하자
곧바로 동정호에서 현 무한시로 편입된 하구의 동호(東湖)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조군이 짙은 안개 속에 동호까지 가는 뱃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동정호(洞庭湖)에서 2일 동안 뱅뱅 돌고 있었다. 동정호는 파양호에 이어 중국 제2의 담수호로
장강의 흐름과 호수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착잡한 지형을 갖고 있다.
여하튼 조조가 동정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주유는 하구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육구를 먼저 점령했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적벽 인근을 확보하고
거대한 동호에서 수군을 조련하는 등 전투에 대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장강 인근은 호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무한 인근의 동호는 총면적이 87만 제곱킬로미터로
수면만도 33만 제곱킬로미터나 되어 항주의 서호보다 5배나 이른다.
중국이 자랑하는 우국시인 굴원(屈原)의 입상이 있고
어광촌(漁光村) 언덕에 구녀돈기념비(九女燉記念碑)가 있다.
구녀돈이란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太平天國) 시절에 무창의 방어를 위해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아홉 여걸(女傑)의 장렬한 죽음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또한 백마구는 오나라의 노숙이 여기에 백마를 장사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무한 사산(蛇山)에 호남의 악양루, 강서(江西)의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3대 누각으로 알려지는
황학루(黃鶴樓)가 있다. 황학루는 223년 손권이 세운 것으로
오나라 수군을 조련할 때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선인(仙人)이 황학을 타고 와서 잠시 쉬었다고 하여 황학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적벽대전이 벌어졌다는 적벽산 절벽에는 ‘적벽’이란 글이 적혀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주유가 조조 군사를 격파한 후 승리를 자축하며 술을 마시면서 검으로 새긴 것이라고
알려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벽이라고 쓴 서체는 해서(楷書)인데
삼국 시대에는 소전(小篆)과 예서(隸書)를 주로 사용했으며 해서는 당나라가 들어선 후에 나타났다.
한편 적벽대전의 증거물도 오림에서 발견되어 전투가 적벽이 아니라 오림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증빙한다.
오림 고채(古寨)에서 인골과 말의 뼈는 물론 ‘건안 8년’이라고 적힌 구리로 된 등자가 발굴된 것이다.
학자들은 이들 유물이야말로 적벽대전 당시의 유적으로 추정한다.
마지막 질문으로 들어간다.
앞의 설명을 통해 볼 때 문제의 대전을 ‘적벽대전’이 아니라 ‘오림대전’이라고 해야 하는데도
그동안 계속 ‘적벽대전’으로 불린 이유가 무엇이냐이다.
가장 큰 의문은 최초로 ‘적벽대전’을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 금란산의 봉추암 방통이 조조에게 연환계를 사주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조가 장병들의 배멀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했다고 인식한다. |
결론은 다소 맥이 빠지지만 매우 간단하다.
진수가 정사인 『삼국지』에서 앞에 설명한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적벽대전’이라 기록했기 때문에
후세인들이 당연히 적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 때문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은 반면
나관중은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전투 소재로 적벽대전을 꼽았다.
그런데 나관중도 진수의 잘못된 표현을 그대로 『삼국지』에 사용했기 때문에
모두들 오림대전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의 장학성(章學誠)은 『병신찰기(丙辰札記)』에서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표시했다.
작가가 소설의 내용을 어떻게 끌고 가든지 큰 부작용이 없다.
그런데 『삼국지』는 70퍼센트의 역사적인 사실에 30퍼센트의 허구를 섞은 소설이다.
문제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적벽대전을 허구의 사실에 기초하여 전개했다는 점이다.
적벽대전이라는 단어만 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역사는 진실을 요구한다. 그런데 30퍼센트의 허구가 진실로 포장되면 그 폐해가 적지 않다.
나관중은 제갈량을 『삼국지』의 주인공의 하나로 만들기 위해 천재적인 군신으로 묘사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삼국지』에서는 주유가 여러 차례 제갈량을 살해하려 하는 반면
제갈량도 주유의 화를 돋우어 조조에 대항토록 사주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연출되었다면 적벽대전은 커녕 조조가 나타나자마자 제갈량조차 도망가거나 항복했을 것이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당연히 조조와 손·유 연합군의 전투지점이 적벽이고
불타는 조조 수군의 선박은 적벽에서 전멸했다고 생각한다.
