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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 신의(神醫) 화타 ③ 두뇌절개수술 일리 있다

Gijuzzang Dream 2008. 9. 26. 00:26

 

 

 

 

 

 

 신의(神醫) 화타 - 두뇌절개수술 일리 있다  ③

 

 

 

관우의 수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수술은 심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제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규모 수술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술과 아편 등을 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까다로운 수술을 하는 동안의 마취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옛날에는 아무리 왕후장상이라도 수술을 할 때 정말로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술대 위에 환자를 뉘어놓고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 보조원이 환자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의사가 톱이나 칼로 환부인 다리나 팔을 절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에는 벌겋게 달군 인두로 환부를 지져 피를 멎게 하고 세균이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고대의 수술 장면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수술대 옆에 뜨거운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에

인두가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의 용도는 절단면을 지져 출혈을 멎게 하는 것이었다.

1800년대 중반만 해도 규모가 큰 유럽의 의료기관은

전직 하역인부거나 복싱선수였던 힘세고 덩치 좋은 사람들을 ‘수색대’로 고용했다.

수술을 받다가 도망치는 환자를 잡아서 다시 수술대로 끌고 오는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실제로 수술 후의 후유증보다도 수술대 위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찰스 다윈이 의학교에 입학했는데 수술을 관찰하는 수업 중에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다 못해

뛰쳐나가 의학교를 중퇴한다. 물론 아버지의 소망과는 달리 의사가 되지 못했지만

결국 『종의 기원』이라는 대 역작을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병원에서 힘 있는 사람 채용

여자에게 아산화질소를 마시게 하는 장면이다. 아산화질소를 흡입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하고 약간의 자극을 받아도 울거나 웃었으므로 파티에서

종종 사용했다. 

물론 현재는 양다리의 절단수술도 마취제를 사용하여 통증 없이 수술할 수 있으며 장기 이식도 가능한 것을 생각하면 과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다.

각 병원마다 마취를 전공한 전문 의사가 있어, 환자의 환부 부위에 따라 마취 정도를 조절하며 환자의 신체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동안 집도 의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에 전념한다.

1772년에 프리스틀리(Josph Priestley)는 아산화질소(N2O)라는 무독성 기체가 묘한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흡입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거나 싸움을 하거나 웃는 등 광태를 보였다.

그래서 아산화질소를 속칭 ‘웃음 가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1778~1829)는

아산화질소를 좀 더 오래 흡입하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데이비는 아산화질소를 외과수술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역시 마취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오락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였다.

그가 더 이상 마취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은 1803년 영국왕립협회회원이 되었고

1810년에는 경 칭호를 받았으며 1829년에 회장이 되는 등 외부 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도 그의 제자이다.

외과 수술에 최초로 마취를 활용한 사람은

미국의 의사 크로퍼드 롱(Craford Willamson Long 1815~1878)이다. 롱은 미국 조지아주 대니얼스빌에서

태어나 켄터키주의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과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받고

1841년 조지아주의 시골 마을인 제퍼슨에서 개업했다. 롱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친절하여 환자의 요청이 있으면 하루가 걸리더라도 왕진을 했으므로 지역에서 평판이 높았다.

그가 마취제를 사용하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1842년 일 때문에 그는 자기의 결혼식에 늦게 가는 바람에 많은 하객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말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친구들은 그에게 파티용으로 아산화질소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당시 아산화질소를 흡입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하고 약간의 자극을 받아도 울거나 웃었으므로

파티에서 종종 사용했기 때문이다.
롱은 파티용 아산화질소 대신 에테르(에틸에테르, C2H5OC2H5)를 만들어주었다.

에테르도 아산화질소와 같은 작용을 하였다.

에테르는 2개의 탄화수소 원자가 산소 원자 1개와 결합하여 생기는 화합물로

일반적으로 중성이며 방향이 있는 휘발성 액체로 아산화질소와 거의 마찬가지로 파티에 널리 사용되었다.

▲ 험프리 데이비

 광부들의 안전등을 발명한 데이비는 아산화질소가 육체적 고통을 없앨 수 있으므로 외과수술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테르와 아산화질소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치과의사나 외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통증을 누그뜨리는 데 이것을 사용했다. 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지나치게 날뛰어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에테르를 마신 그는 상처가 나도 통증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를 지켜본 롱은 에테르를 외과 수술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의 친구 베너블의 이마에 고름이 든 종기 2개가 생겼다.

베너블은 수술을 예약했다가도 수술 때 겪어야 할 고통이 두려워 매번 그 예약을 취소했다.

롱은 베너블을 설득하여 에테르 파티에서 상처가 나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한 후 1842년 3월 30일 베너블의 종기를 제거했다.

그의 수술은 대 성공을 거두었고 1842년 7월에는 남자의 발가락 끝을 통증 없이 절단했으며 1845년 12월에는 마취를 사용한 무통 출산에도 성공했다.

1844년 치과의사인 웰즈도 아산화질소를 흡인한 후 자신의 충치를 뽑도록 부탁했는데 그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 수술이 진행되었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1846년에 윌리엄 모튼은 아산화질소보다는 에테르가 보다 효과적이라는 말을 듣고 에테르 마취약을 사용해서 통증 없이 환자의 치아를 뽑았고

존 워런 박사는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한 최초의 공개 외과수술을 집도했다.

외과의사인 제임스 심프슨은 에테르를 이용하여 여자들이 고통 없이 아기를 분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많은 부작용이 있음을 알았다. 이때 등장한 것이 클로로폼(트리클로로메탄, CHCl3)이다.

