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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 신의(神醫) 화타 ④ 두뇌절개수술 일리 있다

Gijuzzang Dream 2008. 10. 15. 13:41

 

 

 

 

 

 

 신의(神醫) 화타 - 두뇌절개수술 일리 있다 ④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 경우 정말 살 수 없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아프지 않을 수는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19세기 말 아프리카를 탐험한 리빙스턴 박사는 사자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는데

어깨가 뜯겨 나가는 순간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최근 국내 과학자들은 뇌의 메커니즘을 연구하여

감각신호를 차단함으로써 고통을 못 느끼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 김대수 교수는 배앓이를 자주 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TV를 보여 주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데 주목했다.

김 교수는 뇌가 선택적으로 통증신호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관련 유전자를 찾아냈다.

▲ 화타의 죽음, 화타의 죽음으로 그가 저술한 의서들 모두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화타의 의술 내용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T타입 칼슘 채널 유전자’이다.

실험 결과 복통을 일으키는 약물을 투여한 생쥐는 이 유전자가 활동하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유전자 활동이 억제된 경우에는 온몸을 뒤틀며 고통을 호소했다.

T타입 유전자는 어떻게 감각신호를 차단할 수 있을까.

김 교수는 최근 T타입 유전자가 일종의 잡음(noise)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1932년 독일의 한스 베르거는 ‘사람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신경세포가 전달하는 전기신호를 감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후 여러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인 감각신호는 대뇌 각 부분에 흩어져 보관됐다가, 척수와 대뇌를 잇는 뇌조직인 시상핵(視床核)에서 하나의 기억으로 연결돼 대뇌 피질로 전달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김 교수는 “시상핵에서 연결된 감각신호가 대뇌로 전달될 때는 두 가지 형태의 신호가 발생한다”며

“최근 생쥐 실험 결과 T타입 유전자가 활동하면 신호가 한꺼번에 전달되는 다발성 발화(多發性 發火) 형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 감각신호가 동시에 전달되면 일종의 잡음이 돼 뇌가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감각신호가 마치 모르스 부호처럼 끊어져서 전달되는 긴장성(緊張性) 발화로 전달되면

감각신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김 교수는

“같은 자극에도 성격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는 현상을 같은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놀이기구를 탈 때 시큰둥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탄성을 지르며 즐긴다. 김 교수는

호기심이 강하고 스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는 아마도 긴장성 발화 경향이 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다발성 발화를 억제해 긴장성 발화가 강화되도록 쥐의 유전자를 조작했더니
갑자기

호기심이 왕성해졌다고 한다. 신호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인식되면서 정보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양의 통증에도 고통을 훨씬 더 강하게 느끼는 희생도 따른다.

김 교수는 반대로 “의지를 강하게 해 통증을 참아내는 것이나, 정신수련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다발성 발화가 강화돼 외부의 자극을 잡음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발달하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며 “최근 뇌 연구는 이처럼 사람의 정신과 인식, 그리고 자아(自我)와 같은

철학적 주제까지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조와 화타의 악연

▲ 강소성 서주시의 화타의 묘 

조조는 화타의 이름을 듣고 그를 불렀다.

조조는 두풍병(頭風病)이 있었지만 어느 의원들도 치료하지 못했는데 화타가 침을 한 대 놓으니 조조의 두통이 그쳤다. 화타의 신술(神術)에 가까운 의술에 놀라 시의(侍醫)로 삼고자 하였으나 화타는 이를 거절했다.

고급관리만을 위해 자신의 의술을 썩히는 것보다 백성을 위해 의술을 펼치겠다는 생각이었다.

화타는 조조가 여러 번 불렀지만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내가 아프다며 조조의 명을 거역하자

조조는 화타의 부인이 정말로 아프면 팥 열 섬을 내리고 만약 거짓이라면 체포하여 압송하라고 했다.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하자 조조가 그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반면 화타가 조조에게 살해되는 정황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선 화타의 외과 수술 능력을 부하가 매우 실감나게 조조에게 보고한다.