『삼국지』에서의 과대 묘사가 ‘적벽대전’이란 역사적 명소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나관중을 정말로 성의 없는 작가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소설의 한 재미로 제갈량을 부각시키는 등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게 적었는데
막상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가 적은 내용이 마치 진실처럼 오도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그를 소설가로 본다면 그렇게 탓할 일도 아니다. 소설의 본령이 바로 픽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설가는 역사가의 진실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또 역사가는 소설가의 상상력과 창작력을 존중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더욱 많이 밝혀내는 데 매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참고문헌 :
『중국을 말한다(7)』, 구청푸 외, 신원문화사, 2008
『제갈량 문화 유산 답사기』, 제갈량편집팀, 에버리치홀딩스, 2007
「적벽대전 실제 기록은 1페이지도 안 돼」, 배영대 외, 중앙일보, 2008.5.16
『삼국지 강의』, 이중텐, 김영사, 2007
「소총 사격한 뒤 귓속이 윙윙거려요」, 이금숙, 조선일보, 2009.01.14
「삼국지 4대 결전의 현장을 가다」, 정순태, 월간조선, 2009년 1월
『30만원으로 삼국지 따라 떠나는 중국여행』, 강석균, 교학사, 2005
『영웅의 역사(5)』, 토모노 로 외, 솔, 2000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2009,02.14 / 02.12 / 02.17/ 02.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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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하나때문에 '적벽대전'이 일어났다고?
'적벽대전' 正史·소설·영화 삼각비교 - 영화는 영화다
영화 '적벽대전 2'가 개봉 12일 만에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면서
국내에서 개봉한 중국영화 중 최고 흥행작이 됐다.
YTN 2월 3일 보도
홍콩출신 오우삼(吳宇森) 감독의 '삼국지(三國志) 2부작'을 완결짓는
영화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원제 赤壁―決戰天下)'을 본 관객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린다.
영화와 원작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우삼의 '삼국지'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
정사(正史)로 통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비교해봤다.
① 유비 · 손권의 '연합군'은 존재했나?
영화에서 유비와 손권 진영은 동맹군을 결성해 함께 군사훈련을 벌이고 조조에 대항해
공동 작전도 펼친다. 당시는 아직 위 · 오 · 촉 3국이 세워지지 않은 시점이다.
주유(양조위 분)와 조자룡(호군 분)이 최후의 전투에서 함께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오우삼의 전작(前作) 영화 '첩혈쌍웅'에서 나란히 총을 쏘는 주윤발 · 이수현을 연상케 한다.
반면 소설에서 적벽대전은 조조와 주유의 싸움이고 유비는 팔짱만 끼고 있다가
전쟁의 승패가 갈리고 나서야 군사를 출동해 형주를 차지한다.
정사 '삼국지' 위서(魏書)는 적벽에서 조조와 싸운 사람이 유비라고 기록했고
촉서(蜀書)와 오서(吳書)는 주유 · 정보가 유비와 함께 적벽으로 진격했다고 썼다.
이 부분은 영화가 오히려 소설보다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다.
② 제갈량과 주유, 질투인가 우정인가?
영화‘적벽대전 2’는 제갈량(금성무 분)이 동남풍을 불러
조조군을 화공(火攻)으로 격파했다는 소설 속 얘기를
‘동남풍이 부는 시각을 계산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역사에는 이 이야기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 쇼박스 제공
소설은 주유의 캐릭터를 질투의 화신인 것처럼 다뤘다.
제갈량의 재주를 시기한 나머지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영화는 끝까지 두 사람의 우정이 지속됐음을 강조하면서도 "언젠가 전장에서 만날 것"이라는
제갈량(금성무 분)의 대사를 통해 훗날 경쟁관계로 돌아설 것임을 암시한다.