이 약은 동물실험을 통해 마취효과가 있으며 무통분만에 이용될 수 있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마취제를 사용하여 신에 의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여겼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때에 따라서 고통을 받도록

의도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신은 인간을 지금과는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인간이 태어날 때 꼭 받아야 할 분만의 고통을 없애는 것은 성서의 근본에도 위배된다고

크게 공격하였다(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클로로폼은 보급이 되지 않다가

1853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여덟 번째 왕자인 레오폴드 왕자를 분만할 때

그리고 그 후 1857년 베아트리스 공주를 낳을 때 클로로폼을 사용하면서 일반에게도 허용되었다.

현대의 마취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중의 하나는 기관에 관을 넣어 기도를 유지하는 전신마취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비로소 시작됐다.

전신마취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지자 마취 분야는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의사들은 환자들이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어린아이들에 대한 강력한 진통제 사용을 기피했다.

어린아이에게 진통제를 허용할 때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유아의 경우에는 아예 진통을 위한 어떤 처방도 내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진통제를 투여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통증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통증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청결한 외과수술이 필요

▲ 안전 제일, 리스터에 의해 시작된 수술하는 동안 살포되는 방부액은 수술실 주변의 병원균을 제거하여 수술 후유증을 억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취제 사용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조지프 리스터이다.

1846년 12월 스코틀랜드 태생의 로버트 리스턴 박사는 워런 박사의 선례를 따라 마취된 환자의 수술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이나 세탁하지 않은 불결한 상의와 에이프런을 걸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집사 일을 맡아보던 프레드릭 처칠이라는 환자가 수술실로 옮겨졌는데 그는 넓적다리가 썩어 들어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다. 에테르에 적신 스폰지가 든 흡입 장치를 이용하여 마취제가 투입된 환자는 곧바로 마취 상태로 들어갔고 리스턴은 톱니 모양의 시술용 메스로 통증없이 환자의 넓적다리를 절개했다.

이 장면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침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조지프 리스터도 있었다.

리스터는 마취제를 사용한 수술은 대성공했으나 공개적인 수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위생적인 수술실 상태를 보고 놀라 그런 환경에서 수술을 받는 환자들은

수술보다도 세균 감염에 의해 환자의 상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에서 성공적으로 수족 절단 수술을 받았는데도 세 명 중에 한 명 꼴로 환자들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수술 후 감염되는 ‘회저’가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수술 부위가 공기에 노출되기 때문에 감염된다고 생각했지만

리스터는 불결한 병동에 떠도는 세균이 감염의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당대에 리스터는 의과대학 학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는데

20년 후 드디어 자신의 이론을 실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1861년 글래스고의 <왕립진료소>로 발령받은 리스터는

5년 동안 환자의 약 50퍼센트가 패혈증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가설을 실험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865년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는

질병이 공기 중의 미생물 즉 병원균에 의해 전염된다고 발표했다.
리스터는 곧바로 자신이 생각한 방부제 사용 실험에 착수했다.

리스터는 당시 악취 나는 하수구 정화용으로 주로 사용되던 석탄산을 방부제로 선택했다.

리스터는 1865년 8월 복합골절 환자의 환부를 석탄산으로 소독하고 다리에 부목을 대어 붕대로 감았다.

4일 후 붕대를 풀어보니 화농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후 방부제 도포를 계속하자 환부는 아물기 시작했고

골절을 당한 지 6주가 되자 환자는 완쾌되어 걸어서 퇴원했다.

▲ 에테르사용 최초 공개수술,

미국 보스턴의 존 워런 박사는 1846년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한 최초의 공개 외과수술을 집도했다.

(자료 : 세계사의 100대사건) 

리스터의 청결 치료법은 수술 후의 감염을 예방함으로써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술진 의사들이 백색 가운을 입게 된 것도 그의 공이다.

혁신적인 청결 운동의 일환으로 병원에서 때가 묻으면 금방 눈에 띄는 백색 가운을 입었다. 환부를 감싸는 데 거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공이다.

리스터의 방부 치료 가치를 최초로 인정한 국가는 독일로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독일의 외과 의사들은 처음으로 방부 치료법을 사용했다.

리스터는 1871년 9월 빅토리아 여왕의 왼쪽 겨드랑이에 난 커다란 종기를 절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날 여왕은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장시간에 걸쳐 소름끼치는 드레싱 치료를 받았다. 시의인 마셜 박사가 리스터 박사를 도왔고

붕대를 풀기 전과 드레싱을 하는 동안 살균을 위해 그의 위대한 발명품인 석탄산 분무기가 사용되었다.”

리스터는 1897년 남작이 되었고 1902년에는 그 해에 제정된 메리트 훈위를 수여받은 12명 중에 하나였다.

그는 추후에 이 당시의 수술에 자부심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왕의 몸에 칼을 댄 유일한 사람이다.”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에서 개발된 무균처리법은

박테리아를 소독하는 살균법과 달리 완전한 무균 상태에서 치료하는 것이다.

무균치료법은 우선 수술 전, 환자의 절개부위를 소독하고 나머지 신체 부분은 살균한 타월과 시트를 싼다.

수술진은 소독한 가운, 장갑,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술에 사용되는 모든 기자재는

화학적인 방법이나 열로 살균 처리한다. 현재 병원에서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무균처치법은 산과 병동 산모들의 사망률을 낮추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유럽의 산과 병원 입원 환자 중 25퍼센트가 산상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셈멜바이스는 그 열병이 이미 병에 걸린 산모들의 담당 의사들로부터

건강한 산모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의사들에게 표백분 용액으로 손을 씻도록 당부했다.

그 후 그가 담당한 산모들의 사망률은 100명 중 한 명으로 줄었다.

참고문헌 :
『일렉트릭 유니버스』, 데이비드 보더니스, 생각의나무, 2005
「크로퍼드 롱」, 모리 이즈미, 뉴턴, 2004년 12월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mystery123@korea.com

- 2008년 10월 28일, ⓒ ScienceTimes