‘오장육부에 병이 들었을 때 마폐탕(麻肺湯)을 마시게 해서 환자를 마취시킨 다음 날카로운 칼로

배를 가른 후 약탕으로 그 장부(臟腑)를 깨끗이 씻습니다.

이때 병자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후 실로 창구(瘡口)를 봉합한 후 그 위에 약을 붙이면 한 달 혹은 20일이 지나면 완쾌됩니다.’

여기에서 마폐탕이란 마포(麻布) 만드는 삼을 주성분으로 해서 달인 한약으로
학자들은 화타가 이미

삼국시대에 삼(麻) 속의 메사돈 같은 마취 성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통으로 심하게 고생하는 조조가 곧바로 화타를 불러 진맥케 하는데 진맥을 마친 화타는

조조의 병은 뇌 속에 있으므로 복약을 하여도 아무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치료가 가능하냐고 묻자 화타는 다소 어려운 수술이 필요하지만 고치지 못할 것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치료법을 이야기한다.

“대왕의 병은 풍증으로 한 번 발작하면 머리가 깨어지는 것같이 지독하게 아프므로 바람 증세와

담 증세를 걷어내야 합니다. 치료하려면 마폐탕을 마신 후 의식을 잃으면

날카로운 도끼로 뇌를 해부하여 바람 증세와 풍 증세를 걷어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도 머리를 도끼로 가른 후 병의 근원을 치료해야 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조조가 만약 열에 하나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화타는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당대의 패자인 조조에게 의사로서의 솔직한 대답이 고깝게 들렸음은 물론이다.

조조가 대로하자 화타는 관우가 바른쪽 팔에 화살을 맞아 상했을 때 살과 뼈를 긁어냈지만

관우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편안히 바둑을 두면서 수술에 임했다고 말한다.

또한 관우의 팔을 치료하는 것이 조조의 머리를 가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빗대어

약을 올리기도 했다. 조조가 화타의 말에 분개한다.

▲ 리빙스턴의 부상, 리빙스턴은 사자의 공격으로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사고 당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림 토마스 벤느) 

“팔뚝은 긁어낼 수 있지만 두개골을 어떻게 빠갤 수 있느냐. 네가 관우와 가까운 사이이므로 이 기회에 나를 죽여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화타가 조조의 명에 의해 감옥에 갇히자 신하들이 구명운동을 했지만 조조는 꿈쩍도 하지 않고 화타를 죽이려 했다. 신하들의 구명운동에도 조조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화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비장의 의서인『청낭서(靑囊書)』를 옥리에게 전하며 백성을 치료해 달라 했다.

그러나 옥리가 두려워 받지 않자 화타는 어쩔 수 없이 의서를 태워버렸다.

『삼국지』에는 화타가 의서를 태운 것이 아니라

옥리가 의서를 받기는 받았지만 옥리의 부인이 태운 것으로 적혀 있다.

자신의 남편이 화타의 의서를 공부하여 유명한 의원이 되었다고 해도

화타처럼 살해될 것이 분명하므로 불행의 씨앗을 사전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화타는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조조가 자신의 병이 점점 중했음에도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화타는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어도

끝내 나를 위해 병의 근원을 치료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창서(倉舒)가 위독하게 되자 조조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화타를 죽인 것을 정말로 후회한다. 내가 이 아이를 죽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리는 만무이다. 결국 조조도 화타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조조의 병이 뇌종양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화타가 조조에게 살해되는 대목을 자세히 보면 다소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당대의 명의 중의 명의인 화타가 병을 치료하겠다는데

조조는 왜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생각했느냐이다.

『삼국지』에는 여기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야사(野史)는 화타와 조조 간에 뿌리 깊은 악연이 있다고 설명한다.

‘본래 화타와 조조는 당대 무술과 학문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수제자는 화타이고 조조는 화타보다 무술이나 학문 등 모든 면에서 한 수 밑이었다.