정작 정사에는 두 사람이 언제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한 기록이 한줄도 없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비롯한 온갖 신묘한 계책을 내놓았다는 소설과는 달리
정사에 기록된 적벽대전 당시 그의 역할은 손권을 설득하는 데서 끝난다.
영화와 소설에 모두 나오는 '화살 10만개 얻은 계책'에 대해서 중국 호사가들은
"그만한 화살을 얻으려면 짚풀 10만근과 1200m 길이의 선단이 필요하므로 불가능하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③ 전쟁의 원인이 미녀 한명 때문?
교공의 두 딸인 대교와 소교가 각각 손책과 주유의 아내가 됐으며
두 여인 모두 절세미녀였다는 것은 정사와 소설이 일치한다.
소설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의 '동작대부(銅雀臺賦)' 중 다리(橋)를 교(喬)씨로 고쳐 읽어
조조가 마치 두 여인을 취하려 하는 것처럼 주유를 속여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유의 아내 소교(오른쪽)가 전투 직전 조조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역사에도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영화만의 ‘창작’이다. 영화는 한술 더 떠 소교(임지령 분)에 대한 조조(장풍의 분)의 야심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애초부터 조조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그녀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유의 아내가 미인인 소교'라는 것말고는 모두 다 허구다. 정사 원문을 확인해 보니 소설이나 영화 크레딧과는 달리 교씨의 '교'는 다리 교(橋)였다.
④ 연환계와 고육계는 어디로 갔나?
소설에서 주유는 가짜 문서를 유출시켜 조조측 수군 장수 채모 · 장윤을 죽게 하고
노장 황개를 채찍질해 조조에게 거짓 항복하게 하는 고육계(苦肉計)를 쓴다.
제갈량의 옛 친구 방통은 조조에게 가 전함들을 쇠고리로 연결하는 연환계(連環計)를 쓴다.
영화는 채모와 장윤의 죽음말고는 이 모든 이야기를 생략해 버렸다.
방통은 등장하지도 않고 조조군은 스스로 배를 연결하며 황개가 고육계를 자청하자
주유는 "채찍을 맞고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말린다.
사실 소설의 계책들은 거의 다 허구이며 정사에는 '황개가 거짓으로 항복했다'는 것만 나온다.
영화는 이 대목조차 여주인공인 소교의 몫으로 돌려 버린다.
소교가 홀로 조조를 찾아가 차를 끓여 올리며 동남풍이 불 시각까지 지연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⑤ 적벽대전 승패의 진짜 이유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조조군의 전염병은 소설에서는 '풍토가 맞지 않아 병이 생겼다'는 정도로
간략하게 언급된 부분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武帝記)에는 '이때 큰 돌림병이 생겨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라고 쓰여 있다.
중국의 일부 삼국지 전문가들은 이 전염병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본다.
그 전염병의 정체는 다름아닌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였다는 설도 있다.
'조조가 전염병 때문에 스스로 배를 불태우고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강의'를 쓴 이중천(易中天)은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남은 배들을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불태웠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해석을 내린다.
⑥ 그리고 최후의 '첩혈영웅'들은…
수전(水戰)이 공성전(攻城戰)으로 바뀌는 영화의 전투 장면은 전함들을 잃고
급히 도망가야 할 조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역사적 사실에도 어긋난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한 장소에 모여 펼치는 마지막의 현란한 대결 장면은 삼국지의 영웅들이
주윤발 · 적룡 · 장국영의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된 오우삼의 비장미 넘치는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는 긴장감을 연출한다.
어차피 조조가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설의 에피소드가 가공이므로
새로운 결말을 구성한 것이다.
오우삼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비둘기는 이 영화에선 화면 구성을 위한 장치에서 벗어나
줄거리와 관련된 임무를 수행한다. "이번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는 주유의 심각한 대사는
'다 미쳤다'(콰이강의 다리) '전쟁에서 지는 것 다음으로 슬픈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워털루) 등
끝에 가서 꼭 한 마디씩 반전(反戰) 메시지를 날리기 일쑤인
숱한 전쟁영화들에서 익히 보아 온 것들이다.
- 유석재기자
- 2009.02.08 ⓒ 조선일보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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