(화타와 조조의 고향이 같음). 스승에게는 절세미인인 외동딸이 있었는데

스승은 무술과 학문은 물론 인품도 조조를 훨씬 능가하는 화타를 일찌감치 사윗감으로 점찍었다.
그런데 스승과 화타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조조가 스승의 딸인 화타의 정혼녀를 겁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화타는 이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자신의 정혼녀를 조조에게 양보하고

스승 곁을 떠나 변변하게 의료 혜택을 보지 못하는 백성들을 구하는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조는 그 후 승승장구하여 실질적인 당대의 패자가 되었지만,
화타가 구원(舊怨)을 되살려

앙심을 품고 뇌수술을 핑계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사의 내용이므로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여하튼 조조가 세기의 명의인 화타를 죽인 것은

그야말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화타의 마비산 사실이다

▲ 조조는 신의(神醫)로 알려진 화타를 죽인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아들이 죽게 되자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동양은 서양과 달리 외과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화타가 사용한 마취제인 마비산이 계속 전해졌다면

동양도 이 분야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로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화타가 살았던 시대가 2세기인데다 과연 그가 마취제를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정말로 중환자를 마취시켜 개복수술, 심지어는 두뇌절개수술을 할 능력을 갖고 있었느냐이다.

특히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하여 각종 자료에 화타의 치료 사례가 26건이나 기재되어 있는데 이를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혹 안에 새가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복부 절개수술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 사대부가 찾아오자 화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병이 깊으므로 배를 갈라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수명 역시 1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니 질병을 참아낼 수 있다면 수명과 함께 질병의 수명이 다할 것이므로 특별히 수술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대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화타에게 수술해 달라고 했다.

그의 병은 완쾌되었지만 화타의 말대로 10년이 지나 죽었다.

 

후한서』에도 간략하기는 하지만 화타가 두 번이나 개복 수술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이들 기록 모두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므로 학자들은 화타의 수술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또한 삼국시대보다 다소 후대이기는 하지만 수나라 때 개복 수술한 사례가 많다는 등의 기록도

화타의 의술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삼국시대보다는 늦지만 수나라 때 수술이 가능했다면

삼국시대에도 수술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현대 의학에서 술에 마취성분이 있는 삼을 넣어 사람을 잠시 마취케 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화타가 마취제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설명도 있다.

여하튼 화타는 『청낭서(靑囊書)』『침중구자경(枕中灸刺經)』
『관형찰성삼부맥경(觀形察聲三部脈經)』『화타방(華陀方)』『중장경(中藏經)』등의 의서를 저술했다고 알려지지만 이것들이 모두

전해지지는 않았다. 화타가 자기 저서를 감옥에서 모두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화타가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중장경』이 현재 남아 있는데 후세 사람이 만든 가짜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화타가 감옥에서 태운 것은 그의 저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화타가 감옥에 자신의 저서를 모두 갖고 갈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화타의 저술 내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나라와 송나라의 의서에 그의 의료 활동 흔적이 남아 있다.

일부 학자들이 화타의 몇몇 의술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여하튼 화타는 비명에 죽었지만 그에게는 제자들이 있었다.

당대에 유명한 의사로 성장한 광릉의 오보(吳普), 서안의 이당지(李當之), 팽성의 번아(樊阿) 등이

그들이다. 오보와 이당지는 본초(本草)에 대한 저술이 있고 번아는 침술에 능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타는 살해된 후 그의 제자 번아가

그의 수급을 팽성(彭城, 현재의 강소성 서주시)에 옮겨 안장했다고 한다.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서주의 양절중이 산천단을 수축할 때 두개골 하나를 얻었는데

화타의 머리로 생각하고 묘지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현존하는 묘 비석은 높이가 2m이고 ‘후한 신이 화타묘’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의 강소성 서주, 안휘성 박주, 외양 등지에도 화타를 기념하는 묘 · 사찰 · 사당 등이 있다.

근래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박주시 성남 청수하 남안에서 ‘화장호’ 촌락 유적지를 발굴했는데

화씨 마을의 거주지로 확인되었다.

안휘성 박주시 성남 성북에도 화장 촌락이 있는데 역시 화타의 후예가 많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
「사자에 물린 리빙스턴 왜 아프지 않았을까」, 이영완, 조선일보, 2004.10.06
『중국을 말한다(7)』, 구청푸 외, 신원문화사, 2008
『중국의학사』, 홍원식, 동양의학연구원, 1984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8년 10월 31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